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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대 : 듀라라 님 >
“이,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쉿”
질문은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 묻혀버렸다.
벽에 손을 짚고 이동할수록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고, 마치 허공을 걷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오직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숨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에 비해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고,
한 명의 닌자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큰 소리를 내는 것일까?
코로 숨쉬는 것을 그만두고 입을 열어 최대한으로 소음을 없앴다.
그렇게 하자 자연스럽게 어둠에 스며들었고, 두려웠던 마음이 점차 평안해졌다.
마치 어둠과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앞에 보이는 그녀의 등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혼자만의 세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이내 두 눈까지 감게 되고, 오직 청각만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평온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두 눈을 감고 계속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무언가가 막아섰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으로 봐서는 그녀의 등인 모양이다.
그 순간 평온하던 배경이 순식간에 질퍽하고 끈적끈적한 늪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후각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비린내.
모든 감각들이 말하고 있었다.
괴물이 근처에 있다고.
방금 전까지 평온하고 잔잔하던 바다는 어느 새 숨소리조차 쉽게 낼 수 없는 심해로
변해버렸다.
빠르게 괴물들의 대한 정보를 생각해 보았다.
일단 그들은 소리와 냄새로 적을 판단한다고 한다.
그 말은 즉, 허둥대지만 않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도 있다는 소리다.
지금은 지독한 냄새가 잔뜩 나는 옷을 입고 있으니 그들의 무기중 하나가 차단한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의 또 다른 송곳니가 희번뜩이고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발걸음조차 옮기면 안 된다.
문득 그녀가 생각나서 그리로 귀를 기우려보니 이미 숨소리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정찰이라는 임무를 받는 사람다웠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니.
나도 그녀처럼 벽에 붙고 몸의 인기척을 없애기 위해 숨을 삼켰다.
“끼익?”
“!”
짧게 숨을 삼켰을 뿐인데 멀리 떨어져있던 괴물이 반응했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걸리는 건가? 더 조심해야겠다.
입을 벌리고 최소한의 숨을 내쉬었다.
물에 젖은 발자국소리가 청각을 조금씩 자극했고,
그럴 때마다 심장박동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심장도 어떻게 보면 작은 소리다.
최대한 진정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사리 되지 않았고, 그럴수록 마음이 조급해져서 심장은 더욱 요동쳤다.
“꾸이이이?????”
자박거리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심장은 거의 튀어나올 정도로 요동쳤다.
그럴수록 괴물의 발걸음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심장소리는 상대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다.
인체에서 나는 소리이기 때문에 상대편은 거의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밀폐된 공간에 아무 소리조차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거기다가 청각과 후각이 발달된 괴물이라면 더욱 더!
‘어, 어쩌지??’
공포로 인해 논리적인 생각이 차단되고,
심장은 괴물의 먹이가 되고 싶은지 더욱 열심히 펌프질을 해댔다.
도망갈까? 아니, 지금 린이 바로 앞에 있다.
지금 도망친다면 린이 당할 위험이 너무 크다.
만약에 이 상황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마을까지 혼자 도달할 수 있나?
난 이제 갓 마을을 나온 이방인일 뿐이다.
그 어둡고 복잡한 길을 혼자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그 전에 괴물들에게 발각되어 순식간에 몇 십 조각의 고기조각으로 전락할 것이다.
괴물의 발자국 소리가 이제 거의 코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들렸다.
초점이 미친 듯이 흔들렸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뼈칼에게 손이 갔다.
근거리라면 가능성이 있다.
아직 그 괴물을 잘 모르지만 칼을 찌르고도 멀쩡한 몸이 있을 리가 없다.
자! 와라! 괴물자식아!
그 때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끌어안았다.
괴물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물에 젖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지닌 게 괴물일 리가 없으니까.
린인가?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라고 혼자 물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노련한 정찰자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맡기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끄르르”
동공으로 스며드는 푸른 등불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듯 했다.
