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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은실이

구름 |2013.03.18 21:49
조회 181 |추천 0

첫사랑, 은실이

 

오후 내내 산울림이 들리더니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을 어른들은 산울림이 들리는 날이면 산사태가 일어난다고 했다. 산에서 머루를 따먹던 은실이와 나는 커다란 칡잎으로 머리를 가린 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갈팡질팡한 오솔길을 지나 거대한 침엽수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숲 속을 지났다. 그러자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신선마루가 보였다. 그 곳에는 오래 전 숯을 굽던 사람들이 버리고 간 움터가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발견한 나만의 비밀 공간이기도 했다. 굵은 교목들 사이에 받쳐놓은 커다란 판자 지붕은 어지간한 비나 눈에도 끄떡없었고, 숲과 덩굴이 울창해 늘 동굴 속처럼 서늘하고 시원한 곳이었다. 우리는 움터 지붕 아래로 한갓지게 찾아들었다.

"이곳에선 초록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은실이가 말했다. 산속의 풀들과 관목들이 내뿜는 강렬한 향기가 내 코에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후두둑, 후두둑... 쏴아, 쏴아...."

숲 속의 어두움을 가르며 아까보다 훨씬 굵은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땅위로 꽂히는 빗발들 사이로 커다란 사마귀 한 마리가 보였다. 비 젖은 나방 한 마리가 팔랑 공중 위로 날아올랐다. 사마귀는 홱 하고 녀석을 낚아챘다. 언젠가 경운기를 타고가다 길 위에서 본 사마귀가 떠올랐다. 탈탈탈 경운기가 다가가자 온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사마귀는 자신의 호미 같은 앞다리를 들어 올려 경운기와 맞서려 했다. 결국 경운기는 사마귀를 밟고 지나갔고 어리석은 사마귀는 거대한 경운기 바퀴에 깔려 죽고 말았다.

"아이 추워."

은실이가 갑자기 진저리를 치며 무릎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민들레의 마디를 따서 만든 고운 꽃반지가 은실이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웅크리고 있는 은실이의 옆모습은 참으로 예뻤다. 지붕 위에 고여 있던 빗물이 벌려진 틈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땅강아지 한 마리가 잽싸게 땅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는 입고 있던 남색점퍼를 벗어 은실이 어깨위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은실이의 말랑말랑한 팔뚝이 내 맨 살에 슬쩍 닿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은실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점퍼에서 엷은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고만 했다. 덤불 밖 냇가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좔좔좔 들려왔다.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마파람은 산봉우리만한 비구름을 뭉게뭉게 몰아가고 있었다. 소나기가 멈추자 잔잔한 호수 같던 하늘이 엷은 자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낮과 밤사이에 그토록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사람처럼 우리는 줄곧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은실이의 텅 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밤 꿈속에서 우리 엄마를 보았어."

".................."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정말 우리 엄마가 계실까?”

아득한 표정을 짓던 은실이의 샛별 같은 눈에 함초롬한 물빛이 감돌았다. 가슴이 쏴하며 아련했다. 와글와글 울어대던 개구리소리가 갑자기 뜸해졌다. 조금 전 잡아둔 어린 장수풍뎅이가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 나는 가만히 녀석을 놓아주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멀리 산 둔덕에 핀 하얀 물싸리꽃들이 저녁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별안간 가슴이 답답해져오며 뜻 모를 청승이 치받쳤다.

"은실아. 나도 우리 엄마가 보내준 새 운동화를 보면 괜히 눈물이 나. 이러다 영영 엄마를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괜찮아. 그럴 때마다 난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든. 그러면 흐르던 눈물이 멈춰.’

나는 마음속으로만 가만가만 말했다. 동생과 누나를 데리고 서울로 간 엄마 아빠는 방 딸린 구멍가게라도 내면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게 이러구러 이태 째다.

“엄마가 보고 싶어!”

은실이는 낯선 곳에서 잠이 깬 아이처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그냥 은실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은실이의 어깨가 출렁거렸다. 은실이는 정말 울고 있었다. 어디선가 팔랑 팔랑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은실이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따끔거리던 눈시울이 우선해지면서 내 눈가에도 하분하분 물기가 젖어왔다. 갑자기 온 세상이 정지된 듯 고요해지더니 어디선가 짙은 초록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은실이의 낮고 물기어린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줄거지?"

"응. 언제까지나."

"꼭!"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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