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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스 월드 <경기도>

배규상 |2013.04.27 22:07
조회 435 |추천 0

 

떠나자! 하루에 즐기는 새로운 세계여행, 아인스월드~

세계 속으로 한번 떠나보자.

 

 

아인스월드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34점의 문화유산과 유네스코 10대 문화유산 9점, 현대 7대 불가사의 6점 등 세계 25개국 109점의 유명 건축물들이 1/25로 축소, 전시되어 있는 미니어쳐 테마파크입니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

독특한 예술적,미적업적,창조적 재능의 걸작품으로서, 일정시간에 걸쳐 하나의 문화권안에서 인간문화의 발전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인정되는것. 특징적 건축양식,또는 인간주거의 특징적사례로서, 자연또는 사회,문화,경제적인 변화에 의해 파손되기 쉽다고 우려되는 문화유산을 말합니다.

 

 

 

   ▲ 아인스월드에 도착했다.

 

요즘은 항상 그렇듯이 주말만 되면 찌뿌둥한 날씨로 변해버리는 것이 참 아쉽다.

그러나 아주 따가운 햇살에 비한다면 도리어 이런 날씨가 여행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영국존

▲ 타워브리지 

 

1886년 공사가 시작되어 8년만인 1894년에 완성된 영국 템즈강의 명물 ‘타워브리지’. 그 쓰임새는 단순한 일반 대교(大橋)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수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성(城)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장하다. 강물 위로 배가 지나가게 되면 수압을 이용해 다리가 들어올려지게 되고 한번 열릴 때 총 3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배가 중요한 교통기관이었던 시절에는 하루에도 40-50회 가량 열렸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2-3회 정도에 그치고 있어 운이 닿지 않으면 이런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총길이 270m, 총중량 1100톤에 달하는 타워브리지는 대영제국의 힘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건립되어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빅토리아풍과 고딕풍이 합쳐진 세련된 멋을 보여주고 있다. 타워브리지는 특히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밤이 되면 주변의 조명이 브리지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준다. 템즈강의 은은한 물결과 그 위의 타워브리지, 그리고 런던탑 등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남긴다. 탑 내부로 들어가면 역사적 자료들과 함께 다리의 구조에 관한 여려가지 사료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다.

타워 브리지는 완공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시기 동안 단 한번도 고장난 적이 없다. 영국 토목기술자와 건축가들의 놀라운 기술력과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타워브리지는 1980년대 이후 전체가 박물관화 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서 기계공학, 토목공학은 물론이고 구조기술, 전기 엔지니어링, 실내 인테리어, 조각 등 예술과 기술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었다. 공학자 존 울프 배리, 조각가 호라스 존슨 경이 대표적인 참여자들이며 주탑부는 강철 프레임에 외관을 벽돌로 장식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템즈강에는 타워브리지 이외에도 ‘런던 브리지’라는 다리가 있다. 이름이 비슷해 관광객들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예전에 미국인들이 다리를 사기 위해 런던시와 협상 중이었는데, 미국측 담당자가 타워브리지와 런던브리지를 혼동해 끝내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런던브리지를 샀다는 것이다. 한때 타워브리지는 극심한 생활고나 실연을 당한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 위해 많이 찾기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940년경에는 타워브리지의 예술성을 폄하한 일부 엔지니어와 예술가들에 의해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고딕 양식을 벗겨내고 그 위에 유리 구조물을 입혀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재탄생 시켰으며 여전히 전 영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영국 국회의사당

 

영국 국회의사당은 ‘의회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전 세계에 심어놓은 민주주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국회의사당의 정식이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The Palace of Westminster)’인데 그 기원은 1066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북부에 있던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를 침입하여 무력으로 정복했고, 이때 왕이 된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시대인 1090년에 완성됐다. 템즈강을 바라보면서 웅장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1500년대 초반까지 헨리8세의 왕궁으로 사용되어져 왔고 정치인들을 심판하는 법정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당시 목조건물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843년 사소한 실수로 인해 화재가 발생, 전체 사원의 3분의 2가 없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서 채택된 수학자이자 유명한 건축가인 찰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의 설계로 1840년에 착공된 후 48년만인 1888년 완공된 것이다. 요크셔지방의 돌을 직접 실어와서 지어졌으며 우아한 고딕양식으로 재탄생,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특히 이 국회의사당은 건축 양식으로 표현할 때 ‘고딕 리바이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즉, 예전 중세 시대에 풍미했던 고딕풍을 현대에 와서 다시 ‘리바이벌(재현)’했다는 의미이다. 빅토리아 왕조시대 최초의 대규모 건축물로 기록되고 있다.

3만 평방미터에 부지에 길이 300m, 1,100여개의 방이 있으며 복도의 총 길이만 3.2km에 이른다. 내부에는 총 100여 곳의 층계가 있으며 남쪽 부분은 하원, 북쪽 부분은 상원이 자리잡고 있다. 의회가 열릴 때는 나름대로의 표시를 하는데, 낮에는 전체 의사당내 가장 높은 건물인 빅토리아 타워에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이 걸리고 밤에는 시계탑인 빅벤에 조명등이 켜진다고 한다.

내부는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어 의원들에게 청렴한 생활을 하도록 암시하고 있다. 의원사무실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면담은 오직 로비에서만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오늘날 ‘로비스트’라는 말의 유래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국회의사당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높은 예술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지금은 테러단체 ‘IRA’의 폭탄테러 이후 의사당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방청 형식을 빌어 하원에는 출입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턴 사원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서쪽(West)에 있는 대사원(Minster)’이란 의미이다.
8세기 경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그 후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 13세기 헨리 3세에 의해 각각 개축이 됐다. 원래는 노르망디 양식이 강한 건물이었으나 헨리 3세가 고딕양식으로 다시 변형시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내부에는 긴 스테인드글래스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화려한 멋을 더해준다. 길이 1백56m, 너비 61m, 그리고 높이 31m의 크기이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 공이 이곳에서 왕위대관식을 한 이래 많은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이뤄진 장소로 유명하다. 프랑스에서 온 노르만 출신인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모두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트 사원을 대관식 장소로 선택했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지금의 국회 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과 한쌍을 이루고 있던 건물. 웨스트민스터 궁은 16세기까지 왕이 거처한 궁궐이었으며 바로 길 건너 위치해 있는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원래 왕실 직속의 특수 교회였다. 그래서 공식 명칭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성 피타교회’이지만 흔히 사람들은 그냥 ‘애비(Abbey)’ 라고 부른다.

사원 안에는 역대 왕들과 유명 인사들의 묘와 기념비가 많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사한 무명용사를 위한 비석도 함께 세워져 있다. 특히 본당에는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와 엘리노어 왕비, 헨리 5세 등의 묘가 있다. 역대 왕들이 대관식용으로 사용한 의자 ‘코로네이션 체어(Coronation Chair)’도 명물로 꼽히고 있다. 글래드스턴을 위시한 정치가, 문학가인 워즈워드와 엘리어트, 과학자인 뉴턴, 왓트, 음악가 헨델 등이 이곳에 묻혀있기도 하다. 이처럼 역사적 인물의 묘지가 산재해 있는 까닭에 사원 내부로 들어서면 한순간에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의회정치의 총본산이자 또한 종교개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643년부터 1649년까지 이곳에서 열린 총회에서 칼빈의 사상이 구체화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작성되기도 했다. 이는 종교 개혁가인 칼빈의 대표적인 신조이자 오늘날 장로교회의 표준적인 신앙원리가 되고 있다.

또한, 왕의 대관식 장소와 무명전사의 추모비가 함께 있음으로 인해 영국 입헌군주의 진정한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정문의 녹색 대리석에서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remember winston churchill)’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 석판이 눈에 띈다.


 

▲버킹엄 궁전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서남쪽에 위치한 버킹엄 궁전은 영국 입헌군주 정치의 출발점이자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1703년 건축되었을 때는 애초 셰필드 공작의 저택으로 이용되어 왔다. 1761년 조지 3세가 이를 구입한 이후 왕실 건물로 편입되었으며 건축가 J. 내시에 의해 개축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 왕궁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내시는 대리석을 사용해 아치형의 입구를 만듦으로써 인상적인 건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조지 3세는 예산을 초과하는 바람에 자리를 박탈당하고 이곳을 사용하지는 못하게 됐다. 19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이후 여왕이 상주하는 궁전이 되기 시작했다. 그 후 계속적인 증개축이 시행되었는데, 1946년 E.블로어, 1913년 A.웨브가 동쪽 옆면을 증개축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2만2000 평방미터의 호수를 비롯해 17만 4000평방미터의 대정원, 다수의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도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킹엄 궁전은 1993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램브란트, 루벤스, 카나레또 등의 작품과 함께 왕실 소장품을 전시하는 ‘픽쳐 갤러리’(Picture Gallery)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여왕이 있을 때는 지붕에 깃발이 꽂혀있게 되며 여름 휴가기간인 8월초부터 약 2달 동안 일반인도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개방을 하게 된 이유는 93년 윈저성이 화재로 인해 손상을 입자 이를 복구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내부 정원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기념비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각상들이 매혹적인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진리, 박애, 정의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이념과 과학, 예술, 군사, 공업, 농업을 상징하는 군상들이며 영국인들이 사랑한다는 승리와 용기, 그리고 끈기를 상징하는 조각물도 있다.

