지금으로 부터 8년전 여행한 구동구권인, 중앙유럽 문화 탐방기를 여기에 이제야 올립니다. 그런데 아직 전혀 사진을 찾지못하고 있습니다. 찾는 대로 계속해서 사진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실 때마다 더 좋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을 것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요.
〔 중앙유럽 역사 탐방기 ; 1998.7.15~7.26 〕
프라하 중심가
1998년 7월 15일 (수요일)
김포 국제공항 제 2청사에서 반가운 얼굴들과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오후 1시 반쯤 Lufthansa에 올랐다.
비행기는 14시 15분에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났다. 상공에 올라 안정을 되찾았을 때 스튜어디스들이 물수건, 땅콩, 술, 쥬스를 날라주었고 조금 있다가 점심이 나와서 점심겸 저녁식사를 했다.
독일 스튜어디스는 미인은 아니어도 친절하고 근면했고 또 열심히 손님들의 편의를 돌보는데 신경을 썼다.
비행기는 계속 서쪽으로 해를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서울→베이징→울란바토르→이루크츠크→노보시비루스크→옴스크→제카트린버그→페름→카잔→고르키→모스크바→세인트피터스버그→헬싱키→스톡홀롬→코펜하겐→함부르크 동쪽→하노바→프랑크푸르트.
장장 10시간 30분에 걸친 긴 항행 끝에 환승하는 곳인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이 18시 35분이었다(시차는 7시간).
운좋게 창가에 앉았으므로 비행기 바깥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흰 뭉게구름, 양털구름, 연코발트의 하늘... 지구는 병들었어도 아직은 아름다웠다. 우주의 창공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순수무구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시베리아벌판... 이 또한 천연의 광활한 대지이고 자연 그대로가 시야 가득히 전개되고 있었는데 좁디 좁은 한국의 산야를 비교할 때 그저 유구무언으로 감탄이외 나오는 게 없었다. 노보시비르스크 상공을 지날 때 TV게시판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목적지까지의 거리 ; 4742㎞
비행기 현재 고도 ; 10700㎞
바깥 온도 ; -53℃
목적지까지의 소요시간 ; 5시간 44분
목적지 현재시간 ; 12시 04분
현재 비행속도 ; 910㎞
포도주도 양껏 마시고 멋진 식사도 두 번이나 하고 스튜어디스의 후한 서빙을 받았으며, 또 High Society 영화도 한편 보고 동물의 세계도 보았고, 여행 책자도 뒤적이는 가운데 거의 자지 않은 채로 기착지에 도착했다.
Frankfurt는 독일의 교통요지였으며, 듣기로는 Lufthansa는 전독일의 항공을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폴랜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 유고연방, 불가리아 등의 중부와 동부유럽을 잇는 항공망의 중심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공항에는 거의 2,30초 마다 비행기가 이․착륙하여 연락부절이었다.
우리 일행은 다음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3시간이나 기다린 후 다시 루프트한자로 프라하를 향해 날아갔다. 1시간여 만에 프라하에 도착했는데 현지시간으로 밤 10시, 우리 나라는 새벽 5시였으니 꼬박 하룻밤을 뜬눈으로 샌 셈이다. 프라하에서 묵은 호텔은 Diplomat Hotel이었는데 아주 안락하고 편해서 푹 쉴 수 있었다. 이틀밤을 이 호텔에서 묵을 것이므로 잠들기 전에 빨래를 했다.
프라하의 봄
1998년 7월 16일 (목요일)
time 7-8-9. 아침식사는 호텔뷔페. 고급호텔이라 맛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갖가지를 다 맛보았다. 오전 9시에 시내관광에 나섰다. 마치 가을날씨 같았다.
현지의 기온은 최저 12℃, 최고 22℃. 모두들 스웨터를 꺼내 입고 했지만 땀을 많이 흘리는 나는 정말 좋았다.
화약탑으로 가는 길
프라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白塔의 도시”, “유럽의 음악학원”, “북쪽의 로마”로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모습과 슬픈 역사를 지닌 프라하는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잡은 9세기 말에서부터 1000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도 중세모습 그대로 거리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서 프라하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고 훌륭하게 빛내주고 찬란한 문화의 향기를 그윽하게 풍기고 있었다.
화약 탑
우리들이 제일 먼저 간 곳은 공화국 광장에 우뚝 솟아있는 거므스레한 火藥塔이었다.
17세기에 화약탑으로 사용했다는 이곳은 구시가지로 통하는 입구의 성문이기도하고, 그 옆에 아르누보양식의 시민회관이 곁들여져서 한층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인 체코의 다나 여사는 계속 Beautiful Praha!를 연발하며 한가지라도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할까봐 안달이었다.
프라하 캐슬의 야경
다음에 간 곳은 시내 중심을 굽이굽이 누비는 Voltava(몰다우)강과 시내전경이 한눈에 아름답게 전개되는 프라하성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무수한 관광객이 몰려들어 가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훌륭한 문화유산 덕분으로 관광수입이 대단하다고 한다.
프라하성
성안에는 왕궁미술관, 성 십자가 성당, 대통령 府, 성 비트 카테드랄, 성 이지 바실리카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성 비트 대성당이 가장 아름다웠다. 중세교회의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고 중세인들의 신에 대한 외경심과 하늘로 향한 신앙의 표징이기도 한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은 모든 인간들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성 이지 바실리카를 가로질러 모퉁이를 들어서자 많은 관광객과 어울려서 봇물처럼 함께 밀려나가는데 마치 장난감같은 귀엽고 작은 집들이 줄줄이 늘어선 黃金小路가 나왔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한 때 이 거리의 22번지(파란색의) 집에서 작품을 쓰며 지낸 적이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이 조그마한 소로에 접한 작은 집들은 체코의 특산물을 파는 가게이기도 했다. 시간만 있다면 집집마다 들어가 보고 쇼핑하고 싶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어느 아담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전 광장에서부터 우리의 총무인 五星 교수가 통 보이질 않아 모두 찾아서 야단이었다. 이재기 사장 그리고 박우룡 선생이 부리나케 오르막길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땀을 흘리며 되돌아 왔는데 찾지 못했다. 순간 임은명 선생 생각이 나며 같이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납치당한 것은 아닐까?… 온갖 걱정이 마음속을 오갔다.
예상대로 호텔에서 전화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길 잃어버리면 호텔로 찾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호텔 이름은 단단히 외어두어야지…! 이 일은 두고 두고 이야기꺼리가 되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점심은 갖은 양념을 한 생선요리를 맛있게 먹었고 디저트도 푸짐하게 먹었다.
칼레루 다리
다리 위에서
다리위의 낭만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 우리는 몰다우 강 위에 놓인 18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칼레루(Karl, Charles) 다리 로 갔다. 차들의 통행이 금지된 이 다리는 관광객이 넘치고 그림 등을 파는 작은 노점이 즐비했다. 특히 이 다리의 난간쪽에는 성 프란체스코, 성 안토니우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기독교 성자들의 조각상이 30개나 줄지어 설치되어 잇었는데 위대한 성인들의 각각의 표정과 아름답게 새겨진 모습은 이 다리를 더욱 운치있고, 전통과 역사를 돋보이게 했으며, 프라하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는데 손색이 없었다.
이 다리를 건넌 다음, 우리는 몰다우 강이 한 눈에 보이는 다리 아래 야외 카페에서 맥주를 한잔씩 마셨다. 이 곳은 바로 눈앞에 스메타나의 동상 이 있고 뒤에 스메타나박물관이 있는 유서깊은 곳이었다. 저절로 내가 좋아하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중에서 ‘몰다우강’ 의 멜로디가 흥얼거려졌다.
“나의 조국”은 청각을 잃어가던 스메타나가 만년에 쓴 교향시다. 너무나 아름다운 고도 프라하는 찾는 이로 하여금 행복에 겨워 천국에 이른 것이라 착각하게끔 환상에 사로잡히게 했다.
조금 쉰 다음, 15세기 체코의 유명한 신학자이고 사회운동가인 얀 후스의 동상 이 있는 구시가의 광장에서 사진도 찍고 그림엽서도 사고, 또 풀무질하며 종과 칼 등을 만드는 대장장이도 보았다. 얀 후스는 체코의 종교개혁의 선구자이고 칼레루(챨스)대학의 총장이었는데, 카톨릭의 세속화와 면죄부 판매를 격렬히 비난함으로써 이단자로 몰려 로마로 불려가서 화형당하였다. 그의 동상 바로 밑받침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진실을 지켜라”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프라하 구시가지
바츨라프 광장
구시가지 광장은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었는데, 유럽의 모든 도시는 빠짐없이 이러한 광장이 있음이 특징이며 시민의 휴식장소로 자리잡고 있음이 부러웠다. 이 광장에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구시청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탑에 설치된 천문시계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천문 시계탑
매 시간마다 정각이 되면 두 개의 원반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옆의 창문이 열리며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12제자가 차례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각기 흩어졌다가 오후 5시정각에 이 시계탑 앞에서 모여 다른 수많은 관광객들과 어울려 유명한 그 시계의 종소리를 듣고 매료되었다.
