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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과 핵, 그리고 무장평화

시스루 |2012.03.30 08:54
조회 50 |추천 0

'평화의 섬'과 핵, 그리고 무장평화

 

'최후의 결전' 준비하던 日帝 제주에 7만대군 배치, 요새화… 예정된 참극 막은 건 武力격차

평화 담론은 물론 소중하지만 냉혹한 역사의 얼굴은 말한다 '평화는 무장평화에서 온다'고

 

2012년 제주도의 봄은 사뭇 아름답다. 유채꽃과 쪽빛 바다, 올레 길과 오름이 어우러진 풍광(風光)이 눈부시다. 제주도 없는 금수강산은 참 허전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라도가 보이는 송악산 언덕의 바람도 상쾌하다. 그러나 그 해변에는 일제(日帝)가 남긴 진지동굴들이 우리를 맞는다.

 

1945년 봄 일제는 단말마(斷末魔)의 상황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일본은 '결(決) 7호 작전'으로 제주도를 최후 결전의 요새로 만든다. 인구 22만명의 섬에 7만50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켜 거미줄처럼 이어진 수십㎞의 지하 갱도와 700여개의 진지동굴을 파고, 해안 곳곳에 연합군 함대로 돌진해 자폭할 특공정(艇)을 배치했다. 제주도를 미군이 점령하면 중국대륙의 물자 공급 및 관동군 이동이 막히고 일본 본토에 대한 직접 공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일제에게 이는 악몽의 시나리오였다.

 

태평양의 전장에서는 군대가 전멸하고 주민이 몰사하는 일제의 참패가 이어졌다. 1945년 2월 이오지마(유황도) 전투에서 일본군 2만3000명 중 생존자는 포로 212명뿐이었다. 옥쇄(玉碎)의 이름 아래 할복(割腹)과 자살공격이 잇따랐다. 3월에서 6월까지 계속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미군 1만3000명과 일본군 11만여명이 전사하고 주민이 10만명 넘게 죽었으며 섬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파멸적 전황(戰況)에도 일제 군부는 마지막 싸움에 대비했다. 일본 본토에 상륙할 연합군에 치명타를 안기겠다는 계획이었다. 1만대가 넘는 가미카제 자살공격기를 대기시키고 해안을 방어할 지하동굴을 뚫었다. '천황의 땅'을 지킬 지상군은 정규군 260만, 민병대 3200만을 합쳐 3500만명에 달해 미국·영국·나치독일의 전 병력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15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자와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모든 여자를 징집하고 어린 아이들에게도 자폭 훈련을 시켰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자살적 행태는 연합군을 경악시켰다. '하라키리(할복)를 숭배하는 미치광이들'은 참호에서 버티다가 집단자살에 다름없는 최후의 돌격으로 미군을 괴롭혔다. 너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일제의 광태(狂態) 앞에 미국은 '미군 사상자만 최소한 100만명이 넘을' 일본 상륙작전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제주도는 일제의 최전선이었다. 유황도와 오키나와를 능가할 제주도의 대참화(大慘禍)가 임박했던 것이다.

 

일제의 전쟁의지를 꺾은 것은 두발의 원자폭탄이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우라늄 핵탄으로 8만여명이 즉사하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 핵탄으로 3만여명이 죽었다. 한순간에 폐허가 된 두 도시에서 후유증으로 수십만명의 추가 사상자가 발생한 건 물론이다. 8월 8일 소련의 대일 참전은 또 다른 결정타가 되어 일제는 8월 10일 항복의사를 표명한다.

 

예정된 제주의 참극이 원폭 투하에 의해 회피되었다는 걸 역사는 보여준다. 무조건 항복을 촉구한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의 최후통첩조차 일제가 묵살한 게 그 증거다. 일본은 결사항전과 함께 전개한 '화평공작(和平工作)'의 2대 조건, 즉 '패전 후에도 천황제를 보존하고 한반도를 영유(領有)하겠다'는 요구를 1945년 6월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악한 일본의 야심을 꺾은 건 핵무기가 보여준 압도적 무력의 격차였다.

 

나치와 일제도 핵무기 개발에 광분(狂奔)했다. 그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건 일단 인류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래 불붙은 핵개발이 인류 전체를 절멸시킬 절대무기의 확산으로 이어져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국제정치 상황에는 아직 본질적 변화가 없다. 우리의 양심과 양식(良識)이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게 당연한 사리(事理)인 건 이 때문이다. 문제는 마키아벨리의 통렬한 말처럼,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은 다르다"는 데서 온다.

 

핵안보정상회의의 말의 성찬(盛饌)도 핵을 둘러싼 현실과 당위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한다. 당위적 평화주의만으로 풀 수 있는 현실문제는 거의 없다. 1945년 8월 갑자기 찾아온 제주의 평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대(大)재앙에 우연히 의존했다는 사실이 이를 극적으로 예증한다. '평화의 섬 제주'의 평화는 평화에서만 온 게 아니었다. 물론 평화 담론은 고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냉혹한 역사의 얼굴은 평화가 곧 '무장평화'에서 나온다고 증언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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