불빛은 심장을 얼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괴물의 모습도 밝혀주었다.
그것의 모습은 바다 깊은 곳에서나 있을 법한 심해어와 닮았다.
한 손에는 푸른 랜턴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랜턴으로 인해 푸르게 물든 뾰쪽한 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꼬챙이 끝에 묻어있는 검은 것을 보자 뒤통수가 싸해졌다.
푸른빛만 존재하기 때문에 색만 보고는 알 수 없었지만 케찹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 괴물은 우리를 코앞에 두고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그러기를 몇 분. 갑자기 급히 그 자리를 떴다.
처음에 왔던 느린 걸음과 비교되는 빠른 속도였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때쯤 린이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제야 린이 나를 끌어안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커져버린 심장소리를 죽이기 위해 자신을 완충제로 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마운 마음보다 터질 것 같은 분노가 먼저 솟아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있는 욕 없는 욕을 퍼붓고 싶지만 마을까지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참기로 했다.
처음부터 안 간다고 말했었는데 멋대로 나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더욱 분노를 키웠다.
조용하던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말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금방 마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간에 다시 괴물을 만나거나하는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그녀와 돌을 같이 밀고 마을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주먹이 움직였다.
이미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야, 신발년아.”
그녀의 멱살을 찢어질 기세로 쥐어 잡았다. 그녀는 내 태도가 이해간다는 듯 묵묵히 침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뭐라고 말이라고 해보라고!”
“일부러 그랬어?”
“날 억지로 데려간 것은 너라고.”
“넌 나의 노예라고 주인이 가는 곳을 따라가는 것이 뭐가 잘못된 거지?”
그녀의 말은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마을의 규칙상 주인을 지키는 것은 노예로써 당연한 행동. 하지만 아직 그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누군가에게 표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 임무도 없이 마을에서 생활하면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줄 알아?”
가라앉지 않던 분노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잠깐 주춤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안돼.”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마을의 또 다른 규칙이 있어. 밝히지는 않지만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이.”
그녀의 또박또박한 말투 때문일까 방금 전까지 속을 가득 채우던 불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나는 천천히 그녀의 멱살을 놓았다. 가죽옷 위를 멱살로 잡은 탓에 손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괜히 기분까지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게 뭔데.”
“알다시피 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마을에 국 항아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이 마을에서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은 없어.”
“그거야 서로 나눠서 하면 편하니까…….”
“아니, 아무리 노예라도 마을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해. 더 나아가 마을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판단되면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다고.”
그녀의 한마디가 너무 삭막하게 들려왔다.
“그럼 몸이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은??”
“여자라면 성……노리개라도 할 수 있겠지만 남자라면…… 그냥 퇴출이야.”
그녀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식량이 많이 부족해.”
“무슨 소리야? 마을에 쥐랑 식물이랑 많던데.”
“실제로는 일주일 앞이 두려운 정도로 적은 양이지. 이제 뭣 때문에 널 귀찮게 데려갔는지 알겠지? 이 마을에 쓸모없다고 판단되면 넌 그대로 퇴출이야. 괴물의 점심식사가 되던 저녁식사가 되던 우리는 아무 신경도 안 쓴다고.”
장애를 가졌거나 몸이 아프면 서로 서로 도와줘야만 한다. 그것이 사회고, 사람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넉넉했을 경우다. 자기 앞일도 힘든 상황에 동정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마을의 또 다른 면에 대해서 알게 되자 심난해졌다.
그 직후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는 나름대로 생각해서 나를 정찰임무에 데려간 거다. 하지만 그 결과가 자신의 노예에게 멱살 잡히는 것이라니. 따지고 보면 린은 아무 잘못도 없다. 죄라면 내가 퇴출당하지 않게 임무 가르쳐준 것 뿐.
