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시집간 딸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내 어머니의 첫 마디는 이러하셨다.
“알라 연방 생길라꼬 시집을 못가 그 발광을 했고나...”
1994년 10월 16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생활에 적응은 커녕 살림살이 정리도 다 못 끝낸 상태인데 어쩐 일인지 자꾸만 몸이 불편했다.
이유 없이 배가 아프고, 웬지 모르게 불안하고 불길한 생각이 마음 한 켠을 짓눌렀다.
‘혹시...?
아직은 아닌데, 제발 아직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이 무리도 아니었던 게 그때 내 나이 고작 스물 두살이었다.
물론 남편의 나이가 나와 띠동갑이었기 때문에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아직은...
그것도 결혼식을 올리자마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당분간은 남편과 둘이서 신접살림을 꾸미고 가꾸며 나 또한 유치하나마 어린신부 흉내를 내며 어릿광을 좀 부려본 후 엄마가 되었으면 했던 것인데, 어쩐지 나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고, 점차 불길한 예감의 농도는 진하고 강렬하게 나를 옥죄었다.
다른 예비 맘들에 비해 굉장히 빨리 나는 임신사실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처음에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뭔가 해결을 볼 작정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직은 자신이 없었다.
직장도 그만두고 싶지 않았고, 결혼하자마자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게 가장 끔찍했다.
마치 첫 대사조차 시작하지 않았는데 무대를 내려와야만 하는 패배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때 당시에는 정말 싫다는 신경질과, 지금 처해진 이 현실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라는 생각 말고는 다른 어떤 생각도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꺼칠해져 갔고, 입맛도 떨어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체 속앓이를 하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이 절로 튀어나오던 때였다.
“니! 어데 아프나? 한참 깨가 쏟아져야할 새색시 얼굴이 와 그 모양이고..!”
옆 사무실 선배 언니가 참견을 할 정도로 며칠사이 핏기하나 없이 얼굴은 망가지고 못생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야! 사실은 내 몸이 쫌 이상한데...”
컴컴한 골목 끝자락 후미진 곳에 병원은 자리하고 있었다.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까지, 간호사가 건네주는 치마를 갈아입고 내진을 받기위해 침대에 몸을 눕히는 순간까지 나의 생각은 조금 더 많이 나쁜 쪽에 서 있었다.
눈 한번만 찔끔 감으면 된다고, 아이는 조금 더 있다가 가져도 충분하다고, 아니 오히려 조금 더 있다가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세뇌하며 눈을 감았다.
나 스스로가 아직은 엄마가 아닌 철부지 아내 이고만 싶었던 터라 죄책감 같은 건 약에 쓸려고 찾아봐도 아마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임신 맞네...언제로 할까? 내일 하지..간호사한테 시간확인하고...”
의사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소 늙수그레한 중년이후의 남자의사였고, 한평생 산부인과의를 하면서 나 같은 여자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는 투로 불친절했다.
어쩌면 나를 아주 불결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물론 나만의 자격지심임에 분명하지만...)
간호사가 건네줬던 그야말로 불결해 보이는 치마를 벗어 침대아래 소쿠리에 담아두고, 진료실을 나왔다.
의사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듯 나 또한 의사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시간확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료비 지불을 하기 위해 간호사 앞에 섰는데...
“내일 오후 두시입니다. 간단하게 속옷 준비하고...” 간호사가 빠르게 내게 설명을 한다.
너무나 환하게 속을 들켜버린 탓일까? 다소 엉뚱한 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던 것은...
“저 아기 낳을 껀데요...다음 검진은 언제 오면 되나요? 산모수첩은 다음 검진 때 주나요?”
나 또한 빠르게 말을 했고, 그날치의 진료비를 지불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한 달 뒤에 다시 오면 되지요?” 확인사살 또한 빠트리지 않은 체...
간호사의 떨떠름한 표정을 뒤로한 체 문이 부서져라 손에서 놓아 버렸다.
불쾌하고 화가 났다.
시뻘겋게 약이 올라 주머니에 두 손 깊숙이 찔러 넣은 체 땅만 보며 걷고 있는 나에게 병원을 함께 동행한 선배언니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른다.
“미안하다..나는 그 병원이 내진으로 검진하는 곳인 줄은 몰랐다 아이가...”
그 때문이 아닌데, 지금은 도저히 사실을 얘기할 수가 없어 언니의 오해를 모른 척 길을 걸었다.
그날 오후, 조퇴를 받고 엄마를 찾아갔다.