버킹엄 궁전의 명물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근위병 교대식’을 빼놓을 수 없다. 전통 복장을 한 근위병들이 정확하게 72cm의 보폭으로 걸어다니며 교대를 하는 의식을 통해 영국의 전통과 권위를 엿볼 수 있다. 번쩍이는 붉은색 재킷과 부드러운 털이 달린 베어스킨이라는 모자를 쓴 병사들이 근엄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은 ‘런던 관광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궁전 정면에서 우측편에 있는 제임스파크 공원에서는 매일 군악대가 멋진 연주를 선사하고 있어 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의 흥취를 더해준다.

최근에는 궁전 내부에 ‘퀸즈 갤러리(Queen's Gallery)’가 개관되기도 했다. 이곳에는 8곳의 영국 왕궁에서 5세기에 걸쳐 수집된 450여점의 왕실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존

▲에펠탑

 

프랑스 파리의 만국 박람회장에 위치한 높이 984피트(약320m), 무게 7000톤의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시공자인 프랑스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으로 불리고 있다. 1887년부터 약 300여명의 철강기술자가 동원되어 2년 동안 공사를 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변형을 거쳐왔다. 이제까지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연평균 6백만명으로 총 2억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파리지앤(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각종 행사를 이곳 근처에서 치루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에펠탑은 애초에는 특별한 송수신 기능이 없게 만들어졌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55피트의 안테나가 덧붙여져 TV송신탑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건설 후 1930년까지 약 40년간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이 탑이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세느강 근처 땅은 모래가 섞인 연약한 지반이라는 점과 높이가 300m를 넘어가면 바람이 건물을 미는 힘인 횡력이 급격하게 높아진다는 점 때문에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미 파나마 운하의 수문건설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 건설에 참여했던 에펠의 뛰어난 건축능력은 이런 한계점을 극복했고, 이 탑은 11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건재하다. 에펠탑은 건설 당시에도 파리 시민들의 숱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파리의 건물들이 보통 5~6층 높이인데 비해 에펠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연과 조화되는 도시미’를 강조하던 파리 사람들이 ‘오만할 정도로’ 높은 에펠탑을 묵과하기도 힘들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인 모파상, 에밀 졸라, 뒤마 등 3백여명이 탄원서를 제출할 정도로 반대는 격렬했다. 특히 에펠탑 건설에 가장 많은 반대를 했던 모파상은 에펠탑이 완공된 후 내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곳이 흉물스런 에펠탑을 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파리의 유일한 곳’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에펠탑에 오르면 파리시 전체는 물론, 바로 옆 세느 강에서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유람선을 감상할 수 있다. 내부에는 세군데의 테라스를 비롯해 레스토랑, 카페, 영화관이 들어서 있으며 리셉션,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는 귀스타브 에펠 홀도 있다. 에펠탑은 그간 자연적인 변화를 겪기도 했는데, 기온으로 인해 높이가 15cm상승하고 바람 때문에 12cm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탑 전체를 휘감고 있는 조명은 어두워진 후부터 새벽까지 매 시간마다 10분간 화려하게 빛난다.


 

▲ 샤르트르 대성당

 

파리에서 서남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샤르트르(Chartres)라는 지역은 프랑스의 곡창지대인 보스 지방의 수도다. 이곳에는 ‘서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샤르트르 성당’이 있다.

흔히 ‘프랑스 고딕양식의 총체’라고 불려지는 이 성당은 1194년 대화재로 전소되어 버린 바실리카 대성당의 토대에 신축되기 시작해 1220년에 완공되었다. 길이 130m, 높이 37m의 아치와 105m의 높은 탑, 그리고 약 2000평방미터에 걸쳐 있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색유리 조각으로 만든 그림이자 창문)가 성당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높은 건물과 첨탑, 수직으로 솟아있는 느낌을 주는 건물 외벽은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함께 고딕성당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표현해주고 있다. 샤르트르 성당은 아미앵성당, 노트르담성당, 랭스성당 등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양식 건축물로 분류되고 있다. 북쪽 현관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들은 자유로운 몸과 긴장감 있는 얼굴 표정들로 인해 매우 매력적이다.

이 성당을 지을 때 지역 주민들 모두가 발 벗고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대의 역사가인 로베르드 토리니는 ‘사람들이 교회 공사를 위해 돌과 목재, 곡식, 그리고 물건들이 가득 들어있는 손수레를 직접 끌었다’고 전했다.
1507년에 번개로 인해 북쪽의 첨탑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1836년에는 납으로 만든 지붕의 뼈대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1840년에 주철로 지붕의 뼈대를 만들고 녹이 슨 동으로 지붕을 얹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지하에는 여러 묘소가 있는데, 그 건축기법과 실내 모습이 매우 불가사의하다. 제단실 밑의 생 루뱅 지하묘소는 9세기에 생겼으며, 또 다른 지하묘소인 생풀베르는 프랑스 전역에서 가장 넓은 크기의 낭만적인 분위기로 인해 많은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모마리아를 비롯해 많은 성인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샤르트르의 청색’으로 불리는 특이한 색감이 감정을 정화시켜준다. 또한 성당 내부에는 장미 모양의 스태인드글라스인 ‘장미창’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쪽의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남쪽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북쪽은 성모를 각각 그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이들은 프랑스의 장미창을 대표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히며 장장 20만점이라는 대량의 소장품 덕에 관람 기간만 일주일이 넘게 걸릴 정도라고 한다.

원래 루브르 박물관은 1190년 필리프 오귀스트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군사시설이었지만 1300년대 프랑스 군주였던 샤를르 5세는 이를 저택으로 사용했다. 그 후 프랑수와 1세는 군사적인 냄새가 나는 권위적인 외형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롭게 변형시켰고 이후 300년에 걸쳐 궁전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시기에 루브르 궁전은 끊임없는 개축과 증축을 한 뒤에 결국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루브르 궁전에는 원래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 역대 왕들이 수집해놓은 미술품이 있었다.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조성하면서 더 이상 루브르가 궁전의 역할을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 나폴레옹 시대에 이곳을 일시적으로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전시물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왕실의 보석과 귀금속류가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왕실의 보물을 공개하기로 결정해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얻었으며 그때부터 온전히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브르가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박물관으로 탄생하는 데에는 또 한번의 대대적인 공사가 뒤따랐다.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은 이른바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인 개축을 시도했고 이때 모든 전시실로 연결되는 중앙 뜰 가운데의 유리 피라미드도 건설했다. 이는 당시 매우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았으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됐다. 피라미드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안내소와 주차장, 그리고 각종 상점이 있는 새로운 지하공간인 ‘까루젤 뒤 루브르(Carrousel du Louvre)’를 만날 수 있으며, 세개의 전시관인 쉴리(Sully), 드농(Denon), 리슐리유(Richelieu)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전 세계 미술가와 미술연구가들이 찾고 있을 뿐 아니라 관광객들 역시 반드시 거치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특히 젊은 화가나 조각가들은 이곳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창작열정을 불태우기도 한다. 보관되어 있는 작품은 고대에서부터 19세기까지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연대, 지역별로 분류되어 각 건물에 배치되어 있다. 세잔, 고흐, 르누아르, 모네 등 거장의 작품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샤크레케르 대성당

 

1876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1919년에 완공된 샤크레케르 대성당은 건축가 우트리오(Utrillo)와 몽마르뜨에 살고 있던 1백여명에 가까운 예술가들이 합심해서 지은 성당이다.

파리의 대주교 기베르에 의해서 건축이 추진된 이 성당은 당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카톨릭의 숭고한 신앙심을 일깨울 목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지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프랑스인들은 자국 예술의 위대성을 자랑해 자존심을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신앙심을 더욱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건축비는 신자들에 의해서 충당되었는데, 그들의 기부금만 4천만 프랑에 달했다. 당시 모금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애초에 이 성당은 온통 하얀색이었고 이러한 외양이 기존 파리의 건축물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다. 특히 인근의 개선문과 에펠탑 등과 그 건축 양식에서 닮은 부분이 없고 지나치게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건축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한번은 들르는 유명한 건축물이 됐다. 특히 중앙의 3개의 돔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는 ‘성심성당’, 즉 ‘성스러운 마음’의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로마네스크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중앙에 가장 큰 대사원이 있으며 종탑의 높이는 91m에 달한다. 종탑 안에 있는 종은 유럽에서 가장 크기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의 현관문에는 현란한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고 80m에 달하는 중앙 돔에 오르면 파리 외곽 50km까지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개선문, 에펠탑, 불로뉴 숲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콩코르드 광장과 센 강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 꼭대기까지는 수많은 계단이 있으며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이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미사를 보고 있으며 특히 내부 천정에 그려져 있는 예수와 천사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성당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는 옛날 몽마르뜨 화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명화가들이 관광객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있으며 근처에는 유명한 작가와 음악가들이 묻혀있는 묘지가 있다.

▲노트르담 사원

 

현재 노트르담 사원이 위치한 곳은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후 4세기경에 카톨릭이 국교로 지정되면서 이곳에 성당이 만들어졌고 1163년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파리 주교에 의하여 본격적인 개축이 시작되면서 길이 130m, 폭 48m, 높이 35m의 전형적인 고딕양식 건물이 만들어 졌다. 많은 건축가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참여해 무려 170년 동안 건설됐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에 첨탑이 파괴되기도 했고 한때 포도주 창고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9세기 비올레르 뒤크(Viollet-le-Duc)에 의해 재건됐다.

