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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괴물의 탑(1~5)

왕보리 |2012.08.17 09:26
조회 2,188 |추천 3

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 웃대 : 듀라라 님 >

 

 

 

** 그냥 가지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글이라..

    중복인거 알지만 오랜만에 장편 한번 갑니다~

    정말 재미있는 글이거든요^^

  

    작가님들 욕할거면 글을 읽지 마십쇼!!

 

 

 

 

"으으……."


메마른 목구멍 사이로 작은 바람이 새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천근같은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올린다.

어찌나 무거운지 금방이라도 닫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등을 타고 흐르는 낯선 감각이 정신을 다시금 깨웠다.

반쯤 떠진 눈꺼풀 사이로 그것이 보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콘크리트와 금방이라도 퓨즈가 나갈 것 같은 누런 백열등.

그 뒤에서야 겨우 정신이 차려졌다.


"여, 여기가……."


개미가 터져죽는 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의식을 깨워본다.

몸에 힘이 없고, 코에서 미세한 약품냄새가 난다.

납치당한 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그것.

하지만 이제 막 서른의 대열에 오른 월급쟁이인 나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원망을 살만한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평범한 말단 직원이 누군가에게 원한 살 일이 있겠는가?

순간 머릿속에 아찔한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혹시 미친 정신병자가 날 장난처럼 가지고 놀려고 데리고 온 것은 아닐까?

더러운 3류 영화에 나오는 불필요할 정도로 잔인한 장면들이 머리에 생생히 재생되었다.

그러다가 마치 콘센트를 뽑듯 생각이 끊어졌다.


“젠장”


약기운 때문인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껌을 잡아당기다가 끊어지듯 생각이 이어지려고 하면 끊어졌다.

그러기를 몇 분. 결국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일단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세워보려고 몇 번 힘을 줘봤지만 술에 취한 듯 몸에 기운이 전혀 없었다.


"끄으!"


이를 악물며 일어나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어떤 새끼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작게 다짐한다.


"여기가 어디…지?"


다시금 자신에게 중얼거리듯 물어본다.

그나마 자유롭게 움직이는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콘크리트만이 존재하는 음습한 방.

구석에는 곰팡이가 잔뜩 피어났을 걸로 봐서는 상당히 습한 지역인 듯 했다.

주변이 온통 콘크리트 천지인데 뺨이 조금 시린 것 말고는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온기마저 느껴졌다.

거기에 의문을 가지고 몸을 뒤척이자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난 침대 위에 있었다.


약의 효과가 보기보다 대단했던 모양이다. 침대에 있는 지도 모를 정도였다니.

고개를 움직여 누워있는 침대를 살펴보기로 했다.

혹시 끔찍한 고문도구라도 잔뜩 달려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행히 그런 불쾌한 물건들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지저분한 이불과 시트가 나를 반기고 있었으니까.

시트를 다 덮지 못할 만큼 작은 이불 덕분에 시트의 상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불이 가리지 않고 있는 시트 부위에는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이불은 얼마나 빨지 않은 건지 누렇다 못해 시꺼멓다.

평소에도 이런 더러운 것을 참지 못하는 나는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뒤척이며 이 이불

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몸뚱이는 제자리를 맴돌 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 신발 미치겠네.”


입을 열자 입 냄새 대신 진한 약품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난 그제야 이 약품이 알코올처럼 공기 중에 금방 증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발상이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최대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몇 분 정도 그러고 나니 움직이지 않던 손끝이 미세하게 내 의지에 따라주었고,

입 속의 쓴맛도 점차 진한 에스프레소처럼 느껴졌다.

작은 쾌재를 불렀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나는 방금 전의 했던 것에 다시 한번 도전했다.


“으읏!!”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방금 전에 비해 훨씬 간단히 몸이 일어났다.

굳이 이를 물지 않아도 될 뻔 했다.

훨씬 넓어진 시야로 주위를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더러운 이불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엉덩이와 미약한 손힘을 이용해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면서 이불을 슬금슬금 밀어냈다.

곧 내 엉덩이는 이불이 아닌 시트 위에 닿게 되었다.


“으아! 몸 한 번 움직이기 더럽게 힘드네!!”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불은 얼마 날아가지 않고 날개 잃은 새처럼 바닥에 추락했다.

지금 상태라면 유치원생과 팔씨름을 해도 질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김희수……. 호랑이굴에 갇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평소라면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일부러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음으로써 약기운을 털어내고 싶었다.

아직 곰팡이 시트 위에 앉아있지만 이것을 던질 힘이 있을 리가 없기에 간단히 포기했다.

방금 전에 비해 훨씬 유연해진 뇌세포들을 활용하기 위해 뒤로 미뤘던 일을 하기로 했다.


“자, 일단 주위를 살펴보자.”