이 큰 시계는 당시의 우주관(천동설)에 기초하여 천체의 움직임과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였다. 다시 광장의 동쪽에 서있는, 고딕양식으로 14세기에 세워진 틴 교회 를 보았다. 금장식을 정점으로 하는 두 개의 탑은 80m에 이른다고 하는데 정교하고 아름답기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18세기 킨스키 궁전 을 본 뒤 우리 일행은 Diplomat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뷔페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한 뒤, 만 보 이상을 걸었기 때문에 목욕 후 곤히 잠들었다.
몰다우강 동쪽강변의 칼레루 다리에서 화약탑과 공화국 광장에 이르는 구시가지는 옛부터 프라하의 심장부였다고 하는데, 옛모습이 그대로 잘 간직되고 있으며 잘 정돈되고 조화와 균형이 잡혀서 어느 한 곳이라도 흠잡을 데가 없는 도시경관을 보여 주어서 부러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프라하 전경
프라하 의 도시 전체에서 느낀 점은 중세적인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고전미라 하겠다. 벽돌색깔의 지붕, 4․5층의 죽 늘어선 옛 건물들, 그리고 창가에 예쁜 꽃들이 장식되어 있고 거리의 바닥에는 아스팔트가 아닌 네모난 돌조각들이 균형있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깔려져 있었다.
며칠이라도 더 프라하에 있고 싶을 정도로 정이 들었다. 두브체크의 “프라하의 봄”을 연상하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케 하였다.
그 체코는 이제 공산당이 해체되고 시장경제가 채택되어 자본주의 세계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세계는 사라졌으니, 이제는 진정한 “프라하의 봄”을 구가하는 음악의 축제에 심취하여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었다. “프라하는 영원하라”고 하면서…
7월 17일 (금요일)
time : 기상 6시, 식사 7시,
출발 8시의 아침시간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C.C.C.(Cross Culture Club;비교문화클럽)중앙유럽 답사반은 움직였다. 호텔 앞에는 이미 슬로베니아(유고 연방의 하나)의 운전기사가 그의 아들(11살의 미소년인 미치아와는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겼고, 헤어질 때는 못내 아쉬움을 이기지 못했다)과 함께 보기에도 훌륭한 독일제 Hertz Bus(Man社가 제작한 버스)를 몰고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쿠트나호라 를 향해 프라하를 떠났다. 한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 버스는 계속 달리다가, back하고, 길을 묻고 하기를 여러번… 결국 3시간이나 걸려 쿠트나호라에 도착했다. 비록 길을 찾느라 운전기사와 집행부가 애를 쓰고 있었으나, 우리 일행은 3시간 동안에 재치 넘치는 총무님의 사회로 21명 모두가 차례로 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와 곁들여 노래나 만담으로 재미있는 친목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처음 만나는 회원들과도 친숙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지루한 줄도 모르고 갈 수 있었다.
쿠트나호라 는 고즈넉한 전원도시였는데 이 시골에 고딕양식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성 바르바라 성당 이 우뚝 서있었다. 시간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에 제대로 성당안을 보지도 못했으나 외견상에도 참으로 훌륭하고 뛰어난 건축물이었다.
이 지역은 프라하 동쪽 65㎞ 지점에 있으며 13세기에 은광을 채굴하기 위해 세워진 도시였다. 그러나 광산이 물에 잠기게 되어 도시는 쇠퇴하였으나, 은광 때문에 그 당시에는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와서 17세기까지도 은화를 만드는 중심지역으로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Italian Court 라는 건물(은화주조소)안에 진열된 은화제작과정에서 실증되었다. 은화는 둥글고 긴 은괴를 잘라서 본틀을 얹고 망치로 때리면 바로 돈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는 30년 전쟁(1818~1848) 때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1900년에 재건되어 옛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음에 갈 곳은 프라하에서 동남쪽으로 190㎞ 떨어진 지역인 브르노 였다. 가는 도중에 운전기사의 길치(道癡)본성은 또 다시 드러났다. 묻고 찾고하는 방황이 3시간이나 걸린 다음에 겨우 브르노 도시 외곽의 한 식당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집은 낡았지만 음식 맛이 일품이었다. 시장히기도 했으나 스프가 우선 입에 맞았고 메인디쉬인 닭고기는 특미였다. 여기에다 체코의 유명맥주인 Pilsner의 맛은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큰 사발에 가득히 담긴 크림디저트에 우리는 벙어리가 될 지경으로 질렸다. 서양사람들은 살찔 수밖에 없었다.
내일의 바쁜 일정때문에 오늘 오후에 브르노 시내관광 을 하기로 했다. 체코공화국은 크게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의 두 개 지역으로 나뉘어지는데 Brno는 동쪽에 자리잡은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이고 체코 제 2의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의 문화․학문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및 대학들이 있는 도시였다. 점심이 늦은 데다가, 맛있고 배부르게 먹은 탓으로 만사가 태평이었고 상쾌한 가을 날씨에 느긋한 마음으로 브르노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자유광장을 지나 근처의 성 야코브 교회 로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92m의 첨탑과 웅장한 모습의 교회건물과는 대조적으로 엉덩이를 그대로 내놓은 조그마한 사람의 조각은 해학적이고 웃음이 절로 나게 했다.
그것은 반대쪽에 있는 성 페테로 바우로 교회 와 반목하던 시절의 감정표현이라는 말에 더욱 그러했다. 다시 언덕을 조금 올라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 페테로 성당 으로 갔다. 높은 천장과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이 인상적이고 감탄스러웠다.
유전학의 대가인 멘델이 사제생활을 하면서 완두콩의 교배실험을 하던 수도원을 走車觀賞했다. 멘델법칙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익히 들어 아는 것이었으나 그 법칙의 현장을 답파하는 것은 새삼스런 감회였다.
이곳은 밤 9시가 지나고 10시가 되어야 해가 지고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행스럽게 늦게까지 브르노 를 관광할 수 있었고 8시가 넘어서 Grand호텔에 들었다.
8시 반에 늦은 저녁을 호텔식당에서 세트메뉴로 포크요리를 먹었다. 매일 먹는 육고기에 배가 놀라고 있었으며, 오늘 하루는 고단한 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에 체코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쉽고 못내 서운했다.
7월 18일 (토요일)
어제 일정이 운전기사 때문에 지연되었으므로 오늘 일정은 5시 30분 기상, 6시 30분 조식, 7시 10분 출발이었다. 우리 대원은 칼같이 시간을 지켰다.
가을 날씨같은 아침공기는 상쾌하기 이를데 없었다. 맑은 공기, 쾌청한 날씨, 아름다운 경관탓인지는 몰라도 체감으로 느껴지는 체코인의 삶의 질은 퍽 높고 윤택한 것 같았다. 조용하고 아늑하며 고풍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침 일찍 동굴답사에 나섰다.
브르노 근교에 있는 푼케브니 종유굴 이다. 동굴 속은 춥다고 하여 모두들 덧옷이나 스웨터 같은 것을 껴입었다. 사실 처음에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거나, 우리의 것보다 훨씬 떨어지는 종유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한참동안 동굴속을 지나가다가 보니 바깥과 뚫린 곳이 나왔고 괘 높은 산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며 윗쪽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짓누를 것 같은 깎아지른 절벽이 시야를 막고 있었다.
푸른 숲이 상쾌하고 싱그러움을 안겨 주었으며, 더욱이 동굴에서 보는 파란하늘은 경이적인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다. 더러 자살장소로 이용된다는 안내자의 말이 수긍이 될 정도로 신비로우며 이상한 마력을 지닌 것 같았다.
조금 더 들어가니 깊고 푸른 지하하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평평한 공간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우리 일행은 모두 한 보트에 탔다. 우리는 보트를 타고 태고의 신비와 조화를 이룬 동굴속 하천을 구비구비 돌며 이상하고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마치 모험을 즐기는 허클베리핀처럼 들뜨기도 하고 즐거워하며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이른 아침의 동굴탐사는 상쾌하고 성공적인 것이어서 오늘 하루의 여행일정은 잘 진행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가는 곳마다 그 곳의 경치를 담은 그림엽서를 샀다.
