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후궁 주제에 이리 날뛰어대느냐? 무엄하구나."
칠흙같이 새까만 고운 머릿결을 허리께까지 길게 늘어뜨린 화령은 자신의 발 아래 흐트러져 피를 토하고 있는 은하를 즈려밟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화령은 아름다웠다. 자신의 발 밑에서 신음을 토해내고 있는 것을 즐겁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화령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잡티하나 없는 고운 얼굴에 마치 오선지에 얇은 붓으로 그려놓은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화령은 달빛에 빚춰져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마마...흐..흐흑..."
은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자 여자는 눈꼬리를 싸악 위로 올렸다.
"죄송하다라? 네 년은 항상 죄송할 짓만 하더구나."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으윽..."
화령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안 그러느냐?"
"하 하오나 마마...!"
화령은 고운 꽃신을 신은 발을 가볍게 뻗어 은하를 짓밟았다.
화령의 발 밑에서 은하는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피를 뱉어내었다.
화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망가져가는 은하를 응시하며 계속 발로 그녀를 즈려밟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굵직한 중저음의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화령은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령의 발 밑에서 밟히고 있던 은하는 울먹이며 아인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났다.
아인은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은하를 품에 감싸앉았다.
아인은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화령을 쳐다보았다.
아인은 한치의 동요없이 황제의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모두 받아내었다.
"여봐라, 이 마녀를 당장 화원궁에 쳐넣거라."
아인의 목소리는 고요한 호수가 같았다. 결코 분노나 증오 혐오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주나라의 황제였다.
화령은 자신의 곁에서 쭈뼛거리는 무관들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어디서 감히 미천한 것들이 한 나라의 국모에게 손을 대느냐? 무험하도다!"
화령의 목소리에서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한 나라의 국모의 모습일지라.
아인은 어이가 없었다. 황제가 아끼는 여인을 망가뜨려놓고도 저리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여자는 주나라, 아니 세상을 통틀어 화령 단 하나뿐일 것이다.
아인은 무표정으로 화령을 쳐다보았다.
"멈추어라. 저 더러운 마녀는 네 놈들의 손으로 만질 가치도 없다. 그냥 가자꾸나."
아인의 말에 무관들은 주춤거리며 다시 아인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인이 조심스런 손길로 은하를 부축해가자 무관들은 뒤따라 그를 뒤따라 갔다.
"하-"
화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가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어째서..어째서 전하는..제 마음을 모르시는 겁니까..."
화령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달을 응시하였다.
"어째서 전하는...어째서..."
한없이 당차보이던 화령은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는지 화령의 가녀린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화령의 흑보석 같은 눈에서 흘러나와 볼을 타고 도톰한 입술을 타고 내려가 무겁게 바닥을 떨어져버렸다.
<다음날>
"...악독하구나."
"어쩔 수 없지요. 이 험한 궁에서 권력을 쥐려면 말이지요."
화령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은하는 붉게 칠한 입술을 말아올리며 찻잔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아-어제는 훌륭하셨습니다. 연기가 아주 일품이더라구요."
은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화령은 말없이 은하를 쳐다보았다.
"약속은 지키거라."
화령의 말에 은하는 찾잔에서 입술을 떼어내었다.
"약속이라 하면?"
"내가 황제폐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않느냐."
화려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으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은하는 재밌다는 얼굴로 화령을 쳐다보았다.
"황제도 참 어리석습니다. 않그렇습니다 마마?"
은하의 비꼬는 말투에 화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황제폐하를 모욕하지 말거라."
"...그러지요."
은하는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화령은 슬픈 얼굴로 찻잔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마마도 알다시피 저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은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찻잔을 잡은 화령의 하얗고 고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걱정마세요. 마지막 부탁이니까요. 마지막 부탁 한 개만 들어주신다면 황제 폐하의 목에 칼을 절대 대지 않겠습니다."
은하가 웃으며 말하자 화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하거라."
화령의 미세하게 떨리는 고운 목소리에 은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어리석은 것.'
은하는 비웃는 얼굴로 화령을 쳐다보았다.
은하는 차를 한모금 홀짝이고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죽어주셔야 되겠습니다."
"...하..."
"농이 아닙니다 마마. 마마께서 죽으셔야 제가 중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화령은 눈 앞이 아찔해는 것을 느꼈다.