원래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말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의미이며 성모마리아를 지칭한다. 정면에 보이는 두개의 종탑과 장미창이 있으며 입구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정면에서 왼쪽 문이 ‘성모마리아의 문’, 가운데가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최후의 심판의 문’, 그리고 우측에는 ‘성녀 안나의 문’이다. 이 문들 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상징하는 28개의 입상이 나열되어 있으며 2층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화려한 장관을 볼 수 있다. 좌우에는 각각 인류의 시초인 아담과 이브의 조각이 있다.

성당 내부는 무려 9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3개의 장미창과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등이 걸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장미창은 직경이 13m에 이르며 햇빛의 각도와 강약의 변화에 따라 창의 모습도 시시각각 변하게 돼 ‘신비의 색깔’이라고도 칭해진다. 3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세느강과 파리의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노트르담 사원의 또다른 특징 중의 하나라면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앞면 보다는 뒷면이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건축되었다는 점이다. 노트르담 사원은 그간 잔다르크의 명예회복 심판, 나폴레옹 대관식, 드골 장군의 장례식, 그리고 미테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등이 치러져 프랑스인들에게는 유서 깊은 현장이자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원으로 깊이 각인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 방문하면 4명의 연주자에 의해서 연주되는 파이프 오르간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연주 소리를 듣다보면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신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위대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이곳을 배경으로 종지기 콰지모도의 사랑과 자유를 담은 소설 <노틀담의 곱추>를 쓰기도 했다.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파리 남서쪽의 베르사유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에서 16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왕들의 관저로 쓰였던 ‘유럽 궁전의 진수’라고 할만하다. 절대왕정 시대인 당시에 군주는 매일같이 수백명의 귀족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관직과 명예직을 수여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보해 나갔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넓은 공간과 함께 자신의 위엄과 명예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권위 있는 건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근 50여년 동안 증축과 개축을 하면서 그 모습을 하나 하나 완성해 왔다. 1610년 루이 13세가 베르사유 궁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궁전을 짓는 것으로 시작되어 1643년 루이 14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본격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당시 루이 르 보, 쥘르 아르두앵 망사르, 로베르 드 코트와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건축사들과 천재적인 조경사로 알려져 있는 앙드레 르 노트르가 이 작업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약 50년간 전체 길이 680m의 거대한 궁전을 짓기 위해 약 2만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아름답고 특이한 곳이라면 단연 ‘거울의 방’을 손꼽을 수 있다. 이 방은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의 규모로 곳곳에 거울이 있으며 천장은 프레스코화(소석회(消石灰)에 모래를 섞은 재료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로 뒤덮여 있다. 화려한 궁정의식을 치르거나 외국의 특사를 맞을 때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을 비롯해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확인하는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이 방에서 체결되면서 일약 평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프랑스식 정원의 걸작’으로 불려지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루이 14세의 방에서부터 출발해 꽃밭과 울타리, 분수, 십자 모양의 대운하 등이 배치되어 장엄하면서도 권위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루이 14세의 뒤를 이은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에 약간의 영국적 색채를 가미했다.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농가와 소 젖짜는 곳, 물레방아 등 소규모 전원마을과 함께 영국식 정원을 만들었다. 프랑스혁명 당시에 가구나 장식품 등이 많이 유실되었고 현재는 궁전 중앙부, 예배당, 극장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간이 역사 미술관으로 변모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개선문

 

개선문이란 보통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아치 형태의 건축물을 말한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많이 세워져 왔으며 현대의 개선문이라고 한다면 프랑스 파리의 드골 광장에 세워져 있는 ‘에투알 개선문’을 지칭한다.

1805년 오스터리츠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너희들은 개선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6년부터 J.F.샬그랭이 설계한 개선문의 건축이 시작됐다. 그러나 샬그랭이 얼마 있지 않아 사망하게 되고 나폴레옹 자신도 실각을 했기 때문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 후 건축사 페르시에가 제출한 변경안을 토대로 건축이 이어졌고 30년만인 1836년에 겨우 완공됐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나폴레옹 자신도 사망한 이후였다.

높이 49m, 너비 45m의 에투알 개선문은 고대 로마 개선문의 양식을 따라 지어졌으며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근세 고전주의는 ‘조화와 명석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사조로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부활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진 예술의 한 경향이다.

아치의 중앙 밑부분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싸우며 죽어갔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우측 기둥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도인 ‘라 마르세예즈(‘진군’이라는 의미)’가 유명하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지역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어 나폴레옹 시대 당시 프랑스 군대의 위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개선문은 지금도 매년 국경일 축하 행사때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개선문 내부에는 프랑스 고문서들이 보관된 박물관이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개선문 위로 올라가면 파리 시내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개선문은 특히 프랑스 시내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데, 이를 기점으로 12개의 대로가 방사선 형태로 뻗어져 있다.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 방향으로는 콩코르드 광장, 튈르리 공원, 루브르 박물관 등이 이어져 있다. 샹젤리제 거리 오른 편 끝이나 샹젤리제에서 개선문 뒷 쪽으로 있는 그랑드 아르메 거리에서 지하계단을 이용하면 개선문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특히 상제리제 거리는 고급 상점과 카페,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어 세계에서 가장 귀족적인 거리라는 정평을 얻고 있다.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독립문도 바로 이 에투알 개선문을 본 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샹보르 성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샹보르 성은 프랑수와 1세의 제위 시기인 1519년에 착공되어 15년 뒤인 루이 14세 때에 완공되었다. 이 성에는 무려 440여개의 방이 있어 그 웅장한 규모면에서 베르사유 궁전과 곧잘 비교되곤 한다. 총 5,500헥타르의 공간에 32km에 달하는 길고 긴 울타리를 가진 샹보르 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루아르 계곡의 방대한 산림 속에 위치하고 있어 그 모습이 자연 경관과 더불어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성의 외관은 프랑스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유행을 따라 좌우 대칭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중앙 돔 안에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이 있으며 이는 위대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 계단 끝에 프랑수아 1세의 방이 나타난다. 내부에는 금실로 수놓은 찬란한 침대 장식과 테라스에서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종루와 탑, 그리고 굴뚝의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한때 무도회와 연극이 상연되었던 둥근 천장의 근위실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희극작가 몰리에르가 그의 작품들을 처음 올리기도 한 곳이다. 성 내부 곳곳에는 프랑수아 1세의 상징인 도룡뇽 무늬가 새겨져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샹보르 성은 전체적으로 ‘중세적인 느낌’이 매우 강하도록 설계됐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벽돌과 크고 묵직한 둥근 탑 등 견고해 보이는 형태가 그것이다. 하지만 군사적인 목적은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견고성보다는 지붕 꼭대기의 장식품들을 위해 전체적인 구조가 배열되었다. 샹보르 성은 왕들의 상시 거주 숙소는 아니었고 다만 인근 솔로뉴와 샹보르 숲에서 사냥을 즐길 때만 주로 이용했다. 그래서 1년에 고작 5주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민중들의 분노를 사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는 성난 군중에 의해 점령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현재 총 400여개의 방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것은 10여개 정도이지만 이 정도로도 중세의 고풍스러운 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또 성에서는 가을서부터 봄이 오기 전까지 3m에 달하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데, 관광객들의 추위도 녹여주면서 프랑스인들과 따뜻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일몰 때나 안개낀 아침에 샹보르 성을 방문하게 되면 환상적인 중세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게 된다.

 

▲샹보르 성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샹보르 성은 프랑수와 1세의 제위 시기인 1519년에 착공되어 15년 뒤인 루이 14세 때에 완공되었다. 이 성에는 무려 440여개의 방이 있어 그 웅장한 규모면에서 베르사유 궁전과 곧잘 비교되곤 한다. 총 5,500헥타르의 공간에 32km에 달하는 길고 긴 울타리를 가진 샹보르 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루아르 계곡의 방대한 산림 속에 위치하고 있어 그 모습이 자연 경관과 더불어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성의 외관은 프랑스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유행을 따라 좌우 대칭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중앙 돔 안에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이 있으며 이는 위대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 계단 끝에 프랑수아 1세의 방이 나타난다. 내부에는 금실로 수놓은 찬란한 침대 장식과 테라스에서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종루와 탑, 그리고 굴뚝의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한때 무도회와 연극이 상연되었던 둥근 천장의 근위실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희극작가 몰리에르가 그의 작품들을 처음 올리기도 한 곳이다. 성 내부 곳곳에는 프랑수아 1세의 상징인 도룡뇽 무늬가 새겨져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샹보르 성은 전체적으로 ‘중세적인 느낌’이 매우 강하도록 설계됐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벽돌과 크고 묵직한 둥근 탑 등 견고해 보이는 형태가 그것이다. 하지만 군사적인 목적은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견고성보다는 지붕 꼭대기의 장식품들을 위해 전체적인 구조가 배열되었다. 샹보르 성은 왕들의 상시 거주 숙소는 아니었고 다만 인근 솔로뉴와 샹보르 숲에서 사냥을 즐길 때만 주로 이용했다. 그래서 1년에 고작 5주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민중들의 분노를 사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는 성난 군중에 의해 점령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현재 총 400여개의 방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것은 10여개 정도이지만 이 정도로도 중세의 고풍스러운 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또 성에서는 가을서부터 봄이 오기 전까지 3m에 달하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데, 관광객들의 추위도 녹여주면서 프랑스인들과 따뜻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일몰 때나 안개낀 아침에 샹보르 성을 방문하게 되면 환상적인 중세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게 된다.  

