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만큼 양극적 평가를 받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물론이고, 사후(死後)에도 그를 둘러싼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2005년 3월 1일 해방 60년만에, 또 그의 사후 58년만에 비로소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을 위한 파란에 찬 몽양의 삶이 그나마 건국훈장 대통령장(훈격 2위, 1위는 대한민국장)으로 평가받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간 몽양에 대한 우리 나라 사회의 논외구조가 어떤 한계 안에서 맴돌았는지 엿볼 수 있다.
몽양에게는 정치인을 이념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수사가 동원되었다. 공산주의자, 좌경적 사회주의자, 민주적 사회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사회적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온삭 스펙트럼으로 투영된 것이다. 여운형에 대한 이런 엇갈린 평가는 주로 해방 후 그의 행보와 관련되어 난반사된 것이다.
몽양에 대한 각 정파의 입장은 좌익과 우익에 따라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 좌파에서는 혁명적 동지로 출발해서 회색적 기회주의자 또는 친미파로까지 단층이 있었는가 하면, 미군정이나 우익진영에서는 온건한 민주주의 인사로부터 친북·공산주의자, 공산주의적 기회주의 분자 등으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한 인물을 두고 어떻게 이런 양극단의 평가가 있을 수 있는가? 과연 그의 사상과 정치적 행보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수수께끼에 찬 것일까?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테러의 대상이 된 채 마침내 비극적 생애를 마감한 몽양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길을 걸어간 것일까?
몽양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여정현(呂鼎鉉)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인 1901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으나, 민영환(閔泳煥)이 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했고, 1903년에는 우체국 학교인 우무학당(郵務學堂)으로 옮겼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로 민영환이 자결하자 비분강개한 나머지 몽양은 우무학당마저 자퇴해 버렸다.
1906년 부친이 타계한 뒤 1907년 일족의 사숙인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했으며, 양평에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8년에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서울에 올라와 애국계몽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한 승동교회(勝洞敎會)에 출입했다. 당시 승동교회는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안창호(安昌浩)·최남선(崔南善)·이상재(李商在) 등이 출입하는 등 근대문명 계몽과 근대의식 고취 및 국권회복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1910년 몽양은 남궁억(南宮檍)이 강릉에 세운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청년교육에 전념했으며,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해 영문과 과정을 수료한 뒤 1917년 상해로 떠났다.
1918년을 전후하여 세계정세는 급격히 변했다. 소련에서는 러시아 제정이 붕괴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 소수 약소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대한 지원을 천명했고, 미국에서는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했다. 이 무렵 몽양은 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선우혁(鮮于爀) 등과 더불어 조선의 운명과 세계정세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등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파리에서 강화화의(講和會議)가 열렸다. 때마침 상해에서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와 있어 몽양은 그에게 조선대표 파견에 대한 권유를 받고 조선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단체와 조직의 명의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몽양은 김철(金澈)·신규식(申圭植)·서병호(徐丙浩)·조동호 등과 더불어 1919년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堂)을 결성했다. 청년 터키당을 모방한 정당이었다. 몽양은 곧바로 천진에 있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을 상해로 초청했다. 파리 강화회의의 대표로 김규식이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몽양과 신한청년당은 동경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깊숙이 관계했다. 이때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유학생들과 접촉했고, 몽양의 동생 여운홍(呂運弘)은 2·8독립선언 주모자인 최팔용(崔八鏞)을 만나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목격도 했다. 여운홍은 또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의 민족대표들을 만나 상해의 움직임과 동경 유학생의 독립선언 진상을 전해 주었다. 몽양은 선우혁과 김철·서병호를 국내에 잠입시켜 기미독립선언의 기독교 측 민족대표들을 만나게 했는가 하면, 자신은 노령과 간도의 이동녕·박은식(朴殷植)·문창범(文昌範)·조완구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노령 등 독립운동 중심지를 순방한 몽양은 3월경 상해에 돌아왔다. 그 해 4월 10일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었고,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었다. 몽양이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다. 어떤 이는 주권·영토·국민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명목만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몽양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보기도 한다. 차라리 전위분자들이 근대적 정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실질적이고 효과적이라고 보았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몽양은 처음에도 외교위원으로 외교부 차장을 맡았으나 그 후에는 아무 직책도 맡지 않았다. 상해시절 몽양은 임시정부 일보다는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여 교민의 자녀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교민단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상해임정의 수립에 적지 않게 당황한 일제는 임정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임정의 핵심인사들을 회유해 일제에 귀순케 하는 방법이었다. 일제가 노린 인물은 몽양이었다. 그를 일본에 초청해서 설득·귀순시키기 위한 온갖 술수와 책동이 전개되었다.
몽양은 오랜 고민 끝에 일본행을 결심했다. 적국의 요인들이 만들어준 기회와 공간을 이용하여 한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일본 양심의 폐부를 찌르자는 것이었다. 몽양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일체의 공직을 사임히고 장덕수·최근우(崔謹愚)·신상완(申尙玩) 등과 더불어 19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임시정부의 노장층은 “여운형이 일제에 매수되어 친일파로 전락했다”, “민족의 치욕이며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병균”이라고까지 극언을 퍼부었다.
몽양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유학생 수백명을 모아놓고 “나는 일본의 지도층과 타협하러 오지 않았다. 자치를 구걸하러 온 것은 더욱 아니다. 독립을 하겠다고 담판하러 왔다. 제군들의 협조를 바란다. 나는 유학생 여러분을 믿는다”면서 자신의 혼담(魂膽)을 털어놓았다.
20일에 코가[古賀廉次造] 척식국장(拓殖局長)의 저택을 찾아 회담을 나누었다. 코가 척식국장은 “나는 조선의 우국지사들을 진심으로 동정한다. 그러나 가능하고 실효성 있는 활동을 해야 할 줄로 안다”면서 일본의 부강(富强)을 말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일치협력할 것을 요구한 다음 “나는 개인적으로 합병(合倂)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합병이 된 이상 개인의 의사는 소멸되었다. 일한합병은 회사합병과 같다. 한 회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 있는 회사에 합치는 것이 쌍방의 이익이다“는 어처구니없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몽양은 코가 척식국장의 말에 대해 “한일합병을 회사합병에 비유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한일합병이 결코 우리 민족의 의사로 된 것이 아니요, 일본의 무력(武力) 위협 밑에서 소수 당국자, 즉 열도 못 되는 매국역적들의 소행이었지 당시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합병이 두 국민의 호의로 된 것이라고 말하나 조선국민은 여기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다. 합병 직후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항쟁과 최근 3·1독립운동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한일합병은 강제적이요, 정치적·경제적 불공평이요,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앙화(殃禍)이며 수치다. 동양의 환란과 열강의 시기(猜忌)가 여기서 생겼다”고 반박하면서 총독부의 악정을 낱낱이 실례를 들어 이야기하고 일본의 소위 ‘선정(善政)’, ‘덕정(德政)’의 가면을 벗겨버린다. 일본이 자국의 이익에만 급급해서 타민족·타국가를 무시·억압하는 태도를 맹자의 고사(故事) “하필 이(利)를 말하는가? 또한 인의(仁義)가 있지 아니한가?”라는 말을 인용하여 그 어불성설(語不成說)을 나무랐다.
몽양은 이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대한제국 강제흡수를 회사합병과 동일시하는 코가 척식국장의 궤변에 대해서 “회사합병으로 말하면 작은 것은 큰 것에 대해 반드시 손해를 입기 마련이다. 미국의 석유회사가 상업정책으로 무수한 작은 회사를 합병하여 치부하는 것이 그 실례다. 우리는 자손만대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동양 평화를 위해 기필코 독립을 쟁취할 것이다. 만일 동양 단결과 동양 평화의 필요를 아는 사람이라면 조선독립을 가장 긴급한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고 말하며 “실력을 양성하는 데는 자유발전이 최대 요건이요, 최속 성공이다”고 덧붙였다. 몽양은 독립운동의 기본적인 태도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첫째, 우리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자주로 다스렸고, 자주로 발전하였다. 동양문화에 공헌이 많은 것도 자주성이 풍부한 까닭이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계승하고 현금의 발전을 도모하고 세계문화에 공헌하여 자자손손의 행복을 영속하기 위해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 일본의 신의(信義)를 위해서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어찌 곧 죽지 않더냐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역사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문화의 빚을 진 나라다. 그런데 일본은 항상 병역(兵役)으로 회사(回謝)했다. 일청(日淸)·일로(日盧) 두 전쟁을 조선독립을 위해서 한다고 말해놓고 조선을 합병했으니 이건 시기(猜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천만 조선민중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고, 세계 각국은 일본의 신의 없는 것을 타매하고 시기하였다. 4억의 중국민족은 일본을 원수로 알고 배척한다. 일본은 국토를 넓히는 것으로 기쁨을 삼으나 사실은 극히 위험한 지위에 처해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은 일본의 신의를 회복할 뿐 아니라 장래 일본의 국리(國利)도 되는 것이다.