왼쪽 벽면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왼쪽에는 누런 철로 된 세면대가 있었고, 그 옆에 세면대와 같은 재질의 변기가 보였다.

누런 철 세면대와 변기가 때문인지 오래된 교도소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교도소라고 하더라도 몇 년간 사용되지 않은 교도소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비위생적인 교도소가 있었다면 그 관리인들은 벌금 몇 천만 원짜리 철퇴를

두들겨 맞을 테니까.

가운데에는 그냥 넓은 콘크리트 벽이었기에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거기엔 어두컴컴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창문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창문이라고 말하는 것보단 그냥 정직한 사각 형태를 지닌 구멍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 구멍 너머에는 거친 빗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창 아래 웅덩이가 고여 있는 걸 보니 상당히 오랫동안 내린 모양이다.

미치겠네.

기억이 끊어지기 전에는 비 같은 건 내리지도 않고 있었는데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야?

그 때 입가에서 나는 약기운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채고 평범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엇!"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대에 주워 앉고 말았다.

짜증이 솟구치다 못해 입 밖으로 욕설을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침대에서 일어선다.


"으, 으아!"


그 순간 억지로 몸을 일으킨 탓에 균형이 무너졌고,

짧은 비명과 함께 젖을 수건처럼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신발!! 진짜 이런 강아지가!! 으아아아악!!"


결국 욕설이 튀어나왔다.

날 이렇게 만든 새끼 내장을 꺼내서 입구멍에 처넣고 싶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원망한 적이 있을까? 라고 의아할 정도의 살기가 들끓었고,

그 살기는 알 수 없는 상대에게 표출되었다.


“나와!! 나오라고!! 신발!! 벌레처럼 바닥을 기니까 흥분 되냐!? 강아지야!! 신발 나오라고!!

나와아아아아아아!!! 뇌수를 뽑아버릴 거야아아아!!”


고성방가 후에 남은 것은 거친 숨소리뿐이었지만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일순간 솟구쳤던 흥분은 잔잔한 바다에 침몰하는 작은 종이배처럼 점차 가라앉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탓인지 아니면 소리질러봤자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허무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몇 분 동안 소리를 질렀는데 반응이 없으니 당연히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후우……. 으읏!!"


마지막 남은 약기운을 내뱉듯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짧은 기합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고, 이번엔 방금보다 쉽게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거의 약기운이 날아간 모양이다.

작은 용기를 얻은 후 다시 한 번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엇!"


일순간 균형이 흔들려서 철렁했지만 방금 전처럼 어이없이 바닥에 뒹구는 일은 없었다.

"후……. 내가 걷기 시작하는 애새끼도 아니고……. 여긴 어디야?"

주위를 다시금 살펴보았지만 방금 전 그대로였다.

일단 세면대와 변기, 침대 밖에 없는 방을 뒤로 하고 뚫려있는 구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발에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가는걸 보니 이젠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다.

좁은 방이라 몇 발자국 안 걸었는데 어느덧 창가에 도착했다.

차가운 빗방울이 나의 뺨을 때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감각도 멀쩡한 모양이다.

창은 내 허리춤에서부터 머리 높이만큼 뚫려있었고,

가로길이는 양팔을 벌리면 한 뼘 정도가 남을 정도였다.

겨우 도착한 창가에 양손을 올리고,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 하하하?”


전혀 즐겁지 않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곳엔 상식적으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펼쳐져있었다.

 

"오……. 주여"

난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 말이 가장 어울렸다.

창 너머로 보인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저 멀리 수평선이 살짝 굽어보일 정도로 광활하고 육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는 그런 바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멈출 것 같지 않은 빗줄기가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뺨에 닿으면 얼얼할 정도였다.


"말도 안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뒤로 넘어져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처럼 욕설이 튀어나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이것이 꿈이라는 생각만이 뇌혈관을 헤집고 다녔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을 실행에 옮겼지만 뺨은 아팠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교도소에 날 감금했을까?

더 이상한 건 이 방에는 교도관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문조차 없었다.

그럼 대체 날 어떻게 이런 방 안에 가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왜 날 납치한 거지?

분명 가진 것도 없고, 40만 원짜리 적금이나 넣으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월급쟁이인데. 그 회사도 대기업이 아닌 그저 평범한 중소기업이다.

몇 년 전에 겨우 정규직이 된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30살 남자일 뿐이란 말이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그런지 욕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같은 몸뚱이를 침대에 앉혔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자 낡은 스프링이 불쾌한 비명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꿉꿉한 곰팡이 냄새가 퍼져나갔다.

정말 지저분한 침대다.

다리에 힘만 풀리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을 침대.


"아, 휴대폰"


그제야 몸을 돌볼 생각이 들었다.

약기운 탓에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전신에 스턴건을 맞은 듯 아찔한 소름이 돋았다.

급히 배를 덮고 있는 상의를 들어올렸다.

