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5.18 민주화운동 제대로 알고 계세요?

이지연 |2012.12.21 23:47
조회 581 |추천 6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계신분 얼마나 될까요?폭동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저도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글로인해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요그때 봤던글을 여기 올려 봅니다~



[제 목]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숨겨진 진실과 견해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점점 잊어가고 있다. 우리는 공부를 하면서 한번쯤은 한국사 교과서를 읽으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배우곤 한다. 현 한국사 6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후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라는 의의와 간단한 사건전개를 서술하고 있다.이런 간단한 서술에 나는 마음이 아팠고 광주 민주화 운동 정신을 계승하며 사람들에게 교과서에서만 보던, 가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숨겨진 아픈 진실을 서술하기로 결심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80년 5월 18일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들은 정권찬탈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의 데모가 그치질 않았다. 이에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들은 공수부대를 광주에 파견했다.

5월 17일 (토)요일 정부는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했다. 학생운동 지도부를 검속하고 광주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하였다.

5월 18일 (일)요일 전남대생 50여 명이 등교를 저지당했다. 학생들이 "계엄해제" "휴교령 철폐" 시위를 했다. 오후 4시 금남로에 공수부대들이 출동했다. 공수부대원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들이 마구잡이로 때렸고 놀란 사람들은 황급히 도망갔다. 공수부대는 도망가는 사람들을 끝까지 추격했고 어떤 사람은 도망가다가 더 이상 도망갈 때가 없어서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자나 노약자에게도 폭력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후 4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우리나라를 지키는 국군이 국민의 세금을 받고 활동하는 국군이 국민에게 폭행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놀람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5월 19일 (월)요일 11여단 병력을 증파하고 계엄군은 총에 대검을 장착하고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시민군은 파출소에 방화를 하였으며 공수부대 원들과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이 시위 진압 완화를 건의했다.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광주시 동구에 위치)학생 김영찬 군이 계엄군 총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나는 ‘공수부대가 진정 미친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미치지 않고서는 국민을 마구잡이로 찌를 수는 없는 일이다. 전두환 정부에 대해서는 ‘저건 정부가 아니라 사람 쏴죽이는 단체’라고 생각했다. 이 내용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 하루하루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었다.

5월 20일 (화)요일에는 고등학교 휴교조치가 내려지고 가톨릭센터 앞 남녀 30여 명이 속옷채로 구타당했으며 공수 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되었다. 금남로에서는 200여 대의 택시 차량시위가 일어나서 시위대 버스에 경찰 4명이 사망했고 광주 MBC건물을 방화해서 시민 2명이 사망하였다.

유르겐 힌츠페터(당시 광주를 계엄군 몰래 촬영했던 독일 기자)는 20일 상황이 “20일날 광주로 가는 고속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우리는 군대에 의해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었다. 그들은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돌아오는데 한국인 운전기사 김사복이 샛길을 찾아냈다. 논사이로 달려 작은 마을을 하나 지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다시 군대를 만났다. 나는 ‘우리는 광주에서 길이 엇갈린 부장을 찾으러 가는 길이다.’라고 이야기를 꾸며냈다. 학생시위 때문에 그를 잃었다고 하니 군인들을 우리를 들어가게 했다.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트럭에 탄 학생들을 만났다. 나와 녹음기사 헤닝은 그 트럭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를 반겼고 서투른 영어로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주려고 애썼다. 우리가 탄 차는 광주의 중심지로 가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낮게 애국가를 불렀는데 지금도 그 느낌이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라고 말한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매우 살벌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5월 21일 (수)요일에는 아침에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싸움이 있어서 시신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시신의 머리에는 총탄이 박혀있었다. 오후 2시에는 태극기를 흔들고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소리치는 청년들을 저격수들이 쏴서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경택(당시 전남일보 기자)씨는 “내가 빌딩에서 숨어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한 대위가 통신병에게 “발포 명령이 어찌 되었느냐” 라고 묻자 통신병은 아직 아니라고 했다. 그 시각은 12시 30분이었다. 10분후에 “발포 명령입니다” 라고 통신병이 말했고 그리고 그대로 발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발포 명령자가 누군지는 아직 까지 의문이지만 찾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전두환은 국회의 기능을 정지 시켜버렸고 김영삼을 감금시키고 김대중을 체포했다. 언론은 그 사실마저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기자들은 “보도하려 했을 때 간부들이 들이 닥쳐 엎어버렸다”고 진술했다. 이 기사를 실지 못한 기자들은 국민들께 사실을 알려드리지 못해서 매우 한탄스럽고 부끄러워서 신문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에는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고 씌여있었다.

5월 22일 (목)요일에는 운명의 금남로 장갑차 돌격으로 인한 권용문 상병이 즉사했다. 경기만 일병 부상에 따른 조건반사적 발포 이후 광주 시민들이 제31 보병사단의 예비군 무기고를 급습했고, 무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함에 따라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았다.