폴란드 국경으로 가기 위해 올로모우츠 로 향했다. 이곳은 브르노의 서북쪽으로 66㎞ 지점에 있는 모라비아강변의 꽃의 도시로, “플로라”로 불리기도 한다.
프라하 다음으로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 격으로 잠시 둘러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Julius Caesar의 기마동상, 독특한 모양의 시계가 달린 15세기의 시청사, 그리고 삼위일체탑과 Heracles분수대가 있는 미르광장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유럽최대이고 1만개의 파이프가 있는 파이프 오르간이 유명한 st. Michaels성당을 둘러보고 난 다음, 그동한 참았던 생리현상을 해결키위해 근처의 백화점에 들렀다.
이쪽 東歐의 특이한 면은 식당이든 백화점이든 박물관이든 어디서든지 화장실 사용료를 꼭 내야 한다는 것과 휴지는 재활용지로 누런색을 띠고 있었으며 화장실은 정말 깨끗하고 잘 장식되어 있었다. 화장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우리 아시아와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넘었지만 우리는 아우슈비츠 로 가기 위하여 일단 폴란드 국경을 넘어 크라코프로 향했다.
처음에는 나무들이 높이 치솟고 깊게 우거진 숲속길을 달려서 기분이 좋았으나, 뚱뚱하고 엉뚱스런 슬로베니아의 운전기사 이반은 완전히 길치여서 계속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우리는 점심도 못먹고 허기지고 지친 가운데 갈림길만 나오면 불한해하며 넓디넓은 폴란드 들판을 달려갔다.
운전기사의 아들 미치아도 아버지의 길치를 인정하는지 바로 뒤에 앉아서 길을 코치했다. 폴란드의 풍경은 체코보다 다소 거칠고 황폐하며 적막한 느낌이 들고 생활수준이 많이 낮아 보였다.
한결같이 붉은 기와로 된 집을 가졌던 체코와는 달리 지붕색깔이 검정, 회색, 벽돌색, 검은 자주빛 등 갖가지였고 집모습이 다소 투박하게 보였다.
그러나 시골의 낡은 창문에 드리워진 레이스 커텐과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 창가의 모습은 유럽 어디에 가더라도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정경이었다.
낡은 건물을 조화롭게 카무플라주하는 소박미를 연출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적 감각은 유럽인 모두가 갖는 공통의 예지인지 모르겠다.
폴란드 국립공원
유럽은 거의 대부분이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이고 산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들판에는 수확기에 접어든 밀과 보리가 누렇게 황금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평화와 풍요의 상징이고 삶을 영위하는 표징이라는 점에서도 유럽은 생활과 종교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깊게 하였다.
풍요로운 들판을 달리면서 우리 일행은 허기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주유소에 잠시 세워 용변도 보고, 먹을 것을 사고자 하였지만 달러는 받지 않고 폴란드의 즈오티貨 만 받는다고 하니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우리는 게다가 오늘 아침엔 6시 30분에 식사를 하지 않았는가! 한쪽에선 준비해 온 비상식량 미숫가루도 타서 돌리고….
우리는 단장님의 주문에 따라 비장의 팩소주를 다 끄집어내어 일행중 몇몇은 김을 안주삼아 빈속에 마셨다. 속이 찌르르 소식이 왔다.
93년도 아프리카의 투니지아 벌판을 달려 알제리 국경에 이르는 도중에 팩소주와 골뱅이 안주를 먹던 생각이 났다. 팩소주는 늘상 이럴 때만 쓰이는 징크스인가?!
갑자기 “물러가라 체코 파란(폴란드)!”을 외치던 中3때 (1955년)의 일이 생각났다.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와있던 하야리아부대 앞에서 그들이 물러가라고 우리 학생들은 관제데모를 하였던 것이다.
바벨성
우리와는 너무나 멀고 동떨어진 이곳 중앙유럽에 우리는 지금 와 있구나하는 상념에서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했고, 아직도 체코보다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더 남아 있는 폴란드 땅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역시 멀고도 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백만명의 유태인들의 고통에 비하면 鳥鼻之汗(새코의 땀)이지만 …!
묻고 또 물으며, 몇번이나 길을 잘 못 들기도 하면서 저녁 6시가 넘어서야 겨우 크라코프의 Piast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도 다른 곳에 비해 다소 등급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7시경에 호텔식당에서 세트메뉴로 비프스테이크를 먹었다. 여행중 한끼를 굶어보기도 난생 처음이지만, 그래도 나는 항상 포만감을 느끼던 것을 다소 완화시키게 되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오늘 가지 못한 아우슈비츠를 위해,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한다는 망상(?)과 함께 오늘은 금식기도를 했다는 기분이었다. 회장단은 몹시 화가나서 우리의 여행을 주선한 국제적 여행사인 영국의 Trafalga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운전기사의 교체, 굶은 점심값의 배상 등을 따지려 했지만 마침 토요일 오후라서 모두 퇴근한 다음이었으므로 통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회장단은 긴급구수회의를 열고 교통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상세한 지도를 여러장 사서, 지도를 펴놓고 내일의 일정을 짜기 시작했으며, 또한 호텔의 직원들에게도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묻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방만원 교수, 이재기 사장, 운전기사의 아들까지 기어 길치 기사의 안내역을 맡게 되었다.
7월 19일 (일요일)
Time 7-8-9. (기상-식사-출발의 시간)
다소 느긋하게 일어나 크라코프 지역(바르샤바 남쪽 260㎞ 지점) 관광에 나섰다.
맨 먼저 탐방한 곳은 크라코프에서 서남쪽으로 13㎞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인데 고대로부터 우수한 암염을 채굴했다는 비에리치카 소금광산(Rock-Salt mines) 이었다.
우리들은 바람막이나 웃옷들을 걸치고 캄캄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30m로 내려갔다. 바닥, 천장, 계단 할것없이 온통 소금으로 된 소금궁전이었다.
소금탄광속의 화려한 모습
소금으로 된 벽
소금으로 만든 샹들리에와 천정의 소금
소금으로 된 조각품
소금으로 조각된 코페르니쿠스
1천여개나 되는 방(室) 가운데 겨우 2%에 지나지 않는 20여개를 보는 데에도 1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조각 등 흥미진진한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조각품과 彫像을 도처에 만들어 놓았다.
이 작품들은 여러 곳에서, 여러 나라에서 돈벌이 하러 온 광부들이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는데, 참으로 뛰어난 솜씨였거니와 인간의 천부의 재능은 예기치 않은 데서도 마음껏 발휘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곳곳에 크고 작은 예배당이 있었고, 가장 큰 예배당에는 벽면마다 성모 마리아 상, 예수의 상, 최후의 만찬 모습 등을 조각하였는데,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에 못지 않은 일품이었다. 더구나 천장에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소금의 결정으로 조각한 것이라 하는 바 눈부시고 아름답고 빼어난 예술적 천재성에 재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특수한 제복으로 차려입은 광산의 전속안내원의 이야기로는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등 특수한 날에 예배가 있으며, 간혹 결혼식이 거행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소금 광산의 특징은 소금이 건강에 좋고 특히 호흡기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평가되어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소금으로 조각된' 최후의 만찬 '
과연 인간의 재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참으로 경이적인 곳을 관광했다는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훌륭한 곳을 신나게 관광했으므로 오늘의 일정은 순조로우리라 생각하며 시내구경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Turk군대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15세기 말에 건조했다는 말굽형의 성채인 바르바칸 성채 를 보았다. 그리고 크라코프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비스와강변의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바벨성으로 갔다.
바벨 성당 내부
바벨의 주 성당
이곳은 16세기 지그문트 3세가 건축한 고딕-르네상스 양식의 성으로 폴란드 역대왕의 거처였다고 한다. 성안의 르네상스식 마당도 아름다웠지만 역대왕의 대관식이 행해졌다는 벽돌로 건조된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은 웅장하였고 황금 Dome의 지그문트 챠펠이 돋보였다.
이것은 16세기 초반 지그문트왕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에서 초청된 건축가가 완성시킨 건물이라 한다. 성안 뜰 안에 자리하고 있는 왕궁 박물관에는 16세기의 타페스트리, 왕의 劍, 갑옷 등 무기류와 전리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벨성으로 돌아 나오는 성문 옆에는 타테우시 고시치우슈코 의 동상이 서있었는데, 그는 폴란드의 분할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민족의 영웅으로 “나는 전 민족의 자유를 원한다.”,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폴란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바벨 성벽 아래에서 내려다 본 크라코프(크라코우) 는 아름답고 운치가 있었으며 중세적 고풍스러움과 운치가 가득 담긴 도시였다.