다행히도 꿰맨 자국 같은 건 없었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다.

겨우 숨을 돌리고 다시 환자복을 조사하기로 했다.

어느 병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환자복이었다.

혹시나 싶어 바지 주머니를 뒤져볼까 했지만 이 환자복에는 주머니는커녕 뭔가

넣고 다닐만한 작은 구멍조차 없었다.

당연히 없을 꺼라 생각은 했지만 직접 확인하니 큰 실망감이 밀려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하기 위해 날 여기 가둔 것일까.

마루타(생체실험)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장기매매? 그것도 아니라면 인신매매?

나의 머릿속엔 영화에서 본 것들이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고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는 빗소리 덕에 금방 묻혔지만 쓸데없는 생각들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그래,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 어떤 상황이든 안전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멍청히 정신 놓고 있었다간 정말 장기를 다 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희수야, 희수야! 정신 차리자"


일단 차근차근 조사해보기로 결심했다.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한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입고 있는 옷부터 조사하기로 했다.

혹시 도청기라든지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일까 바느질한 부분도 세심하게 조사해봤지만

옷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벗고 나니 알몸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추위가 몰려와서 부랴부랴 벗었던 옷들을 다시 입었다.


"자, 다음은"


다음으로 침대를 조사해보았다.

침대는 사람이 자고 일어나고 하는…… 어찌 보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이든 짐승이든 자신의 보금자리에 중요한 물건을 나두는 습관이 있다.

나 같은 경우도 어릴 적 침대에 야한잡지를 숨겨두고는 했다.

일단 바닥에 떨어져있는 이불을 들어다가 무의식적으로 한번 털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농도가 짙은 먼지들이 허공에 날아다니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급히 창가로 가서 숨을 들이쉬었다.

결벽증은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이 보더라도 저렇게 많은 먼지를 본다면

맑은 공기가 있는 곳으로 피하지 않을까.

먼지를 털고 나니 그나마 깔끔해진 이불을 살펴보았다.

콘크리트 바닥에 이불을 넓게 깔고 세심하게 관찰했다.

이불은 지져 분한다는 것만 빼면 몹시 평범했다.

굳이 수상한 부분을 꼽으라면 곰팡이와 누런 얼룩정도?

곰팡이가 생겼다는 소리는 습기가 많다는 소리고,

누런 얼룩이 있었다는 것은 무언가가 쏟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걸 요약해보면 누군가가 여기서 지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교도소가 사용된 적이 있다는 소리.

이 입구도 없는 방이 말이다.

다시 이불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얼룩이 그냥 생겼을 리가 없다.

그냥 이불을 몇 년간 내버려둬 봐야 얼룩은커녕 하얀 먼지만 소복이 쌓일 테니까.

그리고 곰팡이. 기본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여기가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이불에 습기가 많이 생겨 자연스럽게 곰팡이가 잔뜩 붙은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 그럼 우리나라가 아닐 것이다.

내가 잡혔을 때에는 겨울이었으니까.

그럼 영국인가? 프랑스인가? 짧은 지식을 가진 자신을 작게나마 저주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이불이 사라진 침대는 마치 무명 디자이너가 만든 소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일단 침대 시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시트도 이불과 비슷하게 곰팡이와 얼룩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불에 묻어있는 얼룩과 시트에 묻어있는 얼룩을 비교해보니

공교롭게도 위치가 같다.

예상대로 누군가가 침대에 무언가를 엎지른 모양이다.

그리고 이불과 시트를 청소하기도 전에 여기서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가 교도소라고 생각한다면 형의 기간을 다 채워서 나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사형수라서 둥근 밧줄의 먹이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때 당시 이 방을 사용하던 죄수는 아마도 자신의 죗값을 다 치르고

여길 나간 건 아닌 모양이다.

자신이 남긴 얼룩을 그대로 두고 간다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 주위를 정리하고 새 삶을 산다는 마음으로 나갈 테니까.

아무튼 조금이나마 이 방에 대해서 알아가니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공포라는 짐승에게 쫓겨 정신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을 테니까.


'딴생각은 하지말자'


가볍게 고개를 털어내고는 다시 침대 시트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는 시트를 들어 올려보았다.

꽉 끼여 있어 잘 빠지지 않았지만 힘을 좀 주니 작은 소음을 내며 뼈대와 분리되었다.


"오, 하느님"


신이란 존재를 믿지도 않는 내가 다시 하느님을 찾은 이유는 시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노트 때문이다.

큰 수확이었다.

이 노트만 있다면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하면서 정보를 모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여기에 적나라하게 적혀있을 테니까! 혹시 여기를 탈출할 수 있는

숨겨진 길도 적혀있을 지 모른다.

신은 아직 날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시트 밑에 있는 노트를 꺼낸 뒤 일단 바닥에 던져놓고 시트를 옆 벽면에 붙여놓았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서 희망이라는 빛줄기가 작게나마 보이는 듯 했다.

