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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를 아시나요?

대한민국 |2012.03.16 22:53
조회 1,248 |추천 6

 

 

 

 

 

 

 

전태일 열사를 아시나요?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자들의 권리 즉 노동법이 제대로 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노동자들이 제대로된 임금 뿐만아니라 권리도 존중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소 기업들은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가발산업등을 통해 성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소 기업들은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값싸게 채용하여 수익을 올리는 사례가 많았고,

정부의 근로기준법이 존재는 하였으나, 이를 어겨가며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다수 존재하였습니다.

이에 전태일 열사는 젊은 나이였지만 노동자들을 위한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로 환경이 개선 되지 않자, 분신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되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로 인한 죽음은 당시 큰 파장을 만들었고, 이에 여러 노동운동이 발생하였고

결국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 근로법이 개정되었습니다.

만약 전태일 열사가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것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정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전태일은 대구부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거리에서 껌이나 삼발이등을 만들어서 팔아가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불우한 인물이였습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청계천 평화시장 (현재의 청계천 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동안 노동을하며 당시 차 한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습니다.

이듬해 직장을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였지만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을 전태일 열사는 보았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근로 환경은 정말로 열악했습니다. 햇빛 조차 들어오지 않고 앉아서도 고개를 숙여야지만 들어갈수있는 크기의 다락방에서 밤나절 노동을 해서 받는 임금은 그저 밥 한끼를 먹을수있는 돈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린 여공들은 몸이 쇄약해지고 심지어 폐병에 걸려 쓰러지는 여공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공들에게 병원비를 지급하기는 커녕 병 걸린 여공들은 모두 해고 시켜버립니다.

이에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해서 ' 바보회 ' 라는 모임을 만듭니다.

바보회는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 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의 모습

이후 전태일 열사는 밤이 새도록 ' 근로기준법 ' 에 관한 조문을 뒤져가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노동운동을 시작합니다.

먼저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조사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돌아온 답변은 경멸과 비웃음 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전태일 열사는 이 일로 인해 평화시장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전태일은 그로부터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습니다.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에서 전태일 열사가써놓은글)

 

하지만 전태일 열사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동료들과의 모임인 '바보회'를 '삼동 친목회'로 다시 조직합니다. 그 뒤에 전태일 열사는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 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하게됩니다.

 

전태일 열사는 결국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랜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역시 이것또한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랜카드를 뺴앗기는 등 시위가 다시 무의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을때, 전태일 열사는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리다

"배가 고프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에 노동계에 큰 파장이 일어났습니다.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진계기 또한 이 사건때문이죠, 자본가들에게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것입니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 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입니다.

 

이처럼 오늘날까지 곳곳에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노동자의 일의 터전의 질이 향상된 것은

이러한 전태일 열사의 생명을 던진 희생이 아니였다면

결코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라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희생하신 분들을 우리는 잊지말고 본받아야 합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출처를 다 밝히지 못하는점 죄송합니다.

단지 글을 쓴 계기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이러한 분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고

요즘 애국심이 많이 없어지는것 같아 이렇게나마 글을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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