5월 23일 (금)요일에는 학생들이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를 호소했다.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 집회를 열었고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했다.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도 게시하였다. 주남마을 앞에서는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해서 17명이 사망했고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되었다. 최초 석방자 33명은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유르겐 힌츠페터(당시 광주를 계엄군 몰래 촬영했던 독일 기자)의 말에 의하면 광주 주변에서 탱크와 헬기까지 볼 수 있었고 군대는 외곽으로 철수해서 시내는 조용했고 사람들은 그 동안에 죽은 사람들의 관을 놓은 채 광장에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틀 전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여자와 노인들의 모습도 많이 띄었다고 말했다.

5월 24일 (토)요일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했고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이 발생했다. 23일 제 1차 궐기대회에 이어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도 개최되었다. 소년들이 무슨 죄일까 참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5월 25일 (일)요일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함께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이 전달되었다.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은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에 힘썼고 청소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5월 26일 (월)요일에는 계엄군이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했다.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통해. 학생수습위원회는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을 요구했고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며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이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을 브리핑했고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시켰다. 시내전화는 일체 두절되었다. 한 여성은 시민군 오빠가 나와 내 친구를 위험하다며 몰래 집에 데려다 주었고 그 뒤로 자기는 다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 오빠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는 아직 까지도 알 수 없다. 그 오빠에게 정말 감사하고 지금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린다.”라고 말했다.

5월 27일 (화)요일에는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 그 때 박영순(마지막 방송자) 씨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도청 안에 있는 수많은 학생들이 죽어갑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이 나오셔서 학생들을 살려주세요."라고 방송했다. 이에 계엄군은 “잔당들에게 알린다. 잔당들에게 알린다. 많은 폭도들이 투항하여 생명을 보장받았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주저 말고 자수하라 즉시 자수하라 즉시 자수하여 살 길을 찾으라.”라는 방송을 했다. 결국, 금남로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계엄군은 도청 안 시민군에게 무차별적으로 사격하였다. 계엄군은 도청과 시내전역을 장악하고 “민간인 피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진압작전 종료를 선포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으로 방송했고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이 도청을 인계했다. 시내전화 통화도 재개되었다. 유르겐 힌스페터(당시 광주를 계엄군 몰래 촬영했던 독일 기자)는 “곳곳에 시신이 즐비하게 놓여있는 도청 안 진압군을 보았다. 옷은 갈아입었지만 초기에 사람들을 살해했던 공수부대였다. 진압군은 시신마저 훼손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안 되면 되게하라’ 라고 외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충격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KBS 9시 뉴스에는 “광주 사태는 사건 10일 만에 진압되어서 평정 되어가고 있다. 북한 괴뢰는 여전히 광주 사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라고 보도하며 진상을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군은 생활고와 온갖 위험에 시달리는 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 병력을 광주에 투입하였다”고 보도했다. KBS는 이후에도 끝까지 이런 방송을 했다. 또한 신문에는 2명이 사망했고 계엄군의 진입에 광주시민들이 환호한다고 발간하였다. 언론들은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광주 민주화 운동은 진압되었고 영원히 뭍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광주시민들과 많은 사직서를 냈던 기자들이 세상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유르겐 힌츠페터(당시 광주를 계엄군 몰래 촬영했던 독일 기자)는 광주에서 촬영한 모든 것을 몰래 독일로 보냈는데 검문을 할 때 들키지 않기 위해 차에 몰래 숨겼고 비행기를 통해 보낼 때는 과자 통에 넣어 선물로 위장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한다. 전두환 독재 정부가 국제사회에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김성용 신부의 녹음 테이프도 은밀하게 나돌았다. 녹음 테이프에는 “시뻘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군화로 차고 짓이겼다는 것이다. 여학생 남학생 가릴 것 없이 옷을 벗기고 치고 차고 총검으로 찔러 댔다는 것이다. 아, 이것이 대한의 국군인가? 누가 이들을 미치게 했나? 국민을 살상하라고 명령한 원흉은 누구인가.”라고 하며 원흉을 원망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장용주 신부는 “필름을 비디오로 계속 제작을 해가지고 방송파로 내보내니깐 바로 정부 대변인이 ‘이것은 북쪽의 사주를 받아 만든 비디오다’라고 성명서를 발표 했다. 하지만 그런 성명서가 나올 것은 이미 예측 했기 때문에 반박성명서를 준비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몇 년 몇 월 몇 일 독일 국영방송에서 방영된 것이고 또, 사실은 독일 기자가 직접 광주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진입하여 직접 찍은 것이므로 사실 그대로를 보도 한 것이다. 만약에 왜곡되고 과장되었다면 그것을 지적해보아라 그렇지 않고서는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이다’라고 말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방송으로 인해서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더 자세히 보기위해 상영을 하고 있는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그 상황을 김양래 씨는 “구름처럼 국민들이 몰려왔습니다. 300명 정원인 강당에 500명이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 왔고요. 비디오를 너무 많이 돌려서 비디오를 돌리는 기계가 고장 날 정도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얼마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었다.