셋째, 동양 평화를 위해서이다. 일본이 한일합병의 형식을 지속한다면 두 민족이 다를 것은 물론이며, 중국의 배일열(排日熱)도 결코 식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배일의 근인(近因)은 산동(山東)문제의 21개 조약이지만 원인(遠因)은 한일합병에 있는 것이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독립을 승인하여 놓고 합병해버린 것은 중국에 대한 사기(邪氣)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일합병은 동양 평화를 파괴한 것에 불과하다.
넷째, 세계평화를 위하고 세계문화에 공헌하기 위해서이다. 동양의 쟁투가 멎지 않는다면 필경 서력(西力)은 동(東)으로 올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자체의 평화는 세계 대세의 균형을 보전하고 동양의 단결로 말미암아 세계문화의 공헌이 될 것이다. 오직 조선이 속히 독립된 뒤에라야 세계평화는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코가 척식국장은 몽양의 확고부동한 주장에 그의 말을 시인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일단 굽히는 듯했다. 그는 “일한합병으로 인하여 세계가 일본에 대하여 시기가 생긴 것은 나도 안다. 나는 애초에 합병에 반대하였지만 합병이 된 이제는 합병형식을 유지하면서 일치협력하는 것이 서로 유리하다. 자기 나라를 방어할 실력이 없는 조선이 동양을 병합하려는 구미열강의 음모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일한의 합치가 평화의 근본이요, 실력이 없는 조선이 독립하면 동양평화에 해가 될 뿐이다”면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이론을 내세웠다.
“방어력이 없는 조선의 독립을 방임하면 열대의 초목을 한대(寒代)에 옮겨심고 아무 보호도 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일본은 50년이 걸려 오늘의 번영과 군사력을 보유했는데 조선은 그만한 군사력을 감당할 만한 납세능력이 허락되는가? 영국이나 미국을 믿는가? 그들은 동양을 구미화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따라서 자방력(自防力)이 없는 조선이 독립한다는 것은 동양 평화를 파괴할 염려가 있지 않은가? 일본과 조선은 실력 양성을 위하여 동력(同力)하기를 바랄 뿐이다.”
침략을 얼버무리는 코가 척식국장의 연설에 대해 몽양은 그의 ‘동양평화론’과 ‘실력문제’에 대해서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理想)은 공상(空想)이 되고, 이상이 없는 현실은 사물(死物)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실제적 세밀을 필요로 하는 것이요, 공상적 개괄(槪括)을 허(許)하지 않는다. 종래 일본인의 오해는 합병이 호의로 된 것이라는 점과 한인(韓人)은 동화(同化)가 가능하다는 것과 한인은 선정(善政)에 열복(悅服)한다는 것이다. 오늘까지도 이 미몽에서 깨지 못하고 일한일체주의니 동화주이니 하고 떠들고 있다. 이는 현실에 맞지 않는 공상이다. 세밀한 현실에 맞는 것을 논의해야 한다. 평화의 진수는 정신적 융화이다. 일체의 쟁투, 시기, 분동(忿動), 원한 등 불평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 새 울고 꽃 피고 일난풍화적(日暖風和的)·활동적·자연적 자유의 기상은 결코 사해(死海)의 평정(平靜)과 같은 것이 아니다. 평화는 생존의 희망·희락·자유·평등·존귀에 있다. 결코 위구(危懼)·절망·압박·차별 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쏘아붙인 몽양은 대내외적 동양 평화에 대해 말한 다음 코가 척식국장을 문책했다.
“자존심과 독립성이 풍부한 우리 민족으로서는 국가가 합병된 데 원한이 크고, 몸이 망국민이 된 데 비탄이 깊어 부끄러움을 참고 10년을 은인(隱忍)하다가 이제 거족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자존심과 독립성은 인격의 요소요, 진화의 근본이거늘 이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으니 인류의 죄악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중국에 대하여 야심과 탐욕과 권모술수로 침략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일본을 비난하고, 일본은 조선과 중국에 대해서 똑같이 동양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어 코가 척식국장의 열대식물 비유에 대해 반문했다.
“원래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없으면 하등 위협이 없다. 설혹 어떤 불행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의 실력은 족히 외타(外他)의 보호를 의뢰치 않고 자립하여 발전할 것이다. 열대의 초목을 한대에 옮겨 유리창 수증기 속에서 억지로 그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자. 그것은 벌써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잃은 것이다. 자연 공기 속에서 우로(雨露)의 혜택을 받을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차라리 한풍냉설(寒風冷雪) 속에 십사일생(十死一生)의 곤란을 받아가며 사는 것이, 타인의 보호를 받아 자기생존의 의의를 잃고 구차하게 기생적 생활을 하는 데 비하여 어느 것이 즐겁겠는가?”
“조선이 자유의 실력이 없이 독립이 승인되면 제3국의 침략이 있지 않을까? 일청·일로 두 전쟁이 이것 때문이니 일본이 이런 희생을 반복하지 않겠는가?”라는 코가 척식국장의 우려에 대해서 몽양은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파견, 갑신정변(甲申政變),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에 이르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일본이 국제간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저버렸음을 지적하고 한국병탄의 부당성을 다시금 주장했다. 그리고 “현금(現今)의 세계정세로 보아 일본 외에는 중국이나 러시아나 독일이나 그 어떠한 나라도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번 대전(大戰)의 교훈으로 더욱 그러하며, 이제 시대가 변천하였으니 일본은 옛날의 악몽을 씻는 것이 좋을 것이며, 강권시대는 벌써 갔다”고 단언했다.
다음으로 실력문제를 언급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것은 군사적 실력 부족 때문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며 정치·군사·경제적 세 측면에서 분석하는 한편, 조선이 실력 없이 독립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갓 기우에 불과하며 전혀 근거 없는 허위임을 밝혔다.
“우리 겨레는 침략적 야심이 없는 민족이다.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세계평화의 선두에 서서 오직 문화로 세계에 웅비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기반(羈絆)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된다면 그 전망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밝다.”
몽양은 코가 척식국장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언제나 공세와 통박의 태도를 취했다.
코가 척식국장은 몽양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한국인들은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좋다. 만일 당신이 자치운동을 한다면 필요한 자금은 얼마든지 대줄 수 있다. 그리하면 현재 투옥되어 있는 정치범은 모두 석방될 것이다.”
“나는 자유독립 이외에는 자치고 뭐고 아무것도 용납할 수 없다. 정치범은 조건 없이 당장 석방하라!”
“만주는 조선보다 몇 배나 크다. 당신이 사업을 펼치기에 알맞은 장소다. 만주의 척식(拓殖)사업을 맡아 해볼 생각은 없는가?”
“내가 원하는 사업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뿐이다. 그 외에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몽양은 코가 척식국장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일본의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喜一] 남작(男爵)은 몽양이 담대하고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초 몽양을 초청하였던 목적과는 달리, 자칫하다가는 도리어 몽양에 의해 역선전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위협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는데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중장(中將), 관동군(關東軍) 참모장 하마오모테 마타스케[浜面又助] 소장(少將),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체신대신 노다 헤이키치[野田平吉] 등 군부와 정계의 인물들을 열석시켜 회의를 하는 자리에 몽양을 맞아들였다. 일본 군국주의 수뇌부의 일부 인물이 모인 장소에 들어서자 몽양도 응분의 태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다나카 남작이 “우리 일본은 천하무적인 막강한 3백만 병력이 있다. 해군 함대는 사해(四海)를 휩쓸고 있다. 조선인들은 일전을 벌일 용기가 있는가? 만일 조선인들이 끝까지 반항한다면 2천만명 정도의 조선인들쯤이야 일시에 몰살해버릴 수도 있다”며 위협적인 언사를 토했다. 그러나 몽양은 그의 허장성세(虛張聲勢)를 파악하고 자신감 있게 “그대도 글을 읽는 사람이면 삼군지수(三軍之帥)는 가탈(可奪)이언만 필부지지(匹夫之志)는 불가탈(不可奪)이라는 말의 진의를 알 것이다. 2천만 인구를 일시에 다 죽일 수도 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 여운형의 목을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명의 혼까지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나의 마음까지 벨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하물며 내가 지닌 굳은 조국애의 일편단심과 독립정신까지 벨 수가 있겠는가?”라고 당당히 변설을 늘여나갔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다나카 남작은 “조선은 자치를 하여 일본과 제휴하는 것이 제일 현명한 일이다”고 전제하고 이른바 ‘다나카 플렌’이란 대륙진출 정책을 낱낱이 설명하면서 “조선이 일본과 제휴하면 부귀를 누릴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무자비한 탄압이 있을 뿐이다. 만세를 불러서 독립이 될 줄 아는가? 또 일본이 허락할 줄로 아는가?”라고 윽박질렀다.
