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게까지 추운 거리를 활보했더니 몸이 성치 않았다.
어젠 분명 괜찮았는데 들어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니 금방 녹초가 되었다.
게다가 난생 처음 겪어보는 타인의 체온에 잠을 설쳤다.
만난 지 3일밖에 안됐는데 되짚어 보니 고백을 당한 듯 했고, 어제 들을땐 분명 진심인 것 같았는데 어째서 그와 떨어지니 이토록 불안하고 믿기질 않는지 참으로 이상했다.
내게 클로버라며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난 단 한 마디 조차 할수 없었다.
나는 반년전 대학을 그만두고 음악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 일이 잘되지 않았다.
그로인해 부모님과 사이가 악화되었고 나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꿈을 책임지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매일같이 채찍질을 했고 점점 더 나를 학대했다.
그런 나를 구원하듯 다시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고 까먹은 돈과 시간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는 꿈이 없는 대학을 다시 다니게 된것이다. 그러면서 한해가 지날수록 어깨위에 묵직한 책임감이 쌓여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서 고백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도 기쁘지만 함부로 나도 널 좋아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는 하루하루가 흔들리는 줄타기 같았다.
싫지만 해야 하는 미래와 좋아했지만 책임지지 못했던 과거에 나는 철저하게 묶여있었다.
잠깐 이였지만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방해 없이 현실 속에 속하지 않는, 마치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네버랜드의 피터팬을 만난것만 같은 그런 달달한 꿈.
하지만 그런 꿈조차 현실은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눈뜨니 벌써 지각하기 딱 좋은 7시 반이었다.
스쿨버스는 곧 8시 10분쯤 사거리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매일같이 바르던 선크림조차 바를수 없는 시간이었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에 목도리를 둘렀다.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젖은 머리카락을 이끌고 사거리로 향했다. 칼날처럼 얼굴을 쓸고 가버리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나는 오늘 무척이나 행복했다. 이대로 스쿨버스를 놓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것만 같았다. 시야에 점점 사거리가 진해졌고, 매일같이 스쿨버스를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도 보였다.
아직 스쿨버스가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았고 다시금 목도리를 고쳐 둘렀다. 다행히 목도리가 젖은 머리카락 물기를 스펀지처럼 빨아줘서 더 이상 어깨에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폐인 같은 모습이라 고개를 들기 민망하여 푹 숙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 좁은 시야에 익숙한 신발이 보였고 진한 청바지 위로 검은색 후드티가 보였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설마 아니겠지 라는 마음이 들었다. 깜짝 놀랐지만 최대한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
꿈속에 나왔던 피터팬 이었다.
“...어? 여긴 웬일이야??”
정말 놀랐다. 내가 이곳에 나오는 건 어떻게 알았으며, 준호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누나랑 버스타고 학교가려고 기다렸어. 늦을까봐 걱정했어.”
“뭐? 네가 왜?”
“누나 데려다 주려고.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아침부터 왔어~ 나 착하지?”
몇 백만 원 어치 선물을 받은 것 보다 나를 생각해주는 저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안겨버렸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 무수히 떠올랐던 현실에 대한 불안함이 그를 보자마자 녹아 버렸다.
내 어릴 적 순수함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과 느껴지는 그의 진심에 나는 그를 아주 꽉 안아버렸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내 허리를 두 팔로 안았다. 따뜻했다. 그의 향기가 내 몸에 울려 퍼졌다. 이대로 눈을 감고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 속에 살수 없다는 듯 현실이란 놈이 또 나타나 노크를 했다. 그것도 아주 시끄럽게.
“누나 버스 왔어. 학교 가자!”
“응!”
나는 그에게 동화된 듯 어느새 그와 닮아 가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이러스에 전염된 듯 이유 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와 손을 잡고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내 왼쪽 귀에 꽂아주었다. 우리는 이어폰 반반씩 귀에 꽂고 노래를 들었다.
“이거 내가 누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야. 들어볼래?”
“뭔데?”
귓가에 천천히 포지션의 I LOVE YOU가 흘러나왔다. 쌀쌀한 창밖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게 우리는 따뜻했다. I LOVE YOU 노래를 들으며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의 어깨는 생각했던 것 보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포근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덜컹이는 버스에서 우리는 귓가에 달콤하게 흐르는 포지션의 노래를 하염없이 공유했다. 우리는 학교에 도착하기 까지 약 40분을 이 노래만 들었다. 질릴 법도 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왜일까. 들으면 들을수록 노래가 슬퍼서 심장을 후벼 팠다. 잔잔한 멜로디에 어울리는 가사를 음미하며 평생을 기억할 노래 일 것만 같아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쌀쌀한 추위 탓에 메마른 나뭇가지 들이 서로 체온을 느끼려는 듯 서로의 가지가 닿아있었다. 나무들조차 추위를 실감하는 듯 조용한 바람이 불어왔다. 학교의 풍경들이 나와 준호를 기억하려는 듯 벌거벗은 나무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주 풍성한 나뭇잎이 매달려 이야기를 나누던 그 따뜻한 날씨들 보다 이 쌀쌀한 겨울이 우리를 더욱 따뜻하게 했다.
