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민호(黃敏湖) 숭실대학교 교수
Ⅴ. 북간도지역 독립군단
1. 독립군단의 조직 현황
북간도는 백두산 동쪽으로 두만강을 넘어 연길현(延吉縣)·화룡현(和龍縣)·왕청현(王淸縣)을 중심으로 하고, 그 주위에 훈춘(琿春)·돈화(敦化)·액목(額穆)·동녕(東寧)·영안(寧安) 등을 아울러 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역에서는 20만명 내외의 한인(韓人)들이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북간도지역에서 조직된 독립군단은 왕청현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훈춘현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연길현의 의군부(義軍府), 안도현(安圖縣)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왕청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연길현의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 등이었다. 노령지방은 대한독립군결사대(大韓獨立軍決死隊)·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혈성단(血誠團)·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등이 조직되었다. 이밖에 흥업단(興業團)·야단(野團)·혼한군무부(琿韓軍務部)·국민의사부(國民義事部)·노농회(勞農會)·광영단(光榮團) 등도 조직되었다.
2. 독립군단의 활동
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간도지역에 활동하던 독립군단 중 북로군정서는 3·1운동 이전 만주에서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이 1919년 가을 이후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로 발전하면서 성립한 무장단체였다. 대종교 지도자였던 서일(徐一)은 1911년 3월 왕청현에서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단체명으로 단군교의 부활을 의미하는 ‘중광(重光)’ 사용은 단체의 성격을 보여준다.
주요 인물은 서일을 비롯하여 현천묵(玄天默)·백순(白純)·박찬익(朴贊翊)·계화(桂和)·김병덕(金秉德) 등이었다. 중광단은 기본적으로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하였으나 무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중광단은 무장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대종교 신도와 북상의병 및 공교회(孔敎會) 등을 규합하여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 발전을 꾀하였다. 1919년 7월부터는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기 위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신민회와 광복회 계통의 김좌진(金佐鎭)을 초빙하는 등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강화하였다.
독립군단을 편성한 정의단은 명칭을 군정회(軍政會)로 변경하고 왕쳥현 춘명향 서대파에 본부를 두었으며, 같은 해 10월에 다시 명칭을 군정부(軍政府)로 바꾸어 일제와의 혈전을 전명하는 독립군사령부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12월 상해 임시정부 국무원령 제205호에 의거하여 대한독립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했고, 이듬해 정월에 서로군정서와의 차별화를 위해 재차 명칭을 북로군정서로 변경했다.
북로군정서의 군사력은 북간도지역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서대파 십리평으로부터 약 30리의 산림지대에 8개 동의 병영을 짓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두었으며,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직전인 1920년 8월 중순 현재 대원 약 1천 2백명에 소총과 탄약 24만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과 기관총 7문의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18세에서 30세의 청년을 선발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교육은 6개월 과정의 연성과(鍊成科)였다. 과목은 역사·군사학·전술과·체조·호령법 등이었다. 군사훈련은 구한국 군대식의 훈련을 기본으로 하고, 1정보 넓이의 연병장을 만들어 상시(常時)로 사격훈련 등의 실질적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1920년 6월 현재 기초적인 군사교육을 끝낸 병력은 약 6백명 정도였다. 이후 사관연성소는 입학 생도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엿으며, 1920년 9월에는 289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장을 겸하고 있었으며, 사령부의 부관 박영희(朴寧熙)도 학도단장을 겸임하였다. 교관은 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규식(金奎植)·김홍국(金弘國)·김상운(金尙云) 등이었다. 교재는『보병조전(步兵操典)』·『축성교범(築城敎範)』·『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등을 사용하였다.
북로군정서는 각 지방초소로 경신(警信)을 조직하였다. 20호~30호의 촌락에 경신분소를 두고 각 경신분과에는 과장 1명을 비롯하여 서기·통신원·탐사원·경호원 등을 두었다. 통신원은 통신사무를 담당하였으며, 탐사원은 민정(民政)을 시찰하며, 경호원은 주야 교대로 경계를 담당하여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경신국에 보고토록 하였다. 경신분국은 설치 순서에 따라 제1분국으로부터 39분국까지 두었다. 중앙의 서무부는 이를 총괄하였다.