도무지 복잡하기만 해서 그대로 사무실에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를 보고, 엄마 이야기를 듣고 나면 뭔가 해결이 나거나, 하다못해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 만약 지금 내가 애기를 가지면 어떻게 해야 되는거지?”
분명 만약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단번에 나의 말을 알아들으셨고,
곧이어 그것도 아주 큰소리로...
“알라 연방 생길라꼬 시집을 못가 그 발광을 했고나...” 나를 곱게도 흘겨보셨다.
띠동갑 남편과의 결혼을 끝끝내 허락하지 않으셨던 엄마는, 결혼식 날 퉁퉁 부은 얼굴과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지도 않은 체 신부 어머니 자리에 앉으셔 끝까지 나에게 항의를 하셨다.
그 일을 빗대어 단박에 말씀을 하시는 거다.
졸지에 아이 가지기 위해 시집가려고 엄마 가슴에 대못을 치고 말은 나쁜 불효녀가 내가 되어 버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지라 나는 뭐라고 대꾸는 하지 않았다.
지금 몇 마디 섞어 주고받는 말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 그래서 말인데, 나 이번에는 낳지 말고 다음에....”
“이기 미칫나...
문서방 나이를 생각해야지.
낼 모레가 사십인데 지금도 늦었는데, 이왕 들어선 알라를 안낳다니...그기 무슨 소리고...
그라고 첫 알라 잘못 손 댔다가 평생 알라 못낳는 사람들도 많다..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도 마라..”
엄마의 믿어지지 않는 으름장은 오후내내 내 심장을 쿵쿵 쉬지도 못하고 뛰게 만들었다.
혹 떼려 간 길이었는데 오히려 절대 떨어지지 않는 대형 혹을 목 뒤에 한가득 붙이고 쫒겨 온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길 지하철에서 잠시 혼절을 했다.
평소 멀미는 해도 열차멀미는 하지 않는데 웬일인지 속이 메스껍다는 걸 느끼는 순간 앞으로...쿡...의자에 앉아 점잖게 신문을 읽고 있는 낯선 분 놀라 혼비백산하게 하필 그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구토와 현기증이 일어 더 이상 지하철을 타는 건 무리여서 중간 아무역에나 내려 한참을 기다렸다.
속이 진정될 때까지, 현기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출근을 한다 해도 도저히 업무를 제대로 봐 질 수가 없을 것 같아 회사에 연락을 하고 집으로 가기위해 반대편 지하철을 탔다.
이번엔 얌전하니 속이 조용했다.
대신 자꾸만 머그컵 한가득 담긴 뜨거운 우유와 커다란 카스테라가 먹고 싶다는 욕구가 곧 도착해서 나를 내려주고 말 지하철을 더 빨리 조금 더 빨리 가자고 재촉하게 했다.
지하철을 내리자마자 달음질치듯 개찰구를 빠져 나오고, 힘든 줄도 모르게 육교를 건너고 제법 긴 신작로를 걸어올라 마지막 횡단보도마저 건너면서 부터는 아예 속도감이 더 붙어 마치 뛰다시피 하여 집 바로 아래 슈퍼에 도착을 했다.
500ml 흰 우유 한통과 보기에만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카스테라 두 개를 손에 쥐고 마지막 힘을 다해 집으로 달려갔다.
뜨거운 우유 두 컵과 카스테라 한 개를 게눈 감추 듯 다 먹어치운 후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점심때 지나 눈을 떠 가장 처음 생각났던 단어는 “공유”였다.
어쩐지 우유 두 컵과 커다란 카스테라 한 개를 나 혼자 다 먹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나누었다는 생각에 웬일인지 기분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한껏 곤두세웠던 신경줄이 느슨해졌고, 마치 뜨거운 물 가득 받아 욕조에 들어 앉아 있는 것만 같은 나른함이 온 몸 가득 퍼져나갔다.
혼자 먹었다는 느낌이 아닌, 둘이 함께 먹었다는 느낌이, 아니 내 안의 또 다른 작은 나를 먹였다는 자부심, 대견함, 만족감...이 웬일인지 그날 오후 나를 아주 기분좋게 했다.
처음보다는 덜 독해진 모습으로 이번에는 동네어귀 산부인과를 찾았다.
