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화두...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름 붙여진 것,
즉 언어를 이해해야만 한다.
나무, 산, 강, 바다, 하늘, 구름 등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 붙여진 이름들.
언어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 순간 이름,
존재하는 실상이 아닌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그것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우리가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머릿속에서 각자의 이미지인 나무를 갖고 소통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실제 땅이 아닌 지도가 땅인듯한 오류를 범하게 되고
어느 순간 실제가 아닌 언어를 통한 이미지를 갖고 머리 속에서 살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잘 관찰해보자.
책으로 몇 권 분량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정의를 갖고 있는 사랑.
우리가 사춘기를 맞이할 무렵이면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고린도 전서 13장 14절의 사랑은 언제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로 시작해서
사랑은 창밖의 눈물 같아요, 사랑은 유리 같은 것 등등
노래 가사에서 부터 온통 사랑 투성이의 정의들,
이러한 언어로 표현된 정의 속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이름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랑의 실체가 아닌...
사물이든, 행위이든, 사람이든
어느 순간 우리는 어떤 감정 -주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미묘한- 상태에 다다르면
사랑에 빠졌다, 사랑한다, 라고 느낀다.
자~
사랑의 과정을 살펴보면
일단 주체, 즉 내가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객체, 대상이 있어야 한다.
문장으로 바꾸어 말하면 주어와 목적어가 있어야 사랑이라는 현상이 발생될 수 있다.
그 다음 주어의 감정 상태를 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완벽한 모순이었다.
여기서 속은 것이다.
한 번 잘 생각해보자.
잠을 잘 때 잠자는 나와 잠자는 상태를 분리할 수 있는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연주하는 상태와 나를 분리할 수 있는가?
운동을 할 때 운동하는 상태와 나를 분리할 수 있는가?
내가 없으면 잠자는 행위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행위도, 운동을 하는 행위도 일어날 수 없다.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에서 그림 그리는 나와 도화지와 그림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쉽다.
사랑도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상태와 나는 분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랑은 나의 어떤 감정이 아닌 내가 행위하고 있는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결국 사랑을 나의 감정과 동일시하는 과정의 오해로 인해
우리는 사랑을 명사화하고 형용사화해서
내가 대상을,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
사랑은 운동한다, 잠을 잔다, 연주한다, 그림 그린다, 처럼
나의 상태를 표현하는 동사였던 것이다.
이해해 보자.
가령 "난 피아노를 연주한다"
나, 피아노, 행위,
이것들이 모여 '연주'라는 하나의 상태를 만들어 낸다.
그것처럼
난 너를 사랑한다.
나, 너, 너와 나의 행위, 이것들이 모여 '사랑'이라는 하나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사랑은 주체, 객체가 모여 하나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과정인
그 순간, 그 상태였던 것이지,
대상을 향한 내 감정이 아닌 것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 사랑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땅에 서서 나무를 바라보는 그 상태,
즉 땅이 있었기에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땅과 나의 관계,
나무가 있었기에 나무를 보고 있는 내가 있는 나무와 나의 관계,
너의 눈이 있었기에 나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그 관계,
그 시공간이라는 배경, 너, 나,
그 상태 자체가 사랑이었던 것이다.
대상을 향한, 나를 향한, 각자의 감정이 아니라...
그렇기에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이다.
그것이 좋고 나쁨은 나중 문제이고
하다못해 우산 없이 비를 맞아 몸이 젖는 그 상태 역시 사랑인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로 인해 드러나는 나의 상태,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에 갇혀 그릇된 정의의 사랑에 대한 오해를 푼다면
우리가 그토록 평생 지지고 볶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사랑,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이해한다면
머리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마음은 침묵하고
슬프기만 했던 육체는 사랑체로 변한다.
아픈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아프다면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잃어버렸을 때 놀라 우는 것,
즉 자기 존재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게 옳다.
힘든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힘들고 괴롭다면
난 무엇인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고 두렵다, 라고 하는 게 맞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사랑이 아니다. 그냥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이해는 몸, 마음, 정신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기에 그건 좀 나중에 하자)
결국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스럽고 아픈 건
자신의 감정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오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 사랑하려면
사랑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내 밑바닥 마음,
그것을 살펴봐야 한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대상에게 의존하고
그 의존물이 사라지면 벌어질 내 마음의 상태인 외로움,
그 외로움은 곧 두려움으로 변질되고 두려움은 고통으로 또 변하고.
그 감정의 변화를 스스로 이해해야만
진정 사랑할 수 있다.
대상을 향한 내 감정이 사랑이라는 착각,
그 착각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무수한 각자의 정의속에 갇혀
그 안에서 기뻐하고 황홀해하고 힘들어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에 취해 울고 웃고 하는 원맨쇼를 그만 두어야 한다.
그건 마치 드라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주인공과 동일시해 감정을 일으키는 그런 쇼일 뿐이다.
이걸 인정한다는 건 맨살을 제 손으로 도려내는듯한 아픔처럼
가슴 저 밑바닥의 처절한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별 때문에 아픈 건 대상의 상실 때문이 아니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부족일 뿐.
사랑 때문에 힘든 것도 역시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나의 문제일 뿐.
가슴은 말한다.
이 떨림은, 이 두근거림은, 이 미묘한 느낌이 사랑이 아니면 나는 어쩌라고 하며 억울해한다.
진정 사랑하려면 하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
억울하더라도 아프더라도 힘들더라도 그 가슴이 일으키는 감정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있어야 한다.
내 일도, 네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창밖의 풍경처럼...
그런 후라야 꽃은 없지만 어디선가 풍기는 꽃의 향기를 맡게 되더라.
사랑하려면 이래야 한다.
아이가 흙장난에 빠져 있을 때 시간도 잊고 자신도 잊고
그것이 재밌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완전히 몰입해 있는 상태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
너, 나, 행위
밥을 먹든, 길을 걷든,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든
그 모든 순간과 상황 속에서 완벽하게 집중하는 것.
그럴 때라야 피어나는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를 통해 각자인 나를 발견하고 나를 이해하고
나아지고 달라지고 편해지고 발전하고 진화하고...
그런 상태, 그런 관계
그것이 진정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
존재하는 모든 이유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때문에 아파하는 이들이여...
아픈 이유를 그에게 묻지 마라.
아픈 이유를 그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처절하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내가 무엇을 힘들어 하는지,
그렇게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마친 후라야
남을 사랑함에 세심해지는 누를 범하지 않으리라
.
.
.
나는 느꼈다.
좋고 나쁨을 넘어선, 쾌락과 쾌감을 넘어선
그 아늑하면서도 짜릿한 편안함.
나도 너도 생각도 마음도 없이
존재하는 상태,
난
너와 나, 그 상태, 그 순간
그 자체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