1920년 7월~8월경의 북로군정서의 중요 간부진은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현천묵, 총재부 비서장에 김성(金星), 총재부 비서에 윤창현(尹昌鉉), 사령부 총사령관에 김좌진, 사령부 부관에 박영희, 참모장에 이장녕, 참모부장에 나중소(羅仲昭), 서무부장에 임도준(任度準), 재무부장에 계화, 인사국장에 정신(鄭信), 경리국장에 최익항(崔益恒), 군법국장에 김사직(金思稷), 계사(稽査)국장에 김경준(金京俊), 탁지국장에 윤정현(尹珽鉉), 모연국장에 이홍래(李鴻來), 징모국장에 김우종(金禹鍾), 기계국장에 양현(梁玄), 경신국장에 채규오(蔡奎梧), 군사정탐대장에 허중권(許中權), 지방시찰장에 김석구(金錫九), 경비대장에 허활(許活)·이교성(李敎性), 군의정에 주견룡(朱見龍)이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북로군정서의 임원 125명의 명단이 조사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김가진(金嘉鎭)·최재형(崔在亨)·임세창(林世昌)이라는 3명의 명예고문과 서로군정서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과 참모장 김동삼(金東三)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북로군정서가 북간도의 다른 독립군단이나 국내외의 중요 항일결사단체와 일정하게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가진은 국내와 상홰에서 활동하던 대동단(大同團) 총재이고,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자이며, 임창세는 군정서로 통합된 야단(野團)의 단장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일본군대가 간도를 무단침범하여 독립군을 공격해 오자 1920년 9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주력부대를 청산리방면으로 이동하여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의 첫번째 교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⑵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홍범도(洪範圖)에 의해 3·1운동 직후 북간도에서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1919년 5월 현재 약 2백명의 병력 규모였다. 홍범도는 경술병탄(庚戌倂呑) 이후 1910년대 후반까지 블라디보스토크·니콜리스크와 추풍(秋風)·밀산(密山) 등 연해주와 만주지역과 권업회(勸業會)가 조성한 농지에서 활동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재개를 위해 노력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고 독립에 대한 대내외적 열망이 고조되자 홍범도는 무장부대를 편성하고 근거지를 간도로 옮겨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착수하였다. 이때 홍범도가 활동지역을 간도로 옮긴 것은 1918년 8월 일본군이 러시아혁명을 탄압하고 한인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연해주지역을 대거 침입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세력이 연해주를 떠나자 활동무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볼셰비키세력은 일본군 및 백위파(白衛波)와 투쟁하면서 한인들의 항일투쟁을 지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들은 대체로 반일(反日)·반백(反白)전선에 동참하고 있었다. 특히 볼셰비키세력은 1919년 3월 올가에 설치한 ‘빨치산 제부대 임시혁명본부’ 내에 민족부(民族部)를 두어 한인독립운동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범도의 부대편성과 간도로의 이동은 연해주지역의 정세변화에 기인하는 한편, 연해주지역에서 고조되고 있던 항일기운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홍범도 부대에 참여했던 대원들 중에는 백위군의 강제징집을 거부했던 귀화한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러시아에서 급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사회주의혁명의 전개상황에 대해서도 일정한 인식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홍범도 부대가 대원 및 무기 등 장비를 모집하는 과정에는 이동휘(李東輝)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역할이 중요했다. 홍범도는 1919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여 이동휘가 부장을 맡고 있던 선전부에서 활동하엿으며, 8월 8일에는 국민의회 측과 상의하에 간도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또한 7월경에는 간도지역의 구춘선(具春先)과 의논하여 그가 주도하고 있던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홍범도가 간도로 근거지를 옮겼던 것은 간도가 갖고 있던 지정학적 이점 이외에도 대한국민회의 간도지부와 훈춘지부라는 대중적 기반의 존재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독립군은 설립 초기부터 활발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1919년 8월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부대가 전개한 ‘최초’의 국내진공이었다. 연이어 홍범도 부대는 1919년 9월에 함경남도 갑산군 금정주재소(金井駐在所)를 습격한 뒤 10월에는 평안북도 자성군에 진출하여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당당한 독립군으로서 몸을 포연탄우중(砲煙彈雨中)에 던져 반만년 역사를 영광되게 하며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줌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요 또한 민족을 위한 본의다”라는 내용의「대한독립군 유고문(大韓獨立軍諭告文)」도 발표하는 등 굳건한 항일의지를 천명하였다.