어쩌면 이번에는 예비맘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얼마쯤은 기대하고 갔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조금은 이른 나이이지만 그래도 결혼을 했고, 임신을 하기엔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는 대한만국 가임여성이었으므로, 혼전관계로 인해 불행해진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축하를 받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진료 대기실은 한산했다. 접수를 하고 할머니 한분과 일행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옆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젊은 여성 옆에는 자그마한 종이가방이 놓여져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그것의 용도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여기 의사가 수술을 깔끔하게 잘한다 하네...아가씨도 오늘 접수하면 내일 하겠네”
‘쯧쯧쯧...’소리를 내지 않으셨을 뿐, 할머니의 얼굴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셨다.
아니라고, 나는 결혼을 했고, 나는 띠동갑인 내 남편을 위해서라도 이 아이를 꼭 낳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임신했음을 알리고 축하인사를 받을 것이라고 큰소리로 말 하고 싶었으나, 고개를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뜨리고 있는 할머니 옆의 여성분 때문에 차마 그렇게는 말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 또한 고개를 숙이며 보일 듯 말듯 끄덕이는 시늉만을 했을 뿐...
1994년 12월 임신 삼 개월 째로 접어들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직은 나오지도 않은 배를 가끔씩은 불쑥불쑥 앞으로 내밀어 보기도 하면서 이르게 임부복을 장만했다.
다른 예비맘들은 그렇지 않다고들 하는데 어쩐 일인지 나는 곧잘 배가 아팠다.
가급적 배에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멜빵바지에 운동화를 싣고 있는 힘껏 땅에 달라붙어 걸어다녔다.
입덧은 그리 심한 편이 아니었기에 뭐든 잘 먹었는데, 특히나 고기에 관한한 아마도 하루 세끼전부를 고기반찬을 해 먹어도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따금씩 남편이 이런 나 때문에 기겁을 했다.
남편은 고기를 그리 썩 좋아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인데, 나의 임신기간 중 나를 위해 함께 먹은 고기가 아마 남편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먹었던 고기의 양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믿거나 말거나의 소리를 할 정도였다.
1995년 07월 26일 아침 9시 20분이 조금 지나 3.8kg의 이국적인 딸 아이가 태어났다.
이국적이라는 말은 딸 아이를 처음 받아 안은 간호사의 평이다.
“애기가 정말 이국적으로 생겼어요..”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남편에게 아이를 보여주면서 그러더란다. 아주 이국적으로 생겼다고...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하는 말은 첫 딸을 낳아 서운해 하시는 집안 어르신들을 위로하기 위해 생겨난 옛말이 아닐런지...시댁과 친정에서 전해져 오는 반응이 약간 그러했다.
특히나 알라 낳고 싶어 시집가려 발광 했더냐 욕을 해대셨던 친정엄마는 시댁에 대한 미안스러움마저 더해 더욱더 나에게 눈을 흘기셨는데, 첫마디가 “에라이! 망할년...”이었다.
누구를 보고 망했다 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내가 망한년...이 되기로 하였다.
아직 세상에 대해 눈도 뜨지 못한 딸 아이를 망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내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두 손 모아 빌어주실 내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에게 처음 젖을 물리던 날을 나는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내 엄마의 팔에 의지해 내 딸을 보러 갔다.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러질 것만 같아 겂이 나는 아이를 받아 품에 앉았다.
아직 눈도 뜨지 않는 아이가 그저 내가 받아 안기만 했을 뿐인데 내 가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을 열어 젖을 물렸다. 처음 그 감촉, 느낌, 실감을 감히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서투른 엄마 때문에 아이는 한참 용을 썼고 불편해 자꾸만 몸을 움직이는 아이 때문에 나 또한 절로 식은 땀이 났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한꺼번에 아주 많은 일들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에게 미안했던 일들이...하마터면 저질렀을지도 모를 그 큰 일들이 아직은 작기만 한 아이의 앞에서 얼굴조차 들지 못하게 하였다.
아이가 젖을 빨기 시작한다.
아이가 나를 알까! 채 눈도 뜨지 못하는 아이가 내가 누구인줄 알고, 입안 가득 채워지는 것이 무엇인줄 알고 입을 움직여 제 속으로 젖을 삼켜 보내는 것일까!
아이의 대책 없는 믿음이 맹세코 단 한번도 누군가를 의심해본 적 없었을 이 맹목적 순결함 앞에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동안의 내가 어떠했는지, 산다는 미명하에 지금의 우리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정말이지 그때는 죄책감에 절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아이고! 아기 낳고 자꾸 울면 눈 버려서 안되는데...
새댁! 아들이야 다음번에 낳으면 되지...울지 마라! 울지 말고 아기 젖 믹이야지..“
첫 딸을 낳은 서운함에 우는 것으로 잘못 알으신 옆의 어느 분인가 나를 위로했다.