분명 예전에 여기 갇혀있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여길 나갈 때 남긴 노트일 것이다.

정말 두근거렸다.

첫사랑의 러브레터라도 받은 듯 떨리는 손으로 그 노트를 펼쳤다.


"뭐야 이게?"


두 눈의 초점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었다.

그 노트엔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빌어먹을!!!"


있는 힘껏 노트를 벽을 향해 던졌다.

노트는 마치 비둘기 날갯짓하든 푸드덕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희망이라는 달콤함을 맛봤기 때문일까 그에 대한 배신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으아아아악!!! 내가 왜 이 딴 곳에서 개짓거리를 하고 있어야하냐고!!! 으아아아악!!"


이번에 시작된 고성방가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침대를 향해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맨발이라서 다칠 위험이 있었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발길질에 녹슨 뼈대는 점차 원래 형태를 잃어갔고,

발에도 견디기 힘든 통증이 마구 올라왔다.

하지만 멈출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시트를 올려놓았던 뼈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찌그러져있었다.

견디기 힘든 악마를 진정시키며 식식거리는 숨을 골랐다.

왜 하필이면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은 노트를 침대 시트 밑에 숨겨둔 거냐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후……."

그래, 진정해야한다.

지금 쓸데없는 곳에 체력을 소비해버리게 된다면 나중에 진짜 필요할 때 힘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껴둬야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바닥에 떨어져있던 노트를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시트 옆 두었다.

저 종이도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르지만 다 찌그러진 침대 뼈대를 세심하게 조사를 하기로 했다.

내심 발로 찬 것을 후회했지만 다행히도 뼈대에는 딱히 찾을 만한 흔적이 없었다.

이번엔 세면대와 변기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먼저 세면대 위를 살펴보았다.

가뭄으로 인해 바짝 마른 밭처럼 쩍 갈라진 낡은 비누와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되었는지

짐작조차 안 가는 칫솔.

치약은 그 칫솔 옆에 놓아져있었는데 얼마나 짜서 사용했는지 종이처럼 얇았다.

이번에는 세면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면대 수도꼭지를 돌려보았다.

정신이 멍해졌다. 물이 나오고 있다.


"뭐……."


말문이 막혔다.

물이 나오다니?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될까.

누가 보더라도 버려진 교도소인데! 세면대에서 물이 나오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것으로 알게 된 것은 이 교도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공포감이 해일처럼 엄습해왔다.

누군가가 날 납치해놓고 감시하고 있다는 소리지 않은가!?

순간 입 밖으로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이번엔 참기로 했다.

날 감시카메라로 감시하고 있다면 광분하는 것을 보고 쾌락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빌어먹을……."


화를 억누르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고 있음에도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닥에 있는 노트 중에 한 페이지를 찢어서 세면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보았다.

혹시 염산이라든지 사람의 살을 녹이는 물질일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다.

이건 탈출게임 같이 몇 번 게임아웃이 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한다.

종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난 그 물에 손끝을 살짝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나빠 빗물로 손을 씻어 내렸다.

빗물까지 뜻대로 조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번엔 변기 쪽을 보았다. 변기도 세면대와 마찬가지로 물이 내려갔다.

그 덕에 더러운 오물을 보며 헛구역질 하는 끔찍한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 변기 옆에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두루마리 휴지가 있었다.

그 때 머리를 번뜩 스쳐가는 것이 있어 두루마리 휴지를 마구 풀었다.

얼마 남지 않은 휴지였기에 그 두루마리의 알몸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별 특이점이 없는 평범한 두루마리 심이었다. 짧게 혀를 찼다.


"너무 영화를 많이 본 건가……."


이번엔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혹시 약기운에 놓친 것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꼼꼼히 살피던 중 다시 침대가 있던 자리를 조사하게 되었다.


“어, 어!!”


또 다시 경악했다.

노트가 있던 자리 밑.

그러니까 침대뼈대 바로 밑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과 색이 비슷해서 방금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숨겨진 공간이었기에 다시금 희망이라는 달콤한 향을 맡았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조급해하지 않으며 천천히 그 공간을 덮고 있는 돌을 밀었다.

거기엔 작은 약병과 함께 실톱이 있었다.

 

실톱을 보는 순간 영화 쏘우의 잔인했던 장면이 생각났지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 당장이 톱을 쓸 곳은 없다.

지금 묶여있지도 않고 자를 만한 것도 없다.

이걸로 목숨을 끊으라는 뜻인가 싶어 생각해봤지만 역시 실톱으로 자살한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손바닥만 한 갈색 유리병도 훑어보았다.

거기엔 친절하게 황산이라고 적혀있었고, 위험물질이라는 해골모양까지 그러져있었다.

다소 어색한 친절에 의구심이 들었다.