대한독립군은 무기와 병참의 보급에 곤란을 겪고 있던 중 1919년 겨울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갔다.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이후 1920년 9월부터 근거지를 떠나 국민회·한민회·의군부·신민단 등의 부대들과 함께 이도구에 도착하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특파원 보고에서는 대한독립군의 병력을 약 5백명, 연합부대의 병력을 1천 4백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매일신보』는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과 관련된 전황을 보고하면서 홍범도에 대해 ‘음모단 중에서 제일 무서운 두령’이라고 보도하였다. 이는 대한독립군이 홍범도의 지휘하에 청산리대결전에서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음을 반증한다.
⑶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대한국민회 부대는 북간도 전역에 걸쳐 지방행정 조직이 가장 잘 정비되어 있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산하의 병력이었다. 이 조직은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개최되었던 ‘조선독립축하대회’에서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가 결성되면서 발족되었다.
조선독립기성회의 중요인물은 거의가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간민회 출신이었다. 이들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곧 임시정부를 추대하기로 하고 회의 명칭과 국호가 서로 맞지 않음으로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대한국민회 규칙」에서도 “본회는 임시정부 법령 범위 내에서 독립사업을 기도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자신들이 임시정부 직할의 독립운동단체임을 분명히 하였다.
대한국민회는 본부를 연길현 합마당(蛤碼塘)에 두었으며, 그 밑에 동·서·남·북 등 8개 지방회(地方會)와 130여개의 지회를 조직하였다. 주요활동은 군자금 모집과 교민사회의 안정 및 독립군 양성에 있었다. 실제로 대한국민회는 관할지역의 한인들 중 평균 15향(약 5정보) 정도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부농에 대해서는 1백원 이상 3천원까지 출연하도록 하였으며, 일반농민들에게는 평균 속(粟) 2두, 초혜(草鞋) 2족분을 징수하였다. 대한국민회의 활동은 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두어 1920년 5월경에는 17만원의 거금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1920년 1월경 일제의 정보기관이 파악하고 있었던 대한국민회의 조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본부:연길현 춘양향 합마당, 회장 구춘선(具春先), 임시대리 서상룡(徐相龍), 서기 김정(金精)·고동환(高東煥), 재무 김규찬(金奎燦), 경호부장 박두화(朴斗和), 편집부장 이완(李完), 통신부장 최윤주(崔允周)
중앙총회:연길현 지인향(志仁鄕) 국자가 서구(西溝), 회장 강구우(姜九禹)
동부지방총회:연길현 지인향 화령촌(花領村), 회장 양도헌(梁道憲), 부회장 지모(池某), 서기 최동빈(崔東彬), 통신부장 진석오(陳錫五)
서부지방총회:연길현 숭례향 묘구(廟溝)
남부지방총회:화룡현 지신향 장재촌(長財村), 회장 마진(馬晉), 서기 최기학(崔起鶴), 재무 남세극(南世極)
북부지방총회:왕청현 춘화향 합수평(合水坪), 역원 불명.˝
이밖에 대한국민회의 회장인 한때 마진이 선임된 일이 있으나 창립 때부터 오랫동안 구춘선이 연임하였다. 대한국민회의 직할부대였던 대한국민회 부대는 1919년 겨울부터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으로 불렸다. 간부진으로는 군총장(軍總長)에 안무(安武), 부관에 최익룡(崔翊龍), 중대장에 조권식(曺權植)·임병극(林炳極), 향관(餉官)에 김석두(金碩斗)·허동규(許東奎) 등이었다. 대한국민군의 초기 근거지는 왕청현 지인향 의란구(依蘭溝)였다.