은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차를 홀짝였다.
화령은 은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겠다."
은하의 눈이 커졌다.
은하의 손에서 찻잔이 툭-하고 떨어져버렸다.
방석 위로 떨어졌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찻잔이 산산조각이 날 뻔했다.
화령은 씁쓸한 눈길로 은하가 떨어뜨린 찻잔을 쳐다보았다.
'저것은 아인이 은하에게 하사한 것이겠지...난...단 한번도 아인에게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후후...'
화령은 슬픈 얼굴로 은하를 응시하였다.
"단 한 달의 시간만 주거라. 단...한...달만..."
말을 마친 화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은하의 방을 나갔다.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인 은하궁 안.
은하는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불쌍하군요 마마...그렇게 온 맘을 다해 전하를 사랑하는데도 전하는 마마를 바라봐주시지 않으니 말입니다."
은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화원궁 안》
화원궁의 시녀들은 궁 밖으로 나오질 않는 화령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항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 황제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한창 은하를 괴롭히고 있을 시간이었다.
"중전 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냐?"
"그러게...걱정되네...허락이 안떨어지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으휴..."
"우리 중전 마마, 진짜 불쌍한 것 같아."
"그러게나 말이다. 황제 폐하는 어째서 중전 마마의 마음을 모르시는 걸까? 중전 마마가 황제폐하를 사모하신지 벌써 6년이 넘었으니..."
.
.
.
"헉-헉-"
거친 호흡소리가 울려퍼졌다.
칠흙같은 새까만 윤기나는 긴 머리칼을 허리께까지 늘어뜨린 고운 얼굴의 여인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인의 하얀 모시옷은 이미 갈갈이 찢겨져 있었고 그 안에서 피가 베어져 나왔다.
여인의 눈가에는 굵은 눈물이 맺혀져 있었고 그 얼굴에는 왠지 모를 품위가 베어져 나왔다.
화령. 화령이다. 이 여인은 화령이었다.
화령은 모시옷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아인아, 네가 밉구나...내 맘을 몰라주는 네가 너무 밉다.."
화령이 너무나 맑고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혼잣말을 하였다.
아인. 주나라 황제의 황태자 시절의 호(呼) 였다.
화령은 화려한 주나라 중전의 옷은 이미 벗어던진터였다.
어젯밤, 몰래 구한 모시옷과 짚신을 신고서 궁을 나왔다.
화령의 마지막 배려였다.
"한달 동안은...마지막 한달 동안은...멀리서 지켜만 보겠습니다..."
화령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은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령의 얼굴 위로 씁쓸한 안색이 떠올랐다.
'전 중전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들어야겠지요. 이제부터 중전 마마는 제 명령에 따르셔야 겠습니다. 안그러면. 제가 황제 폐하를 죽일 테니까요.'
당돌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권력에 물들어버린 은하의 탁해져버린 눈동자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은하는 아인을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중전의 자리가 탐날 뿐. 은하는 아인을 죽이고도 남을 여자였다.
그 후, 화령은 은하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세시 경 후 황제 폐하께서 이 곳을 지나가신다지요? 그 때 마마께서 절 짓밟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되겠군요.'
'오늘 야밤에 황제 폐하께서 업무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신다지요? 분명히 제 궁에 먼저 오실 터이니 제 궁에서 절 괴롭히고 있는 모습을 연기하면 되겠습니다.'
'내일 다섯 시 경에는-"
갑자기 화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쿠-쿨럭-"
화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손바닥 위로 흐르는 붉은 혈.
화령은 씁쓸하게 웃었다.
'은하야, 어제 네가 주었던 차에서 독초의 향이 나더구나...'
《이 주 후, 궁궐 안》
아인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폐하, 어디 편찮으시옵니까?"
걱정된다는 얼굴로 아인을 쳐다보는 은하였다.
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령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이야? 귀신 곡할 노릇이군...근데...왜 이리 가슴이 먹먹하지...? 오히려 좋아해야 마땅한데...'
아인의 머릿속은 잔뜩 뒤엉켜 있었다.
이주 전, 궁궐 안은 뒤집혀버렸다.
바로, 주나라의 중전 화령이 사라져버린 것.
화령은 서찰을 한 개 남기고 떠났었다.