대체 실톱과 황산을 어디에 쓰라는 걸까? 자살이라도 하라는 건가?

아니지. 자살을 원했다면 황산만 넣어둬도 될 텐데.

방금 전에 있었던 희망이 점차 희미해짐을 느꼈다.

황산과 톱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막막하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탈출구가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라도 있었지만 방을 전부 조사하고 나니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뇌 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거무칙칙한 회색과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누런 전깃불.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불쾌한 감시카메라.


“하아……. 이런 상황에도 추위는 느껴지는구나.”


팔로 몸을 끌어안고 추위를 최소화하려고 했지만 추위는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점점 밤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누런 얼룩과 곰팡이가 잔뜩 핀 이불에 눈이 갔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불로 몸을 감쌌다.

침대뼈대는 이미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시트를 그냥 바닥에 깔아놓고

그 위에 몸을 눕혔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지만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물 밖에 없었지만.)

 여기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모든 것이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로 보였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몸을 새우처럼 말았다.

기온이 낮았기에 최대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자

체온이 점차 올라갔고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곧 잠의 기운이 찾아왔고,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회사에서 3년간 짝사랑하고 있는 백소라 팀장.

겨우 28살이란 나이로 당당히 우리 회사 한 부서의 팀장으로 임명받은 여성이었다.

그 뿐이겠는가? 얼굴과 몸매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우리 회사에선 거의 여신으로 통하는 그녀. 뽀얀 피부, 오뚝한 콧날, 애교 있는 반달눈.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가득 찬다.

그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고 그 날 온종일이 행복하다.

그녀가 나의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루에 수백 번도 넘게 생각하고 꿈꾼다.

하지만 꿈은 그저 꿈일 뿐 그녀 주변엔 나보다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들이 줄을 서고 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한다? 그건 이미 옛날 생각 없는 노인들이 한 말일 뿐이다.

용기가 아니다. 돈이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한다.

돈이 있으면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있고, 행복도 줄 수 있고 편안함도 줄 수 있다.

돈이란 그런 것이다. 철없는 사람들이 돈으로 못 사는 것도 있다고 하고는 하지만…….

사실상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하아…….”


한숨이 흘러나왔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의 삶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곳으로 납치당하고 잡혀간다고 하더라도 날 급히 찾아보려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님? 아버지는 이미 옛날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신세지고 계신대?

친구? 취업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다보니 어느 새 친구들은 모두 자기 길을 떠나고 없었다.

겨우 올라간 고지엔 오직 나 혼자만이 서있었다.

있는 것이라곤 차가운 바람과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두려움 뿐.

이렇게 치열하게 올라가서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망신창이가 된 나에게 대체 무슨 보상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일까.

만약 여기서 더 올라가도 과연 행복이 있을까?


“뭔 헛소리냐.”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다니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둔하잖아?

지금은 여기서 탈출할 생각만 하자.

일단 살아야지 미래가 있을 테니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갑자기 처한 상황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로했던 모양이다.

창 너머로 내리는 빗줄기마저 자장가처럼 노곤하게 만들었다.

검은 보자기가 세상을 덮으려 하기에 반항하지 않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월 30만 원짜리 작지만 아늑한 원룸이기를 기도하며.

 

익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서서히 눈꺼풀이 들어올려지자 기분 나쁜 백열등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반겼다.


"휴……."


몸에서 꿉꿉한 곰팡이냄새가 났다.

이런 이불에서 잤으니 당연하겠지만 낯선 곰팡이냄새가 너무나도 불쾌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입에 못 댔으니…….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변한 게 없다.

굳이 변한 게 있다면 빗물이 나의 시트를 살짝 젖게 한 정도.

비가 들어오는 각도 계산을 잘못했던 모양이다.

이미 늦었지만 시트를 창가에서 멀직히 떨어뜨려 놨다.

여기에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시트를 젖게 내버려뒀다가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날씨에 젖은 것을 말리는 건 무리니까.

다시금 목마름이 가시처럼 목을 찔러댔다.

음식은 안 먹어도 한 달 동안 살 수 있지만 물은 일주일만 안 마셔도 목숨이 위험하다.

이제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정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물이 그리웠다.

세면대로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창가로 바꿨다.

아무래도 세면대의 물을 쓰기엔 너무 불안했다.


"어……?"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멍청한 소리가 경악으로 바뀌기까지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뻥 뚫려있던 창문에 철창이 채워져 있었다.

잊고 있었던 공포감이 스믈스믈 올라오더니 강하게 머리를 때렸다.


"마, 말도 안돼"


눈을 의심했다.

이 자리에서 계속 잠을 잤었는데 대체 저 철창은 언제 생긴 거란 말인가?

누군가가 날 다른 방으로 옮겼을 거라고 생각을 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는 내내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누군가가 날 건들렸다면 금방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 철창을 새로 박았을 거란 생각은 더 말이 안 된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두려움으로 변해 정신을 지배했다.