대한국민회는 군대 양성을 위해 각 호마다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 1명을 차출하여 지방총회에 보내 사령부에서 1개월간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했다. 교육 내용은 학과교육과 술과교육으로 나뉘어졌다. 학과교육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을, 술과는 집총교련과 집총야외교련을 각각 하였으며, 일본의 보병조전(步兵操典)에 의한 교육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8월말경 대한국민회 부대의 병력은 약 450명이었으며, 군총 6백정, 탄약 7천발, 권총 160정, 수류탄 120개 등을 확보하고 있다. 대한국민회 부대는 이들과 연합하여 1920년 5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로 편성되어 6월 7일에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도 홍범도 부대와 함께 참전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약 880명의 부대인원 명부가 조사되어 있엇던 것으로 나타나는 등 대규모였다.
⑷ 군무도독부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는 북간도 왕청현 춘화향(春華鄕) 봉오동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신한촌을 건설하는데 성공한 최진동(崔振東)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단이었다. 간부들 중에는 공교회원과 의병 출신이 많았다. 일찍이 간도지역으로 이주한 최진동의 3형제는 봉오동을 중심으로 석현·홍진·양수·대감자 일대에만 해도 무려 1천 5백무(畝)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최진동은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는 3·1운동 이후 자신의 자위단(自衛團)을 토대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봉오동을 군사기지로서 활용했다. 주요 간부는 참모장에 박영(朴英), 대대장에 이춘승(李春承), 중대장에 이동춘(李同春), 소대장에 최문인(崔文仁) 등이었다. 이밖에 모연대장에 최태여(崔泰汝), 지방국장에 주원덕(朱元德), 중대장에 최봉세(崔鳳世)·김만순(金萬順) 등도 가담하였다.
1920년 5월경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대한국민군, 그리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연합군단을 결성했다. 즉 대한독립군은 1919년 여름부터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을뿐만 아니라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먼저 대한국민회 측의 인물들과 접촉하여 행정과 재정은 대한국민회, 군무는 홍범도와 안무가 각각 분담하여 통솔하기로 했다. 항일전을 수행할 경우에는 홍범도가 ‘북로정일제일사령부장(北路征日第一司令部長)’의 직함으로 전군을 지휘토록 협의하였다. 이후 북로정일제일군은 최진동 부대와도 연합을 시도하여 이 과정에서 대한북로독군부가 편성되었다. 1920년 현재 대한북로독군부의 병력은 대한독립군 계통이 460명으로 군총 2백정, 탄약 4만발, 권총 30정이었고 군무독군부 계열과 대한국민회 계통은 280명으로 군총 2백정, 탄약 1천발, 수류탄 120개, 기관총 2문이었다. 이 부대는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주력군이 되었다.
⑸ 대한정의군정사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는 1919년 3월 한말 의병항쟁을 전개하던 이규(李圭)·강희(姜喜)·조동식(趙東植)·이동주(李東柱) 등이 조직하였으며, 구한국 군인이 주력인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大韓正義團臨時軍政府)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이들은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1919년 10월 명칭을 대한정의군정사로 개칭했다. 이규가 임시정부에 보낸 보고에 의하면, 이들의 병력은 1919년 10월 현재 8백~9백명 정도였다. 내두산(乃頭山)에는 중국 보위단이라는 명칭으로 1백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소사하지방의 훈련소에는 마을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240명의 단원이 훈련 중이었다. 이밖에 화전현 고상하(古相河)에는 1백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포수(砲手) 수백명이 사냥에 종사하면서 군정사와 연계되어 활동했다.
