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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의 하룻밤

김형석 |2012.06.05 19:36
조회 104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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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여행] 명재고택에서의 하룻밤, '백의정승'의 정신을 만나다

 

 

虛閑高臥

"하늘을 가리고 한가히 눕는다"

 

離隱時舍

"떠돌아 다니다 숨어 쉬는 곳"

 

 

 

양극화와 재벌의 탐욕으로 시끄러운 대한민국...

동학혁명과 6. 25 전쟁도 비껴갔던 명문가를 찾았다.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즉 ‘향교가 있는 마을’에 있다.

이 지역은 파평 윤씨의 세거지이다.

조선시대 소론의 영수 윤증 선생의 고고한 기품 빼닮은 종갓집

명재고택(明齋古宅. 구 윤증고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다했던

조선 숙종 때 학자 윤증(尹拯.1629∼1714)의 꼿꼿함과 검소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명재고택에 명재 선생은 살지않았다

 

명재고택이 지어진 것은 1709년.

아들과 제자들이 이 집을 지어 윤증 선생을 모실려고 했지만

명재는 '선비에겐 과분하고 호화롭다'며 끝끝내 살지 않았다.

 

윤증 고택은 정작 윤증이 기거하던 곳이 아니어서 더 감동적이다.

조선후기 소론의 기초를 다진 대학자였던 윤증은 평생 단 한번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

초라한 집에 거주하는 스승이 송구스러워 제자들이 정성껏 집을 지어 내주었지만,

정작 윤증은 ‘큰 집이 내겐 과분하다’며 기거하던 초라한 집에서 나오질 않았다.

 

윤증이 ‘큰 집’이라며 들지 않겠다고 했던 집도

실상 경남 안동 일대의 으리으리한 고택에 비하면 채 반의 반도 되지않는 규모다.

겉모양만 보자면 안채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작고 초라할 정도다

 

 

겉보기에도 사대부가의 주택치고는 소박하고 단출하다.

한데 집안을 천천히 뜯어보면 곳곳에 숨어 있는 과학적 원리와 아녀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

한옥의 아름다운 전통미도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虛閑高臥(허한고와)

"하늘을 가리고 한가히 눕는다"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 윤증 선생은 성품이 대쪽 같다.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아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린다.

스승이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명재고택은 윤증 선생의 기품을 닮아 고졸하고 단아하다.

 

 

離隱時舍(리은시사)

"떠돌아 다니다 숨어 쉬는 곳"

 

노성산(옥녀봉)을 병풍처럼 두른 고택에는 솟을대문이나 울타리가 없다.

주변을 둘러싼 나무와 숲이 이를 대신한다.

노론이 정국을 주도할 당시 소론의 학풍을 이었던 윤증 선생이

한 점 부끄럼 없이 모든 것을 다 보여주겠다는 자존심과 자부심 때문이다.

 

 

아녀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의 과학적 설계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다.

안채 서쪽에 곳간채가 있고, 동쪽 뒤편 언덕에는 사당이 들어앉았다.

안채는 ‘ㄷ자’형이지만 사랑채와 마주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모양이다.

중문과 안채 사이에는 벽이 가로막아 오른쪽으로 한 발 옮겨야 안채로 들 수 있다.

여성들만의 공간인 안채를 남자들이 함부로 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사랑채 왼쪽으로 난 중문으로 들기 전 작은 우물...

고택이 들어선 자리는 ‘옥녀탄금형’으로, 좌청룡·우백호를 끼고 가운데 샘이 솟는 형상이다.

우물은 향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향나무 뿌리는 물을 정화시켜준다고 한다.

물맛이 좋은 건 당연지사,

이 물을 사용해 만든 종갓집의 간장과 된장, 고추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사랑채 주춧돌에는 일영표준(日影標準)이라는 글씨를 새긴 표지석이 박혀 있다.

이는 명재 9대손인 윤하증 선생이 해시계의 영점을 잡아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만든 것.

이런 가문의 실용적인 학풍으로 인해 명재 선생 종가는

윤하증 선생 때부터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고 제사 역시 모두 양력으로 지내고 있다.

 

 

사랑채 앞, 눈을 아래로 두면 석가산(石假山)이 눈에 띈다.

뾰족한 돌을 모아놓은 석가산은 금강산을 본떠 만든 것.

비록 몸은 여기에 있지만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으로 조성한 것이란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마당 쪽으로 난 들창을 열면 앵글이 기막히다.