외국에서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많은 방송을 했다.

-CBS 뉴스(1980/5/28)

정부는 광주 사태의 원인을 공산주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함으로써 시위가 계엄령 반대와 군부의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려 하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CBS 뉴스 브루스 더닝 이었습니다.

-ABC 뉴스(1980/5/28)

전두환 장군과 소수의 선택된 장군들이 민간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혁명의회를 구성해서 군사독재를 감행하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외국에서는 다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민은 모르고 있었던 그 때 그 상황을 보고 정말로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80년 8월 23일자 신문과 방송을 보면서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파렴치하게도 신문과 방송은 전두환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에 대한 것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9월 1일 전두환은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우리역사에 또 한번 군부독재라는 단어가 쓰여지게 된 것이다.

32년이 지난 지금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열사님들과 기자님들께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그 날의 기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 하신다.

-김춘국(당시 학운동지역방위 시민군):“5.18은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이였 고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후회 는 없다.”

-정숙경(도청 취사조):“그 당시에는 아픔 밖에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같은 사람은 가슴이 찢어져요”

-양인화(시민군):“그때는 도둑도 강도도 그 때 항쟁기간 동안은 휴업이었어요, 모 든 범죄자들이 항쟁에 참여했어요.”

-박광웅(시위 참여):“내가 평생을 살면서 이런 경우는 텔레비전에서 보지도 못했 고 실제로 보지도 못했어, 근데 내가 인생 처음으로 그런 것 을 본 그 날 계엄군이 젊은 놈들을 모두 팬티만 입혀서 뚜들 겨 패요 입으로는 표현 할 수도 없어”

-나경택(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적십자 안장을 찬 군인마저 적군을 치료할 의 무를 가지고 있는데도 치료를 해 줄 망정 뚜 들겨 팼습니다.”

-이세영(당시 시위 참여):“계엄군이 총을 쏘니깐 시민들이 도망가기 시작했습니 다. 그때 나는 ‘아, 진짜 총을 쏘나보구나’라고 생각했 고 그래서 짐칸으로 뛰어 내릴려고 몸을 돌리는 그 순 간에 맞았어요. 끔찍했죠. 또, 선생님께서 ‘오늘 저녁이 위험 하니깐 젊은 사람들은 빠져 나가라’라고 말씀 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 님, 지금 저희들이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우 리가 그것을 보고 어찌 집으로 돌아갑니까. 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지 못합니다. 계엄군을 막겠습니 다.”

-이만영(당시 시민군):“나주 경찰서에서 총이랑 다 가져왔어요, 그리고 도청 안으 로 들어갔죠. 정말 긴박한 순간이었습니다.”

-나의갑(당시 전남일보 기자):“소의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 갖은 자들 이었습니다.”

-양인화(평화 반점 운영):“5.18을 겪고서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돈보다 더 소 중한 것은 목숨이다.”

-임병석(시민군):“광주 시민들께서 주먹밥을 해서 차에다 얹어주셨는데 그것이 정 말로 꿀맛이였었고 그것이 우리 아픔을 대변해주었고 정말로 그 것을 용기로 삼고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계엄군들과 대치를 했습니다.”

열사님들과 기자님들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그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당시 얼마나 초조하고 급박하고 두려웠는지 알 수 있었고 범죄자들마저 항쟁에 참여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민주화를 바랬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32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의 기억에는 10일간의 항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가 남아있다. 전두환 정부의 억압과 사실 은폐로 인해 지낸 시간들도 끔찍하다고 느끼고 계신다. 나는 하루하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조사하며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내가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하면서 장면 하나 하나가 나를 슬프게 했고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생각이 나곤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비통한 심정도 들었다. 또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취재해 주신 외국 기자 분들을 비롯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후대의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겨 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도 들었다. 또한, 나는 꼭 국사선생님이 되어서 한국사 교과서의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수업할 때. 분량이 반장 정도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다양한 영상과 다양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싸우신 멋지신 분들이란다.”라고 말해줄 것이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0일 간의 항쟁을 하루하루 알려주면서 수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여름 방학 또는 겨울 방학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사적지에 가서 사진을 찍고 자신을 적어오는 것을 수행평가로 내주어서 제자들에게 직접 사적지를 체험함으로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또 한번 생각하게 할 것이다. 또한, 내가 한국사 교과서 편찬에 참여하여 무리더라도 5.18 광주 민주화에 대해서 단원 맨 마지막 부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될 수 있는 한 모두 실을 것이다. 한 번쯤 학생들이 교과서를 넘기면서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직도 5.18에 그날의 사건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더 많은 자료가 나오고 증언이 많이 나와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들이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서 ‘아, 우리나라도 겉으로 드러난 것 이 외에 이런 숨겨진 아픈 역사가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고 나는 꼭 국사 선생님이 되어서 이러한 아픈 역사를 제자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가르칠 것이다.



추천수6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