미안함이 밀려왔지만 이미 내가 저지른 행동이었기에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녀와 나는 방으로 돌아가서 빗물로 즙을 씻어냈다. 그녀가 먼저 씻고 다음으로 내가 씻었다. 서로 마주치는 상황이 있었지만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괜히 숨이 막혀왔다. 이미 푸른 랜턴을 든 괴물에 대한 생각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이 곳에서 지낸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마을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친한 테루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나를 가족 대하듯 대해주었고, 집과 직장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따스함에 가슴이 포근해졌다.
정작 친해져야할 린과는 그 때 이후로 아직도 서먹서먹하다. 그녀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처음에 한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자다는 사실에 조금 기대했었지만 이미 그 김치국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 그리고 정찰자에게는 한 가지 일이 더 있다. 바로 식용식물을 채취해오는 것이다. 그 식물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거의 이끼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과 냄새가 아주 역하는 것. 이쯤에서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그 식물은 괴물을 쫓는 식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식물을 구해오면 고기와 교환하고 혹은 다른 물품과 교환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그녀의 패턴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서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다. 그 때 이후로 괴물을 만난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긴장감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가죽옷도 벗고 왔다. 매번 그 지독한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린, 무겁지 않아? 들어줘?”
“필요 없어.”
어느 새 말을 텄다. 그렇다고 해서 친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솔직히 친해지고 싶어서 마음대로 말을 놓은 것에 불구하니까. 그녀는 언제나 친절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거절하니 솔직히 그리 좋지만은 않다.
“나한테 줘도 되는데 굳이 네가 드는 이유가 뭐야?”
“굳이 너한테 줄 이유도 없는데.”
“냄새나잖아.”
“매번 하던 일이라서 냄새도 잘 모르겠는데.”
아, 빙하기 바람이 몰아치는구만. 좁은 방에서 같이 지내는 사이인데 너무한 대우다. 사실 밤마다 늑대가 마음을 들쑤셔서 죽을 지경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자고 싶다. 그런 게 남자 아닌가? 저런 미녀와 있는데 그냥 바보처럼 있는 것은 정말 남자가 할 짓이 못 된다. 덧붙여 저 외모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여기 와서 한번도 그 괴물을 못 본 것 같은데?”
“몰랐어?”
“응? 뭐가?”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곳이 비록 어둡기는 했지만 며칠이나 있다보니 익숙해져서 어렴풋이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었다.
“놈들은 소리와 냄새에 반응을 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그냥 돌아다니는 거라면 걸릴 일 없어.”
“그래? 그럼 첫 날에 걸린 건 왜?”
"아주 가끔 그런 경우도 있어. 그리고 놈들이 싫어하는 식물을 들고 다니는 것도 한몫하지. 냄새에 민감해서 이런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면 오히려 멀어지려고 하거든.”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그녀의 기분을 흐트러뜨리기 싫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다.
“처음 괴물을 만났을 때는 그냥 지나가던데?”
“그 때는 내가 화염병 들고 다녔잖아 네 냄새보다 내 휘발유 냄새가 더 강했기 때문이야.”
“그렇구나.”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마을, 동네) 나가는 분위기로 풀을 캐러 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냄새가 민감한 놈들이니까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면 마주치고 싶어도 마주칠 수가 없다.
어느 새 풀이 자라는 곳에 도착한 우리는 묵묵히 돌에 붙은 이끼를 긁어냈다. 문득 캐던 중 아무 생각 없이 풀을 코에 갔다댔다. 그 순간 역한 냄새가 후각을 후려치는 듯 했다.
“윽!”
“킥, 뭐하는 거야 바보야. 냄새 심하다고 적당히 삶지 않으면 큰일 나.”
그녀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등을 때렸다.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 아니면 첫 스킨십 때문인지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나마 찬바람이 불던 분위기가 풀렸고, 캐러오기 전에 생각해뒀던 말을 어렵사리 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용기가 필요한 한마디였다.
“너랑 좀 친해지고 싶어.”
“뭐?”