사각형 연못과 인공섬, 교촌리 마을과 멀리 계룡산 암봉까지 한눈에 잡힌다.

이 들창은 와이드TV에 적용되는 16대9의 비율이라는 점,

들창의 높이가 팔을 걸어놓고 편하게 앉을 수 있는 30㎝ 높이라는 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300년 된 소박한 한옥 곳곳에 숨은 과학적 건축미에 탄성 절로
 

안쪽 사랑채와 이어지는 문은 ‘미닫이 여닫이문’이다.

4쪽으로 된 미닫이문을 옆으로 열고 다시 밀면 여닫이문처럼 열린다.

이런 문은 국내에서는 운현궁과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사랑채 바깥문을 모두 열면 가운데 기둥에 딱 들어맞게 크기를 맞춘 것도 미학적이다.

 

성난 동학군이 상경하는 길목에 있던 양반가는 모두 불질러졌다

 

당시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명재고택 안채 입구...

윤증가도 동학군이 불을 지르다 마을주민이 반대해 살아남았다.

왜?

‘나눔’은 윤증가의 오래된 미덕이다.

명재고택 지킴이 윤증 선생의 13대손인 윤완식씨에 의하면...

고구마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하루 1끼는 고구마를 먹었고,

꽁보리밥에 머슴들과 겸상을 시켰다고 했다.

당대의 최고의 부잣집이었지만

이웃과의 공동체를 실천하며 호의호식을 못하게 한

명재 선생의 엄명이 유유히 내려와 지켜졌기 때문이다.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택이 온전히 남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내외벽으로 불리는 이 벽은 바닥에서 한 뼘 정도 올라와 있다.

이는 외부에서 안채로 들어오는 사람의 발을 보고

신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여성을 배려한 건축물이다.

 

 

아채 대청마루에서 뒷편 장독대 쪽에 난 여닫이문이 자연을 아낀 좌우대칭이다.

나무의 송판 하나도 아껴서 지은 집인데 미학적으로도 데칼코마니...

옹이가 박히고 나뭇결이 살아있는 문짝에서 화가의 심성이 읽힌다.

 

 

 

대청마루 기둥도 자주 오르고 내리는 곳에는

손에 잡기 편하도록 사각이 아닌 팔각기둥을 사용했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안채와 곳간채 건물을 나란히 두지 않았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이다.

여름이면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북쪽의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겨울철 북풍이 좁은 건물 사이에서 남쪽의 넓은 쪽으로 나가면서 유순해진다.

이른바 ‘베르누이의 정리’다.


이 때문에 곳간채 북쪽 끝 창고에는 차갑게 보관해야 할 것을 뒀고,

아녀자들이 사용하는 안채는 매서운 북풍을 피하는 것은 물론

일조량이 많아 추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고택은 베르누이의 정리가 세상에 드러나기 30여년 전에 지어졌으니

선조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다.

 

 

 

 

굴뚝의 높이를 낮춘 이유는?

 

밥 짓는 연기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 보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

굴뚝에도 배려의 흔적이...

 

윤증 선생의 실용정신은 후대의 제삿상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명문가에 비해 제사상은 일반 밥상 크기만 하고 송편이나 전, 탕도 올리지 않는다.

이는 윤증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은 유밀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한 유언했기 때문이다.

 

술도 청수(깨끗한 맹물)로 대신하고 제사도 4대까지만.

특이한 것은 "마음 변하지 마라"는 뜻으로 백설기(흰떡)을 쓰며,

절을 할 때는 '사내는 굴복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팔을 구부리지 못하게 했단다.

 

 

 

고택의 연못에 배롱나무를 심은 뜻은?

 

고택 앞의 연못...

마당 좌측에 조성된 연못은 사각형(천하를 상징)이고

자그마한 원형 섬을 만들어 배롱나무를 심었다.

거추장스런 의상없이 발가벗은 듯 매끄럽게 윤이 나는 고목은

신기(神氣)가 어린 듯 구불구불 제멋대로다.

 

조선 선비들은 배롱나무와 향나무를 가까이 두고 꼿꼿한 지조와 강직한 삶을 실천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자리한 명재고택도

늙은 배롱나무와 향나무가 양 팔을 벌려 길손을 반긴다.

 

 

 

사랑채 우측 마당을 가득 메운 수백 개의 항아리도 장관이다.

장독대 옆 야트막한 언덕에는 400년생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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