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루 이틀이 무미건조 하게 지나버렸다. PC방에서 알바를 하면서도 유리문이 열릴 때 마다 나는 흠칫했다. 기다리지 않는다면서 그를 기다렸다. 슬프지 않다면서 손님에서 커피를 가져다 줄때에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자각하지 못했다. 손님이 어디 아프냐고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얼굴에 타고 흐르는 눈물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몰랐다.
그를 못 만난 2일이 2년과도 같았다.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끝까지 아이 같았던 건 나였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할걸. 괜찮지 않다면 아프다고 말할걸.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말할걸. 그와 다르게 마음을 꽁꽁 숨기고 받기만 했던 내가 그의 부재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첫날은 괜찮았다. 하루에 몇 십번을 괜찮다고 다독였다. 세상에 남자는 많다며 피식 웃어 보이며 하루종일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정말 괜찮은줄 알았는데 괜찮은 척 했던 내 가식적인 모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준호의 순수한 마음이 고마웠다. 마치 이상에 살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고, 그와 함께 있을때면 현실이 두렵지 않았다. 이렇게 영원히 시간이 멈춰 어른이 되지 않을것만 같아서, 나는 그를 현실 도피처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그가 이미 내 곁에 없지만, 아주 짧은 시간 속에 나는 준호를 정말 사랑했음을. 떠나기 전에 그 어떤 말이든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 시간 그 장소 그곳에서 항상 우리의 추억이 살아 있음을 준호에게 말해야 했다.
알바가 끝나자마자 눈싸움을 했던 놀이터로 향했다. 우리가 던지고 맞았던 그 차가운 눈덩이는 이미 녹아 사라진지 오래였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밖에서 보는 일이 잦아졌고 딱히 갈곳도 돈도 없는 가난했던 우리는 이곳에 왔다. 그와 시간 가는줄 모르게 걷다 보면 어느새 이곳이 종점처럼 우리는 도착했다. 당연히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사실 별로 아는게 없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집은 어딘지 꿈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현실에서 다친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쉼터였다.
차가운지 뜨거운지도 몰랐던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입김이 하늘에 서리던 그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뺨이 데일 것만 같았다.
‘만남이 짧건 길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몰랐어.. 준호를 한번만 더 만나고 싶어..’
얼마큼 빌었는지 모른다.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바라봤다. 흐르는 눈물을 한 번도 닦지 않고 하염없이 빛나는 달을 쳐다봤다. 준호가 잠깐 내게 왔다 가야한대도 좋아요. 손끝에 묶인 붉은실이 아니여도 좋으니 딱 한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나는 하늘 어딘가에 있을것만 같은 신에게 애원하듯 빌었다. 간절히 기도 하고 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준호가 있을 리가 없었다. 눈을 뜨면 그가 항상 내 앞에서 환하게 웃어줄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가 보다. 놀이터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리가 사무치게 쓸쓸했다.
매일같이 걷던 그곳은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밤거리를 내리 쬐는 가로등이 시야에 뿌옇게 보였다.
‘터벅터벅’
눈 위를 걷는 발자국조차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나보다. 당연하게 느껴졌던 준호가 없다는 게 쌓여있는 눈들도 알고 있는 듯 했다. 여기 저기 뛰노느라 바빴던 눈 위의 발자국 네 개가 지금은 두 개 밖에 없다. 뒤를 돌아 쌓인 눈을 내려다보니 눈들이 내게 바보라고 속삭이는것만 같았다.
“그래.. 나도 알아.. 나는 바보야.”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갈 곳 없는 걸음은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 없는 세상에 도착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싶은 게 없어도 공부를 못해도 손가락질 받지 않고 내 맘대로 뛰놀수 있는 그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을 때까지 영원히 볼수도, 뛰놀 수도 없는 곳이겠지. 허황된 이상을 좇는 내가 불쌍했다.
사람이 다른 거지. 틀린 건 아닌거라고.. 그 아이는 나를 그대로 봐줬는데, 나는 제일 경멸했던 사람들의 행동을 그대로 했던 거라고 생각하니 코끝이 시큼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늘을 똑바로 마주보고 입으로 터져 나오는 나의 모든 악하고 나쁜 습관들을 토해내고 싶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결심한 듯 고개를 들며 하늘을 보려는데 멀리서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잘 보이지 않아서 확신할 순 없었지만, 빌고 빌던 절실한 기도가 통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앞의 형체를 향해 달렸다. 매일같이 발끝에 묶여 있던 현실이 눈 속에 녹아내려 달리는 발걸음에 날개가 달린 듯 했다. 피부 모공을 얼려버릴 듯 한 칼바람 역시 나를 멈출 수 없었다.