크라코우(크라코프)
크라코우의 야경
이곳은 바르샤바로 옮기기 전까지의 폴란드 수도였으며, 14세기~16세기에 걸쳐 야기에오 왕조 시대의 수도였기도 하여 보헤미아의 프라하와 오스트리아의 빈 등과 나란히 중세 유럽 문화의 3대 중심지였다고 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야겔룬대학 도 이 도시에 있었다. 역사는 바로 크라코프의 힘이었다. 특히 구시가지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 기적적으로 전쟁에 휩싸이지 않는 행운을 얻었으므로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었다. 1978년 유네스코에 위해 세계 12대 유적지로 지정된 곳이라 한다.
점심은 아담한 식당에서 상큼한 생선튀김을 먹었다. 어제와는 달리 제때에 점심을 먹을 수 있었고 소금광산, 바벨성 등의 관광으로 기분이 흔쾌해진 데다가 교통위원회의 길 지도가 면밀주도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오늘은 꼭 아우슈비츠에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일행은 가벼운 마음으로 식당을 떠나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시내 한 복판의 네거리에서 우리 버스가 좌회전하려는데 갑자기 빨간불이 켜지고 급정거하는 찰나에 오른쪽에서 소형 승용차가 우리 차 앞에 끼어들어 역시 급정거하는 통에 미쳐 손 쓸 틈도 없이 우리 버스가 그 차를 들이 받았다.
두 차가 다같이 좌회전해서 안전지대에 세워놓고 따지게 되었는데 앞차의 주인은 공교롭게도 폴란드의 변호사였다.
우리 기사와 폴란드 변호사와의 승강이가 제대로 되지 않는 기미를 보이자 이재기 사장 등 우리 측이 가세하여 타협을 보려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때 우리들의 속어는 엉망진창, 설상가상, 속수무책, 만신창이, 첩첩산중이라는 단어였고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크라코프에서 아우슈비츠까지는 54㎞나 떨어져 있고 또 문닫을 시간이 다가오는데 사건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우리 일행은 모두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태웠다.
우째 이런일이?!…… 정말이지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기도 하다.
두시간 가까이 걸려 겨우 해결을 보고 우리 버스는 아우슈비츠(폴란드 말로는 오스비엥침)를 향해 달렸다. 운전기사 이반은 길치이기는 하지만 운전 하나는 빼어났다.
속력내고 커브틀고 좁은 길에서 빠꾸치고(빽하고)하는 기술은 감탄할 정도였는데, 시간이 없는 탓도 있지만 속력을 다해 맹렬히 달렸다. 속으로는 겁도 났다.
]그러나 아우슈비츠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다행스럽게도 일요일이라서 마감시간이 연장되어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수용소 입구. "노동이 너희를 자윸케하리라"쓴 간판
수용소 입구 (겨울)
비극의 극치
죽은자의 신발들...
수용소
제1수용소
제2 수용소 내부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저 유명한 나치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였었는데, 지금은 폐허에 텅빈 막사만 덩그렇게 남아있고 일부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특수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 수용소에서 학살된 사람의 수는 (무려 28개 민족에 이르고) 250만~4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유구무언이다.
처음에는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1940년에 설립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 유럽인들, 특히 각국의 유태인, 집시, 공산주의자, 반 나치 운동가, 소련군 포로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독가스로 사용 된 자이클론
수용소 입구에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를 얻는다)라는 기만적인 문구가 쓰여진 간판이 걸려있어 이 문구를 새겨 보는 사람은 누구나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 에는 안네프랑크나 코르베 신부 가 수용된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이 수용소의 둘레에는 철조망이 설치되어있고 고압전류를 흐르게 하여 도망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는 것이다.
모두 28개 동의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그대로 서 있었으며, 현재에는 처참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전율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유품은 수용자의 칫솔, 안경, 가방, 구두, 머리카락, 구두솔, 빗, 식기, 지팡이, 의족, 의수, 그리고 쓰다남은 독가스 사이클론B통 등으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여행용 가방에는 소지자의 출신지, 고향명칭, 나이, 이름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는데, 그 가방의 주인이 무저항으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처지의 아찔한 환상이 일순 뇌리를 스쳤다.
기가 막히게도 수용자의 금발의 머리카락으로 카페트를 짠 그 원단이 전시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의 피하지방을 짜내어 비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등골이 오싹하고 할말을 잊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인공노의 울분과,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회한과 통탄을 못내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든지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과 인간심성에 잠재해 있는 性惡을 스스로 수양을 통해 제거해 버리지 않는한 누구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몇 대원은 눈물을 금치 못했고 나는 계속 구역질이 나오려 해서 손수건으로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에 천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가스실과 그 옆에 설치된 고속 인체 소각로도 보았다. 갓 들어온 수용인들에게 깨끗하게 목욕을 시킨다는 미명아래 사람들을 샤워장으로 들여보낸 다음 독가스인 싸이클론B를 천장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투입하면 20분 이내에 헤모글로빈이 응고되어 질식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 사방 1m도 채 안되는 방에 10㎝평방의 공기통만 만들고 그곳에 4명을 선채로 수용하는 방도 있었다. 10~11호 동 사이에는 2만명을 총살한 “죽음의 벽”이 있었고 지금도 그곳에는 사람들이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화환을 갖다놓곤 했다.
그리고 곳곳에 죄수복 차림이거나 말라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벌거숭이 소년, 소녀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정말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 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어떠한 일을 저질렀는가”하는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철저하게 통제하고 참혹하게 살해할 수 있을까? 그것도 대량으로, 일상적으로……. 수용소의 생존자 중 한사람인 A4685번의 증인이 얘기한 것처럼 “인간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은 진실이다.
정말 인간존재란 어떤 것인가? 정말이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다시 한번 인간내면에 대한 자기성찰과 인간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규모가 10배나 더 큰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있었다. 이 수용소의 주거상황은 정말 비참했다.
콘크리트위에 지푸라기를 깔고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화장실은 아무런 가리개도 없이 콘크리트 바닥에 겨우 앉아서 용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여러개 뚫어놓고 수십명이 짧은 시간에 빨리 일을 치르게 한 것이었다.
벽돌집도 아니고 나무로 된 오두막이었다. 인체소각로는 나치가 퇴각하며 파괴해 버린채였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설명을 해준 지성적인 중년의 여성가이드는 자기 시아버지가 여기 수용되었던 적이 있었으며 그 시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서 가이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녀의 한 친척은 이곳에서 수㎞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늘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Sweet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얘기해 주었다. 스위트한 냄새라니?… 인육 태우는 냄새는 고기 굽는 것처럼 구수했다는 말인가?!…
이곳에는 철로가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교통망이 짜여 있었으며, 홀로코스트의 영화 에서 보던 죄수(?)들이 내리던 바로 그 철로의 종점을 보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나치의 만행을 연상하며 전율, 분노, 통곡을 넘어선, 감당할 수 없는 참담함과 가누기 힘든 감정을 지닌채 오늘날 독일인들이 다시 통일하여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고 야릇하게 느껴져 과연 이 세상에는 정의와 진실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주재하는가? 라고 자문해 본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기지로….
아직도 남아있는 쉰들러의 공장
저녁 7시가 넘어서 어우슈비츠를 떠났다.
음으로 운전기사 이반과 그의 아들 미치아도 관광에 동참했다. 아마 여기는 처음 와본 모양이었다. 사고 이후 점차 그들도 친절하기 시작하였고 미운정, 고운정, 삐댄정이 함께 뒤섞여 정이 들었다. 미치아는 우리 여행단의 마스코트처럼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지원 누나! 우룡 형님! 하면서 그동안 사귀고 친해진 사람을 따라 다니며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녁식사는 피아스트 호텔로 돌아와 폭챱과 감자요리를 먹었다. 궂은 일도 많았고 처참한 광경도 목격한 오늘은 퍽이나 힘들고 착잡한 하루였다.
그 참신, 발랄하고 애교어린 신숙원 교수의 재담도 들을 겨를이 없었으며, 오늘 반나절은 참혹함에 얼굴을 침통하게 찡그린 채 펴지 못했던 것이다.
7월 20일 (월요일)
7-8-9. 시간에 맞추어 호텔에서 아침을 마친 다음 버스에 올랐다.
영국의 트라팔가 회사에 요구해서 운전기사를 교체하려던 것도 허사가 되었고, 교통위원회가 가동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운전기사 자신도 “no problem”을 연발하며 최선을 다할 기미가 보였고 그의 아들 미치아도 톡톡히 조수노릇을 하고 있어서 크라코프를 떠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제 휴양지인 자코파네로 향하여 달려가는데, 자코파네는 크라코프 남쪽 86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체코와의 국경지대이며 높이 2000m를 오르내리는 타트라 산맥의 한기슭에 자리잡고 표고 9000m나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휴양도시였다.