 

 ▲ 파리 오페라하우스

 

파리의 오페라 거리에 위치한 일명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1861년 샤를 가르니에의 설계로 공사가 시작되어 14년 후인 1875년에 완공됐다. 당시 ‘우아한 건물’이라는 컨셉을 내세워 디자인을 공모했으며 171개의 기획안이 경합을 거쳤다.

이 극장은 한번 오페라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이 무려 400명이 넘을 정도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1,991석의 객석은 제정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천장에는 샤갈의 ‘꿈의 꽃다발’이 그려져 있어 예술적 감흥을 더욱 고조시킨다. 건물 전체를 대형 그림과 대리석 조각상으로 뒤덮고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극장 건물 자체가 하나의 관광 상품화되었고 따라서 공연이 없는 날에도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설계자인 가르니에는 20세기 프랑스 건축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또다른 건축가인 오귀스트 페레와 함께 이 건물에 철근 콘크리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의 넓은 대리석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퓨티어의 샘물’이라는 조그마한 구조물이 있고 손님용 원형홀로 이어진다. 관광객들은 객석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박스석에서 극장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웅장한 조각들이 장식하고 있는 로비를 지나 붉은 색 융단이 깔려있는 객석에서 공연을 감상하면 마치 19세기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관현악 연주회 공연을 시작으로 문을 연 이 극장에서 최초로 공연된 오페라 작품은 프로망탈 알레비의〈유대 여인(La Juive)>이라는 작품. 그 후 오페라하우스는 1939년 국영이 되었으며 1989년 바스티유에 신 오페라 극장이 생긴 이래 이곳은 발레 전문 공연 극장으로 그 위상이 변화됐다. 현재의 오페라 하우스 발레단을 이끄는 젊은 예술감독 파트릭 뒤라스는 고전적인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 참신한 연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루이 16세 재위기간인 1669년에 설립된 ‘국립 음악 아카데미’(Academie Nationale de Musique)를 관장하고 있어 프랑스 문화예술의 행정 중심이기도 하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오페라 하우스에 숨어사는 유령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인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유령이 세인의 눈을 피해 오페라 하우스 지하 하수구에 숨어지내는 풍경은 명장면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벨베데레 궁전

 

벨베데레 궁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벨베데레’라는 건축 용어부터 이해해야 한다. 사전적인 의미는 ‘아름다운 경치’이며, 보통 ‘좋은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세운 건축구조물’을 일컫는 말이다. 구체적인 건축기법으로는 ‘꼭대기에 지붕은 있지만 벽은 한쪽 면이나 여러 면이 트여있는 곳’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가장 위층에 지어지거나 독립적인 형태를 갖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실용화되기 시작했지만 야외가 트여있다는 점에서 날씨가 추운 북유럽 지역에서는 건축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은 대표적인 바로크풍의 궁전 건축양식과 정원 형태를 갖추고 있다. 궁전이 지어진 시기는 1714년 부터 1722년 까지이며 그 계기는 1683년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터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유럽 제일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따라서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힘과 권위를 내세우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특출한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t)는 벨베데레 궁전 설계를 통해 자신의 건축세계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큰 정원으로 에워싸여진 채 서로 바라보고 있는 대칭형 벨베데레 형식의 벨베데레 궁전은 전통적 요소와 이국적 요소들, 그리고 18세기에 나타난 공간에의 새로운 접근 방법이 결합되어 건축되어졌다.

1714년에서 1716년에 지어진 아래쪽 궁전은 전통적인 평면에 기초했다. 방의 크기가 비교적 작고, 중심에는 2층 높이의 거실이 위치하고 있다. 이 궁은 투르크족(1683년)과 루이 14세의 군대(1704년)를 물리친 용맹한 사보이 오이겐 왕자의 여름 거처로 이용되었다.

위쪽 궁전은 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 입구 쪽에 커다란 연못이 자리잡고 있으며 후기 바로크 시대의 세속적 건축물(성당을 제외한)중 단일 건물로는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래쪽 궁전은 저택용이었지만 위쪽 궁전은 축제나 연회를 여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위쪽 궁전의 2층 붉은 대리석 홀은 1945년 5월 미·소·영·불 4개국의 외무장관이 세계 2차대전 후 10년간의 신탁통치를 마치고 오스트리아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부여하는 ‘주권회복 조약’이 체결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오스트리아 회화의 미술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입구에는 여자의 얼굴과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지혜와 힘의 상징인 스핑크스가 버티고 서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세계에서 가장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또한 슬프면서도 미스테리한 사연까지 깃들여져 있는 신비의 성이다. 미국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공원인 디즈니랜드의 디즈니성이 바로 이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니 그 동화같은 낭만적 아름다움을 상상해볼 수 있다.

독일 바이에른에 위치한 이 성은 당시 왕이었던 루드비히 2세에 의해 1869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은 17년 뒤인 1886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이후 공사는 중단된 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바그너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루드비히 2세는 오페라 ‘로엔그린’ 중 백조의 전설이라는 것에 모티브를 얻어 성 전체를 디자인했고 그래서 ‘백조의 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의 외벽은 흰색과 베이지색의 대리석을 사용했고 날씬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갖추고 있다. 밝으면서도 중후하고 낭만적이면서도 진지한 모습에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특히 지붕 위의 비대칭형 원추들이 예술성을 더하고 있다.

루드비히 2세는 생전에 두가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백성을 돌보지 않은 무능력한 정치인’이자 ‘예민한 감성을 지닌 예술가에 가까운 순결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 루드비히 2세는 정치에는 일찌감치 손을 뗐다시피 했다. 자본주의의 도전과 권력과 음해가 난무하는 정치를 그는 견디지 못했다. 그는 미술과 시, 오페라에 빠져들며 이러한 낭만을 실현시켜줄 자신만의 성, 노이슈반슈타인성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의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가 비록 왕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개인의 재산을 털어서 지었기 때문에 돈이 없을 때는 공사를 중단한 채 성을 방치하기 일쑤였다. 때로 은행 융자나 빚을 얻기도 했으나 공사는 더디게 진행됐고 빚만 갈수록 늘어갔다. 결국 완공도 보지 못한 채 그는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느닷없는 죽음을 당했다. 호수에서 발견된 그의 시체는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낳기에 충분했다. 그는 수영실력이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굉장히 건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암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말 그대로 ‘명당’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삼면이 각각 반발트씨에, 알펜지, 그리고 호프남제 등 세 개의 호수에 둘러싸여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존 건축의 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파격적인 건물이다. 마치 거대한 옥수수 4개가 하늘로 치솟은 듯 보인다.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해 1882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이 성당은 12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앞으로도 200년은 더 건축을 할 예정이라고.

현재 완성된 것은 지하 예배당과 중앙 지하실 정도이다. 완성된 도면에 따르면 높이 100m 정도의 탑이 12개가 들어서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를 상징한다. 이외에 중앙에 세워지는 170m의 가장 큰 탑은 예수를 상징하고 탑과 탑을 이어주는 돔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또 별도의 돔 4개는 4명의 복음 성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스러운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까지는 전체 건축 시리즈에서 일부분에 불과하다. ‘나시미엔토(탄생)’라는 건축 주제에 이어 ‘글로리아(영광)’와 ‘파시온(수난)’ 부분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 향후 200년이라는 건축 시간이 더 소요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당 지하에는 가우디의 스케치와 사진 등이 있다. 현재는 공사중이기 때문에 성당 내부에는 시멘트 포대와 공구가 여전히 흩어져 있다.

이 성당을 구성하는 외벽 선은 거의 모두가 곡선 형태이다. 이는 지금껏 건축역사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개념이다.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곡선 형상에 적합한 구조 역학까지 배려해 건축됐다. 높이 170m를 가진 이 거대한 건물은 바르셀로나의 ‘스카이 라인(산이나 건물이 하늘에 그리는 윤곽)’을 바꿨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우디 건축의 특징은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기능은 반드시 유지하되 그 외형과 내부공간을 어떻게 구성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시킬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흔히 건축물이라고 하면 고정되고 딱딱하고 위치가 바뀌지 않을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마치 땅위에 떠서 부유하고 있는 듯 보이며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움직일 듯한 모양새다. 그만큼 전통 건축 양식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다.

특히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받았을 때 성당의 모습은 황홀경 그 자체다. 가우디는 40년 동안 이 성당 건축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1926년 전차에 치여 사망할 당시에도 성당 앞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유네스코는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인 구엘 공원과 카사밀라 등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인간의 창조적 천재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며 극찬했다. 

 

▲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이탈리아 바티칸 시티에 위치한 성베드로 성당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바티칸 시티에는 예로부터 수없이 많은 보물이 존재해 왔는데, 그 중에서도 이 성당은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26년 콘스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세워졌으며 1506년 율리우스 2세의 명령에 의해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이 성당은 카톨릭의 총본산을 대변할만한 사원을 건립하자는 의견에 따라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총동원됐다. 당시 르네상스를 주름잡던 건축가들이 참여해 무려 1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사를 했고 마침내 1626년 완공되었다.