1919년 12월 현재 중요 간부로는 군정사 총재 이규, 부총재 강희, 비서과장 겸 통신과장 홍우찬(洪祐贊), 비서과 서기 장남섭(張南燮), 서무과장 겸 회계과장 강두희(康斗熙), 외교과장 길성익(吉星翼), 편집과장 겸 측량과장 윤석우(尹錫禹), 심판과장 연병준(延秉俊), 초모과장 박성호(朴星浩), 공장과장 조병규(趙炳奎), 사찰과장 석광옥(石光玉), 순찰과장 강도준(康道俊), 경리과장 강이중(姜以中), 출판과장 김진원(金鎭源), 군무부장 강익성(姜翼成), 제1중대장 조동식(趙東植), 제2중대장 오일(吳一) 등이 있었다.
대한정의군정사는 대한독립군 및 여러 무장단체들과 연합하여 주로 국내의 일본 헌병대나 경찰서·관공서 등을 습격하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하여 만주지역의 한인들에 대한 교육과 계몽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청산리대결전 이후 김좌진·지청천 부대와 합류했다.
⑹ 의군부(義軍府)
의군부는 의군단(義軍團) 또는 대한의군도독부(大韓義軍都督府) 등으로 불렸으며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의병대장들을 중심으로 1919년 4월경에 조직되었다. 의군부의 총재는 간도관리사 이래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의병항쟁을 주도했던 이범윤(李範允)이 추대되었으며, 허근(許瑾)·조상갑(趙尙甲)·홍림(洪林)·최우익(崔于翼)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연해주에서 활동했을 때에는 이범윤의 근거지였던 추풍에 본부를 두었으나 북간도로 건너온 후로는 연길현 명월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본부의 조직으로는 이범윤의 휘하에 사령관 김영선(金營善), 검사부장에 최우익, 검사관에 김영범(金永範), 재정부장에 강봉거(姜鳳擧)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항일전(抗日戰)이 고조되던 1920년 7월 이후에는 검사부와 참모관회의, 군사령부를 통솔하는 참모부, 경리와 경위(警衛)를 맡는 참리부(參理部), 지방조직을 통솔하는 지방부 등으로 정비되었다.
전투부대는 허근을 대장으로 하는 1백여명의 전위대(前衛隊)와 최우익을 총무로 하는 산포대(山砲隊)로 구성되었다. 특히 16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산포대는 포병이 아니라 야산을 경장(輕裝)으로 달리며 정확한 사격으로 적에게 기습을 가할 목적을 조직된 별동대였으며, 이로 보아 의군부의 최정예부대였다. 이후 전위대와 산포대는 통합되어 최우익은 의군부 독판(督辦)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부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했다.
의군부의 지방조직은 북간도 내 의군부 본부 부근인 지인향 의란구 남동(南洞)에 소재한 중부와 용신사(勇新社) 양목정자(楊木亭子) 등에 위치한 서부 조직이 있었으며, 그 관할구역 안에 여러 이정국(理正局)을 두어 통제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의군부는 1920년 8월 최우익을 비롯하여 이을(李乙)·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의 핵심인물이 의란구(依蘭溝) 북동(北洞)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참변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는 등 위기를 맞았다.