우리 일행은 높고 울창한 폴란드의 숲속을 이리저리 꼬불꼬불 달려 나가는데 시야에 펼쳐지는 광경은 푸른 숲이 가득히 담기고 그림에서나 보는 정겹고 아담한 집들이 올망졸망하게 산기슭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었다.
85년도에 비엔나에서 짤스부르크, 인스부르크 등을 거쳐 스위스로 가는 도중에서 보았던 정경처럼 너무나 목가적인 풍경이 전개되는 게 아닌가!
이 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꿈만 같은 상념을 못내 떨칠 수 없었다.
항상 하듯이, C.C.C.가 자랑하는 수준높은 강의가 진행되었다. 오늘의 강사는 서강대의 서양사 전공의 김영한 교수 였다. 내용은 “타보르파(派)와 천년왕국 사상과 대량학살” 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17일 오후나 18일 오전에 저 유명한 체코의 타보르 지역 을 답사할 예정이었으나, 운전기사의 길치 덕분에 헛되게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못내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15세기 체코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후스운동)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도시가 바로 타보르(프라하 남족 80km 지점)였다.
얀 후스가 화형당한 사실에 분노한 체코민중과 그를 지지하는 일부 귀족계급은 1419년 7월 시청사로 쳐들어가서 반후스파 카톨릭의원을 창밖으로 내던져 살해하였으며(“창에서 내던지기”했던 프라하의 성 가운데의 문제의 방을 우리는 이미 답사했다)
이 사건은 후스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 후스전쟁을 지휘한 애꾸눈 영웅 얀 지시카는 지지자들을 모아서 군사공동체를 만들고 공화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그 활동중심지가 타보르였으므로 그들을 타보르파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1) 카톨릭 부패에 대하여 반발한 종교운동이기도 했고, 2) 보헤미아 지역의 땅과 고위직을 반 이상 차지한 독일인에 반대한 이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이기도 했으며, 3) 봉건영주 타도라는 사회체제 반대를 외친 사회혁명운동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타보르에 모인 4000여명은, 최후의 심판 후 예수가 재림한 뒤에 1000여년간 낙원을 이룬다는 믿는 1000년 왕국사상을 신봉하였는데, 이것은 순교인에게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졌고 재산을 공유하고 공산적 자유, 평등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내부에 갈등이 생기고 합스부르크가의 군대에 의하여 패배한 다음 타보르파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타보르지역에서 최초의 집단자살(집단살해)이라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이후 농민전쟁의 지도자 토마스 뮨쩌도 타보르파의 전통에 의존하며 프라하 선언을 하고 싸웠으나, 그가 처형됨에 따라 섬멸되고 말았는데, 이것 또한 집단살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후 독일 뮨스트지역에서는 재세례파가 싸움에서 지자 수천명이 집단자살하는 일이 생겼다. 이와 같이 천년왕국 사상은 영혼구원에 의한 속세에서의 해방과 사탄의 제거를 중시하였느데, 이는 현세와는 동떨어진, 신비하며, 강렬하고 몰아적인 성질이 농후하여, 최면에 걸려 환상적이 되고 만다.
물론 여기에는 예언자의 예언이 중요하다. 20세기의 대량학살사건인 나치의 유태인 학살, 스탈린의 숙청, 모택동의 숙청, 폴포트의 학살사건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와 맥을 같이 하는 홀로코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학살함으로써 완벽한 게르만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말이 맞지 않을 때 이들 사회는 일시에 무너지고 만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폴포트 는 결국 다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 나라에서도 근년에 있었던 오대양 사건, 휴거 사건 등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주 재미있는 강의였는데, 나는 기억력이 아둔해서 더 상세하게 옮겨놓기도 어렵고, 논리가 정확한지도 의문스러워진다.
그러나 김영한 교수의 강의 내용은 비교문화연구 제6호에 실릴 예정이라니 그 때 실상을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느덧 버스는 점심 때쯤 아름다운 자코파네 에 도착했다.
중앙 유럽은 대평원으로 덮여 있었는데, 여기에 도착하니 처음으로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타트라 산맥 가운데에서도 이 자코파네가 명승지고 등산, 스키, 수영 등등 갖가지 스포츠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데에도 가장 적격지로 손꼽히고 있기 때문에 관광객과 여름휴가를 보내려고 폴란드 각지에서 온 휴가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들끓었다.
우리는 산중턱에 있는 그림같은 호텔 Kasprowy Oribs에 짐을 풀었다. 객실에서 바라보는 카스프로위 산(타트라 산맥 중의 하나)과 그 기슭에 자리한 오목조목 섞여서 아기자기하게 마을을 이룬 아름다운 집들이 푸른 초원과 맑은 하늘 밑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마치 그림에서 보는 스위스의 어느 휴양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호텔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폴란드에서의 악몽같은 일들(길치로 말미암은 시간허비와 속상함, 교통사건,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깔끔히 잊을 수가 있었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함께 모여 자코파네 시내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아주 자그마하고 아늑한 식당이었는데, 메뉴는 특이하게 조리한 돼지고기 요리였다.
짭짤한 스프맛도 아주 좋았지만, 돼지 삼겹살과 치즈를 말아서 튀김가루를 묻혀 기름에 튀긴 요리(돼지 삼겹살.치즈튀김)가 정말 白眉였다.
이 식당은 돼지 요리 전문점인 것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곳곳에 멧돼지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먹기 힘들었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 다음 2시간 30분간의 자유시간이 허용되었다. 지금까지는 좀처럼 없던 일이라 우리들은 어리둥절했고 별로 쇼핑할 일도 없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걱정이기도 했다. 할 일 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는데, 이 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야슈추르프카 성당)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은 타트라 박물관 이 휴관이어서 관람할 수가 없었다.
폴란드는 체코만큼 특산물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조잡한 물건 뿐이어서 그림엽서만 여러장 샀다. 그러다가 김영한, 신숙원 교수와 오 신부님을 만나 다섯 사람이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한담을 나누며 시간을 재촉했다.
중앙 유럽에는 커피를 아주 작은 잔에 진하게 해서 마시는데 마치 에스프레소 같은 커피였다. 이날 신 교수는 이 커피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일 없었다.
여행중에는 잠 잘 자고 잘 먹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최상의 조건인데 나는 컨디션이 좋았다. 여행체질인가?!…
쇼핑을 끝낸 일행은 17시에 다시 모여 호텔로 돌아왔다. 조금 휴식을 취한 다음 호텔식당에서 생선튀김을 맛있게 먹었고 일행중의 전상호씨가 보드카를 모두에게 대접하였다. 보드카는 원산지가 러시아인줄 알고 있었으나, 폴란드가 원산지인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보드카를 한 병 사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곳은 타트라 국립공원 에 속했고, 여름에는 등산, 하이킹, 승마를 즐겼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는데, 폴란드 최고의 리조트 지역이었다.
앞으로 차기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추진중이라고 한다. 호텔 뒷산에는 스키장으로 가는 리프트가 있었고 공산당 시절에는 고급당원들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휴양지였고 이 호텔에서 우리는 몸이 완전히 풀릴 중도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이제 내일이면 폴란드를 떠난다. 이 폴란드는 10세기 서슬라브의 부족들이 통합되어
Piast왕조를 건설한 다음, 13세기 몽고군의 침입, 17세기 스웨덴의 침입,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속주로 편입되어 자치권을 상실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에게 정복되었다가 독일이 패전한 뒤에는 공산화되어 구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가 마침내 1989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파란만장의 역사를 지닌 나라였다.
이 나라는 주위에 프로이센, 독일, 러시아, 소련, 오스트리아 등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이리 시달리고 저리 쳐박히며, 독립을 잃고 박해와 굴종으로 나라없는 슬픔을 뼈저리게 느꼈고, 자주와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애국혼을 일개워 준 폴란드 어머닏르의 눈물겨운 애환과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선명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쇼팽, 코페르니쿠스, 마리아스콜로도프스카(퀴리부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 나라는 숲과 정원으로 덮인 대평원이었다. 쇼팽이 고국의 흙을 늘 간직하고 다녔다는 사실(애국사상)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폴란드에 대해 애착을 가질까?
바르샤바에 있는 쇼팽 생가와 동상
7월 21일 (화요일)
6.-7.-8. 시간에 맞춰 일찍 자코파네를 떠났다.
라니냐 현상인지 체코보다 폴란드의 기온이 높았다. 이제 일행은 멀리 남쪽으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로바로 향하여 떠났다.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슬로바키아 국경을 넘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차는 빨리 넘어 갔는데 유독 우리 버스만 남게 되어 짜증나게 만들었다.