어느덧 정문에 들어섰고 준호는 내 손을 천천히 놓았다.
“수업 잘들어! 졸지말고!”
그의 목소리는 경쾌하고 우렁찼지만 나는 그가 아쉬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늦게 온 학교이기 때문에 수업을 빼먹는 건 엄청난 각오가 필요했다. 혹은 빠지고도 시원하던 20살이 아니었다. 애써 그를 뒤로 한 채 엘리베이터 앞까지 향했다.
책을 들고 있던 오른손이 간질간질 했다. 나는 손바닥을 폈다. 그의 손가락이 진심을 담아내게 전해준 클로버가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서둘러 다시 정문으로 뛰어 나갔다.
다행히 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가깝진 않았지만 아직 멀리 가진 않았다.
천천히 뛰던 내 발걸음을 서둘렀다. 왜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보내면 안될 것만 같아서 그의 옷깃을 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때 까지 한번도 멈추지 않고 뛰었다.
내 손길을 느낀 듯 한 준호가 뒤를 돌아봤고 그는 내게 묻지 않았다. 왜 수업을 듣지 않았는지 왜 나를 따라왔는지 미안해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은 채 내 손을 잡고 우린 마음 가는 대로 시간에 우리를 맡겼다.
그날 이후 우린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준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중요한 날 한꺼번에 터뜨릴 생각에 너무 신이 났고 그 말을 듣고 기뻐할 준호 얼굴을 상상하니 설레고 또 설렜다.
우리가 만난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 준호가 내게 강촌에 놀러가자고 말했고, 우린 버스에 몸을 실고 강촌으로 향했다.
차가운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아서 그랬는지 늘 사람이 많던 강촌엔 인적이 뜸했다.
하지만 나는 더욱 좋았다. 이곳에 준호와 둘만 남은 것 같아서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그와 함께 강촌에서 유명한 놀이기구인 바이킹을 탔다.
바이킹 중에 가장 무섭다는 게 강촌 바이킹이다. 그도 그럴게 하늘로 높이 올랐다가 떨어질 때 몸이 반쯤 공중에 떴다. 이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에 아찔했지만 중독 된 듯 이내 내 두손은 푸른 하늘로 쭈욱 뻗어있었다.
우린 놀이기구에 전세를 낸 듯 서로 마주보며 끝에 앉아 내가 하늘로 오를 땐 소리를 질렀고 준호가 하늘에 오를 땐 그가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서로 사이좋게 날씨 좋은 푸른 하늘에 고함을 치며 서로의 모습에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아무리 커플이지만 조금 창피 할 수도 있었다. 그야 머리카락이 하늘에서 춤을 추느라 얼굴에 붙질 않으니 상대방이 이렇게 생겼나 싶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사람을 만났을땐 두껍게 가려진 화장속의 민낯을 함부로 내보인적이 없었다.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할까봐 혹은 이쁘게 보이지 않을까봐 살이 찌면 걱정했고, 얼굴에 뾰루지가 나면 만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공중에 떠 있는 엉킨 머리카락 따위 걱정 하지 않았다.
코끝이 빨개지고 쌀쌀한 날씨에 수분이 메말라 갈라진 피부였어도 준호 라면 그 모습조차 예뻐해 줄것만 같았다.
바이킹을 수차례 타는 바람에 허기를 느낀 우리는 서둘러 팬션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준비했다. 남들이라면 바비큐 파티라도 벌여야 했지만 아직 우린 어엿한 직장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컵라면과 집에서 싸온 김치와 쌀 정도 였다. 배가 고플 준호를 위해 나는 김치 볶음밥을 하기로 했다. 들기름에 볶여 고소한 냄새가 풍길 때 쯤 밥을 이리저리 뒤섞고 그 위에 살짝 익힌 계란을 올렸다. 그리고 함께 먹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고 식탁에 올렸다. 준호가 나간지 한시간 좀 안되는 시간이었다. 요리가 다 끝나도록 보이지 않는 준호가 걱정돼서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았다. 어느새 깜깜한 밤속에 귓가에 울리는건 아무것도 없었고, 시원한 바람 소리와 졸졸 흐르는 강물 정도가 나를 반겼다. 팬션 건물 뒤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나 여깄어!”