⑺ 대한신민단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은 3·1운동 후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 부대로, 단장은 김규면(金圭冕)이었다. 임시정부 파견원의 보고에 의하면 5백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만주지역 근거지는 왕청현 춘화향 초모정자였다. 단장에 김준근(金準根), 부단장 박승길(朴承吉), 사령장관 양정하(梁正夏), 참모장 김창순(金昌順), 재무장 이존수(李存洙), 대대장 최규남(崔奎南)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왕청현의 신민단 지부는 약 2백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장총 약 160정, 권총 약 50정, 폭탄 3상자, 망원경 3개, 소통찬은 1정에 약 2백발씩으로 무장하였다. 신민단은 헌장에서 ‘대한국신민단은 민주제에 의하여 독립국을 건설하고 영원히 보존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었는데, 이는 민주공화제에 입각한 독립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단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민단은 1920년 6월 4일에 박승길(朴昇吉)이 인솔하는 30명의 대원이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를 치렀으며, 6월 7일에는 이흥수(李興秀)가 인솔하는 60명의 대원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 7월에는 단장 김규면이 김덕선(金德宣)에게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게 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왕청현의 신민단 참모부에서 권총과 탄환 및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서류를 받은 김덕선은 휘하에 6명의 대원으로 의연대(義捐隊)를 조직하고 국내로 들어와 함경북도 무산·길주·의령 등에서 활동을 하였다. 185명의 신민단원을 확보한 의연대는 군자금으로 현금 1893원, 출금계약(出金契約) 33878원 모금에 성공하였다. 이후 서울에 신민단 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는 신민단이 군자금을 모집하기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밖에 한국광복단(韓國光復團)은 1920년 1월 북간도지역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복벽주의(復辟主義)계열의 독립군 부대로 본부는 왕청현 춘명향(春明鄕) 대감자(大坎子)에 두었으며 안도현(安圖縣) 등에 지단이 있었다. 광복단은 복벽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조직이었으며, 450명의 병력에 장총 150정, 권총 2백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광복단이 복벽주의계열의 조직이었다는 점은 광복단 취지서에 군수보복(君讐報復)을 강조하고 있는 것엣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간부는 단장에 이범윤, 고문에 김성극(金星極), 대판(大辦)에 전성윤(全聖倫), 총무에 홍두식(洪斗植), 참모에 황운서(黃云瑞)였으며, 안도현 지단의 지단장은 김승국(金昇國)이었다.
한편 임시정부 파견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광복단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당시 어랑촌전투(漁郎村戰鬪)에서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1920년 8월 현재 2백여명의 병력에 군총 4백정, 탄약 1천 1백발, 권총 30정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 통솔자는 전성윤이었으며, 임원은 약 27명이었다.
⑻ 대한의민단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은 1920년 4·5월경 연길현 숭례향(崇禮鄕) 묘구(廟溝)에서 천주교인과 의병이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단장은 방우룡(方雨龍)이었다. 임시정부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의민단 2백명의 군인과 2백정의 군총을 보유하고 있으며, 간부는 방우룡·김연군(金演君)으로 국민회 부대와 연합하였다. 또한 일제 측 자료에서는 인원은 약 3백명이고 의병항쟁파에 속하는 단체였다. 1920년 8월 현재 병력은 3백명이고 군비는 군총 4백정, 탄약 4만발, 권총 50정, 수류탄 480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의민단은 왕청현 춘화향에 본부를 두었으며, 동서남북 및 중부에 지부가 있었다. 간부로는 단장 방우룡 이외에 참모장 김종헌(金鐘憲), 영장 허은(許垠), 부단장 김연군 등이 있었다. 천주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정상태는 비교적 풍부했다.
의민단은 1920년 7월 26일 북간도의 독립군단들이 연합부대로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가 창설되자 대한독립군과 함께 제2대대로 편성되었다. 주둔지는 연길현 명월구였으며, 소명월구에 있던 방우룡의 집과 천주교 건물이 제1군사령부로 이용되었다. 의민단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1920년 7월 명월구 이청배(二靑背)에 대한국민회 등 연합한 사관양성소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그해 9월,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 기병 1백여명이 침입하여 사관양성소를 방화함으로 폐교되었다.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를 이동하기 시작한 의민단은 부대를 2대로 편성되었다. 이중 비교적 훈련이 잘된 모험대 100여명은 국민회 부대 및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청산리대결전에 참가하였다. 이후 의민단은 독립군의 북정을 따라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이밖에 1920년대 초반 북간도지역에는 대한독립군결사대(大韓獨立軍決死隊)·대한공의단(大韓公義團)·대한의군사부(大韓義軍事部)·구국단(救國團)·야단(野團)·훈춘한민회(琿春韓民會)·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 등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의 군사활동은 1920년대 초반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도의 근간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