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공중전화
계절 학기를 듣기 위해 나는 버지니아로 돌아왔다.
한달 동안 비워둔 자취방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채워 넣기 위해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집 앞 은행 모퉁이
에서 공중전화를 발견하였다.
이곳에 머문 지도 3년째인데 처음 보는 공중전화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설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새것처럼 반짝였다.
"요즘 누가 공중전화를 쓴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공중 전화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군대를 전역하고 막 학교에 복학 했을 때.
모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바로 그때.
그녀를 공중 전화 앞에서 처음 보았다.
우유 같이 하얀 얼굴에,
깜짝 놀란 것 같은 크고 동그란 눈.
날렵한 콧날과 그녀의 눈보다 작은 빨갛고 조그만 입술
그리고 약간 분홍 빛을 띄고 있던 그녀의 두 볼.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녀는 친구로 보이는 다른
여자와 초조한 듯 공중전화를 통해 수화기 건너편
누군가에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막상 복학은 했지만 막막했다.
2년 동안 굳어버린 내 머리로 수업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아는 친구들이라곤 1학년 때 같이 놀던 여자애들
둘뿐인데 친구는 어떻게 사귈까.
그때 마침 신입생오리엔테이션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외국인들만 모아 학교에서 직접 주최하는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중국에서 한국에서 일본에서
아프리카에서 모인 유학생 친구들이 조를 지어
원을 그리고 앉아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인 여자를 만났다.
"이름이 자경? 한국 분이세요?"
"네. 그쪽은 이름이...?"
"아 전 임원석이요. 만나서 반가워요"
한국인을 만난 기쁨에 나는 잔뜩 들떠 있었다.
"몇 살이세요?" 내가 물었다.
"87년생이요."
"어? 나도 87인데 우리 친구였네"
동갑내기 자경이는 나와 한국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사촌이었다. 때문일까 우리는 금방 친해져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함께 강당을 나왔다. 그때 난 그녀를 보았다.
공중전화 앞에서 초조하게 전화를 걸던 그녀.
그녀는 자경이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고
"언니!" 라고 외쳤다.
시차 때문인지 너무 피곤해서 일찍 침대에 누웠다.
아까 은행 모퉁이에서 보았던 공중전화가 생각 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은행 앞 공중전화 앞에 서서 날 괴롭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