난 사실 겁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봐라. 어떻게 이런 상황에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치아들이 서로 자석처럼 붙었다가 떨어졌다를 반복했고,

다리는 과장에게 혼났을 때보다 훨씬 크게 후들거렸다.


"휴……. 진정해……. 진정해……. 흥분하지 말고."


최대한 자신에게 암시를 걸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렇게 당황해봐야 나아지는 건 없었다.

머릿속으로 그렇게 냉정하게 판단해봤지만 몸의 컨트롤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나서야 떨림이 멈췄다.


"크흑……."


갑자기 울분이 솟구쳤다.

입술을 꽉 깨물며 견뎌내려고 애썼다.

정신 차려야 한다.

아무리 미친 싸이코의 장난감처럼 놀아난다고 해도 분명 탈출할 방법은 있을거다

아니, 분명 있다.

이러고 있으면 오히려 싸이코의 기쁨을 주는 것 밖에 안 된다.

그런 장난감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양손으로 뺨을 가볍게 때리자, 두려웠던 생각이 조금씩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래, 사람은 마음 먹기 나름이다."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는 어느 덧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잦아들었기에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창가로 다가갔다.

손만 뻗으면 철창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다.

눈을 감았다고 다시 떠봐도 철창은 그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있었다.

스산한 묵빛으로 빛나는 철창을 보고 있으니 가슴마저 시려오는 것만 같았다.

뻥 뚫린 창에 철창 4개가 북한군처럼 무섭게 막고 서있었으니 괜히 가슴에 돌이 올라간 듯

답답했다.

창 너머로는 굵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빗줄기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손바닥을 모아서 빗물을 받았다.

정말 따가울 정도로 굵은 빗줄기였다.

그 덕에 손바닥에 빗물이 금방 모여들었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실까말까 고민할 줄 알았던 몸은 본능에 의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 번에 들이켰다.


"하아!!"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마시는 물이었다.

불쾌할 줄 알았는데 스트레스가 확 날아갈 만큼 기분이 좋았다.

딱 하루 만에 먹는 물맛이어서 그런 것일까 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빗물을 마셨다.


"아! 살겠다!"


영양가 없는 물을 마셨을 뿐이지만 몸에 기운이 생겼고, 뇌세포들이 활성화 되었다.

시트쪽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이 철창에 대한 생각 해보기로 했다.

어제 약에 취해있기는 했지만 약기운은 금방 날아갔으니 약 때문에 철창을 못 봤거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방 구석구석 조사했었는데 저렇게 굵직한 철창을 못 봤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박혀있다.

아무리 못 봤다고 하더라도 저 철창은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끄응…….”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30년 동안 쓸모도 없는 수학과 영어만 잔뜩 해온 대가랄까 다른 것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 지금 와서 후회해서 어쩌겠는가.

일단은 어제처럼 방을 조사해봐야겠다.

저 철창 뿐 아니라 뭔가 바뀐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일단 찌그러진 침대뼈대를 살펴본 뒤 덮고 잤던 이불과 시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입고 있던 환자복도 대충 훑어보았다.

노트에도 역시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세면대와 변기도 어제와 변함없다.

구석에 두었던 황산과 실톱도 그대로다.


“아”


갑자기 머리에 번개가 스쳐가는 듯한 찌릿함을 느꼈다.

황산과 실톱. 그리고 철창.

마치 철창을 황산으로 녹이고 실톱으로 끊으라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쓸모도 없었던 도구들이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시트에 몸을 눕힌 뒤 생각을 계속 이어갔다. 철창.

이 새로운 변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단 가능성은 3가지가 있다.

얕은 잠을 잤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완전 곯아떨어졌다는 것.

두 번째는 철창을 새로 박은 것.

세 번째는 철창을 숨겨놓은 것.


"세 가지 전부 이상하잖아."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철창을 살펴보았다.

콘크리트에 꽉 박혀있는 걸 보니 확실히 이 건물을 지을 때 같이 박아놓은 것 같다.

그러니 철창을 새로 박아놓았다는 건 무리다.

나도 모르게 자버렸나?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이런 곳에서 깊이 잠드는 사람이 이상하다.

빗소리가 크고 방의 쾌쾌한 냄새 탓에 푹 잘 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역시 숨겨놓았다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가?

어제는 비가 온 탓에 어두웠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처음 접하는 약 때문에 방을 조사한 뒤에

곧바로 이불에 누웠다.

그러니 창을 제대로 본 것은 고작 한두 번 정도다.

그 한두 번도 생각해보면 약에 취했을 때 한번과 자기 전에 한번 이었다.

약에 취했을 때에는 간단하게 나를 속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다색과 비슷한 것으로 채색해뒀다가 비가 오면 올수록 씻겨 내려가게 하면 되니까.