「사랑해서 미안했습니다」
아인은 끙-하고 신음소리를 내었다.
왜 이리 불안하단 말인가? 어째서? 왜?
아인의 눈 앞에 활짝 웃던 화령의 너무나 고았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내가 미쳤구나..."
"송구하오나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못들어서..."
"아니다. 은하야, 먼저 자고 있어라. 난 정원 좀 거닐겠다."
아인의 말에 은하는 싱긋 웃으며 이불을 덮고 누웠다.
은하는 화령이 사라진 바로 다음 주에 중전의 자리를 꾀어차게 되었다.
화원궁의 시녀들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아인을 쳐다보고는 모두 궁을 제발로 나가버렸다.
아인은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며 정원 밖으로 나갔다.
《산 속》
"흐흡...감사합니다 성녀님...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흡..."
"아니에요. 건강하게 살아주신 것이야 말로 은혜를 갚는 거에요."
"세상에 이리 마음씨 고우신 분들도 계시는 걸 보면...흐읍...아직 세상이 썩어나진 않았나 봅니다...흑..."
화령은 싱긋 웃어보였다.
화령은 산 속에 들어오고 나서 약초를 깨고 약초로 약을 만드는 법을 익혀 산 속에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가자마자 화령은 참았단 듯이 바로 쿨럭거리며 피를 토해내었다.
헬쑥해진 화령의 모습. 화령은 뼈밖에 안남은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원체 아름다웠지만 세상의 속세를 떠나 산 속에서 고요히 지내니 더욱 자연을 닮아가는 듯 했다.
단말마의 고통이 화령을 덮쳐왔다.
화령이 다시 한번 피를 토해내자 이번에는 커다란 핏덩이가 나왔다.
화령은 익숙한듯 옷 소매로 입가를 닦아내었다.
인간에게는 직감이란 것이 있었다. 화령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 몇 일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직감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마지막으로 몰래 아인을 보는 것도 괜찮겠지..."
《궁 정원》
어찌어찌해서 궁 정원으로 들어온 화령.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정원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툭-하고 떨어져내렸다.
"황제폐하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단 사실에 소인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줄 아세요?"
화령이 너무나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령이 잽싸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누구냐!"
"내 독초가 효력이 있긴 있나보구나.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죽음의 기운이 네 년을 덮친 것을 보면 말이다."
은하였다.
화령이 한 때 입었던 화려한 붉은색 옷을 입고서 몸을 보석으로 치장한 은하의 모습은 너무나 잔인해보였다.
은하는 속으로 움찔하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만 같은 화령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은하가 말을 낮추자 화령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왜 네 년이 여기 있는 것이냐?"
은하가 쏘아붙이자 화령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미안합니다. 황제 폐하의 모습을 딱 한 번만 훔쳐보고 가겠습니다.."
위태로운 화령의 모습에 은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신 몰래야. 알겠어?"
화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화령이 없는 삼 주 가량의 시간동안 아인의 행동은 은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잠을 자면서도 항상 화령의 이름을 불렀고 깨어나 있어도 항상 심각한 얼굴로 무언갈 생각하는 듯했다.
아인은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은하는 알았다. 그게 사랑이란걸. 그래서 더욱이 화령과 아인을 만나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화령이 허겁지겁 정원 뒤 편으로 숨었다.
은하는 살짝 당황하다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령은 아인의 향기를 맡은 것이었다.
"여기서 바람을 쐬고 있었구나."
아인의 허스키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정원을 맴돌았다.
은하는 싱긋 웃었다.
툭-
눈물이 떨어졌다.
"저 없이도 역시 폐하는 사실 수 있군요...역시 아무렇지도 않아보여요...나만 아픈 거였군요 또..."
화령의 눈에서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화령은 천천히 담장을 너머 궁궐 밖으로 달려나갔다.
"마지막으로...마지막으로 널 봤으니 됐다..."
화령이 길을 미친듯이 달리며 중얼거렸다.
화령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 했다.
갑자기 화령의 몸이 고꾸라졌다.
"쿨럭-"
핏덩이를 토해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덩이들.
화령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웅성웅성.
화령의 몸에서 힘이 풀린다.
그리고...화령이 눈에서 주먹만한 눈물이 천천히 한 방울 흘러내린다.
"...사랑해서 미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