특히 사원의 설계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가 부라만테로 부터 시작되었다가 미켈란젤로에게로 이어졌으며, 그의 천부적인 재질과 감각이 잘 반영되고 있다. 특히 중앙에 솟은 아름다운 돔은 미켈란젤로의 걸작에 속한다. 로마 르네상스 건축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한 성베드로의 묘지 위에 세워졌다.

성당 내부에는 수없이 많은 건축물들이 관람객들을 압도하며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 특히 그 중에서도 ‘피에타 상’은 압권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자애로운 마리아상을 조각한 것으로 완벽에 가까운 조화와 균형미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슬픔에 잠긴 듯한 성모마리아의 표정 역시 인상깊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서명을 한 유일한 작품으로도 유명한데, 자신들의 팬이 이 작품을 다른 작가의 것으로 오인하자 몰래 밤에 성모의 가슴 부분 옷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난 1978년 바티칸 시티가 테러리스트들의 침입을 받은 후 현재 이 작품에는 방탄 보호 유리가 쳐져 있다.

청동으로 만든 베드로 상도 인기가 높다. 특히 베드로의 발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금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 주변에는 바티칸 시국을 경비하는 스위스 용병이 있는데 이들의 제복 역시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 파랑, 노랑, 빨강의 강력한 색깔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베드로 성당은 바티칸 광장에 세워져 있는데, 이 역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손꼽힌다. 1656년~1967년에 걸쳐 베르니니의 설계로 건설되었다. 총면적은 1만 5,160 평방미터. 매주 일요일 정오가 되면 바티칸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교황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으로 몰려온다. 4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 이곳도 그때만큼은 발들여 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들로 붐빈다. 

 

▲피사의 사탑

 

한쪽으로 기울진 모습 때문에 더욱 유명한 ‘피사의 사탑’은 본래 피사 대성당의 부속건물이었다. 그러니까 피사 대성당은 성당 본건물과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불려지는 종탑 등 세가지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1174년에 착공되어 1350년에 완성된 피사의 사탑은 중세 도시 국가인 피사가 해전(海戰)에서 사라센 함대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 기념으로 세워졌다.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으며 꼭대기의 종루를 포함해 55.8m의 높이와 16m의 지름을 가진 8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게는 1만4,500톤. 탑 내부에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이 있으며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색과 음계를 지닌 7개의 종이 있다. 그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지중해에서 발달한 토스카나풍과 중세 기독교 정신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합쳐졌다. 이 양식은 매우 대담하면서도 종교적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피사의 사탑은 지금보다 2배나 큰 110m 정도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탑을 쌓아가던 중 3층까지 올렸을 때 공사 관계자들은 지반의 한쪽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따라서 이때부터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 그 반정도의 높이로 짓기로 결정했으며 수학자와 건축가들이 모여 원인 파악과 문제해결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연구했다. 새롭게 층을 올릴 때마가 기울어져 있는 쪽을 더 높게 만들기도 했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기울기가 멈춰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국 공사를 몇 번이나 중단하기도 했지만 끝내 1350년 기울인 채로 완공되었다.

매년 1mm씩 남쪽으로 기울어져 현재는 10도 가량이 차이가 나 수직선상에서 5.2m나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 1990년 부터는 내부 관람을 금지한 채 탑세우기에 골몰하고 있다. 현재는 탑의 기초를 강철 케이블로 묶은 후 반대편 지반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올려놓아 1년 만에 5mm를 다시 원상복구하기도 했다. 무려 7백년 동안이나 기울어진 채 쓰러지지는 않았기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그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즉, 물체의 질량 중심이 그 물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 내부에 있으면 쓰러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피사의 사탑은 수세기 동안 조금씩 기울어져 왔음에도 여전히 존재해 있다. 일부에서는 향후 200년을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여전히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져 있는 현재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되기를 바라고 있다.


 

 ▲밀라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밀라노 대성당’은 높이 157m, 너비 92m에 이르는 거대한 고딕양식의 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통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밀라노라는 도시 자체가 유럽의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이자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경제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밀라노가 자랑하는 두 가지가 바로 ‘세계 최첨단 유행’과 ‘밀라노 대성당’이다.

밀라노 대성당은 3천개가 넘는 거대한 조각군과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수백개의 유리 첨탑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장미창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으로 정평이 높다. 첨탑의 경우 굉장히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일부 통일감이 없고 번잡해 보인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이 성당의 유래는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대성당을 지을 것을 건의한데서 비롯되었고 이에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가가 기공식을 거행했다. 당시 영주와 대주교는 프랑스나 독일에 필적할 만한 거대하면서도 권위 있는 성당을 원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외국 건축가들도 함께 참여시켰고 그래서 다소 이국적인 요소가 강조됐다. 현재 이탈리아 내에 있는 성당 중에 알프스 이북의 고딕적 요소가 가장 농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건축양식이 반영되다보니 건축가들 사이의 의견조정이 어려워 부대 공사가 모두 끝난 것은 1951년이었다.

대성당에는 모두 5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앙문은 ‘천국의 문’으로 불린다. 특이한 것은 이 성당에 있는 모든 문은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 이는 ‘교회가 모든 것을 포용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무료이지만 반바지나 슬리퍼, 미니스커트 차림의 입장은 금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나 혹은 계단을 이용하여 옥상까지 올라갈 수가 있는데 맑은 날에는 알프스산맥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밀라노 대성당에는 대주교 암브로시오의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킨 시민들에 대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지나치게 잔혹하게 처벌을 가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황제가 대성당에 참배를 하려하자 대주교는 문을 막고 나서서 ‘황제의 손이 백성의 피로 더럽혀졌으니 시민들에게 보상을 할 때까지는 참배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왕의 권력보다 교회의 권위가 더욱 강했던 중세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콜로세움’은 거대한 투기장이자 오락시설이었다. ‘글라디아토르’라고 불리는 검투사들의 시합과 맹수들의 싸움 등이 선보이던 장소였다. 원래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가 있던 자리에 착공해 8년 뒤인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다. 당시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100일 동안 격투 경기가 열렸으며 약 5,000여 마리의 맹수가 도살되기도 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당시 콜로세움이 자신들에게 주는 자긍심을 표현했다.

둘레 527m에 직경 188m(짧은 쪽 156m)의 크기를 가진 이 원형극장이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을 얻은 데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유래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근처에 세워진 네로의 조각상을 의미하는 콜로서스(Colossus)에서 파생됐다는 것이다.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웅장한 모습이나 아치가 장식하는 균형잡힌 모습들이 로마 건축 기술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거대한 바위 축대 위에 세워졌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 위에 있었으니 이는 지진으로 인한 흔들림이 최대한 흡수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수용 인원은 4만5,000의 좌석과 5,000의 입석으로 총 5만명 정도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의 콜로세움 천장에는 ‘베라리움’이라고 불리는 천막지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 채광과 환기구의 역할을 했다. 특히 지정된 입구로 들어가 관람을 원하는 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은 오늘날의 많은 경기장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중심부의 ‘아레나(투기장)’를 정점으로 카베아(관객석)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도록 배치되었으며 지하에는 맹수와 검투사가 대기하는 공간이 있고 사형수들이 갇혀있는 감옥도 있었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의 많은 신도가 이곳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완공 후 300년간 피비린내 나는 격투기와 사형이 처해졌지만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그 잔인한 역사가 끝났다.
하지만 이 콜로세움에서 피를 흘리는 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람들이 동물 위로 올라가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기도 하고 동물들이 직접 뒷발로 일어서거나 물 속에서 곡예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다표범이나 사슴, 영양, 원숭이, 개 등도 조련을 받아 갖가지 쇼에 등장했다고 한다.

 

▲ 아크로폴리스

 

고대 그리스 문화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불리는 ‘아크로폴리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 제 1호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도시 중심지에는 약간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이를 ‘폴리스’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지역을 감시하기에 알맞을 정도로 높았기에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 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 국가 자체가 폴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원래의 폴리스는 ‘높은’이라는 의미의 ‘아크로(akros)’라는 단어가 붙어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아크로폴리스는 각 도시 국가에 있는 언덕과 그 언덕에 위치한 방어벽과 신전을 모두 가르키는데, 오늘날에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아티케 지방의 아테네에 있는 그것을 지칭한다. 또 아크로폴리스에는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을 짓고 여러 신들의 상징물을 만들어 당시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재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성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레아, 아테네 여신을 모신 신전인 파르테논와 에레크테이온, 승리의 여신 니케를 기념한 니케신전이 남아있다.
특히 중앙에 위치한 파르테논은 그리스 건축의 상징 그 자체이며 멀리서 보면 공중에 뜬 것처럼 느껴져 신기함을 자아낸다. 중간부분이 약간 부풀어져 있는 기둥 부분은 딱딱한 신전의 모습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기도 한다. 또한 기하학의 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기는 했지만 딱딱함과 획일성을 배제하는 건축기법을 사용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근 40여년에 걸쳐 건설됐다. 기원전 447년에 처음 파르테논이 건설되기 시작해 438년에 완성됐고 건물 외벽의 장식은 432년까지 계속됐다. 그 후 기원전 421년과 406년 사이에 에레크테이온과 니케신전이 완성됐다. 성벽 밑으로는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연극장(1만7,000석)과 부유한 귀족이며 철학자였던 헤롯 아티커스가 기원 후 161년에 세운 극장(5,000석)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크로폴리스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1458년 아테네를 점령한 터키인들은 파르테논신전 남서쪽에 첨탑을 세우기도 했으며 1687년 터키인과 싸우던 베네치아인들이 아크로폴리스를 폭격, 신전 안에 있던 화약고가 터져 건물 중심부가 파괴되기도 했다. 또한 1800년대 초기 터기의 허락을 받은 영국의 귀족 토머스 엘진이 조각품을 철거해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팔아 상당수의 유물이 유출되기도 했다.