느닷없이 그런 말을 내뱉자, 그녀는 못 들었는지 되물었다.
“매번 나한테 너무 쌀쌀 맞잖아. 좀 친해지고 싶다고…….”
평소의 나라면 생각도 못했을 만큼 솔직한 말이었다. 그녀도 잠잠하던 내가 이런 말을 해서 그런지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 전에 있던 곳에서는 용기만으로 미인을 쟁취할 수 없었지만 이 곳은 모두가 평등한 곳이다.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된다. 직장과 돈을 볼 이유도 없다.
그녀는 우물우물 말만 곱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평소의 무뚝뚝한 그녀의 모습은 온대간대 사라지고 없었다. 한 없이 수줍음을 타는 귀여운 아가씨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조금만 행동력이 있었다면 그녀의 입을 빼앗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나도 그래…….”
무뚝뚝한 그녀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마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설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조차도 엄청 용기를 낸 것이라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이 30살에 처음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기에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등골을 따라 흐르는 짜릿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에 지금까지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같은 한 집에 사는데 계속 어색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으, 응”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입에 걸린 웃음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용기 있게 나왔어야했는데.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이제 봐서 속이 상할 정도였다. 이 곳이 탑이든 괴물이 있는 곳이든 그냥 그녀랑 알콩달콩 살았으면 좋겠다.
“너라면 말해도 될 것 같아.”
“응? 뭐가?”
방금 전까지 수줍어하던 그녀의 태도를 지워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살짝 움찔했다.
“난 여기서 탈출하려고 해.”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탈출하는 방법이 있어?”
“우리는 지금껏 이 층만 돌아다녔었잖아. 몇 개월 전에 우연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었거든.”
“괴물들이 있어. 위험해.”
“그건 알아. 하지만 평생 여기서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그, 그래도”
“가족이 있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족이.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애타게 날 찾고 있을 거야.”
“…….”
“그리고……. 만약 이 사실을 마을사람들에게 말했다가는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마을의 어두운 부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들에게 있어 탈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들은 여기서 몇 십년동안 살아왔어. 탈출할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면 그들의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로 안 될 일이야."
"겨우 그런 일 때문에?"
“…….”
그녀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지 잠시 뜸을 들였다.
풀이 근처에 있기 때문에 괴물들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마을을 나가려는 사람은 죽임을 당해."
"그냥 쫓겨난다며?"
"그건 거짓말이야. 그들은 끝까지 너를 죽이려고 쫓아올 꺼야."
순간 잊고 있었던 흑인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서 하마터번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대, 대체 왜?"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인생을 부정하려고 했으니까……."
"그런 미친……."
"그래, 정말 미친놈들이지. 그러니까……. 네가 필요해.”
“왜, 왜……. 하필이면 나야?”
“너는 살아서 이 곳까지 왔잖아. 온 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아직 밖에 대한 미련이 많을 거야. 밖으로 나가고 싶은 갈망이 가장 클 것 같아.”
아직도 밖이 그립다. 따뜻한 온수하며 편안한 침대. 그립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밖에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몇 십 년이라고 한다면 벌써 있던 집도 사라지고 알던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촌장의 감시 하에 있지도 않아. 나와 함께 할 사람은 너 뿐이야.”
‘나와 함께’라는 말에 가슴이 떨려왔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남녀 불문하고 '나와 같이’ 라는 말을 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내가 미리 준비해뒀으니까. 오늘 밤에 당장 탈출하자.”
“오늘?”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괴물들은 오늘 하루 종일 자는 날이야. 위로 올라가기 가장 좋은 날이지. 가자, 희수야.”
그녀가 내 이름 두 글자를 또박또박 말해주자, 괜스레 가슴이 떨려왔다.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받치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정도 이끼를 채취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가 탈출을 위해 준비해둔 물건들을 가지러 마을에 가야만 했다.