혹은 바다색을 묻혀놓은 비닐을 철창에 감싸뒀다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비닐을 회수해갔을 수도 있다.

이 건물은 몇 층 더 있는 것 같으니 위층 창문에서 회수한다면 가능하다.

일어났을 땐 약기운 탓에 제대로 못 봤고,

자기 전엔 살짝 어두컴컴해져서 눈치 못 챘을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대체 ‘왜’ 했냐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문득 황산병과 실톱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모든 것이 한 사이코에 의한 ‘게임’이라고 한다면? 흔한 탈출게임에서도 주인공이

탈출할 수 있게끔 적지 않은 힌트를 주지 않는가?

도구를 찾지도 않았는데 창으로 탈출한다면 그 게임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날 가둔 인간이 사이코라는 한에서 말이다.


"정말 제대로 된 싸이코한테 걸렸구만."


머리에 벌레라도 들어간 듯 지끈거렸다.

아무튼 황산과 실톱이라는 도구를 얻었다.

그리고 철창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저 철창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소리.

그래야지만 게임이 진행되겠지.

게임 주인공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 굶어죽을 순 없는 일이니까.

밖으로 탈출할 생각이라면 일단 밖의 정보가 다시 필요했다.

어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창 밖을 살펴보기로 했다.

철창이 다소 좁은 편이라 얼굴을 넣을 수 없었지만 대략적이나마 건물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가파른 절벽과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벽면…….

사이코의 뜻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탈출하지?

다시 시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평범한 회사원이 특수 액션을 펼칠만한 체력이 있을 리가 없다.

하루라도 술을 안 먹으면 다행일 정도로 불안한 건강상태로 대체 무엇을 하라는 거지.

뭐, 그건 둘째 치고 대체 무슨 수로 탈출하라는 거지?

여기엔 밧줄 같은 것도 없을뿐더러 갈고리 같은 걸로 뭔가에 걸어둘 만한 도구도 없다.


“하아…….”


배가 고프다.

일어나 빗물을 마셨다.

이렇게나마 조금이라도 허기를 가시게 해야지 움직일 수 있었다.

매일 저녁을 술로 배 채우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상사와 한번 술을 마시면 적어도 10만 원 이상이다.

2차로 가면 몇 십만 원을 뛰는 건 순식간.

그 술 한 잔 마실 금액으로 국밥 몇 십 그릇을 먹을 수 있을 텐데…….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 해봤자 득도 되지 않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일단 가지고 있는 물품을 살펴보자.

방 여기저기 깔아놓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응?”


갑자기 백열등이 깜박깜박 거린다.

철렁거리는 마음으로 백열등을 바라보았다.

왠지 눈을 떼는 순간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계속 바라보고 있자 조용한 스파크 소리를 내더니 이내 원래 불빛으로 돌아왔다.

백열등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등이 깜빡이는 그 짧은 순간 몸은 어느 새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저 불빛조차 없다면 정말 칠흑같은 어둠 속에 파묻히게 된다.

그런 끔찍한 상황만큼은 부디 면하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방 전체가 나의 목을 조여 간다.


“자, 볼까”


눈 앞에 펼쳐놓은 도구들을 훑어보았다.

먼저 얇은 이불, 10cm 두께의 침대 시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침대 뼈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노트, 낡은 칫솔과 비누, 다 쓴 치약껍데기, 휴지 조금과 두루마리 심,

입고 있는 환자복, 황산과 실톱.

그렇게 도구들을 늘어놓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세면대 아래에 있던 그것이 눈이 갔다.


“어?”


그것을 주웠다.

어제 세면대 물을 조사하기 위해 살짝 적신 종이뭉치였다.

그것만 본다면 아무 문제없다.

하지만 그 둥글게 말린 종이에 어제는 본 적 없는 글자가 보였다.


“설마?”


물에 젖어서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러자, 그 숨겨져 있던 글자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마른침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 날짜 모름. 날씨 비

    지금 내가 뭘 쓰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써도 나타나지 않는 펜 때문이니까.

    그냥 종이에 미세한 긁힘으로 글을 쓰고 있다. 왜 이런 짓을 한다고 한다면 그저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미쳐버릴 것만 같으니까. 나는 펜과 시계를 주웠다. 어디 쓰는 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써본다. 」

 


종이에 남겨있는 내용은 날 흥분시켰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시트 옆에 둔 노트를 들고 세면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찢여 물에 적셨다.

 

 

「 날짜 모름. 날씨 비

    놀랬다. 어제 막 휘갈긴 글씨가 종이가 떠올라있었다. 습기를 흡수하면 글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리 신기할 것도 없다. 문방구 같은데 이런 도구가 넘치고 넘치니까. 그저 왜

    이런 펜을 두었는지 짐작가지 않는다. 여기 날 가둔 것조차 짐작할 수 없으니 알 방법이

    없겠지.


