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힘든일이 많아 아빠가 보고싶은 날이 많네요.
아빠 생각 나서 끄적여 봅니다..
아빠가 43세가 되던 해에 제가 태어 났어요.
엄마도 아빠도 국민학교 중퇴.
밥 굶고 옷 못입고 집없이 살지 않았지만
넉넉하지는 않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도 전 엄마 아빠 나름대로 최대한 베풀어 주셨고 아껴 주신것 같아요.
위로 14살 차이나는 오빠가 있긴 하지만 오빠가 평생 받은 사랑보다
제가 어릴 적 받았던 사랑이 더 클정도로..
아빠는 60세가 넘으셨는데도 딸 대학 등록금 내야 한다며
큰 목욕탕에 딸린 이발소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깍아주시느라 새벽 5시부터 밤까지 일하셨어요.
그래도 다행인게
앞에 나가기 좋아하고 누군가 이끌고자 하는 성격을 가진 덕분에
대학 생활중에서 1학년 1,2학기를 제외하고
대의원, 총학생회 간부가 되어 등록금의 절반을 장학금으로 받으며 자랐습니다.
남들보다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부끄럽지 않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처음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네요..
누구보다 기뻐 하던 아빠께서는 제가 사회인이 되던 해..
5월달
감기가 걸린것 같다며 동네 의원에서 주사를 맞고 쇼크로 이발소에서 쓰러지셨어요.
다행히 이발소에 같은 교회 집사님이 계셔서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었죠.
종합병원에 한달정도 입원하시게 되었네요..
병원에선 그냥 감기라고
퇴원 2달 후 어느 금요일
아빤 또 그 때 그 감기증상을 보이셨어요
의원에서는 이번에도 주사 처방하고 쓰러질까 무섭다며
종합병원으로 갔으면 한다네요.
아빤 분명 주사 한대 맞고 돌아온다며 아침에 나가시더니 오지 ㅇ낳으셨어요.
종합 병원에서는 엑스레이를 보며
"어? 이상하다? 더 커졌네?" 라는 말을 하며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의 대학병원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엄마 아빠 없이 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대학병원에 아빠를 보러갔는데
하루만에 살이 얼마나 많이 빠진건지
몇개월 동안 투병한 것만 같은 힘들 얼굴에 산소호흡기 까지 하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계셨어요.
분명 감기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이럴 수 있는지
그날 밤.
아빠의 상태가 심각하답니다.
흉수 라고 하지요..
폐에 찬 물은 빼내었는데
심장에도 물이 찼다고.. 양이 많아 심장이 힘들어 한다고;......
토요일에 응급실은 전문의없이 인턴, 레지던트, 실습생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중 그나마 제일 실력 좋으신 분이
20cm정도 되는 긴 바늘로 마취도 없이 제 앞에서 아빠 가슴을 찔렀습니다.
행여 시술시 심장을 찌르게 되면 개복수술을 해야한다는 말과 함께...
다행히 시술은 잘 끝났고 길다란 관을 통해 정상적인 누리끼리한 복수가 아닌
피가.... 하루종일 흘러나왔네요.
그날 새벽 실습생이 아빠의 상태를 보다
복수주머니(피주머니)를 만져 보더니 친구를 부릅니다.
**야! 이리와봐! 이거 완전 따뜻하다.
너도 만져봐.
거봐. 따뜻하지?
하며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웃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바로 제앞에서
바로 잠든 우리 아빠 앞에서
뒷통수라도 한대 때리고 싶었어요.
행여 거기서 큰 소리 내면 아빠에게 불이익이 갈까 한마디 못하고 엉엉 울며 참았네요.
몇일 뒤 조직 검사 결과...
폐암말기
남은 시간 2개월.
항암지료 받을 경우 6개월..
아빤 하늘 나라 가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천사들 머리는 자기가 다 깍게 생겼다며
괜찮다고 걱정말라고 하셨어요.
그땐 남들 보기에 좋은 집으로 이사도 했고
제가 돈도 벌기 시작했는데
왜 살만하니까 이런 시련이 오는건지
아빤 남은가족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병원이 아닌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고 싶다며..
항암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저도 싫었습니다.
티비에서만 보던 빡빡이 환자가 되는 것도 싫었고
온통 하얀 벽에 둘러 쌓여서 주사와 약에 찌들어 힘들게 사는 것보단
공기 좋은 우리 집에서 그냥 짧은 시간이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나가랍니다.
흉수는 모두 뺐으니 당분간 괜찮을 거라고.
항암치료 받지 않을 경우 그냥 나가랍니다.
집에 돌아온 아빠의 소원은.
늦둥이 딸이 결혼하는 것을 보고 죽고 싶으시다네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아셨는지..
아빤 결혼하는 것 보다는 제 남자친구 한번 보고 죽고 싶으시다네요.