그 때였다. 그녀와 손을 잡고 가던 도중에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챘다. 방금 전까지 있던 지독한 냄새가 사라졌음을. 그 냄새가 무엇인지 눈치 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타났으니까.
“!!”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3마리다. 그 괴물이 3마리나 있었다. 하나는 고등어같이 생겼고, 다른 둘은 처음 보는 낯선 생선이었다. 그들 중에 하나는 푸른 등불을 쥐고 있었고, 다른 두 마리는 하얀 꼬챙이를 쥐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저것은 분명 뼈를 갈아서 만든 창일 것이다. 쥐 같은 작은 생물에게 저렇게 큰 뼈가 나올 리가 없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하자, 그녀가 갑자기 손을 꽉 쥐었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괴물들을 주시하는 린이 있었다.
. 뭔가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 내 마음은 한 없이 조급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수록 그들은 조금씩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우리를 보고 온다기보다는 그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괴물을 봤을 때와 같았다.
하필이면 풀을 담아놓았던 바구니에 구멍이 났을 줄이야. 너무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떨어뜨린 풀 냄새 때문에 우리들의 냄새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저 멀뚱히 걸어올 뿐 아무런 공격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붙잡은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괴물들이 저 창을 들고 뛰어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마른침을 삼키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냥 이대로 뛰어서 아지트까지만 도망갈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괴물들에게 우리들 아지트를 알려주는 꼴이다. 그렇게 되면 탈출은커녕, 마을의 위협까지 생기니 그것만큼은 안 된다.
힐끔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이상한 병을 꺼내고 있었다. 그 병에는 병뚜껑 대신 검은 천이 박혀있었다. 그 천에서 미세한 휘발유 향이 났고, 그 냄새가 그들에게 도달하기까지 큰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그것을 아는 지 꺼내자말자 곧장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분명 처음 방에서 얻었던 물건일 것이다. 내가 실톱과 황산을 얻은 것처럼.
그녀가 라이터를 켜는 순간 ‘치’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고기들이 갑자기 뛰어오기 시작했다. 휘발유를 묻혀둔 천에는 작은 불꽃이 튀자 말자 순식간에 불이 붙었고, 그녀는 곧장 그 병을 그들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뛰었다. 처음 날 구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도 이런 식으로 도망갔었지. 그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쾌감이 뒤섞여서 너무 흥분되었다.
“멋져! 린!”
“헛소리 말고 뛰어!”
“뭐 어때! 전에도 이렇게 도망갔었잖아!”
나의 행복은 거기서 끝이 났다.
"!!!!!"
신발.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빠르게 뛰어가던 그녀와 나는 급히 멈춰 섰다.
건너편에서도 괴물 3마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괴물들도 두 마리가 하얀 꼬챙이를 쥐고 있었고, 한 마리는 푸른 등불을 들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쫙 풀리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찾아온 상황에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혹시나 린을 쳐다보니 린도 혼란스러운지 좋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던진 화염병 하나뿐이었다.
짧게 생각한 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뼈칼을 굳게 쥐었다.
“미, 미쳤어!?”
“여기서 그냥 잡혀서 죽는 것보단 나아, 곧 뒤의 불도 꺼질 테고 뒤까지 막힌다면 정말 끝이라고!”
하다못해 싸워보고 죽던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이대로 죽을 순 없는 노릇이다.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일단 지리적으로는 우리가 유리한 좁은 길이다. 생선형태의 괴물이다 보니 꼬리가 길어서 좌우로 싸우는 것이 부적절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3마리가 같이 다니는 것이겠지. 옆면을 노린다면 가능성이 있다. 그 때 마침 잉어 같이 생긴 녀석에게 눈이 갔다.
“린, 맨 오른쪽에 있는 놈을 돌파한다. 따라와.”