    혹시 먹을 것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쌀 한 톨 없었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배고파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글을 적는다. 이것조차 안하면 이 혼자 있는

    방에서 어둠에게 먹혀버릴 것만 같다. …… 아내는 날 찾고 있을까? 아니, 그 여자

    성격이라면 벌써 사망신고하고 내 재산을 가지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겠지. 젠장…….

    만약 여기를 나간다면 그 여자부터 정리할 것이다. 그녀가 나 모르게 바람피운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들을 증거로 제출한다면 그 년한테 돈을 주지 않고 이혼할 수

   있다. 돈 때문에 나를 유혹한 그 암캐의 절망적인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너무 행복하다.

   그러니 빨리 여기서 나가야된다. 일단 여기를 탈출할 방법을 찾아보자.

   그건 그렇고 배고프다. 」

 


일기 내용이 갈수록 사적으로 변했다.

아마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솔직하게 글을 적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사적인 내용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급히 다음 장을 찢어서 물에 적셨다.

 


「 날짜. 처음 쓴 날로부터 5일. 날씨 비

    이젠 저 지긋지긋한 비가 너무 싫다. 태양을 보고 싶다. 눈이 멀 정도로 ……. 밖에 나간다면

    그냥 재산이고 뭐고, 조용한 산 속에 가서 농사나 하면서 살고 싶다. 여자도 필요 없다. 그냥

    혼자 조용히 살고 싶다. 어릴 적 괴롭혔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 애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다음에 만나면 사죄와 함께 식사 한 끼 같이 했으면 좋겠다.


    사실 아내의 첫 모습에 반했다. 그녀의 유혹적인 눈빛과 입술을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인간성은 문제가 있지만 그녀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몸뚱이를

    지녔으니 괜찮았다.


    …………이제는 몸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할 것만 같다. 지금까지 너무 막

    대한 것 같아 미안하다. 」

 


2번 째 일기와는 다르게 반성해가는 모습이 비췄다.

아내에 대한 작은 사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자신의 속과 자주 대면하다보니 점차 자기 자신을 성장시킨 모양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어두운 내용이었다.

글씨체도 마구 휘갈겨져 있다.

그는 어둠 속에 너무 오래 노출되었다.

다음 페이지를 적셨다.

 


「 날짜 9일. 날씨 신발놈의 비

    배고프다.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 없다. 저 철창을 뚫고 가야겠다. 많이 녹슬어 있으니

    조금만 고생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체력 남아있을 때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이

    곳에서는 누군가가 날 도와줄 일이 없다는 사실을…….


    젠장!! 철창이 녹슬었다곤 하지만 너무 단단했다.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 침대를 분해했다.

    그리고 뾰족한 부분으로 철창을 때리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땀을

    흘렸다. 그 덕에 더 배고파졌다. 아내가 보고 싶다. 」

 


점차 얇아지는 일기장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마지막 동화의 끝이 해피엔딩을 바라는 소녀처럼 말이다.

‘과연 이 자는 살아남을까?’ 이것이 가장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 자가 살아남아야지만 내가 살아남을 테니까.

조금씩 물결치던 불안감이 어느 새인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마구 몰아치고 있었다.

 


「 성공이다. 철창을 부수는데 성공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손에 물집이 가득했다. 뭔가

    해냈다는 쾌감이 온 몸에 전율을 흐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철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 나는
 
    절망했다. 그토록 고생한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두렵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었다가는 굶어죽을 것이 분명하다. 뭔가 해야만 했다. 옷과

    이불로 밧줄을 만들고 아직 부수지 않은 철창에 묶었다. 아마 5m 정도는 내려갈 수 있겠지.

    예전에 만난 여자친구가 등산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다.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다. 순수했던 20대였으니까. 서로 말단 직원이었지만 사랑했었다.

  (이 부분에 핏자국이 있다.) 쓸대없는 글을 너무 많이 적어서 그런지 손이 너무 아프다.


    …… 지금 나에게는 아내가 있다. 탈출하면 먼저 아내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다시

    사랑해볼 것이다. 그러니까 내려가자. 저 아래로. 」

 


저기 보이는 철창은 그가 탈출하고 난 뒤에 새로 박은 모양이다.

아니면 방 자체가 다르거나.

아무튼 그는 저기로 나갔다는 소리.

여기에 시체도 없고, 그의 시계와 연필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다음 페이지를 물에 적셨다.

 


「 어제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자버렸다. 그런데 후회 된다. 자고 일어나니 몸에 기운이 없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도 오늘이 지나버리면 더 힘이 없을 테니 지금 탈출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느님. 제발 절 구원해주세요. 역시 이 시계는 쓸모가 없었다. 」

 


그 글을 마지막으로 일기는 끝이었다.

그 외 다른 페이지를 물에 적셔보았지만 그저 백지일 뿐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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