이윽고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피부에 말라붙은 눈물은 이미 집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온몸이 환희와 전율에 젖었고, 그의 얼굴이 시야에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나는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막히고 코가 시려웠고 칼바람에 맞선 뺨이 아픔을 잊은 채 간질간질 거렸다. 질끈 묶고 있던 머리는 반 정도 풀려 버렸고 그를 놓칠까 한 번도 멈추지 못했던 다리는 온통 눈이 묻어 있었다.
그 끝에 준호가 보였다. 언제나 한 번도 슬픈 적 없던 표정이 오늘도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
달리던 나는 준호에게 양손을 뻗었고, 그는 당연하듯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다시는 놓치지 않을 기세로, 평생을 다해 준호를 품에 안았다.
“사랑해 준호야.. 미안해.. 나도 너를 사랑해..”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지도 못한 나는 목소리도 제대로 가다듬지 않은 채 숨이 넘어갈 듯 그에게 말했다. 그는 이 품을 잊지 않겠다며 나를 더 꽉 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몇십 분을 서로를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족쇄를 채우듯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속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걸 서로 알고 있었다.
“사랑 한다고 말하는 게 엄청난 책임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나지막하게 준호에게 속삭였다.
잠자코 내 얘기를 듣기만 했던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라색 유리구두가 그려진 예쁜 수첩 이였다.
준호는 그 수첩을 내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누나를 처음만난 그 순간부터 매일 같이 진심을 담아 썼어. 누나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나는 내일 한국을 떠나지만.. 나중에.. 어른이 돼서 예쁘게 웃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누나를 다시 찾을 거야.”
“아..”
다시금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가 떠나 슬펐지만 잡고 있는 이 손을 놓아야 하지만 그가 가는 길이 행복이라면, 더 큰 곳에서 세상을 날수 있다면 나는 이곳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이별이 슬프지만은 않았다. 악하지도 못되지도 않았다.
너에게 질렸다며 혹은 다른 사람이 생겼다며 듣던 쓰레기통 같은 역한 말이 준호를 만나서 치유되었다.
내게 최고의 이별을 선물 해줬던 준호에게 너무 고마웠다.
나는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고 한참을 길가에서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 갈 때 쯤 나는 힘든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집에 오자마자 그가 건넨 수첩을 펴고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레 읽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처음만나 지금까지 나에 대해 써놓은 이야기였다.
<<누나는 나와 많이 닮은 것 같아. 물론 누나가 더 어른이긴 하지만.. 세상에 시작점이 있다면 분명 누나와 나는 같은 곳에서 흘러왔을 거야. 짧지만 굵게 나는 누나한테 사랑할수 있는 시간에 모든 사랑을 줄 거야. 그 사랑을 담아 이 수첩을 간직해줘.. 우리가 한때 사랑했음을 기억하고 싶어.>>
<<사랑한다는 그 흔한말
누구한테도 할수 있는 그 흔한말
제일 쉽게 할수 있고 너무 많이해서 감흥이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난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유일하게 사랑할수 있는 시간이니까
사랑한다 말하는건 흔할지 몰라도
그 1초엔 내 가득 당신만 사는거니까>>
이별이 참 쓰렸다. 좋아하지만 헤어질 수도 있는거구나. 세상에 모든 이별이 한사람의 마음이 변해서 생기는 게 아니었구나. 짧았지만 나는 어린친구 이자 남자친구였던 그에게 많은걸 배웠다. 수첩을 열고 닫는 그 순간까지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그가 내게 잠시 다녀간 듯한 느낌에 아직도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걸어야겠지.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가면 더욱 더 꿈같이 느껴질 거야..
이별이 얼마나 아픈지 알았기에 나는 사랑을 꺼렸고, 다가오는 사랑을 막아보고 싶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어디서든 항상 환하게 웃길 바라고 또 바라며 꿈에서 깨어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