남자친구가 생길때까지만이라도 버티고 싶었는지
미안하다고 ..
부담줘서 미안하다고..
치료 받으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하셨습니다..
3주에 한번씩 왕복 3시간 거리의 대학 병원을 다니셨습니다.
항암주사 한번 맞고 올 때 마다 몇일 씩 침대에만 누워계신것 같아요.
항암치료를 하기 시작한 이후에 아빠에 대한 기억의 절반은
침대에서 주무시는 거였어요.
야채스프, 보양식, 현미차, 편백숲,
편백나무, 율마, 족욕 등등 아빠한테 좋다는 건 뭐든 했어요.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아빤 힘이 없어지셨지만 신경질 적인 말투와 행동을 하셨네요.
다음날 일나가야 되는 엄마를 고래고래 소리 질러 깨워서
물떠와라. 다리주물러라.
진통제 붙여라.(마약성 진통제 붙이는 것 )
씻겨달라.
리모컨 찾아와라
이불 바꿔달라
핸드폰 밧데리 충전좀 해라.
물 끓여 놔라 등등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때는 물건도 마구 던지셨어요..
이때 전.
차라리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에.
엄마까지 힘들게 할 바에 그냥 하늘이 편할 거라는 생각을 했네요..
엄마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편찮으실 때도 여전히 저는 사랑해주셨는데 말이죠.
나빠요. 제가 나빴어요.
그리고 몇일 뒤.
병원에서 이제 안와도 된답니다.
또 나가랍니다.
영어로 어렵게 쓴 진단서를 쥐어 주며 동네 있는 종합병원에 가랍니다.
뭐라고 쓴걸까?
인터넷 찾아봤더니
더이상 치료 불가. 연명치료 바람.
그리고 두달 정도 지났네요.
아빠가 보고 싶어 병원에 갔는데
아빠는 또 자고 계셨습니다.
엄마와 간단히 밥을 먹고 다시 들어와
"아빠, 나 가~ 또 올게."
"...응"
주무시고 계시지 않았나봅니다.
사랑하는 딸이 왔는데도 눈도 못뜰 만큼 힘드셨나봅니다.
그리고 다음날
엄마가 물었다네요.
"진주아빠. 나한테, 진구한테, 진주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나중에..
나중에.. 꼭 말 할게.. 나중에"
제가 찾아갔던 날 이후 이틀밤을 지내고 나서
아침 7시 급하게 전화벨이 울렸어요.
병원에서 급하게 호출.
몇번이고 위독 하다며 왔던 전화에 전 무뎌졌었나봐요.
밤 12시에도 전화받고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7시에 전화받고 대충 씻은 후 7시 30분차를 타고 가기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버스가 아닌 택시를 타야 할것 같았습니다.
택시 승강장에도..
거리에도 택시는 없었습니다.
시골이라 8시 이후에나 볼 수 있는 택시를..
터미널 주인 아저씨를 붙잡고 울고 불고 빌어서
자고 있는 택시 아저씨에게 빨리 와달라고 전화를 하게 했습니다.
불러 놓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터미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왜 우는지 말해주지 않아도 모두 알만큼 소리쳐 울었습니다.
아빤.
의사에게. 병원을 지키던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가셨습니다.
벌써 1년 6개월 밖에 안지났는데
울 엄만
아빠 얼굴이 생각이 안날 때도 있다네요
이렇게 생겼던 것 같은데...
사진 보면 아 이렇게 생겼었지!
전. 어제 본 얼굴 처럼 생생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울아빤..
제 꿈쏙에 딱 한번 나오셨네요.
제가 잠자는데 쳐다보고 있던 아빠 얼굴 딱한번.
보기 좋게 커플티 입고
다음날 아침 일찍 치료 받으러 가야 한다며
넥타리를... 손수 다림질 스프레이 까지 뿌려서 다리더니만
정작 메진 넥타이는.....
결국 제가 다시 메드렸어요.
제가 넥타이 메는 것도 아빠 한테 배웠는데
왜 아빤 이랬는지,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빠 기력 회복하라고 오리 고기 먹으러 가서.
나도 귀찮아 하기 싫던 트리 꾸미기.
아빠가 졸라서 사드렸더니 아빠 혼자 꾸미고 계심.
치료 받으러 가던 날.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지요.
많이 야위셨네요..
사랑하는 아빠.
꿈에서라도 만나줘.
보고싶어
내 아빠는 제 아빠처럼, 오빠처럼, 남자친구처럼 다정했지만
제 기억에 코흘리개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아빠 볼에 뽀뽀 해 준것도,
사랑한다고 안아준것도. 한번도 없었네요.
그게 제일 후회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한게...
모두 아빠 돌아가시고 난 뒤에 말한것들 뿐이라..
모두 담배 끊읍시다.
모두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