폴란드 국경을 지키는 경찰이 공연히 우리 기사에게 트집을 잡는 것인지 우리 기사가 서류를 미비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기사가 짜증스런 모습으로 연신 가방을 뒤적이며 무엇을 찾아서 갔다왔다 바쁘게 돌아 다녔으나 좀처럼 출발할 기미가 없었다.
국경을 넘어가는 다른 사람들은 패스포트만 보이고 쉽게 떠났는데 하필이면 우리는 떠나지 못하다니, 동양인이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 역시 여기는 가난한 나라니까 돈을 챙기려고 공연한 트집을 잡는 것 같기도 했다. 약 1시간여 만에 가까스로 국경을 넘어 슬로바키아로 들어갔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1993년 1월부터 국민투표에 의해 두 나라로 분리 독립하였다는 것인데, 슬로바키아는 체코보다 경제적․문화적으로 많이 뒤떨어졌고, 아직도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잔존해 있는 것 같았다.
슬로바키아의 타트라산 부근 스타리스모카베츠에서 돈을 바꾸고 점심도 먹었다. 점심은 뷔페였는데 볶음밥과 스튜가 있었으며, 아주 맛이 있었다.
즐겁게 식사를 끝낸 다음 근처에 있는 산중호수가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뛰어난 절경을 만끽하였다. 호수가에 우거진 숲과 그림같은 집들은 마치 TV에서 보는 미국의 더벅머리 미술가 밥이 그린 숲속의 정경 그것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헝가리 국경까지 16km이고 서남쪽에 위치함)를 향해 떠났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물 얻은 고기 마냥 신나서 들뜬듯한 모습이었고 길도 잘 아는 눈치였다.
슬로바키아, 헝가리는 자주 와 본 모양 같았다. 길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잘 달릴 수 있어서 먼길을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우리는 Holiday inn호텔에 짐을 풀었다. 세계적인 체인이었으나 명실이 상반했다. 알고 보니 현지인 이름만 빌리고 옛건물을 외형만 살짝 고쳤을 뿐 낡은 채로 사용하기 때문에 냉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방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는데 가보니 별다른게 아니었으므로 그냥 지내기로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따라 32℃~35℃에 가까운 폭염이 엄습하여 찌는 듯한 더위였다. 체코와는 딴판이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시내의 아담한 지하식당에서 우리는 매우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맛있는 포도주와 생선튀김에 생음악연주가 일품이었다.
갖가지 세미클라식의 귀에 익은 음악을 연주해 주는 통에 우리는에 포도주에 취한 채 바이얼린 달러를 끼워 넣어주기도 하고 신나는 춤도 추고, 처음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며 즐거웠다.
근처 흘라브니에 광장 에서 얼마간의 자유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이 호텔에서 이틀 묵기 때문에 빨래를 했다.
7월 22일 (수요일)
7-8-9. 시간에 맞춰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 전용버스로 브라치슬라바 시내 관광에 나섰다.
그런데 오늘 현지가이드는 너무나 예쁜 처녀가 아닌가! 여대생이고 루시라 했다.
모든 일행이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특히 남성회원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으며 설명하는 곳마다 가이드 가까이에 모여, 들으려고 하는 모습이 역연했다.
늘씬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즐거운 일이다.
먼저 2차 세계대전 기념탑을 보기위해 언덕을 올라갔는데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다뉴브 왼쪽 강변의 브라치슬라바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 도시는 헝가리의 지해하에 있던 1541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터키제국에 함락됨에따라 그후 3세기에 걸쳐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므로, 한때 헝가리 왕국의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브라치슬라바 성 으로 갔다. 도나우 강변 언덕위에 높이 지어진 장대한 이 성은 12세기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세워졌으나 15세기초엽 다시 고딕양식으로 새로이 개축되었고 19세기초 큰 화재로 소실된 것을 2차 세계대전이후 복구한 것이라고 하는데 안쪽은 슬로바키아 박물관 분관으로 쓰고 있었다.
성에서 내려다 본 도나우강과 시가지는 소박하고 고풍스러웠다.
다시 아래로 조금 이동하여 성 마르틴교회 로 갔다. 14세기에 만들어진 매우 아름다운 교회로 85m나 되는 첨탑이 있었다. 이 교회는 3세기간에 걸쳐 11명의 헝가리왕과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바로크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다뉴브강의 건너편은 오스트리아 땅이며 빈(비엔나)까지는 50㎞밖에 안된다고 했다. 불현듯 오스트리아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폴뉴먼이 슬로바키아 사람이라는 가이드 루시양의 얘기에(모친은 슬로바키아인이고, 부친은 집시였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이 갔다. 슬로바키아 사람들은 얼굴이 좁고 눈이 파랗고 머리가 회색-금발이고 별 미남은 아니고...등, 폴뉴먼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어제밤에 거닌 광장으로 내려와서 구시청사와 미하엘 문을 보았고, 모짜르트가 살았다는 집 간판(네모로 된 동판) 앞에서는 너도나도 각기 루시와 기념촬영을 하느라 부산했다. 그런 다음 점심을 먹었는데, 포크튀김요리였다.
그런데 이곳 음식점에서 내놓은 스프가 모두 짰다. 별로 맛이 없는 요리였다.
오늘은 시간도 많고, 또 체코의 프라하만큼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자유시간 및 쇼핑시간을 가졌다. Tasco백화점 에 들러 한시간여 돌아다녔으나 우리 나라의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
유리제품은 많고 쌌지만 깨어질까봐 못 사고 손녀와 손자에게 줄 장난감으로 작은 비행기와 자동차를 샀다. 4시쯤 호텔로 돌아와 모처럼 한참을 쉬었다.
저녁 늦게 호텔에서 만찬을 마치고 몇몇씩 짝을 지어서 호텔로비 바에서 보드카를 한잔씩 마시며 한국대학사회의 장,단점을 논하며 IMF(임프 : YS가 아이엠에프관계 서류를 처음 보더니만 하는 말이 “이거, 임프가 뭐꼬?” 했다는 것)에 관한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브라치슬라바의 밤 은 깊어가고 있었다.
7월 23일 (목요일)
6-7-8의 시간에 맞추어 호텔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버스를 타고 브라치슬라바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헝가리 국경선을 통과했다.
아주 수속이 간편하여 통과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훈족의 후손, 마자르족의 후손 이라는 아시아계의 선조를 가진 헝가리에 대해 좀더 색다른 감정을 가지고 눈여겨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천이 540여개 이상이 솟아올라 온천천국이며 맛있는 요리와 토카이포도주도 유명한 요리의 나라이다. 또한 리스트, 바르토크, 코다이 같은 유명 음악가를 낳은 음악의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헝가리고 들어서자 대평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들판에는 보리와 밀이 익고, 라벤더, 해바라기, 옥수수, 포도나무가 보라색, 노란색, 녹색의 아름다운 색깔로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우리는 쇼프론 경유 코스를 그만두고 곧장 부다페스트 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일행은 신나는 시간을 가졌다. 개별노래 부리기보다는 팀별 장기자랑을 하기로 했다.
뱀띠팀(필자, 오신부, 성대 지영숙 교수 팀)과 토끼팀(방만원 교수, 이재기 사장, 황영상씨 팀) 그리고 양띠팀(계선자 교수, 김경숙 교수, 이길순씨 팀)으로 나뉘어 노래, 만담, 이야기, 장기자랑 등 4次에 걸친 대결끝에 드디어 뱀띠팀이, 신중한 심사를 거쳐 1등을 했다.
여기엔 오남주 신부님의 기막히게 애절하고 감동적인 두차례의 노래솜씨가 히트를 했기 때문이며 필자의 구수한 우스개와 노래도 한몫했다. 사이사이 잡띠팀도 가세하여 찬조출연을 하였고 사회자 오성 장군의 초치분장의 발전적 사회솜씨도 큰 몫을 하면서 환성과 웃음속에 여흥이 끝나고, 몽고족의 유럽 침입에 관한 김종원교수의 수준높은 강의가 있었다.
몽고의 바투에 의한 킵차크와 동유럽 원정(1236~1242)에 관한 것 그리고 이것이 서유럽의 기독교세계에 큰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게 되어 로마교황이 몽고의 재침을 막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목적에서 프란시스코파 수도승을 카라코룸에 파견한 일 등 동서문화교류에 대한 강의 내용이었다.