“뭐야~ 왜 거기 있어? 밥 다 됐는데 밥 먹자!”
큰소리로 소리 쳤지만 멀리 보이는 준호는 미동이 없었다. 그저 한손으로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만을 보낼 뿐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내 볼을 빨갛게 달아오르게 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곳엔 내 이니셜로 만든 촛불이 가득했다. 내 이니셜 촛불 옆에 그가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촛불을 보고 눈물이 났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런 깜짝 이벤트를 해주다니. 너무 기뻤다. 기특한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흐뭇한 미소로 준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자꾸 부는 바람 때문에 그가 공들여 붙인 촛불이 점점 꺼져갔고 그럴 때 마다 그는 다시 촛불을 붙였다.
분명 눈물이 났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행복해서 웃음이 났다.
아무리 붙여도 꺼지는 불빛에 본인도 민망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한손을 잡아 자기 오른쪽 볼에 갖다 댔다. 그러곤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내가 노래 불러줄게”
“응? 노래?”
그가 수줍은 듯 웃었다. 노래방 말고 이렇게 밖에서 생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는 처음이라 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모두 다 기억하려는 듯 그의 모습을 쫓기 바빴다.
그가 ‘음.음.’목을 가다듬는 행동을 몇 번 반복하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
"I Love you. 기억 하나요
처음 그대에게 느낀 그 떨림 I love you. 오랜 후에서야 내게 해준 그대 그 한마디 우리 사랑 안 될 거라 생각 했죠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돌아서려 했었던 내 앞에 그대는 꿈만 같은 사랑으로 다가왔죠.이 세상 아니라도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텐데 눈물 한 방울도 보여선 안되겠죠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미소로 날 떠나요 그 미소 하나로 언제라도 그대를 찾아낼 수 있게.. "
그가 노래를 마칠 때 쯤 어느새 준호 눈가에도 촉촉하게 눈물이 맺혀있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할 사람이 없을 거란 상상에 빠져 황홀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준호는 슬퍼 보였다. 슬퍼 보이는 그의 눈을 만졌다. 손가락에 뜨거운 눈물이 묻어났다.
지금이었다. 나도 좋아한다고, 너를 많이 사랑하게 됐다고 말해야 했다.
“준호야..”
그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입술로 떨어졌다. 내게 해준 이벤트가 그리도 감동이었던 걸까? 갑자기 서글프게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해야 할 말을 잊어버렸다.
“누나.. 미안해..”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준호의 팔이 너무 심하게 떨렸다. 이윽고 그는 나를 안은 채 내 귓가에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나 삼일 뒤에 유학 가.. 나 사실.. 거기서 너무 힘들어서 엄마한테 졸랐어.. 친구들 만나러 한국 오고 싶다고.. 나 너무 외로워서 한국에 오고 싶었어.. 그래서 이번에 한국 보내주면 다시 가서 공부 열심히 한다고 엄마랑 약속했는데.. 그랬는데..누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어..”
나는 깜짝 놀라 따뜻했던 준호의 품을 살짝 밀쳐버렸다. 지금 준호가 뭐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 놀러 왔다는 건가? 다시 가야한다는 거야? 삼일 뒤에?
마음속에 시끄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진정되질 않았다. 엄청 많은 궁금증이 있었는데도 쉽사리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 그래. 누나는 너보다 어른이니까 이해할게.. 그럴 거야. 춥다. 들어가자.”
사실 너마저 나를 속인건가 싶었고, 가야 할 사람이면서 왜 무책임하게 고백 같은걸 했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고, 왜 이렇게 정을 주게 만들었냐고 묻고 싶었다.
이래서 안되는 거다. 어린아이는 무책임 하니까. 책임지지도 못할 사랑을 일단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해버리는 돌직구 같은 거니까. 내가 어리석었어.
그날의 별은 왜 그렇게 환했던 건지. 나쁜 생각뿐인 내게 희망이 있다는 듯 너무나도 밝았다.
사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황당했다. 아니 괜찮다. 그냥 내일부터 없었던 일로 하면 됐다. 지금 준호와 같이 있는 밤이 정말 내 가슴을 아프게 하겠지만 오늘만 참고 내일부터 없었던 일로 나는 내 일상을 살아가면 된다. 처절하게 아픈 가슴을 다독이며 상처 받지 않은 척 나는 어른인척, 너는 그저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달래면 언젠가 슬픈 밤이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