 


▲카이저빌헬름 교회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위치한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1891년 건축이 시작되어 1895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통치자였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1889년에 사망한 아버지인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프란츠 슈베크텐(Franz Schwechten)이 설계한 이 교회는 63m의 높이이며,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을 때는 서베를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빌헬름 2세는 20년 동안 재직하면서 무려 30개가 넘는 대형 교회를 짓도록 했는데, 이는 신자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도시의 미관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에 교회는 늘 텅텅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특히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지어진 곳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건축을 추진하던 당시 신하들이 많은 반대를 했지만 황제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또 교회 옆에는 광장을 지어 자신의 처인 황후의 이름을 따 ‘아우구스트 빅토리아’로 명명했다. 교회의 건축양식은 고딕풍이 변형된 ‘네오고딕’ 형식이다.

특이한 것은 현재는 이 교회가 부서진 채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2차대전 중인 1949년 11월 23일 영국군으로부터 폭격을 맞은 것인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복구하려고 했으나 시민들이 반대해 그대로 두었으며 현재는 종탑 부분만이 남아있다. 복구를 반대한 이유는 이른바 ‘전쟁의 참상을 알리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현재는 부서진 교회 옆에 8각의 형태를 지닌 새로운 교회를 지었으며 여기에서 매주 예배가 이뤄지고 있다. 콘크리트로 지은 이 새로운 교회는 외벽이 유리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푸른빛을 발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 이색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교회의 이름이 매우 길고 발음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교민들이나 일부 주민들은 그냥 ‘깨진 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텅 빈 이빨’이라고도 부른다. 교회 내부에는 폭격을 당하기 전의 사진과 폭격 직후의 사진,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작은 박물관이 있으며 정교한 벽화와 함께 많은 촛불들이 켜져 있다. 깨진 모습 자체는 건물의 정면보다는 뒤편에서 더욱 잘 보인다. 전 세계에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많은 반전평화주의자들이 이카이저 빌헬름 교회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한다.

 

 

러시아존

▲성바실리 사원

 

성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건축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려한 외관과 독자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이반 대제가 2백년간 이곳에 군림한 몽골족 카잔한을 물리친 기념으로 1561년 완성했다. 외세를 물리친 기념으로 만들어진 만큼 당시 러시아 건축 기술을 총동원해 건설했다고 한다. 특히 인근의 또다른 건축물인 크레린 궁전이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진 반면, 성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건축가들이 전통적인 기법을 발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란한 색채와 독특한 모양새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양한 탑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부조화 속의 조화’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곳은 건설 당시 바실리라는 수도사가 기거하다 1588년 사망해 북동쪽 별관에 묻혔다. 수도사 바실리는 생전에 이반 대제에게 종교적, 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반대제가 그를 기리기 위해서 ‘성바실리 사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7m 높이의 팔각탑을 중심으로 네 개의 중간탑이 둘러싸고 그 사이에 다시 네 개의 작은 탑이 위치해 총 9개의 탑이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외부에서는 그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탑은 8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탑들은 또한 서로 다른 형상을 지닌 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실리의 전체 탑은 각기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전체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이 강해 끊임없는 긴장감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각 탑들은 계단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부 벽면에는 이슬람 양식의 꽃과 기하학적 문양,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16세기경에는 붉은 벽돌이 주요 재료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좀 더 밝은 색조를 띠는 미술적 장식이 첨가됐으며 17세기에 남동쪽의 삼각형 지붕 종탑이 증축된데 이어 남북에 두 개의 출입문이 더 만들어졌다. 애초에 이곳을 설계한 사람은 뽀스뜨닉 야꼬블레프라는 사람인데, 그 사원이 너무 아름다워 다시는 이와 비슷한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눈이 뽑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를 이기지 못한 이반대제의 잔혹함을 엿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바실리 성당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다. 사원 내부는 박물관이자 예배당인데, 성가대가 부른 노래가 지붕 끝까지 올라가 공명되면서 다시 내려오는 음색이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붉은광장

 

흔히 ‘모스크바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붉은 광장’은 길이 695m, 폭 130m에 넓이 7만3,000평방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러시아어로는 ‘끄라스나야 쁠로샤지’라고 불리는데 원래는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곳 주변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붉은 색을 찾아볼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붉은 광장’의 유래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유력한 해석이 있다. 하나는 이곳에서 혁명기념일과 메이데이등 주요 행사가 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붉은색 현수막을 들고 나왔고 또 인근 건물에도 이 붉은 현수막이 내걸렸기에 그때부터 붉은 광장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끄라스나야’라는 말 자체가 ‘중요한’, ‘붉은’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져 있는데, 이곳이 점차 모스크바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곳 주변부를 살펴보면 이 광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대통령 관저가 있는 크렘린 궁전, 국립역사박물관, 레닌의 묘, 성 바실리 사원, 러시아 호텔 등이 빙 둘러싸고 있는 이 광장은 가히 러시아의 정치와 문화, 관광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크렘린 궁전 안에는 15세기의 장대한 교회에서부터 현대적인 의회를 비롯해 사원과 병기고, 마차, 의복 등 러시아 황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시관도 있다.

15세기의 이곳 붉은 광장은 러시아인들이 단순한 상거래를 하는 시장에 불과했으며 명칭도 ‘토르그(시장)광장’이라고 불렸었다. 그 후 1571년 거대한 화재가 발생해 인근 점포들이 모두 불에 탄 후에는 ‘빠자르(화재)광장’으로 개칭됐다. 17세기에 이르러 러시아 정부는 이곳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붉은 광장’이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넓이를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다.

또 붉은 광장은 러시아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의 황제 ‘차르’가 이곳에서 각종 선언이나 판결을 내리기도 했으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 이곳에서 혁명군과 적군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세력과 정부군 사이의 유혈극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지도자 레닌이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연설을 하기도 했던 곳이다. 오늘날에 수많은 러시아 관광객들이 이 붉은 광장을 찾아 러시아의 깊은 역사와 정서를 느끼고 있다.

 

 

 

아프리카 존 

▲스핑크스

 

스핑크스란 고대 이집트 등지에서 신전이나 무덤의 입구에 석상으로 만들어 세운 무덤의 수호신을 말한다.
이는 제단으로도 사용되었으며, 혹자는 스핑크스의 밑에 도량을 만들어 물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든 것을 놓고 홍수를 대비해서 세운 건축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스핑크스는 그 발상지인 이집트에만도 수천 개가 산재해 있으며, 시리아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에도 전파되었다. 다만 이집트 기제에 있는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딸린 스핑크스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를 가리켜 ‘대 스핑크스’라고 하며 오늘날 모든 스핑크스의 대표적 상징물로 꼽히고 있다. 대 스핑크스는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와 하안신전 옆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스핑크스는 사람(파라오)의 머리와 사자의 몸체를 가지고 있으며 날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 가리켜 ‘왕자신의 상’이라고도 한다. 애초에 왕을 사자로 여긴 이집트의 옛 관념에서 나왔다 하며 왕비도 여성 스핑크스로 표현되곤 했다. 스핑크스 석상은 문 양쪽에 세워지거나 건조물의 일부로 사용되었으며, 상아의 부조 또는 청동상이 종교색 짙은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모두 날개돋친 상이며, 수호신의 역할을 하였다. 전체의 길이만 약 70m, 높이가 약 20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얼굴 너비만 약 4m나 된다고 한다.

이 얼굴은 카프라왕의 생전의 얼굴이라고 전해진다. 앞으로 뻗은 앞다리 사이에는 투트모세 4세의 석비가 있다. 이 스핑크스는 ‘지평선상의 매’를 나타내는, 태양신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스핑크스에 얽힌 전설 또한 유명하다. 테베의 암산 부근에 살던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라는 수수께끼를 내서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은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그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어렸을 때는 두 팔과 두 다리로 기어다니고, 자라서는 두 다리로 걷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물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대개의 스핑크스가 그렇듯이 대 스핑크스 또한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조각한 것인데, 이 위대한 문화 유산 또한 전쟁의 상처가 할퀴고 간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아랍군의 침입에 의해 코가 깎여졌고, 영국군에 의해서 수염이 뽑혀 나가기도 했다. 지금도 대 스핑크스의 수염은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핫셉수트 여왕의 신전

 

핫셉수트 여왕은 이집트 왕조에서 보기 드문 여왕으로 제 18왕조의 5대왕이다. 그녀는 투트모세 1세의 장녀로, 이복남매인 투트모세 2세의 왕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서출의 조카 투트모세 3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카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여왕은 정통왕위 계승권을 주장, 22년간 공동통치를 하였다.