몽양은 다나카 남작의 억지 음성에 비웃음을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호화롭기를 세계에 자랑하던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에서 물 위로 1백분의 9밖에 안 보이는 빙산덩이를 작다고 업수이 보고서는 물 속에 잠긴 10배 이상의 큰 덩이를 생각하지 않고 돌진하다가 빙산에 부딪혀서 배 전체가 침몰되고 말았다. 그대들은 이와 같은 만용의 어리석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선인들이 부르짖는 독립만세는 물 위에 나온 소부분의 빙산이다. 모시(侮視)할 수 없는 것이다. 모시하면 세계인류의 정의에 부딪쳐 일본은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다나카 남작이 발끈하여 “일본이 망하면 동양 전체가 망한다”고 외치자 몽양은 차분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조선 속담에 초가삼간이 다 탄대도 빈대 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말이 있다. 동양이 다 망하여도 일본이 망하는 것을 통쾌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조선민족의 솔직한 심정이다”라고 쏘아붙였다. 다나카 남작은 불쾌한 기분이 들어 “조선은 일본의 은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꾸짖듯 말했다. 그러나 몽양은 ‘다나카 플랜’이 얼마나 위험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정책인지 자세히 논박하면서 다나카 남작에게 “일본은 남방의 손문(孫文)과 협력하라”고 제의했다. 이에 다나카 남작은 “우리 일본은 북방의 단기서(段淇瑞)·장작림(張作霖)과 협력한다”고 대답했다. 몽양은 “자라나는 남방의 손문과 손을 잡지 않고 무너져가는 북방의 수구파와 협력하는 것은 일본 대외정책의 큰 오류다”고 비판했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청도(靑島) 주재 일본영사 유이 가츠케[由比邪気]가 대화에 끼어들며 “그대가 지치운동을 원치 않거든 청도로 와서 일본과 중국 양국간의 조화를 위해 일해주기 바란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몽양은 “일본이 침략근성을 버리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이 간다 해도 중·일 양국의 조화란 바랄 수 없다”며 가볍게 거절했다.
일본 제국주의 당국은 몽양에게 아카사카이 황궁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곳은 국빈이 아니면 외국인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곳이며, 일본인도 대신급이 아니면 참관할 수 없는 일본의 황궁이었다. 비원 안에서 오찬의 대접까지 받고 돌아나오면서 몽양은 참관 소감을 묻는 신문기자의 질문에 “맹자(孟子)에 보면, 예전에 주(周) 문왕(文王)에게 70만리의 동산이 있엇는데 꼴 베는 이가 들어가고 꿩 잡는 이가 들어가서 문왕이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니 백성들이 동산이 작다고 하였고, 제(齊) 선왕(宣王)이 40방리(方里)의 동산을 가졌는데 사슴 죽인 놈을 살인죄와 같이 벌하여 임금이 혼자 즐겨하니 백성이 동산이 너무 크다고 하였다고 했다. 만일 일본에서 성군정치(聖君政治)가 있다면 이런 곳을 모든 백성에게 개방하여야 할 것이다”고 비난하였다. 또 미즈노 총감을 만나 악수를 나누면서 “경성역에서 강우규(姜宇奎) 동지가 던진 폭탄에 얼마나 놀랐는가?” 하고 담대한 질문을 던졌다. 미즈노 총감이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어디로 둘지 모르고 어색해하다가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 하고 물었지만 몽양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야말로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몽양은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어려워질 것과 조선이 반드시 자주독립해야 되는 까닭을 역설하고, 이는 우주자연적 불변의 법칙이며 신이 명하는 민족의 권리라고 주장했다. 미즈노 총감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고, 몽양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논쟁에서 미즈노 총감이 거듭 수세에 몰리자 영어로 말을 바꾸는 것이었다. 몽양도 영어로 맞받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것은 동양 평화를 파괴한 조짐”이라고 주장하며 미즈노 총감의 궤변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체신대신 노다는 몽양 일행을 초청하여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솔직히 말하면 그대가 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倂呑)한 것은 일본이 살기 위해 그리 한 것이다. 일본의 생사가 달린 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일본은 그대로 내놓을 수 없다. 그대가 꿈꾸는 일은 망상에 불과하다. 그대의 연설이 얼마나 웅변이요, 그대의 이론이 아무리 철저하여도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수 없다. 조선이 독립을 하려거든 실력을 길러서 싸워야 한다. 생명을 희생해서 독립을 쟁취하라. 거저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몽양은 오히려 얼굴에 화색을 띠며 즉석에서 “내가 동경(東京)에 와서 오늘까지 낙망했다. 아무것도 볼 만한 것이 없고 성취한 것이 없어서 허행(虛行)을 하게 됐다고 생각했더니, 오늘 이 자리에서 비로소 일본에 제대로 된 인물을 하나 발견한 것이 내가 동경에 온 소득이다. 일본인 중에 그대가 유일하게 큰 인물이다. 그대는 일본인답지 않게 가장 인간적이요, 거짓이 없고 매우 양심적인 참말을 하였다. 내 마음이 상쾌하다”면서 돈지(頓智)의 웅변을 서슴없이 토했다. 노다는 기가 막혀서 “내가 밑졌다”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정열적 활동으로 1919년 11월 27일 저녁에 동경 제국호텔에서 5백여명의 세계 각국 특파원과 외교관들이 모여들어 기자회견이 열리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몽양은 조선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과 독립운동의 필연적인 명분을 주장하는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었다. 이 연설의 본론은 몽양이 한국어로 한 것을 장덕수가 일본어로 통역했고 마지막 외국인 기자와의 문답에는 영어로 답변하였는데, 연설 도중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다음날에 경시청의 특별 승낙으로 각 신문에 그의 연설이 번역·보도되었는데, 일본 의회 귀족원과 중의원·대의원들은 몽양의 일본 방문을 추진한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하며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이번에 동경에 온 목적은 일본 당국자와 그외 식자(識者)들을 만나 조선 독립운동의 진의를 말하고 일본 정부의 의견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 각원(閣員)들과 식자 제군들과 간격 없이 의견을 교환하게 된 것은 유쾌하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는 독립운동이 평생의 사업이다. 구주전란(九州戰亂)이 일어났을 때 나와 우리 조선이 독립국가로 대전(大戰)에 참가하지 못하고 동양 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우두커니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이 심히 유감스러웠다. 그러나 우리 한국민족의 장래가 신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시기가 반드시 오리라고 자신했다. 그러므로 나는 표연(飄然)히 고국을 떠나 상해에서 나그네로 있었다.
작년 11월에 대전이 끝나고 상해의 각 사원에는 평화의 종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신의 사명이 머리 위에 내린 듯하였다. 먼저 동지 김규식을 파리에 보내고 3월 1일에는 내지(內地)에서 독립운동이 돌발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곧 대한민족(大韓民族)이 전부 각성하였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 해방, 부인 해방, 노동자 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새벽이 어느 집에서 닭이 울면 이웃집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 것이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적으로 발각된 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이다.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평화와 행복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과거의 약탈, 살육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신의 뜻이다.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로 달려나가 평화족 천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명이다. 우리의 선조는 칼과 총으로 서로 죽였으나 이후로는 서로 붙들고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은 세계의 장벽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에 일본이 자유를 부르짖는 한국인에게 순전히 자기 이익만을 가지고 한국 합병의 필요를 말했다.
첫째, ‘일본은 자기방위를 위하여 조선을 합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차제(此際)에 무너진 이상 그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조선이 독립한 후라야 동양이 참으로 단결할 수 있다. 실상 일본의 의도는 이익을 위했던 것이었을 뿐이다.
둘째, ‘조선은 독립을 유지할 실력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과연 병력이 없다. 그러나 이제 한민족은 깨었다. 열화 같은 애국심이 이제 폭발하였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써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하려는 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면 조선에는 적이 없다. 서쪽 이웃인 중화민국은 확실히 조선과 친선할 것이다. 일본이 솔선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는 날이면 조선은 마땅히 일본과 친선할 것이다. 우리의 건설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을 다스리는 국가일 것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적 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다. 평화란 것은 형식적 단결로는 성취하지 못한다. 이제 일본이 아무리 첩첩이구(睫睫利口)로 일중친선(日中親善)을 말하지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오직 정신적 단결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동양인이 이런 경우에 서로 반목하는 것이 복된 일인가? 조선 독립문제가 해결되면 중국문제도 용이하게 해결될 것이다. 일찍이 조선독립을 위하여 일청전쟁과 일로전쟁을 했다고 하는 일본이 그때의 성명을 무시하고 스스로 약속을 어겼으니, ‘한(韓)·화(華)’ 두 민족이 일본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독립은 일본과 분리하는 듯하나 원한을 버리고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함께 나가고자 하는 것이니 진정한 합일(合一)이요, 동양평화를 확보함이며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제일의 기초이다. 우리는 꼭 전쟁을 하여야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싸우지 않고서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화를 못 얻을 것인가? 일본 군정(軍政) 인사들은 깊이 생각하라.”
몽양의 일본 방문은 독립운동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적도(敵都) 한복판에서 민족국가 건설의지를 당당히 밝힌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었다. 몽양이 일제에 매수되었다고 주장했던 상해임정의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등은 몽양의 일본행이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정정했다. 박은식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몽양의 일본행이 ‘도일(渡日) 선전’ 활동이었다고 기술했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개인자격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의 외교부 차장 직책을 맡은 바 있으므로 임시정부의 위상을 높인 효과도 있었다. 아울러 몽양 개인으로서는 독립운동 진영에서 핵심인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상해로 돌아온 몽양은 러시아·중국의 사회주의자들과 자주 접촉했다. 당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소비에트에 우호적 입장이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었지만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와는 무관했다. 따라서 조선의 독립을 지지·후원할 승전국은 없었다.