특히 몽고 침입으로 유럽기사단이 대패한 이유는
① 며칠 후 올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바람처럼 빨리 나타난 몽고군에 미처 옷도
갖추어 입지 못한 채 대적하게 되었다는 점,
② 몽고인의 말타는 솜씨는 비호같고 귀신같아서 말에 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
③ 남녀노소를 막론한 몽고인의 무자비한 살상에 유럽은 너무나 놀라서 기절초풍, 아
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던 점들을 얘기들으며 일행은 퍽 흥미진진해했다.
12시쯤되어 도나우강이 직각으로 꼬부라지는 지역 입구에 있는 에스테르곰(부다페스트 서북방 45㎞)에 도착했다. 날은 찌는 듯 했다.
며칠전부터 여기도 폭염이 계속된다고 한다. 운전기사의 신나는 운전으로 우리는 한시간여 일찍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 현지 가이드가 와 있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쫙 들어선 쇼핑가게를 오가며 간단한 쇼핑을 즐겼다.
헝가리의 민속 공예품은 자수와 인형, 예쁜 도자기류라고 한다.
12시 45분쯤 총각가이드 다니엘이 도착했다. 여성단원의 눈동자가 빛난다는 우스개 소리를 해가며 우리는 높이 100m의 거대한 도움이 있는 대성당(Bazilika) 에 도착했다.
이성당은 다른 성당과는 달리 가운데가 매우 넓고 밝았으며 마음에 꼭드는 성당이었다. 과연 헝가리 최대의 카톨릭 대본산다웠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아무 예고도 없이 일행은 꼬불꼬불한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300여계단) 성당의 Dome꼭대기로 올라갔다. 다리도 아프고 헐떡거리기도 했지만 돔으로 된 탑위에서 360°의 파노라마로 다뉴브강 지역 을 수 ㎞전방까지 다 전망할 수 있는 경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당지붕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곳이야말로 기막힌 도나우벤트 지역 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곳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우리는 다시 내려와 도나우 강변의 야외식당으로 갔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큰나무 밑에 식탁이 놓여 있었고 경치도 좋았지만, 좀 늦은 점심이어서 스프와 감자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은 뒤 높은 성을 뜻한다는 비쉐그라드(부다페스트 서북방 40㎞지점)로 갔다.
14세기에 만들어진 높이 328m의 성 정상의 요새는 완벽하게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도나우강을 조망할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도나우 강변에 오다니...
필자는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강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쪽으로만 흐른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헝가리 한가운데를 직각으로 흘러가고 또 수도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며 놀라워 하였다.
다시 우리는 부다페스트 북방 약 20㎞지점의 센텐드레라는 예술인의 도시로 갔다.
이제 점차 수도 부다페스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먼저 Bus에서 내려 다뉴브강변을 걸었다. 강가에 가서 남편 김종원교수는 발도 담그고 사진도 찍고, 필자는 다뉴브강변의 작은 조약돌을 기념하기 위해 10개 정도 주워서 손수건에 쌌다.
이 도시는 17세기 후반 세르비아족 이민들이 조성한 도시로 바로크, 로코코, 루이 16세 양식의 색채 풍부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는데 거기엔 Munslek이라는 글을 써서 유산보존지역임을 표시해두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 거리의 작은 광장 한쪽에서 작은 소녀가 저금통을 앞에 놓고 피리를 불고 있었던 모습은 너무나 예쁘고, 또 조금 가슴이 저리는 풍경이었다.
에스테르곰에서도 성당 한모퉁이에서 한 여대생이 풀륫을 불고 있었는데...
그 지역 성당도 둘러보고 조각 공원도 보고... 우리는 특급호텔 Radisson Beke Hotel에 들었다. (신부님 빽 도난) 시원하고 깨끗하고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행가방을 챙겨놓고 옷도 갈아 입고 곧 호텔식당으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바이얼린 셋, 콘트라베이스 하나, 큰 실로폰 하나로 구성된 생음악 연주가들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해 주고 있었다.
필자는 멋진 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 포크스틱이었다.
그리고 헝가리의 자랑거리 포도주인 토카이 포도주를 아주 맛있게 마셨다. 바이얼린 연주가들은 우리 곁으로 와서 희망곡을 신청하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연주를 해준다.
사실 호텔에서의 연주는 돈을 주어야 하는지 주지 않는 것이 예의인지 잘 몰라서 다소 난처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 대만, 홍콩 등 아시아계 관광객들이 돈을 주어온 모양인지 느낌은 돈(팁)을 달라는 모습이었다. 대표로 한 분이 악기에 달러를 끼워 주었다. 객실에 들어와서는 사흘간 이 호텔에 머물기 때문에 빨래를 해 널었다.
7월 24일 (금요일)
7-8-9의 느긋한 아침시간을 즐기며 맛있는 아메리칸 뷔페 브랙파스트를 양껏 먹었다.
샐러드, 베이컨, 우유, 시이리얼, 쥬스, 과일, 후루츠칵테일 등 갖가지를 다 먹었다.
계속되는 양식에, 섬유질 부족에 여행성 긴장으로 변비가 계속되고 있다.
“성공이가?” “아니...실패...!” 아침마다 이어지는 우리 부부의 의 대화다.
애하나 낳는 만큼이나 힘들다...!
오늘은 부다페스트에서 서남쪽으로 90㎞ 두시간 거리에 있는 발라톤 호수주변의 휴양지를 종일 방문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에 아주 여유가 있었다.
발라톤 호수는 바다가 연해 있지 않은, 헝가리의 바다라고 할 만큼 큰 호수였다. (591평방 ㎞) 정말 크고 물색이 푸르고 아름다웠다.
호수 주변에는 수영객들, 요트, 윈드써핑, 낚시, 보트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으며 무더운 한여름 속에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휴양객들은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오늘의 현지 가이드는 우여곡절 끝에 어제의 다니엘이 가고 새로운 대학생 가이드 라자띠비가 맡았다. 여성단원들 사이에서는 다니엘이 더 낫다는 둥 띠비가 더 낫다는 둥 설왕설래했으나 가이드로서의 자질은 오늘의 띠비 총각이 더 나았다. 지원처녀는 인물도 띠비가 더 미남이라고 했다.
호수로 가는 동안 아무튼 그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헝가리는 유명한 말이 많다는 얘기(정말 TV엠블램이 뛰는 말이었다),
헝가리인은 매운 음식을 일반적으로 많이 먹으며 또한 채소는 거의 먹지 않고 육고기를 많이 먹어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육고기값이 매우 싸고 고추, 마늘이 많았음),
외국의 침입이 잦았으며 그들은 우물에 독약을 뿌렸기 때문에 술을 많이 먹게 되었으며 각지방마다 술이 유명한데 그중 토카이 지방의 술이 제일 유명하고, 사람들은 전쟁때도 술에 취해 있었다는 얘기,
895년 헝가리가 성립했기 때문에 1995년엔 헝가리 성립 1000주년 기념행사가 헝가리 곳곳에서 성대하게 있었다는 얘기,
또한 동서독으로 나누어져 있떤 냉전시대에 이곳은, 헤어진 동서독 이산가족이 각기 이곳 발라톤에 와서 서로 만나는 만남의 장소였다는 얘기(그래서 지금도 언덕위의 집들에는 “빌려주는 방 있음” 이라고 쓴 간판이 붙여져 있었다),
헝가리의 1차 산업은 농업이며 2차 산업이 관광으로 관광수입이 크다는 얘기,
유럽에서 제일 큰 호수가 발라톤이므로 여기서는 잉어 종류의 생선이 많이 잡히므로 피시스프가 제일 유명하다는 얘기 등등이었다.
어느덧 발라톤 퓌레드 지역에 들어서서 호수를 조망하며 차를 달렸다.
깊이 3~4m의 호수는 7가지 색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푸른색이 매우 아름답고 공기는 맑았다. 동쪽의 Tihany(티허니)쪽은 고급 별장지였는데 무성한 갈대와 밀려오는 파도, 언덕위의 빌라, 만발한 라벤더꽃밭, 바로크양식의 수도원...등 경치가 빼어났다.
우리는 언덕을 올라 포도밭옆의 빌라식당에서 토카이 포도주를 마시며 악사들의 생음악을 들으며 파-란 발라톤 호수를 바라보며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이것이 낙원이리라... 언젠가 이곳에 다시와서 방을 빌려 얼마간 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이 지역은 가을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 애들과 언제 다시 같이 왔으면...
다시 호수가로 내려와 한시간여 자유시간을 가지면서 우리는 호수가를 거닐며 사진도 찍고 카드도 사고 벤취에 앉아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했다.
일행은 오후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다. 부다페스트는 왕궁이 있는 언덕쪽의 부다지구와 강건너 아래쪽의 페스트지구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고 부다 왕궁으로 갔다.
