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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빼고도 다 바꿔선 안 된다"

국화꽃 |2012.03.23 09:52
조회 135 |추천 0

"마누라 빼고도 다 바꿔선 안 된다"



 

선거판, 못 바꿔 안달이나… 이 땅에선 너무 바꿔 문제
연령과 성별 상관없이 '새것' '新品'에만 집착, 오래된 것은 낡고 잘못됐고 치워야 할 것으로 분류돼

  최보식 선임기자 그냥 변화로는 안 먹힌다. 이제는 '새로운 변화(새누리당)'쯤 돼야 하고, "완전히 갈아엎겠다(민주당)"고 핏대를 세워야 뭔가 팔린다. 속성상 야당은 그렇다 치자. 집권여당까지 "바꾸자, 바꾸자" 나서는데, 무얼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얼른 이해가 안 된다. 공천 잡음 속에서 후보들을 낯선 얼굴로 바꿨거나, 이 지역구에서 저 지역구로 옮겨놓은 것밖에는 아직 모르겠다.

 

 

선거 때마다 변화가 안 팔린 적 없고, 누가 누가 잘 바꾸느냐로 다투지 않은 적이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노무현 탄핵' 역풍(逆風)이 불었을 때는 노란옷의 후보자들이 금방 신세계를 만들 것처럼 흥분했다. "확 뒤엎고 사람 사는 세상 만들자!" 이런 합창(合唱)으로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세상만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다. 그때도 행복했던 사람은 소수였다. 찍은 사람들조차 염증을 냈을 정도다.

 

 

뒤이어 '이명박 바람'도 세상을 바꿀 것처럼 세차게 불었다. "여러분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바꿉시다!" 그렇게 다수 의석을 차지해도, 임기 내내 무엇을 했는지 모르면서 지나갔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 묻는 것조차 민망해졌다. 이번엔 모두가 불만이었다.

 

 

또 '한판 바꾸자'는 철이 왔다. 이걸 빼면 선거 장사가 안 된다. 출마자들조차 무엇을 바꾸고 왜 바꿔야 하는지를 몰라도 말이다. 선거판은 마치 내가 사는 동네의 산책로와 비슷하다. 한번은 가로등을 이리 다음번은 저리 옮기고, 조경석을 괴고 빼고, 개천 폭을 고무줄처럼 넓히고 줄인다. 늘 바꾸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세금이 남아도는군"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산책을 한다. 과거의 산책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선거판의 '바꾸자' 경연(競演)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질과 대부분 무관한 것처럼.

 

 

물론 바꿔야 할 것도, 흐름에 따라가야 할 것도 많다. 딱 맞춰놓은 법과 제도는 세월 앞에서 너덜해지게 마련이다. 때가 생기고 녹이 슨다. 봄날에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쌓인 부패와 비리(非理)의 쓰레기봉투도 치워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무조건 모든 걸 다 바꿔"에 열광하고, 하루가 멀다고 갈아엎어버리는 것은 성형중독과 같다.

세상을 살다 보면 바꿀 것 못지않게 지켜야 할 것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물려받은 만큼 후배나 자식 세대에게 그대로 전해줘야 할 무엇도 있다. 그게 더 우리의 중대한 임무가 될 수 있다. 이윤을 위해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 재벌 회장님이야 "마누라 빼고 다 바꾸자"고 발언할 수 있겠지만, 사람 사는 동네에서는 바꾸는 것보다 무엇을 계속 지켜야 할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 마누라 말고도 바꿔서는 안 될 가치와 덕목들은 많다.

 

 

선거판에서는 바꾸지 못해 안달이지만, 오히려 이 땅에서는 너무 바꿔서 문제가 된다.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새것' '신품(新品)'에만 집착한다. 오래된 것은 낡고 잘못됐고 치워야 할 것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축적도 주름도 그늘도 없다. 양은냄비처럼 금방 달아오르고 식고 또 달아오른다. 반만년 역사라고 자랑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런 역사를 증명할 수가 없다. 박물관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박제된 유물과 모조품을 빼면 말이다. 장차 이 사회를 떠맡아야 할 젊은이들이 6·25전쟁 발발 연도조차 모르는 사실에 깜짝 놀라 "이렇게 역사의식이 없을 수 있느냐"고 개탄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쭉 그렇게 만들어온 것이다.

 

 

모친에게 물려받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행사장에 나온 영국의 캐서린 왕세손빈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집 살림이 어려운가. 미국 영화에서 자신의 할머니가 꼈던 구식 반지를 약혼녀의 손가락에 끼워주는 장면을 가끔 본다. 우리 식 사랑의 정표로는 '신상품' 반지를 선물해준 뒤 이를 덤으로 더 얹어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즉시 파혼을 맞을 게 틀림없다.

 

 

우리의 과거는 계승의 대상이 된 적이 별로 없었다. 사람이 먹고사는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에도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 시절 삶의 정신과 가치도 결코 시시했을 리가 없다. 오늘은 그런 과거의 토대 위에서만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 바꿔야 한다"는 선거판의 구호에 우르르 몰려갈 뿐, 무엇을 바꾸고 지키고 물려줘야 할지를 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쓰면 수구꼴통으로 취급되거나 집안에서는 '영감' 소릴 들을 공산이 높다. 마찬가지로 선거판에서 어느 정당이나 정치인이 "우리 삶의 어떤 모습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 한 표를 달라"고 하면 망하는 코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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