그런데 1917년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정부는 약소민족에 대한 이념적·재정적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더구나 러시아혁명의 중심에는 민족과 계급의 해방으로 평등한 세계·국가·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념이 깔려 있었다. 또한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투쟁하기 위해 일어났으므로 압박 속에 신음하던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 진영으로서는 설득력과 호소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몽양은 1920년 이동휘·김립(金立)·김만겸(金萬謙) 등의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참가했다. 그러다 상해파가 소령정부의 지원금 60만원을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지자 상해파와 갈라섰고, 안병찬(安秉瓚)·조동호·김단야(金丹冶)·박헌영(朴憲永)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참가했다. 이 무렵 몽양은 최초로 마르크스의《공산당선언》을 번역하고 부하린의《공산주의 ABC》, 영국 노동당 관계자의《직접행동》등을 번역해 만주와 국내에 배포했다.
그러나 몽양은 마르크스사상가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였다. 몽양에게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과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선택의 하나였다. 몽양이 보기에 파리강화회의는 제국주의국가의 전후 식민지 제분할회의에 불과했다. 자본주의국가에 대한 체험적 실망은 몽양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뒷날 몽양은 노농(勞農) 독재와 보수적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 대안을 찾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공산주의와 광의의 사회주의가 1920년대 이래 1940년대까지 혼재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물론 그 후에도 마르크스나 레닌 이념을 정확히 인식하고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착취와 수탈에 반대하면서 평등사회를 건설한다는 점에 끌리고, 나아가 해방 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수준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몽양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기준으로 볼 때는 민족주의자였다. 몽양 자신은 러시아의 레닌주의, 중국의 삼민주의와 대비하면서 조선에서는 ‘여운형주의’라고 자신의 이념정향을 밝히면서, 민족주의적인 것이 ‘조선해방’의 첩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22년 초반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 말기에 열린 워싱턴군축회의에 맞서 열린 회의다. 이 대회에는 몽양을 비롯하여 김규식·이동휘·현순(玄楯)·김철 등 54명의 조선대표가 참석했으며, 몽양으누대회 운영의장단에 뽑혀 개회식 연설을 했다. 몽양은 ‘조선의 혁명운동’이란 보고를 통해 조선인이 상해에서 민족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한 회의(1923년의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몽양은 “조선에서 계급운동은 시기상조다”, “공산주의자들도 현 단계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상해임시정부는 개조할 필요가 있다” 등의 주장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몽양은 앞서 열린 워싱턴회의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우사 김규식도 토론과정에서 워싱턴회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뒤 극동민족대회에서 동아시아 인민이 단결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조선의 독립이 러시아의 원조로 틀림없이 성취되리라고 밝혔다. 몽양 여운형 자신도 이 대회에서 여러 영향을 받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몽양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깊은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극도민족대회에서 몽양은 러시아혁명의 지도자인 레닌과도 두 번 만났다. 레닌은 조선이 농업국가이며 식민지 상태이기 때문에 먼저 민족해방운동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하애 하며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자들과도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양은 민족해방운동을 무엇보다 강조한 레닌의 말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그 밖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 러시아 공산당 간부들도 만나 그들의 신념과 열정을 체감했다.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귀환한 몽양은 임시정부 개조운동에 나섰다. 몽양이 보기에 당시 임시정부는 명칭만 거창했을 뿐 내실이 별로 없었다. 몽양은 해외 동포사회의 주요집단 대표들을 모아 민족해방운동 과정 전체를 되돌아보고 임시정부가 명실공히 민족해방운동의 사령탑으로 기능하게끔 개조하려고 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해외의 70여군데 민족운동단체 대표자 100여명이 국민대표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를 그대로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개조할 것인가, 아예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체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통일적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체 마련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1919년경부터 몽양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의 반제투쟁(反帝鬪爭)의 연장선에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민족해방이 조선의 독립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 연대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1917년경부터 상해에서 조우한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손문(孫文), 극동민족대회에서 함께 활약했던 중국 공산당의 간부 구추백(瞿秋白) 등 중국 국공합작(國共合作)의 핵심인물들과는 친밀한 관계였다.
몽양은 조선과 중국간의 연대를 위해 1921년 중국인 오산(吳山)을 비롯해서 윤현진(尹顯振)·조동호와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했다. 중한호조사에는 훗날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모택동(毛澤東)도 있었다. 1925년에는 북경주재 소련대사 카라얀을 만나 중국혁명을 위해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카라얀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몽양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을 매개하면서 국공합작 조정자의 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몽양은 이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兩黨)으로부터 당원대우를 받는 유일한 조선인이 되었다. 몽양은 중국이 국공합작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다면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결정적 전기가 올 것이라고 믿어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1927년은 중국의 북벌(北伐) 성공과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조선의 해방에 대한 희망도 보이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러나 상황은 한순간 뒤집혔다. 장개석(蔣介石)이 4·12상해쿠데타를 일으켜 총구를 공산당에게 돌린 것이다. 중국혁명의 지평선에 먹구름이 뒤덮인 1928년 몽양은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몽양은 주로 체육을 맡아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여 필리핀·인도네시아 등으로 원정여행을 다녔다. 마닐라에서는 아시아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다가 현지 경찰관들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상해로 돌아온 몽양은 1929년 7월 일본경찰대에 피체되어 16년만에 수인(囚人)의 몸으로 조국에 되돌아왔다. 반일(反日)·반제(反帝) 연설이 빌미가 된 것이다. 몽양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했다. 몽양이 출옥한 당시 조선에서는 대중운동이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1925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조직되어 공산주의운동이 확산되고, 노동·농민·청년·부녀운동 등 대중운동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반면 민족협동전선을 목표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해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가 1931년 해소된 뒤 민족주의 진영은 급속히 내부분화를 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설 땅이 좁아졌고, 이른바 개량적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화의 경향을 노골화했다. 그들은 자치운동·내선일체·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족운동 진영을 내부에서 붕괴시키면서 일제에 대한 투항과 변절을 서슴지 않았다.
출옥 후 몽양은 합법적 수단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길로 나서기로 했다. 때마침《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서 몽양을 사장으로 영입했다.《조선중앙일보》는《동아일보(東亞日報)》·《조선일보(朝鮮日報)》와 함께 3대 신문으로 일컬어졌다. 사옥은 당시 주소로 경성부 견지동(堅志洞), 현재 농협 서울지부 자리였다.
《조선중앙일보》에는 쟁쟁한 인물들이 몰려와 있었다. 주필엔 이관구(李觀求), 편집국장에 김동성(金東成), 영업국장에 홍증식(洪增植)이 있었다. 그 밖의 편집진용에 문학담당 이태준(李泰俊)·김남천(金南天)·윤석중(尹石重) 등과 정치·경제 해설 고경흠(高景欽)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위에서 직공·기자·간부에 이르기까지 정치범·사상범 등 전과자가 많았고, 체육계에서도 기라성 같은 인물이 포진했다.
《조선중앙일보》는 일제 식민통치와 친일·반민족행위자는 가차없이 비판했으나, 노동자·농민·소자본가·서민·학생 등에게는 용기와 격려와 애정을 아낌없이 쏟았다. 또한 직접 수재나 화재현장에 나서 피해자들을 돕고 위로했다. 세간에서는《동아일보》사장 송진우(宋鎭禹),《조선일보》사장 방응모(方應謨)와 몽양에 대해 이런 말도 나돌았다.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끄덕끄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조선중앙일보》는 총독부의 정책에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총독부가 이른바 농촌진흥책의 하나로 ‘자작농(自作農) 창설령’을 내리자, 그 허구성을 빈박하면서 식민통치하에서 자작농이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창설령은 조선 농민들을 기만하여 더 많은 식량을 수탈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공격했다.
《동아일보》·《조선일보》가 역점을 두어 벌이던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과 ‘브나로드운동’도 몽양은 탐탁치 않게 생각하여 비판했다. 이런 운동은 식민지문제의 본질을 덮어둔 채 개량적이며 타협적인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사실상 일제의 자력갱생·농촌진흥책이란 위장된 술책에 협조하는 것이라고 속셈을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1934년 몽양은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의 회장에 추대되어 1937년 해산될 때까지 회장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도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 회장직을 맡았다. 몽양 주위에는 운동선수와 젊은이들이 항상 몰려들었다. 지금 체육계의 원로이거나 작고한 사람 중 몽양을 따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다. 육상·농구·권투·역도·유도계의 원로들은 모두 몽양을 추종했고, 한국 IOC위원을 지낸 사회학계의 선구자 이상백(李相伯) 동아시아문화연구소장 등 수많은 인사가 몽양을 추종했다. 이것은 몽양 자신이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하고 스포츠로 단련된 신체를 가지기도 했지만, 스포츠를 통해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하려는 남다른 스포츠관 때문이었다.
