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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멋지다 거침없이 달리는구나

영욱오아시스 |2012.03.05 16:34
조회 85 |추천 0


[광개토태왕비문] □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皇天 威武 橫披 四海 掃除 □□庶寧 其業 國富 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州有九宴 駕葉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 陵於 是立碑銘 記勳績 以永後世焉

(부여시조 해모수의)□ 제 17대 후손이 되는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 연호를 永樂(영락)이라 하였다. 태왕(호태왕)께서 베풀어 주신 은택과 하느님의 위세와 武勇(무용)에 힘입어 四海(사해: 천하 사방)을 掃除(소제=평정)하여 □□태왕께서 바라시던 나라는 질서가 안녕되어 가업에 종사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백성들은 넉넉한 재물로 잘 살게 되었다. 하늘과 같은 큰 은혜를 끝없이 베풀어 주시고 갑자기 돌아 가신 후 九州(9주)의 백성들은 슬퍼하며 酒宴(주연)을 올리며 항상 잊지 못하고 있다가 駕葉國(가섭국)으로 甲寅年(갑인년:서기 414년) 9월 29일 乙酉(을유)일날 就山(취산:산능)에 移葬(이장)을 하고 이 능에 비석을 세우고 碑銘(비명)에 훈적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였다. "

"이 때에 백제,신라,가라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 지역) 모두 평정하고 굴복시켰다.임나(대마도)와 이왜 즉, 왜구와 그 이웃무리까지도 신하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위세가 떨침은 이때가 그 극성기였다."



보충사료▣ 광개토태왕비문과 크게 다르지 않는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의 기록내용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의 기록내용/"고구려 제19대 광개토경호태황은 재위기간이 391년~413년이며, 연호는 영락(永樂)으로 일명 영락대왕이라고도 한다. 사후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했다.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즉,공이 크며 성인과 같은 덕이 탁월하였다. 온 세상의 나라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하였다.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예로서 진열하고 예로서 하늘의 음악으로 연주했다.군진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온 세상의 나라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하였다.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예로서 진열하고 예로서 하늘의 음악으로 연주했다.군진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각주/나이 18세에 태왕에 오른 광개토태왕.결코 나이18세가 어리다고 볼 수 없다. 나이가 많아도 어린아이같은 뇌를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이와 상관없이 교육을 통하여 뇌에 어떠한 내용을 저장시켜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불의와 침략과 독식은 물리치고 공존번영할  수 있는 대동홍익주의를 심어 주는 일이다.18세에 태왕에 즉위한 광개토태왕의 뇌구조가 그랬다고 볼 수 있다.)

말을 타고 순시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하늘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인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광개토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  3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돌아 왔다.

*각주/이 기록에서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고 고구려 대방땅을 공격한 왜의 실체는 광개토태왕비문에 이잔국으로 비하하여 기록된 웅진백제를 중심으로 서남해 해상세력임이 명확해진다.

이 때에 백제,신라,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지역) 모두 평정하고 굴복시켰다.임나와 이왜 즉 왜구와 그 이웃무리까지도 신하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위세가 떨침은 이때가 그 극성기였다.

(일본열도 세력은)3국이 바다 섬들에 있고 7국은 육지에 있었다. 처음 변진 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산 적이 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하였다.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고구려)골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즉 고구려 제19대왕이신 광개토대왕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였으며 성이 같다.옛날부터 웅습성이 있었다.지금의 구주의 웅본성이 그것이다.

*각주/[한단고기]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記) 기록에 "먼 옛날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대마도·일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이후 북방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부여.흉노.선비족이 마한영역이였던 일본열도로 이주해서 많은 나라들이 생긴 것이다.

영락 10년에 세 가라(대마도 세력)가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었고,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모두 열제의 명령에 통제되었다.(*각주/광개토태왕은 백제연방군를 정벌할 때 임나가라-대마도까지 복속하여 대마도에 고구려의 임나연정을 세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이 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안라인을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그것은 다라국이나 안라국은 고구려인들이 대마도 지역에 세운 고구려나라들이기 때문이였다.)[광개토태왕비문]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10년 庚子(경자)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 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후퇴하기에 황급히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으로 하여금 군대를 관리하게 하였다.신라와는 친하게 지내 온 관계로 신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나, 광개토태왕 때 이르러 신라왕이 조공을 바쳤다. "

*각주/라이벌 백제를 겨냥하기 위해 고구려가 전략적으로 필요했던 신라를 침략한 백제연방군(가야포함 왜군)을 개마무사를 파견하여 몰아 내고 백제와 일본열도를 잇는 대마도까지 정벌하고 고구려출신의 안라인에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고구려는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을 통하여 10여년간 백제와 왜의 연합을 단절시키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통제했다

[사료]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6대 고국원태왕 331~371 재위기간 40년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때 연나라 장수 모용한 수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였으나,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족히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 잡아 돌아 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 갔다.

13년 봄 2월, 왕이 아우를 연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 예방케 하고, 1천 건에 달하는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곧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보내고, 왕모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고구려사의 굴욕



廣開土태왕碑文 영락 17년 五萬 四方合戰 斬煞蕩盡所



"고국원태왕 할아버님 당시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여 미천태왕 할아버님의 무덤을
파 헤쳐 시신까지 훔쳐 간 연나라넘들의 패륜행위와 우리의 굴욕을 잊지 않고 있느니라!"



후연(後燕)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좁힌

광개토태왕은 A.D 407년에 사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였다.

廣開土태왕碑文「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하여 000000000에서 우리의 군사가 4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고 쓸어 버리고 개갑 1만여령을 로획하였으며, 군수물자와 기계의 획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 오면서 사구성, 루성, 00성, 00000000성을 격파하였다.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000000000師 四方合戰 斬煞蕩盡所 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00城.00000000城」 

註 이 전쟁 때 고구려는 후연을 북으로는 거란 방면에서, 남으로는 발해(渤海) 방면에서, 서쪽으로는 후연의 유주(幽州) 방면에서(이 무렵은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한 후이다), 동으로는 북진(北鎭) 방면에서 각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이 때 후연(後燕)을 4방에서 공격하였다. 후연은 이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내분이 일어나 모용희가 죽고 고구려 왕족 고화(高和)의 손자 고운(高雲 : 모용보가 양자로 삼음)이 왕이 되었고, 왕의 성씨(姓氏)를 후연의 모용씨가 아닌 고구려의 고씨(高氏)를 사용하였다.

이를 보면 이때 후연은 고구려의 위성국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년 뒤인 A.D 409년에 풍발이 북연(北燕)을 세우므로서 북연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용희를 제거하고 고운을 왕으로 추대한 풍발(馮跋)의 고향이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과 같은 장락군(長樂郡) 신도현(信都縣)이고, 유주자사 진(鎭)이 A.D 408년 12월에 죽자 다음해 A.D 409년에 북연(北燕)을 세우고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떨어져 나간 점이다.

이를 추정해 보면 광개토왕의 후연 공격 때 유주자사 진과 같은 고향인 풍발이 유주자사 진의 영향력으로 모용희를 죽이고 고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가 유주자사 진이 죽자 다음해 북연을 세우고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것으로 추정된다.

http://www.megapass.co.kr/~hsg1000/b6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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