“무, 뭐!? 자, 잠!!”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첫 발을 디디는 순간 앞의 괴물 3마리도 뛰어오기 시작했다. 꼬챙이로 날 당장이라도 찌를 기세로 뛰어오고 있었다. 마치 말을 탄 채로 결투를 하는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고작 2m라는 거리를 남기고 있을 때 그들이 나를 향해 하얀 꼬챙이를 내찔렀다.
“으랴라아아아!!!”
“뀌에이으이이익!”
순간 앞도 보지 않고 곧바로 오른쪽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바닥에 뭔가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직후 오른쪽에 무방비하게 있던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벽 쪽에 붙어서 그런지 잉어의 눈만이 나를 쫓았다. 창을 찌르고 싶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녀석의 눈을 향해 뼈칼을 찔러 넣었다. 순간 기분 나쁜 감각이 살을 타고 흘렀다. 그 불쾌감에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 했다.
“뀌이이이이이이이잉익!!!”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녀석은 같은 동료들과 몸이 뒤엉켜 바닥에 쓰러졌다. 완전히 막혀있던 골목에 작은 틈이 생겼다! 그 길을 향해 곧장 뛰었다. 자주 가던 풀숲으로 간다면 녀석들은 분명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만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뛰었을까 괴물들의 발소리도 기분 나쁠 만큼 처절한 울부짖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코에 지독한 냄새가 풍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안전지대에 들어왔다.
“하악……. 하악…….”
참아왔던 숨을 모두 토해내자 남아있던 기력이 물을 머금은 스펀지를 쥐어짜듯 쭉 빠져나갔다. 지독한 냄새가 후각에 마구 빨려 들어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에 잔뜩 낀 가래침을 뱉고 숨을 몇 번 더 고른 뒤에서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곧장 린에게 생각이 미쳤다. 뒤에서는 그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역시 보통 체력이 아니다.
“린, 역시 대단한걸. 이렇게 멀리까지 뛰어 왔는데 멀쩡하다니…….”
이상함을 눈치 챈 것은 그로부터 몇 초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대꾸가 없는 그녀를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고, 거기에는 까마득한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어?”
린이 없다.
“린? 린? 장난치지 말고 나와! 린!”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발소리가 단 하나 밖에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몸에 있던 털들이 바늘처럼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고, 머릿속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괴물들 무리에서 벗어날 때 잡힌 것일까? 살아있을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없다고 생각하니 마치 바다 한 가운데에 알몸으로 떠있는 듯 했다.
괴물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니,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한 괴물들이 그녀를 잡았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벽을 조심스럽게 집어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기에.
일단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벽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풀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온 몸에 묻혀두었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자, 거기서 남자 몇 명을 구해서 구하러 가자. 그 수밖에 없다. 후들거리는 다리 탓에 평소보다 3배에 가까운 시간이나 걸려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쥐고기’
“굽기”
막다른 골목으로 보이던 길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매번 겪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기에 귀에만 의존해야만 했다.
“린은 어디 있는 건가?”
익숙한 목소리. 이 마을에서 계속해서 살아왔던 중년 남성의 목소리.
“괴물들에게 잡혀간 듯 합니다.”
눈을 뜨지 못한 채 그렇게 말했고, 그 한마디에 중년은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옆에 있던 남자도 이상한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껏 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처음이니까. 마을에서 귀한 휘발유를 그녀에게 준 이유도 그녀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일단 마을로 들어가세.”
그 말을 따라 마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차 빛이 익숙해지는 것이 느껴졌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거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써 내용을 들은 모양이다. 그 때 느닷없이 레이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예가 주인을 버리고 갔어!”
그 한마디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곧 모두의 눈동자가 바뀐 것을 느꼈다. 가족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린과 같이 다니면서 어둠 속을 지내온 탓일까 이 순간 그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흑인에게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쾌감. 슬쩍 뒷걸음질 쳤다.
“주인은 노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주인이 위험할 때에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구한다. 그것을 잊은 것인가?”
등 뒤에서 저음 목소리가 들려왔고,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마을의 촌장이 나에게 뭔가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대로 의식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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