1936년 8월 손기정(孫祺貞)이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1회 올림픽 대회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한 낭보가 한반도를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제 마수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던 조선민족에게 그 소식은 민족적 울분을 씻어주는 더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조선중앙일보》는 호외를 발간했고, 신문들은 조선을 빛낸 손기정 선수의 쾌거를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8월 15일《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말소하는 사진을 실었고, 10일 뒤《동아일보》에서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발행했다. 이 사건으로《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고,《조선중앙일보》는 자진폐간으로 문을 닫았다. 4년여에 걸친 몽양의《조선중앙일보》시절은 이로써 종막을 고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더욱 발악적으로 파쇼체제를 강화했다. 조선총독부는 민족지도자들에게 친일간담회와 강연·방송·국방헌금·신사참배·학병지원 권유를 강요했고, 거의 대부분이 이에 응했다. 일제에의 협력과 변절을 거부하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 오소리처럼 땅굴을 파고 사는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몽양에게도 혹독한 시련이 다가왔다. 일신의 안일을 위해서는 세상사와 담을 쌓고 은둔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동면(冬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하활동 자체를 완전 중단할 때 가능한 방법이었다. 몽양으로서는 그것은 식물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몽양은 일제(日帝) 당국의 회유와 협박을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을 때 몽양은 이렇게 대응했다.
“공원을 꾸미는 데 사쿠라도 심고 소나무도 심고 무궁화도 심고 산도 만들고 못도 만들고 해야 좋은 공원이 될 것이지, 전부 사쿠라만 심는다면 잘될 것인가? 당신들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고 하는 낙원을 만들려면 일본인만 있어도 안 될 것이요, 조선인도 중국인도 다 같이 생존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빗길이었다. 아런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몽양은 1940년대 초반 일본을 다섯 번 방문했다. 몽양으로서는 일본의 고위급 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한 고급정보를 획득하고 국내에서의 신변위협을 모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제로서는 몽양을 통해 장개석·왕정위와의 화평교섭을 매개하려고 했다. 몽양은 이를 완곡하게 거부했다.
몽양은 일본에서 고노에[近衛文發] 전 수상을 만나기도 하고, 우가키[宇垣一成] 전 조선총독과도 회담을 가졌다. 이들과의 접촉에서 몽양은 자신을 대(對)중국 화해공작에 이용하려는 일제의 내심을 비켜가면서, 당시 일본정계가 처한 전국적(戰局的) 상황을 알 수 있었고, 일제가 차츰 패망의 길로 들어섬을 투시할 수 있었다.
몽양은 일본을 왕래하면서 청년학생들을 만나 조국의 앞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몽양은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민족해방운동가로서의 투쟁적 경력과 호쾌한 사내대장부의 훤칠한 용모, 한 번 말문을 열면 현하지변(懸河之辯)으로 쏟아져 나오는 힘찬 담화, 불같은 애국의 정열 등은 젊은이들이 몽양 주위로 모이게 하는 마술적 힘을 가졌다. 몽양은 청년학생들에게 국내외 정세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제공하고, 일제의 패전·패망논리를 정연하게 전개했다.
몽양이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일본 황제와 독대(獨對)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을 전후해서 한동안 소문이 나돌기도 했으나, 몽양이 소문을 일축해서 그 사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다 1976년 여경구가 죽기 직전 여연구(呂鳶九)에게 털어놓은 것을 여연구가 2001년 말경『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발행)을 펴내면서 밝혔다.
다음은 몽양을 따라 통역담당으로 일본에 간 몽양의 조카 여경구에게 몽양이 일본 황제와 만난 뒤 절대비밀을 강조하면서 전해준 내용으로, 여경구는 이를 몰래 기록했다가 여연구에게 전한 것이다. 중요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여운형:"일본의 황제가 무엇 때문에 조선인 여운형을 만나자고 했는가?"
히로히토:"과연 듣던 바와 같군. 남아(男兒)라더니."
여운형:(재차 같은 질문)
히로히토:"당신이 조선인으로 태어난 게 아깝다."
여운형:"농담할 시간이 없으니 용무가 없으면 돌아가겠다."
히로히토:"당신에게 부탁이 있는데,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을 위해 수고해 줄 수 있겠는가?"
여운형:"할 만한 일이면 하고 못할 일이면 하지 않겠다."
히로히토:"중국에 간 짐(朕)의 사신(使臣)들이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었는데, 일본인을 보내서는 안 되겠으니 나의 사신이 되어달라."
여운형:"목적은?"
히로히토:"중국에 가서 일본군대가 지나갈 길을 빌려달라고 청탁하는 것이다."
여운형:"내가 친일주구(親日走狗)로 나선다면 중국인들이 나를 살려두겠는가?"
히로히토:"그러기에 당신의 수완을 믿는 것이다."
여운형:"친일과 반일은 수화상극(水火相克)이거늘, 일본이 조선민족에게 큰 재난을 들어씌우고 어찌 조선인에게 친일을 설교하는 것인가? 나에게 재능과 수완이 없어 일본 황제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히로히토:"(분노하며) 짐(朕)이 사람을 많이 만나봤으나 너처럼 오만무례한 자는 처음이다. 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거늘, 짐의 황명을 즉시 듣든지 아니면 죽음을 받든지 어느 한 길을 택하라."
여운형:"죽는 게 무서워서야 어떻게 반일을 하겠는가? 이 길에서 이미 많은 조선 사람들이 생명을 바쳤거늘, 앞으로도 독립이 이룩될 때까지 민족의 넋을 지켜 죽는 사람들이 끝없이 늘어날 것이다."
히로히토:"그럼 너는 죽여달라고 청을 하러 짐에게 왔단 말인가?"
여운형:"아니다. 나는 모르는 것을 알려 주려고 왔다. 조선 사람들을 죽일 수는 있지만 조선 민족을 없애지는 못한다. 조선의 인민은 친일주구 몇 놈 때문에 일시적 치욕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 인민은 영웅들을 무수히 낳고 우리 힘으로 치욕을 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다. 그런데 너의 곁에는 이런 진리를 아는 자도 없고 또 알아도 말해주는 사람도 없겠으니 내가 수고로이 온 것이다."
…(중략)…
히로히토:"그대가 조선인인 것이 아깝다. 짐의 신하 가운데 그대 같은 이가 없으니 짐을 좀 도와달라."
여운형:"자기 죄를 뉘우치고 중국과 조선에서 군대를 다 철수시키면 가능할 수 있다."
히로히토:"과연 듣던 바와 같군. (김빠진 소리로 호위병들에게) 길은 내주고 짐을 대신해서 문 밖까지 안전하게 배웅하라. 그리고 여 선생, 오늘 우리가 만난 일은 없던 것으로 하자. 피차를 위해……."
이상이 여경구가 여연구에게 밝힌 내용이다. 여경구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켰다.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 있고 뜻하지 않게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몽양은 여경구에게 함구령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몽양이 도쿄에 가서 다나카와 미즈노를 만난 사실은 이내 널리 알려졌지만, 일본 황제와의 담판은 극비리에 부쳐졌다.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에 대한 일제의 폭압과 약탈은 야수적으로 진행되었다. 폭압의 촉수는 몽양에게도 뻗쳐 왔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총동원체제를 만들었다. 친일파로 이름깨나 날리던 명사들을 동원하여 대동아성전(大東亞聖戰)에 적극 협력할 것을 강요했다. 변절한 최린(崔麟)·윤치호(尹致昊) 등에 의해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이 조직되었다. 민족의 운명은 나날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42년 12월 몽양은 일본 도쿄에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바로 구속되었다. 내용인즉 1942년 도쿄에서 귀국한 후 미국 공군의 도쿄 공습상황과 일본 항공기의 낙후성, 머지않아 일제는 패망한다는 예견을 친지들에게 역설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1943년 몽양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43년 7월 2일에 일제는 몽양을 석방했다. 몽양이 출옥한 다음 날 몽양의 집을 찾은 안재홍(安在鴻)은 몽양의 모습이 너무나 처초(凄楚)했다고 회상했다. 몽양은 안재홍에게 일본 헌병들이 자신을 때리고 매달지 못한 대신 번갈아 달려들면서 전후 90여 시간을 의자에 걸어 앉혀놓은 채 흔들고 잡아당기면서 눈 한번 못 붙이게 하는 건(乾)고문을 하더라고 말했다.
집행유예로 형무소에서 나온 몽양은 일제에 전향하라, 학병권유를 해라, 만주로 가라 등 일제의 강요가 너무나 격심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일제의 폭압이 날로 극심해지자 우익 민족주의계열의 인사들은 친일의 길로 투항했다. 이런 극한상황 속에서 몽양은 감옥 안에서 구상했던 민족해방과 건국의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모험을 감행했다. 비합법적 민족통일전선체 조직에 착수한 것이다.
지금까지 건국동맹(建國同盟)은 1944년에 전격적으로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구상과 준비는 1942년 투옥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몽양은 눈앞에 다가올 해방정국에 대비했다. 곧 해방을 맞아 진공상태에 빠질 민족현실을 감안해서 새로운 조국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또 국내에 진주할 연합국과 상대하기 위해서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몰두했다.
마침내 1944년 8월 10일 해방 직전 국내에서 유일한 민족해방운동 단체이자 건국준비를 위한 유일한 조직체인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다. 몽양을 비롯하여 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조동호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몇몇 공산주의 단체가 있었으나 지역적으로 한정되고 각계각층을 망라하지도 못했다. 이들 조직에도 상당수는 몽양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내에서 전국적 규모로 여러 계층을 포괄하고, 여러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건국동맹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컸다.