핫셉수트는 어린 투트모세 3세를 대신해서 섭정을 하다가 결국은 그녀 스스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오직 내정에만 전념하였던 그녀는 시나이 광산의 채굴과 교역을 위하여 푼트 원정을 감행하는등 여걸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 시기에 핫셉수트 여왕의 신전이 그녀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며 건축가인 센무트의 설계에 의해 이집트의 고도(古都) 테베의 서쪽 다이르 알바흐리에 건축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뒤로하고 서 있는 핫셉수트 여왕의 신전은 거대한 3층의 테라스식 신전으로 가장 독창적이고 웅장한 신전이다. 이 곳의 벽화에는 그녀의 통치기간 중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신전은 투트모세 3세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다. 투트모세 3세에 의해 많이 훼손된 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투트모세 3세는 선왕인 투트모세 2세의 조카였으나 서출이라는 신분과 어린 나이로 인해 사실상 통치권을 핫셉수트 여왕에게 빼앗기는등 그녀의 통치기간 중에 엄청난 설움을 받았다. 장성한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핫셉수트의 섭정기간을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겠다는 뜻으로 모든 건물과 신전에서 그녀와 관련된 기록을 파괴해 버릴 것을 명령했다. 또한 센무트도 처형시켰다. 핫셉수트 여왕은 센무트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한 나머지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다이르 알 바흐리 북쪽에 있는 이 신전은 주변 경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모든 이집트 신전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신전의 석재도 뒤쪽 산의 절벽과 동일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신전의 기본 구조는 가구식 구조로 구성된 벽들과 열주량을 가진 세개의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신전에 피라미드가 없는 이유 역시 사막이 아닌 절벽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신전 뒤의 산이 피라미드 역할을 하고 있다.

 

▲  아부심벨 대신전

아부심벨 대신전은 이집트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280km 떨어진 나세르 호수의 서쪽 연안에 있다. 이 곳은 수단과의 국경에서 20km 떨어진 지점이다. 이집트 제 19왕조의 람세스 2세에 의해 기원전 1300년경에 세워졌다. 사암으로 된 절벽을 뚫어서 건립했는데 높이가 33m이고, 너비는 38m이다. 정면에는 높이 22m의 거대한 람세스 2세 상 4개가 나일강을 굽어보는 입구를 지키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곧 대열주실이다. 이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 안쪽 길이 63m이며 방 네 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실에는 오시리스신을 본떠 만든 람세스 2세의 상과 전쟁 그림 등이 있고, 제 2실과 3실에는 종교 의식을 그린 벽화가 있으며, 제 4실에는 신격화한 람세스 자신과 세 수호신의 상이 있다.

람세스 2세는 파라오인 아버지 세티 1세의 차남으로서 기원전 1305년에 태어났다.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람세스 2세는 세티 1세가 세상을 떠나자 26세에 파라오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는 이후 67년의 긴 세월에 걸쳐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역대의 왕 중에서도 단연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고대 이집트 역사상에 찬연히 빛나는 위대한 파라오”로 추앙받고 있다.

람세스 2세가 이 신전을 지은 까닭은 몇 가지로 짐작된다. 하나는 변방에까지 태양신의 아들인 자신의 강성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 수호신들을 모심으로써 풍요를 가져다주는 나일강이 해마다 범람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과 아내의 영원한 삶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전은 수천 년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20세기 중엽에 두번째 아스완댐 건설로 이 지점의 수위가 높아져 물에 잠겨 사라지게 될 운명에 놓이게 되자 유네스코 주도 아래 50여개국이 지원하고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1963~68년 신전을 정교하게 1만6,000개의 조각으로 분해하여 60여m 높은 지점에 원형대로 다시 조립함으로써 오늘날 영구히 보존하게 됐다.

 

 

서 아시아존

▲페트라

 

영국의 시인 딘 버존(Dean Burgeon)이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붉은 도시’라고 예찬한 페트라는, 실제로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신비로운 도시이다. 페트라는 나바테안(Nabataeran)이라 불리는 고대 유목민족이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와 기원전 6세기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암석 지대를 발견한 이들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이 도시를 원래 나바테안들은 ‘렉무(Rek Mu)'라 불렀는데, 그들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 그리스인들이 ‘페트라'라고 그리스어로 고쳐 불렀지만, ‘렉무’ 역시 ‘페트라’처럼 요르단말로 ‘바위’란 의미를 갖고 있다.

106년 페트라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고,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번성을 누렸다. 실크로드의 길목이란 지리상의 위치로 인해 수많은 대상들이 여행 중에 이곳을 거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로마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중심지를 옮기면서 세계의 동과 서를 이었던 실크로드의 축을 페트라에서 북쪽의 다마스쿠스로 변경시키게 된다. 자연스럽게 이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그후 여러 세기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에 의해 오랫동안 잊혀졌던 신비의 도시가 다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서고고학 연구소인 도미니칸 수도사의 발굴을 시작으로(1896년 최초로 보고서 출간됨), 무덤과 건물, 성 입구의 문과 로마식 극장 등 페트라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사방이 협곡으로 둘러쳐진 페트라는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어 마치 지하의 은밀하고 신비로운 왕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홍빛 광채를 발하고 있는 신전과 같이 페트라에 세워진 대부분의 건물들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그 내부를 활용한 것인데, 극장이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매우 잘 갖춰져 있다.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한 나바테안 특유의 스타일에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 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화려한 그리스 로마 양식들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준다. 암석의 산화철은 마치 장미 봉오리 같은 화려한 무늬를 만드는데, 나바테안들은 그 무른 사암을 깎아서 수많은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밖에도 페트라에는 알 카즈네 광장 왼편의 가파른 계곡 위로 나바테안들이 하늘에 제물을 바치던 제단이 있다. 그 너머 호르(Hor)산 정상에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보이는데, 애굽을 탈출한 모세의 무리가 페트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그 길목에서 죽은 아론을 그곳에 안치한 것이다. 그리고 동 로마시대의 기독교 은자들은 가나안과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수도원을 만들었다.
 

▲ 이맘모스크

이맘 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낙쉐자한 광장(Naqshe Jahan, 현재는 이맘 광장으로 불림) 남쪽에 세워진 이란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예전엔 ‘왕의 사원'이라고 불려졌다 하는데, 카바(Kaba), 즉 메카(Mecca)를 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교하고 화려한 타일 모자이크와, 다양한 모티프, 아름답고 이국적인 글씨 문양 등의 장식과 함께 완벽한 색상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건물의 웅장한 정문을 42m 높이의 터키식 첨탑이 양쪽에서 보좌하고 있다. 입구의 천장은 이란 특유의 아름다운 종유석들로 장식돼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문들은 금과 은의 층으로 덮여져 있고, 나스탈릭(Nastaliq) 글씨체로 쓰여진 몇 개의 시 구절이 장식되어 있다. 통로를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네 개의 이반(ivan)과 아카이드를 만나게 된다. 모든 벽들은 역시 7가지 색상의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그리고 52m가 되는 높은 돔이 세워져 있는데, 그 원개는 무려 12m나 떨어진 두 층의 덮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돔 중앙 아래에서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에코를 자아낸다.

사파비드 왕조시대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압바스 1세는 자신의 궁정이 지닌 화려함에 비해 당시의 쉐이크 로트풀라(Sheikh Lotfullah) 모스크가 너무나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실의 면모를 갖춘 사원을 세우길 바랬는데, 그래서 탄생한 모스크가 바로 이맘 사원이다. 1611년에 착공에 들어간 후, 사원이 완성된 모습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했던 압바스는 건축가를 부추겨서 보다 빠른 공법을 개발토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교하게 세라믹을 조합하는 예전의 모자이크 방식 대신에 ‘카쉬스(Kashis) 타일’, 즉 7가지 색상을 칠한 타일에 유약을 발라 처리하는 간편한 기법을 새롭게 적용해서 건물의 완공을 앞당겼다. 따라서 어떤 부분은 새로운 기법이 적용된 반면, 다른 부분은 옛 스타일로 제작되었으며, 이렇게 장식된 타일들은 광선의 변화에 따라 색조를 달리하는 미묘한 효과를 낸다. 결국 압바스 왕의 마지막 재임년이었던 1929년 사원이 완성되었다.

그 후 1630년과 1660년 약간의 장식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을 제외한다면 이맘 사원은 18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건축기간에 비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규모를 자랑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 테오티와칸

테오티와칸은 멕시코의 가장 신비로운 문화에 속한다. 그 이유는 스페인의 침공 이전에 이미 이곳을 살던 사람들이 사라져버렸고, 그들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어떤 자료도 남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650년 사이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테오티와칸은 중앙 아메리카 문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문화를 이룩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최초의 메트로폴리탄을 형성했었고, 문명의 전성기에 그 인구가 12만 5천 가량에 달했지만 7세기 중반 갑자기 폐허가 되고 말았다.

약 23.5㎢의 땅에 펼쳐진 테오티와칸 유적은 격자형으로 설계된 계획 도시로 2천여 개의 구조물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60m가 넘는 피라미드가 압도적인데, 이 도시의 웅장함으로 인해 후대인들은 이 유적을 ‘신들의 도시’라 불렀다고 한다.

테오티와칸 도시 내부와 다른 지역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들에 의하면, 이 도시가 과거에 마야의 저지대와 과테말라의 고지대, 북멕시코, 그리고 멕시코의 걸프연안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무역 활동을 했었다는 결론이 나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도시 자체가 멕시코 계곡과 푸에블라 계곡을 이어주는 천혜의 통로에 자리잡고 있어 기름진 골짜기를 품에 안고 있었으며, 넉넉한 수자원과 농기구를 만드는데 적합했던 흑요석이 풍부했다.