다뉴브 강가에서 페스트 지구를 내려다보듯이 펼쳐진 곳이 아름다운 왕궁언덕이었다.
이 왕궁은 13세기 몽골의 습격을 받은 벨라4세왕이 에스테르곰을 도망쳐 나와 부다에 고딕양식의 성을 세운 것이 그 시초며 300여년간 번영을 누렸는데 16세기 터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성도 붕괴하였다.
뒤를 이어 17세기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화려한 바로크양식의 궁전이 새로 세워졌으나 그후다시 1849년 화재로 파괴되었다.
건축가 이블과 하우스만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완성한 것이 1904년이었다한다.
그러나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왕궁은 또다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1950년대에 들어와서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하니 이 왕궁의 역사만으로도 헝가리의 파란만장한 과거역사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왕궁은 매우 아름다웠으며 다뉴브강변에 펼쳐진 페스트 지역의 고풍창연한 모습과 강위에 놓여진 마라릿다리, 자유의 다리(본래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다리), 페퇴피 다리, 세체니 다리(사자조각에 혀를 만들지 않아 자살), 에르제베트 다리, 그리고 마가릿섬등 정말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다음 우리는 마챠시 성당에 들어갔다. 거기에서는 파이프오르간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경건한 추모미사를 올리고 있어서 그 장엄한 분위기에 우리는 압도되었다. 다시 특이한 고깔 모양의 네오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어진 어부의 요새를 답사하며 황혼의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즐기며 마치 동화속의 주인공이 된 듯 했다.
오늘 저녁식사는 민속무용과 민속음악 공연이 곁드려지는 시내의 큰 야외식당에서 하게 되었다. 헝가리의 특산품이 자수품이었는데 민속옷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토카이 포도주에도 취하고 민속무용과 음악에 취하며 부다페스트의 밤을 즐겼다.
특히 이재기 사장과 헝가리 처녀와의 춤, 포도주 마시기 등의 신명풀이는 그동안 마음쓰며 고생한 이사장의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신나는 한마당이었다.
그러나 식탁밑에서, 뒤에에 앵겨드는 모기떼의 습격에 남녀노소할 것없이 모든 단원이 모기에게 한바탕 파티를 열어주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틀째 Radisson호텔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1998년 7월 25일 (토요일)
이제 마지막날의 관광이다.
7-8-9타임에 맞추어 멋있고 맛있는 아침호텔뷔페를 들고 전일 부다페스트관광과 다뉴브강 유람선 관광에 나섰다. 제일먼저 간 곳은 영웅광장이었다.
건국 천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광장에는 반원형태의 벽면에 성 이슈트반, 벨라4세, 마챠시왕, 안듀라슈2세 등 헝가리의 영웅 14명의 조상이 조각되어 있었고 광장 한복판에는 건국천년기념비(36m의 원주에 천사 가브리엘의 동상이 있음)가 유명한 조각가 자라 쥬루지의 솜씨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기념 촬영을 한 뒤 성스테판성당과 성이슈트반 대성당을 관람한 뒤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헝가리 최대의 박물관으로 1846년에 건축가 플라크 미하이가 세웠다고 한다.
고대. 중세, 근대, 옛동전, 초상화 등 5개의 주제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헝가리 왕가의 유품이나 성이슈트반의 왕관, 부채, 대관식의복, 황금목걸이, 옥검 등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으며, 번창했던 시절 헝가리 왕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점심은 天檀반점 중국요리였다. 정말 꿀맛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중국음식이었고 또 요리 솜씨도 좋았다. 이번엔 그 흔한 한국음식점엘 안 갔다는 사실도 특징이었다.
점심식사 후 드디어 우리는 대망의 다뉴브강 선유를 하게 되었다.
배가 큰 것은 아니지만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을 유람선을 타고 관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벅찬 일이었다.
제로 강물이 맑고 푸른 것은 아니었지만 양쪽 강변으로 펼쳐지는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건물의 퍼레이드는 정말 장관이었다.
터키에서 마지막 선유를 즐겼던 보스포러스 해협의 정경이 떠올랐다.
다뉴브강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다리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뾰족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하얀 국회의사당, 멋있는 왕궁, 스테판 성당, 마차시 성당, 신교 교회, 공대건물, 전도자 겔레르트의 동상이 있는 언덕... etc... 마지막 다뉴브강 선유까지 마치고 나서도 아직 미진한 것이 부다페스트에 더 머물고 싶었다. “다뉴브의 진주”, “다뉴브의 장미”라 불리우는 부다페스트는 빠리를 뺨치는 도시였다.
오후 우리는 마지막 쇼핑을 위해 쇼핑타운을 헤맸다. 필자는 단장팀 선물 사느라고 더 정신이 없었는데 우리 것은 헝가리 도자기(꽃장식 접시)를 몇개 샀을 뿐이다.
중앙 유럽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조용한 음악이 있는 시내의 불가리아 식당에서 했다.
황영상씨가 한턱 낸 토카이 포도주로 건배를 하고, 우리 일행은 조그만 정성을 모아 그동안 여러 가지로 애써줌으로해서 싸고 유익하고 쾌적하고 멋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 분들에 대해 선물증정식이 있었다.
단장님, 총무님, 여행사 사장님 세분에게 작지만 마음의 선물을 드렸다. 이제 12일 간의 여행 일정이 어느덧 다 지나가 버린 것이다.
저녁식사후 Bus를 타고 둘러본 도시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호텔에 돌아와 마지막 짐을 챙겼다. 내일이면 귀국하는 것이다.
캐톨릭신도팀은 오신부님 방에서 미사를 올렸다.
7월 26일 (일요일)
6시 기상, 7시 아침식사, 8시 출발이다.
잠을 깨니 제법 많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까지 단 하루도 흐린날 없이 쾌청한 날씨였는데 우리가 떠나려니 이제 비가 오다니... “...감사합니다!”
Bus에 올라탔다. 기사도 Bus도 어제와 달랐다. 아침 일찍 고향 슬로베니아로 떠난다던 기사 이반과 아들 미치아는 아직도 떠나지 않고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호텔 입구에 서서 비를 맞으며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12일간 이제 미운정 고운정이 흠뻑 다 들어 서로가 헤어지기를 너무나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정이리라. 피부색, 인종, 민족을 달리해도... 우리는 한참 동안 이별의 정을 나누고 손을 흔들었다. 아직도 그 예쁘고 건강한 미치아의 모습과 영어 실력이 눈에, 귀에 선하다.
공항으로 달려가면서 빗속의 부다페스트를 보았다.
허전한 마음과 안도의 마음이 뒤섞였다. 마치 딸을 시집보내고 난 뒤 다음날 혼자서 비오는 하루를 맞이한 친정엄마의 마음 같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10시 45분 루프트한자로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두시간쯤 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4시간 여를 기다린 후 저녁 5시 서울을 향애 프랑크푸르트를 떠났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의 대기시간은 썩 즐거운 추억이 되지 못했다.
쇼핑할 것도 없고, 또 독일이 물가는 면세점이라도 엄청 비쌌으며 불친절하고 쾌적한 것이 되지 못했다. 아직 통일의 후유증은 남아 있으리라...
다행스럽게도 또 창가에 앉았다. 시베리아 벌판 위를 비행기는 날고 있었다.
시 해가 지는 듯했다. 너무나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같은 새벽별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이 움터오는 지구의 하늘 빛이 수억년을 가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항성과 행성들,
순간 우주의 신비에 휩싸이며 시공을 초월한 기분이 되었다.
인간, 자연, 우주... 20세기, 21세기, 22세기, 인간, 역사, 미래...
앞으로 지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죽지만 21세기는 차세대들에게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그날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잠들기도 하고 아침식사도 하는 사이 어느덧 서울시간 아침 10시 김포공항에 그야말로 무사히 비행기는 도착하였다.
12박 13일의 중앙유럽여행은 이렇게 무사히 그리고 보람있게 끝났다. 모두 짐을 찾고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우리 부부 김교수와 나는 다시 공항 국내청사로 와서 부산행 비행기로 바꾸어 타고 무사히 우리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은 모처럼 된장찌개 와 명란알탕에 새콤해진 총각김치에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서 맛있게 밥을 해먹었단다. 음식회포를 모처럼 풀었다.
며칠간은 내내 밤낮없이 잠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스메타나의 몰다우강을 들으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1. 비셰그라드 2. 몰다우강 3. 샤르카(여성이름) 4.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 5. 타보르 6. 블라니크(보헤미아 중,남부 경계에 위치한 산) 이렇게 6악장으로 나누어진 “나의 조국” 교향시를 들으며 마음은 다시 한번 몰다우강변을,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을 달려가고 있다.
중앙유럽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