건국동맹이 지향하는 바는 두 가지였다. 패망을 앞둔 일제에 강력한 타격을 가하는 것과 다가올 해방을 좀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주의세력을 폭넓게 규합하여 건국사업에 함께 참여하는 민족해방운동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기본과제로 삼았다.
1944년 몽양을 중심으로 한 중앙조직이 구성되었는데, 이기석(李基錫)·김세용(金世用)·조동호(趙東祜)·이상백(李相佰)·이여성(李如星)·허규(許珪)·현우현(玄又玄) 등이 참가하였다. 참가자들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뛰어넘었다. 이어서 지방조직을 만들고 농민·청년·학생·노동자·부녀회·사무원 등 각계각층별 조직도 결성했다. 건국동맹은 지방·부문별 조직을 구축함과 동시에, 임시정부와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등과도 연대해서 민족해방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해외 민족해방운동 단체들과의 연대·연합은 조직적 수준으로 전개되지 못했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동사에 만주·연안·중경에 있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과 연대하려 했고, 일제 패망과 해외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존재를 인식한 상태에서 민족해방 후의 ‘건국’이라는 문제의식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고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치리….’
심훈(沈熏)이 읊었던 그날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찾아왔다. 해방은 민족 내부의 항일투쟁과 수많은 민족적 고투 속에서 왔지만, 일차적으로는 연합국의 군사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민족의 운명을 자력으로 결정할 수 없는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의 엔도[遠藤柳作] 정무총감이 몽양을 불러서 “일본은 패전했다. 오늘이나 내일 곧 발표할 것이다. 당신에게 치안유지권을 줄 테니 일본인들의 생명을 지켜달라”라고 부탁했다.
몽양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① 전조선의 정치범·경제범 즉시 석방, ② 경성의 식량을 3개월분 확보할 것, ③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 것, ④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⑤ 각 사업장 노동자들을 우리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 것 등이었다.
건국동맹은 변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순간에 조직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로 확대·발전시켰다.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추대되었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불문하고 민족적 구심체가 없었던 상황에서 건국동맹이 모체가 되어 신조선 건설을 위한 건준(建準)이 태동한 것이다.
건준은 8월 말까지 남북에 걸쳐 145개 군에 지부를 만들어 치안유지 차원을 넘어서 행정권 장악과 준정부 활동을 하였다. 이들 조직은 대부분 일제로부터 치안·행정 등을 인수받고 각 기관들을 접수하여 자율적인 지방정치의 토대를 구축했다. 미국군이 진주하기 직전인 9월 6일 건준이 모태가 되어 ‘조선인민공화국’을 구성했다.
서울 중앙의 변화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건준 지방지부들은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 시기 건준은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좌익단체라기보다는,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국가건설이라는 민족적 요구와 열망이 따라 민중이 조직한 초기적 행정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생적 민중역량은 미국군의 진주를 맞아 차츰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방된 그날 건준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민족적 공백을 메워줄 주체적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국내에 없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이 이끈 임정은 중경에 있었고, 김두봉(金枓奉)이 주도한 조선독립동맹은 연안(延安)에 있었다. 또 김일성(金日成)과 최용건(崔庸健)이 이끈 조선인민혁명군(朝鮮人民革命軍)은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있었다. 이들이 설사 고국으로 급히 온다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서울운 물론 지방에까지 건준이 재빨리 조직된 것은 한국인들의 독립의지와 자주성, 자치능력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건준은 선언과 강령을 통해 자주독립에 기초한 새로운 나라와 정권을 수립할 것을 내걸었다. 건국을 준비하되 반민족적·반민주적 세력을 배제한 민족통일전선을 결집해서 새로운 정권의 수립을 원조·후원하는 신국가 건설의 산파역을 자임한 것이다. 건준의 임무는 한시적이며 과도적인 것으로 명시했지만,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인민위원을 선출하여 이들로 하여금 강력한 민주주의정권을 빠른 시일 내에 구성한다고 못 박았다. 해방정국의 첫 단추는 이렇게 해서 건준에 의해 끼워졌다.
미국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고 조선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된다는 것은 해방된 지 닷새 만은 8월 20일에 알려졌다. 해방의 감격에 들떠 있던 대중에게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몽양은 미국군의 진주 이전에 건준을 모태로 국내의 민족해방운동 역량을 총집결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한 상태에서 미국군을 맞기로 구상했다. 여기서 몽양의 구상을 한번 살펴보자.
“혁명가는 먼저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 비상조치로 생긴 것이 인민공화국이다. 인민이 승인한다면 인민공화국과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 당초에 연합국이 진주한다면 국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인민공화국이다. 약체이면 보강하여 난국에 처할 수 있게 하겠다. 혁명 초에 혁명단체가 조직하는 것은 손문(孫文)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만지(靑天白一滿地) 홍국기(紅國旗)도 국민의 총의(總意) 집결로 제정된 것은 아니다. 혁명 지도자들의 투철한 의지와 정열에서 나온 것이다.”
1945년 9월 6일 건준의 주최로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개최되어 몽양은 임시의장을 맡았다. 대회에서는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했고,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상정·통과되었다. 이로써 건준은 인공(人共)으로 발전적 해체를 맞았다. 이어서 9월 10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선언과 강령, 그리고 인공 부서를 결정했다. 아울러 일제 잔존세력의 완전 구축(驅逐)과 우리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외세와 반민주적이고 반동적인 모든 세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실현할 것을 선언했다.
이날 발표된 인공의 부서별 책임자를 보면 주석에 이승만(李承晩),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허헌(許憲), 내정부장에 김구, 그 밖에 외교부장에 김규식, 제정부장에 조만식(曺晩植), 군사부장에 김원봉(金元鳳) 등이었다. 인공은 좌익계는 물론 우익계까지도 광범하게 끌어안으려 했고, 국내 세력뿐만 아니라 해외 혁명세력도 포괄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인공은 창립 직후부터 우익·미군정, 심지어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고 거부되었다. 인공을 통해 정권수립을 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몽양은 정당조직으로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11일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이 태동했다. 인민당은 “각계각층의 인민대중을 포섭·조직하여 완전한 통일전선을 전개하고, 관념적·반동적인 경향을 극복·타파함으로써 현 단계의 과제인 완전독립과 민주주의국가 실현”을 완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인민당은 결성 당시부터 민족통일전선 구축을 가장 중요한 현실적 사명이라고 규정했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사무원·소시민만으로……농민·노동자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반동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조선인민당 창당인사에서 몽양은 이렇게 외쳤다. 몽양의 인사말처럼 인민당은 결성 당시부터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당의 가장 핵심적인 어젠다로 삼았고, 이는 몽양의 노선 바로 그것이었다. 인민당은 찯당 후 몽양의 노선에 따라 정당간 합작과 이승만·백범과의 합작을 모색했으나, 정당과 이승만과의 합작은 일찌감치 파탄으로 끝났다.
인공이 선택할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은 환국한 중경의 임시정부와 정부 대 정부로 합작하는 것이었다. “인공과 임정이 합작한다면 이는 국내와 국외의 ‘정부’가 합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좌익과 우익의 합작이 될 것이다. 만약 양 ‘정부’의 합작이 성공한다면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미군정 역시 통일·단결된 ‘정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 합작을 모색하는 측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 길이 가장 현실적 해결방법이며 민족 내부에서 정권을 수립하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임정은 인공 측의 수차에 걸친 합작제의를 묵살했다. 임정은 그들의 정통성을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8·15광복 직후 백범은 임정의 총사직 및 해산을 주장한 중경 임정의 일부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국무위원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임정은 과도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과도정부 역할을 수행할 것을 고수했다. 그리고 인공의 제의에는 당 대 당의 통합이 아니라 인공이 임정의 조직 속으로 들어오라고 응수했다.
인공과 임정의 합작에 의한 과도정권의 수립은 민족 내부에서 주체적으로 과도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몽양은 당시의 정세로 봐서는 좌와 우 어느 일방에 의해 정권이 수립될 수 없다는 인식하에 인공과 임정의 합작으로 해방정국의 새로운 중심축을 형성하고자 전력을 다했으나, 그의 노력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5년 말 좌우의 분열과 대립은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가 대두하자, 좌우는 내전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무엇보다 임시정부 수립을 중요사항으로 채택했고, 미·소 공동위원회와 조선의 정당·사회단체 참가 같은 사항이 중요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들 사항은 보도도 하지 않은 채 신탁통치 부분만 클로즈업해 반탁의 성난 물결은 한반도를 뒤덮을 기세였다.