엄마가 두 손을 꾹꾹 눌러 내 눈물을 닦아 주셨다.
“울지마라, 울지마라...눈 짓무른다. 울지마라, 고만 울어라...”
엄마의 눈에도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니가 없었으면 내가 어쩔뻔 했니? 내가 어찌 살뻔 했니?”
요즘 들어 입버릇처럼 딸 아이에게 내가 하는 말이다.
백일전만해도 두 무릎을 세워 아이를 눕히면 아이의 키와 내 무릎이 딱 맞았는데, 내 가슴위에 아이를 엎어 재우면 내 심장 소리가 바로 아이의 귀에 전해지면서 아이는 편안하게 새록새록 잠이 들곤 했었는데, 어느새 나보다 한 뼘은 더 커버린 아이는 이제 나에게 친구이자 삶의 동료이자 전우이다.
※여기서 전우라는 말은 아이가 우리 둘 사이를 정의하면서 한 말이다.
산전수전공중전을 함께 겪으며 꿋굿하게 헤쳐나가는 우리모녀의 뚝심이 전우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하면서...※
아이는 내 삶의 증인이요,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다.
삶의 고비고비 힘들거나 지칠 때, 외롭거나 서러울 때, 고통스러울 때,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는 내게 살아가야 할, 버텨주어야 할, 참아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진실로 아이 때문에, 아이 덕분에 살았다.
세상 여느 부모가 그러지 않을까만, 특히나 나는 아이로 인해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흉내나마 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내게 스승이자 가르침이자 내가 가야 할 길 이다.
아이는 또 다른 곧 나이다.
그러니 나는 함부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내가 지나가는 이 길이, 내일 내 아이가 지날 길이라 생각하면 길가에 피어 있는 풀 한포기라도 함부로 꺾을 수가 없는 일이니, 오늘 내가 뱉어버린 한마디 말이 내일 내 아이에게 상처가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행동하나 말 한마디 제멋대로 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중학교 2학년 시절 제법 혹독하게 사춘기 열병을 앓았다.
일 년여를 일요일마다 우린 도서관 길을 오르내리고, 학교 운동장을 걸으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느라 힘이 들었고, 나는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 곁을 지켜내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입 안이 헐었다.
아이가 한 고비를 넘기면 나도 또한 아이 따라 한 고개를 넘어가고, 아이가 울면 아이가 없는 곳에서 내가 울고, 아이가 즐거워하면, 아이의 등을 두들기며 나도 따라 즐거웠다.
그래서 아이는 우리사이가 모녀지간이 아니라 전우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느 날 문득 엄마가 되어 버린 나를 만나 좀 더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이...
아이는 나로 인해 일찌감치 속이 영글었고, 나는 아이로 인해 조금씩은 더 늦게 철이 들고 있는 것만 같다.
살면서 크고 작은 고비들을 만나고 때로는 힘이 들고 때로는 상처받아 고통스러울 때,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와 차를 마셨다.
아이의 말간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하고 어떻게 답을 내어야 하는지가 보였다.
삶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아야하는지도 아이의 눈망울 안에서 찾아내곤 했다.
어쩌면 인생을 아주 오래 살아내신 어르신들보다, 평생 동반자인 남편보다 내가 더 믿고 의지하는 건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아이와 함께 IMF 힘든 시기를 지나고, 아이가 있어 남편이 아플 때에도 힘들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거뜬하게 병간호를 하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첫사랑, 나의 처음사랑, 아이가 내 곁에 있으므로....
철부지 어린시절, 미처 잘못된 생각으로 내 아이를 놓쳐버렸다면 어쩌면 나는 영영 어른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뭣도 모르는 나를 자극해 주셨던 여러분들에게 나는 지금 감사한다.
나쁜 생각을 하고 찾아간 나에게, 임신임을 알려주고, 축하한다 챙겨주고 시끌법석하게 나를 칭찬해주셨다면, 어쩌면 나쁜 생각을 실행에 옮겨버렸을지도 모른다.
지레짐작만으로 오히려 나에게 나쁜생각을 기정사실화시켜주시는 바람에 욱...하는 청개구리 근성이 발동을 하여 오히려 더 고민하고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이렇게 살 수가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가끔씩 그 분들에게 감사한다.
우리 엄마에게도...서슴없이 욕해주고, 나무라주신 내 엄마에게도 감사한다.
내 첫사랑, 내 처음사랑을 고스란히 내가 안을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