신탁통치는 몽양도 반대했다. 그러나 몽양은 해방공간에서 세계사적 안목이 가장 넓은 정치인이었다. 몽양은 신탁통치에 원색적 감정을 누르고 냉철하려 했다. 어떻게 보면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지 몰랐다. 그는 자칫하면 반탁투쟁이 국제적 고립과 민족분열, 독립의 지연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신탁통치 정국에서 몽양 중심의 인민당에서는 인공과 임정의 통일교섭 대안으로 좌우익 주요정당 중심의 통일교섭을 추진하였다. 인민당을 비롯하여 한국민주당 대표 원세훈·김병로(金炳魯), 국민당 대표 안재홍·백홍균(白泓均), 조선공산당 대표 이주하(李舟河)·홍남표(洪南杓) 등 사이에 회동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46년 1월 7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은 정래 수립될 우리 나라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하게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4당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합의는 매우 주목되는 결정이었다. 만약 4당 모퀴니케의 내용처럼 통일임시정부 수립에 정당·사회단체가 동참하고 정부수립 후 신탁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면 남북 분단정권의 수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민당, 국민당과 조선공산당이 공동성명의 정신을 뒤집어 4당 코뮈니케는 휴지가 되고 말았다.
인공과 임정의 합작, 4당 코뮈니케 등이 모두 실패로 귀결된 후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임정의 우익계와 이승만계열은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이하 민주의원)’을 구성하여 우익세력의 통일을 이루었다. 이에 대항하여 민주의원에 참가하지 않은 좌익·진보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하였다. 몽양은 박헌영·백남운·김원봉·허헌 등과 더불어 민전의 공동의장이 되었다. 이제 신탁국면을 계기로 남한에서는 반탁 대 친탁, 우익 대 좌익의 대립구도가 등장하였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몽양의 발걸음은 바빠졌다. 미·소 공위가 본격화되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전망이 열리면서 몽양은 인민당의 조직을 확대·강화하려 했고, 미·소 공위 지지 및 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몽양의 기대와는 달리 미·소 공위는 미국·소련 사이의 이해가 상충함으로써 5월 8일 무기휴회로 접어들었다. 반탁진영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한 소련의 입장과 반탁진영도 포함시키자는 미군정의 이해대립이 평행선을 그은 것이다. 결국 어떤 조선인도 조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회의에 참석조차 못한 채 회의는 결렬되었다.
미·소 공위가 휴회되면서 우익진영에서는 이른바 자율정부 수립운동을 벌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진영은 미·소 공위의 합의 여부에 개의치 않고 정부를 수립하여 38선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당시 상황에서 통일정부의 수립이 여의치 않으므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내세웠다. 단독정부 수립 구상이었다. 이에 좌익진영은 미·소 양국의 공동지원 없이는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미·소 공위 속개운동을 전개했다.
정국이 이처럼 좌우로 나뉘어 대립과 반목을 전개하는 동안, 미·소 양국의 협의와 내부적 단결로 한반도의 통일과 임정 수립의 길을 찾고자 하는 흐름이 있었다. 우사와 몽양이었다. 몽양은 “민족분열주의와 국제고립주의는 우리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탁치(託治) 수용으로 민족을 분열시킨 좌익진영과 반탁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우익진영을 동시에 비판함으로써 양 진영에 거리를 두면서 중도적 노선을 취했다.
우사와 몽양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입장은 좌우 양 진영의 합작을 모색하는 배경이 되었다. 미군정도 합작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좌우합작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6월 14일 몽양과 우사, 그리고 우익 측의 한민당 총무 원세훈과 좌익 측의 민전 의장단 허헌 등의 좌우합작 4자회담이 열렸고, 이어서 7월 25일 덕수궁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여 제1차 회담이 열렸다.
이후 좌익 쪽에서는 ‘좌우합작5원칙’을 내놓았고, 우익 쪽에서는 ‘좌우합작8원칙’을 제시했다. 좌우 양측이 제시한 합작원칙 가운데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신탁통치문제와 토지 및 중요산업의 처리 등 경제정책문제, 그리고 친일파 청산문제 등이었다.
좌우 양측이 합작원칙에서 의견을 좁히지 못하는 동안 인민당과 공산당·신민당 등 좌익 3당이 합당을 발표하고, 미군정청에서 공산당 간부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자, 대구·경북지역에서 10월항쟁이 발생함으로써 합작운동은 한동안 정체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하는 국면에서도 합작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하여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조화한 ‘좌우합작7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좌우합작의 가장 큰 목표였던 임시정부 수립과 미·소 공위 재개가 반영되었으며, 토지개혁과 친일민족반역자의 처리문제, 정치범 석방과 입법기구 설치 등이 포함되었다.
합작7원칙이 발표되자 좌우익의 대표적 정당인 공산당과 한민당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조선공산당은 합작7원칙의 핵심을 단정(單政) 수립의 도구인 입법기구 수립으로 몰아붙여 비판했으며, 친일파·지주 등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한민당은 토지개혁이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주의원은 합작7원칙에 찬동했고, 백범과 한독당은 좌우합작의 성립이 ‘8·15광복 이후 최대의 수확’으로 보고 합작7원칙에 전면적 지지를 표명했다.
좌우합작7원칙을 수용함으로써 합작운동을 일정한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 몽양은 그 후 공산당과 민전 측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해 사면초가에 빠졌다. 미군정은 좌우합작7원칙 중 입법기구문제만을 부각해 입법기구 수립으로 치달았다. 좌익의 내분과 박헌영노선과의 끊임없는 대립·갈등으로 몽양은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받았다. 환갑을 넘기고도 정정하던 몽양은 1946년 12월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고향인 양평으로 낙향했다.
그해 연말은 몽양에게 정치적 시련과 좌절만 안겨준 채 저물어갔다. 이듬해 1월 몽양은 새해를 맞아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몽양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정치일선에 복귀하여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5월 24일에는 정식으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부위원장에는 백남운·이영·장건상(張建相)이 선출되었다.
창당대회에서 몽양은 3당 활동을 둘러싼 좌익계의 내분을 수습하고 임시정부 수립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근로인민당의 목적과 사명은 친일민족반역자 중심의 단정세력·반동세력의 계획과 음모를 분쇄하고 완전 자주독립을 찾자는 데 있습니다. 노동자·농민만으로 민주조선을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시민만으로도 조선 건설은 불가능합니다. 조선의 건국은 오로지 각계각층이 한데 뭉쳐야 할 것입니다. 미·소 공위 재개의 찰나에 출현하는 우리 당은 과거 3당 합동의 실패를 수십하기 위해 나온 만큼 새로운 역사창조에 노력하여야 합니다.”
몽양은 근로인민당을 조직할 때 남북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의 공동협의체를 구성하고,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통일된 정책과 4개국 원조에 대한 방법과 관계를 협정하자고 제의했다. 이러한 몽양의 제의는 1947년 9월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고 분단의 국제적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근민당 등 중도파 정치인들의 남북지도자회의 소집 요구로 나타났다. 이어서 분단정권 수립이 사실상 확정된 시기에 가서야 남북협상 또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가 이루어졌다. 몽양의 구상은 이렇게 시대를 앞서 갔지만, 세상은 그의 의중을 늦게 깨달은 것이다.
한편 제2차 미·소 공위는 우여곡절 끝에 5월 21일 재개되었다. 미·소 공위는 순조로운 진행을 보여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조선 제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협의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규정에서는 미·소 공위가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의 구성 및 정강과 정책에 관해 한민족의 의견과 요망사항을 청취하고자 하는 바 미·소 공위와 협의를 원하는 정당·사회단체는 우선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좌익진영은 물론 우익진영마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소 공위와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는 임시정부에 참여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협의에 참가할 것을 신청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구성비와 성격이었다. 남한지역의 정당·사회단체 수가 북한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데다, 이들 정당·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한 숫자가 한반도 전체 인구의 두 배가 넘어 유령·사이비 단체에 대한 시비가 그치지 않은 것이다.
몽양은 새로 국가를 수립하는 마당에 친일민족반역자는 마땅히 협의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며 3상회의 결정에 명시된 일제잔재 청산은 국제협정이므로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아울러 유령 단체가 협의대상에 드는 것은 민족적 양심으로나 지식수준으로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비민주적 정당·사회단체를 골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의대상문제로 미·소 공위가 또 다시 공전할 기세를 보이자, 미·소 공위 미국 대표는 소련이 미·소 공위의 협정을 무효로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소련도 성명을 통해 미국이 3상회의 결정을 정확히 실행한다면 미·소 공위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좌우합작위는 미·소 공위에 대해 “공위는 협의대상문제에 신중을 기하고자 시간상 다소 지연되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이때 이 난관을 돌파하도록 미·소 양측을 격려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이며, 동시에 미·소 양측은…조선의 자주성을 좀더 존중해 임정수립에 최선을 다하여 주기 바란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몽양은 미·소 공위의 성공을 간절히 소망했지만 정국은 몽양이 소망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주장을 한 치도 굽히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좌우의 양 진영도 종래의 입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2차 미·소 공위도 이로써 사실상 결렬되고,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회부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단정(單政)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한의 정치지도자 중 몽양만큼 북한을 많이 방문한 사람은 없다. 적어도 1948년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 남쪽의 지도자가 공개·비공개를 떠나 북한과의 관계설정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몽양은 환갑을 맞은 1946년 한 해에 모두 다섯 차례 북한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북한과 일련의 정치적 연대·연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8년의 남북연석회의는 우리 민족사에서 분명 획기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한반도에 두 개의 정권수립이 목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남북연석회의는 분단을 눈앞에 둔 위기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한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노력이었다. 이에 비해 몽양이 38선을 넘나든 1946년은 남북을 둘러싼 기류가 임시정부 수립에 집중되어 있던 국면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몽양은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구체적 설계로 남한 내부에서의 좌우합작과 남과 북의 연대·연합을 구상한 것이다. 따라서 남북연석회의의 발단은 백범이나 우사에 앞서 몽양이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몽양이 남쪽에서 벌인 좌우합작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데 비해, 남북의 연합·연대를 위한 몽양의 노력은 그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면 몽양의 방북(訪北),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몽양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남쪽에서 좌우합작을 완성하고 북쪽과 연대·연합하는 것이 필수라고 보았다. 몽양의 5차에 걸친 북한방문은 결국 좌우합작과 남북연대·연합이라는 몽양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남북연대·연합을 빼놓고는 몽양이 고투한 통일민족국가를 위한 운동의 전체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몽양이 방북해서 논의한 주제는 남한정국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포함해서 민족통일전선과 직결된 문제였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대처, 임시정부 수립, 좌익 3당의 합동, 좌우합작과 3당 합동, 좌익진영의 단결과 몽양 자신의 정계복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몽양이 북한에서 접촉한 인사들 역시 남북연합·연대란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김일성을 비롯해서 김두봉·최창익 같은 조선신민당 관계자, 우익인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천도교계 청우당 관계자들과도 광범하게 접촉했다. 몽양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관계자들과 북한주둔 소련군 지휘관들과도 접촉했다.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몽양은 당시의 정치정세와 미국·소련의 속셈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대내외적 상황 전체를 통찰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에서 몽양만큼 테러를 많이 당한 인물은 없다. 해방되고 만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무려 10여 차례나 테러를 당했다. 1945년 8월 18일에는 계동 자택 앞에서 괴한들에게 곤봉으로 피습받았으며, 9월 7일 저녁에는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오던 중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밧줄로 묶였다가 행인의 구제를 받았다. 1945년 12월 상순에는 배천온천 여관에서 피습받았는데, 사전에 여관을 옮겨 무사하였다. 이듬해 1월에는 창신동의 친구 집에 괴한 5명이 습격해왔으나 출타중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4월 18일 오전 9시에는 관수교에서 괴한들에게 포위되었으나 행인에 의해 구출되었다. 5월 8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몽양에게 수류탄을 던지려던 테러가 사전에 발각됐으며, 5월 하순에는 종로에서 괴한들에게 포위되어 격투가 벌어졌으나 행인에 의해 구출되었다. 1946년 7월 17일에는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교살당하기 직전에 벼락이 낙하하여 도망쳤다. 10월 7일 저녁에는 자택 문전에서 납치 후 풀려났고, 1947년 3월 17일 밤에는 계통 자택의 침실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출타중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같은 해 5월 12일 오후 7시 30분에는 혜화동 로터리에서 승용차에 탑승한 채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5월을 넘기면서 몽양에 대한 암살이 더욱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소문은 정가에 널리 퍼졌다. 특히 제2차 미·소 공위가 성공적으로 전개되어 통일민족국가가 수립될 경우 몽양이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와중에 6월 28일 남한주둔 미국군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 장군은 이승만의 테러음모를 비판하는 공개 서한을 띄웠다. 몽양이 암살되기 20일 전이었다. 하지 장군은 서한을 통해 이승만 진영이 여러 건의 정치암살을 계획하고 있으며, 테러행위와 경제교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7월 18일 저녁 몽양은 미·소 공위 미국 수석대표인 알버트 앨런 브라운 소장을 찾아가 자신에게 날아든 암살 협박편지에 대해 의논했다. 몽양을 만난 브라운 소장은 몽양과의 면담내용을 비망록으로 만들었다. 브라운 비망록은 몽양을 만난 마지막 미국인의 기록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반세기 가까이 묻혀 있다가 10여년 전에 공개되었다.
‘하지 장군을 위한 비망록’에서 브라운 소장은 몽양이 어제(7월 18일) 저녁 자기 숙소를 방문해서 미·소 공위의 장래전망에 관해 질문하면서 “나의 생명이 위험하다. 나는 오늘, 즉 7월 19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향리로 가려고 한다. 경찰이 더는 나 혹은 우익이 아닌 어떤 개인도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다고 했다. 브라운 소장은 또 몽양이 “미국군 사령부는 이승만을 추방해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승만은 현재 남조선에서 모든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했다.
운명의 날인 7월 19일 아침, 몽양은 성북동 김호(金乎) 과도입법의원의 집으로 가서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조선사정소개회 소속 김용중(金龍中)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준비해 간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친필로 쓴 석 장짜리 영문편지로, 이 편지 원본이 어떻게 해서인지 남한주둔 미국군 당국에 압수되어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문서상자 속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다가 10여년 전 공개되었다.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가령 위의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 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그 반대극으로 가려 하고 있소. ‘좌익’ 내지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이다. …친애하는 김 선생, 선생에게 하는 말이오만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성북동 김호의 집에서 나온 몽양은 명륜동의 임시거처인 정무묵(鄭武默)의 집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고 혜화동 로터리까지 약 150미터에 이르는 비포장길을 승용차를 타고 천천히 나왔다. 승용차가 골목을 벗어나 포장된 로터리로 들어섰을 때, 맞은 쪽에서 경찰차 한대가 갑자기 달려왔고, 몽양의 승용차 뒤편으로 누군가 뛰어오른 순간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낮 1시 15분이었다.
승용차는 서울대병원으로 질주했다. 그러나 의사가 미처 손을 써보기도 전에 몽양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아버지가 길바닥에서 쓰러질지라도 얘들아, 너희들은 울지 말고 일어나 싸워라!”
평소 자식들에게 자주 하던 말 그대로 몽양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19세 청년 한지근(韓智根)의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사건은 이미 경찰과 암살범의 합작으로 철저히 조작된 상태였다. 몽양에 대한 테러와 암살에는 수많은 개인과 단체가 관련되었다. 몽양의 죽음 뒤에는 음험한 커넥션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악질적인 친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전향해서 일본 경찰대의 밀정 노릇을 하던 인물들과 경찰관을 비롯한 각 부문의 친일파로 구성되었다. 다음으로 극우파시즘으로 무장한 세력, 이들 신념의 한 축은 극단적 반공이었고, 다른 한 축은 일본 군국주의의 세뇌를 받은 국수주의였다. 마지막으로 단정세력이 있다. 이들은 미·소 공위의 파탄과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달린 자들이었다.
모든 테러와 암살이 그러하듯 하수인이 중간지령을 내린 인물 이상을 안다는 것은 곧바로 사형감이다. 한국 현대사를 견인한 지도급 인물의 암살배후는 따라서 언제나 미궁으로 끝났다. 그러나 앞서의 세 집단은 조직적으로 범행을 계획·실행했으며, 은폐도 공모(共謨)했다.
미군정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하지 장군은 미국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뒤 남한에 들른 웨드마이어 장군과 가진 회담에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운형은 암살될 때까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다. 그는 흰 백합이 아니라 대단히 음흉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정치적 평화를 위해 그를 포섭하려 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고 감쪽같이 배반했다.”
몽양의 장례식은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에서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운구행렬은 수많은 군중에 에워싸였고 상가는 철시했다. 거리는 통곡의 울음바다였다.
몽양이 62세에 걸친 전 생애의 마지막에 누운 곳은 북한산 자락 우이동 태봉이다.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비원에 따라 그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처리하여 철제관에 뉘였다. 벌써 60여년이 다 되어 간다. 2005년 3월 1일 몽양에게는 수여된 훈장이 고작 2등급인 대통령장이었다. 역사의 무게를 다는 저울추의 눈금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은 해방 후 한반도에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대립, 좌익과 우익의 사상·이념적 대립,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적 대립이라는 세 가지 대립구도를 극복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몽양은 이처럼 상극적 대립구도를 매개하기 위해서 폭넓게 양측을 오간 인물이다. 몽양에게 지지와 비판을 보내는 것은 몽양의 활동 가운데 어느 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 데서 오는 평가이기 쉬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몽양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민족 내부의 통일·단결로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몽양은 또 합법정치공간에서 활동한 대중정치인이었다. 그는 비합법적 조직운동가나 혁명가가 아니었다. 좌우합작운동을 통해서 그는 일정한 원칙하에 타협과 양보, 그리고 설득의 노력을 다했다. 몽양은 대외적으로 민족자주의 정신을 강조했지만 접근방식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몽양 자신은 미국과 소련을 언젠가는 물러나갈 손님으로 대접했으며, 러시아에 레닌주의가 있고 중국에 손문의 삼민주의가 있듯이 조선에서는 ‘여운형주의’로써 해방된 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몽양은 스스로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규정했다. 이것은 몽양의 사상과 이념의 모호성과 불명확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시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이념적 접근보다는 민족적 동질성의 토대 위에서 구체적 실천이 중요했음을 나타낸다. 몽양의 반대파나 비판자의 눈에는 몽양의 그런 모습이 기회주의적으로 보였거나 위장적인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은 있다. 결국 이데올로기 전장(戰場)이 되어버린 한국 현대사는 한 시대의 탁월한 정치지도자인 그의 설 자리마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