한편, 종교와 관련된 다수의 유물과 건축물들은 테오티와칸이 종교적인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크게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 그리고 깃털 달린 뱀을 숭배했던 피라미드와 함께 <사자(死者)의 길>로 구성되어 있다. 꼭대기마다 신전을 이고 있는 이 피라미드들은 이집트와는 달리 왕의 무덤이 아니라 종교적 의식을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건축되었다고 추정되는 <태양의 피라미드>의 경우 높이가 63m, 한 변의 길이만 225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로 하루에 3천명의 인력을 투입하더라도 완공에 족히 30년을 소요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3.2km에 펼쳐있는 <사자의 길>은 폭이 좁게는 43m에서 넓게는 145m나 되는데, 길 좌우에 계단식의 석대들이 늘어서있다. 이 석대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덤이었다거나, 물건을 팔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거나, 작은 피라미드였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

16세기에 스페인 정복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선교사 디에고 두란은, 제물로 희생될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수 킬로 줄지어 서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제사장이 이들의 가슴에서 칼로 도려낸 심장을 제단에 바쳤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테오티와칸에 대한 수많은 발굴작업과 연구로 묻혀져 있던 도시의 윤곽이 상당부분 들어 나긴 했지만, 왜 이 거대한 도시가 7세기 중반에 버려졌는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로 남아있다.
 

 ▲치첸이트사

 

치첸이트사는 메리다에서 약 120km 떨어진 곳에 남아있는 마야 문명의 유적지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학설마다 그 연대 구분이 일치하고 있지 않지만 그 역사는 대체로 기원후 약 7세기부터 9세기 사이 마야인들에 의해 형성된 ‘고전적 마야’ 시기와 그 이후부터 14세기 사이의 ‘마야-톨텍(Maya-Toltec)’ 시기로 나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야인들은 기원 후 6세기 중반 경 치첸(Chichen은 마야어로 ‘우물의 입구’이란 뜻)의 두 우물(‘신성한 우물’과 ‘세속적인 우물’) 근처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대부분의 마야 문명의 중심지처럼, 치첸이트사 역시 종교적인 의식을 위한 장소였다. 그러다 10세기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치첸이트사는 한동안 버려졌다가 11세기초 다시 재건되어 마야 제국의 종교 중심지로 번성했다고 한다.

치첸이트사의 건축물은 크게 두가지 양식으로 변별되는데, 고전적인 마야건축과 그 이후의 톨텍 건축 스타일이 그것이다. 톨텍(Toltec)은 약 800년경 치첸이트사를 점령했던 호전적인 종족으로 마야족보다 훨씬 거칠고 인간을 산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보통 이들 톨텍족의 등장을 기점으로 이전의 ‘고전적인 마야 시기’와 이후의 ‘톨텍-마야 시기’의 건축 양식를 구분하고 있다.

높이가 약 20m에 달하는 <엘 카스틸로(El Castillo, 스페인어로 성이란 뜻) 피라미드>는 9세기 전에 건축되었는데, 마야인들의 엄청난 천문학적 지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계단구조로서 총 91개의 계단 수와 4개의 면을 곱하면 364가 나오고 여기에 꼭대기 제단까지 더하면 정확히 태양력의 일년 날수인 365일이 된다. 또한 <카라콜(Caracol)>이란 천문대에는, 별들의 움직임과 춘분, 추분, 일몰과 월몰을 오차 없이 관측할 수 있는 위치에 창문들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한편, 마야문명 최대 규모에 해당하는 <공놀이 경기장(Juego de Pelota)>은, 톨텍족의 지배 이후 경기에서 패한 팀의 주장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설이 있지만, 거꾸로 승자가 영예로운 희생자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 한가지 치첸이트사 유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세노테(Senote)>라는 웅덩이인데 마야인들에게 물을 공급했던 원천으로서나 제물을 바쳤던 신성한 샘물로서 기능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실제로 이 웅덩이 밑에서 1901년 에드워드 톰슨(E. Thomson)이 보석과 그릇들과 함께 대부분 어린아이들의 것인 유골들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제물로 희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치첸이트사는 14세기 초 적대 도시에 살던 마야판(Mayapan)족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그 이후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그 모습을 다시 세상에 드러낼 때까지 밀림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치첸이트사의 갑작스러운 멸망에 대해서, 아마도 식량의 부족이나 내부에서 발생했던 분쟁 때문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정확한 원인을 알고 있지 않다.

 

 ▲ 마추피추

 

케추아어로 ‘늙은 봉우리’란 뜻의 마추픽추는 옛 페루의 수도 쿠스코(Cuzco)에서 탄생한 잉카제국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던 잉카문명 최후의 유적지이다. 안데스 산맥의 해발 2,350m 위치한 마추픽추는 아마존강의 원류인 우르밤바 강 위의 가파른 절벽에 건설되어 있어 산 아래에서는 도저히 그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다.

약 1,200명 가량의 잉카인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추픽추는 커다란 층계와 높은 방호벽, 그리고 수로가 크게 북부와 남부 두 구역을 구분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농업지구가 있고 북쪽은 도시구역이다. 도시구역은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사원이나 왕궁, 탑 그리고 귀족계급을 위한 권위적이고 종교적인 건물이 주로 세워진 반면, 동쪽은 일반인을 위한 주거지로 계획되었다. 이 외에도 죄수들을 따로 수용했던 감옥이나 피라미드, 그리고 농사를 짓는 데 사용했을 태양시계 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건축물들은 화강암을 주재료로 해서 매우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졌는데, 돌 조각들이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히 맞물려있다. 젖은 모래를 비벼서 돌의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기술적인 수준도 놀랍지만, 20톤이나 나가는 돌들을 바위산에서 잘라내 수십 km 떨어진 산 위로 운반해서 사용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건축술에서 바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잉카인들이 어떻게 이 엄청난 높은 곳에 돌들을 운반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이다. 한편, 잉카인들은 가파른 산 위에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취약점을 보안하기 위해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서 농사를 지었다.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잉카제국이 멸망한 이후, 위대하고 장엄한 도시 마추픽추는 약 400년간 황량한 초목으로 뒤덮여진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결국 잉카제국의 전설적인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잉카제국의 마지막 수도)를 찾으려는 미국인 탐험가 하이럼 빙험(Hiram Bingham)에 의해 1911년 마추픽추의 베일이 벗겨지게 된다. 그후 수많은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했지만, 아직도 이곳이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잉카인들이 스페인 폭정을 피해 안데스 산 높은 곳에 세운 새로운 요새가 마추픽추라는 가설도 있고, 이곳이 바로 잉카제국의 마지막 수도인 빌카밤바라는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빌카밤바는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추픽추 유적에 아무런 공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렇다면 마추픽추는 태양의 신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했던 잉카인들의 열망이 반영된 비밀스러운 의식의 장소였을까? 이곳에서 발굴된 대부분의 미이라들이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것이었는데, 그러면 마추픽추는 선택된 여성들로 구성된 ‘태양의 처녀들’의 집단 거주지였을까? 이렇게 마추픽추의 형성배경이 미증유로 풀리지 않고 있지만, 이 신비의 도시를 살았던 잉카인들이 그들 뒤로 유적만을 남긴 채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역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세아니아 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내세울만한 음악 공연장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서, 1954년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주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국가를 대표할만한 건축물을 세우자는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후, 1957년 전세계로부터 국제건축현상공모에 제출된 233개의 설계안 가운데, 덴마크의 건축가 엇존이 당선되었고, 그해 건축이 시작되어 14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조개 껍질을 연상시키는 오페라 하우스는 오늘날 시드니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현상 공모에서도 기존의 현대건축물 개념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새로운 형태로 주목을 끌었는데, 건축가는 어느 날 자신의 부인이 정성껏 깎아 놓은 접시 위의 오렌지 모양에서 그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이한 건물 형태의 형태는 실제 건축에 있어 많은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드러내었고, 그로 인해 애당초 4년으로 계획했던 공사기간이 10년이나 연장되었으며 공사비 역시 약 20배 가량이나 더 투자되었다고 한다. 결국 오페라 하우스의 애초 기본 골격은 유지되긴 했지만 세 번의 재설계를 거쳐 상당히 축소된 디테일로 1973년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었다.

오페라 하우스는 무엇보다도 조개 껍질 혹은 파도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지붕의 특이한 형태가 인상적인데, 이 지붕은 총 2,194개의 미리 주조된 콘크리트 조각들을 강철 케이블로 고정시킨 다음 스웨덴산 세리믹 타일로 마감했다고 한다.

높이 67m, 길이 185m, 그리고 폭이 120m에 달하는 건물 내에는 총 5개의 공연장이 있으며, 그 외에 스튜디오, 갤러리, 레스토랑, 휴게실, 도서관 등과 같은 부대 시설이 무려 1,00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가장 큰 콘서트 홀은 2,679명의 관객을, 그리고 오페라 극장은 1,547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연극, 콘서트, 오페라, 현대무용, 발레, 그리고 심포니 콘서트에서 재즈에 이르는 모든 형태의 음악과 또한 전시회와 영화 상영 등 약 3,000여 개의 다양한 이벤트가 연간 2백만 명의 관객과 약 20만 명 정도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 링컨 기념관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라함 링컨을 기념하고 ‘인간 정신이 갖고 있는 관용과 지조 및 정직의 미덕'을 기리기 위해 워싱턴 D. C.에 세운 기념관이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에 있는 300개가 넘는 기념관과 조각 중 미국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기념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건축가인 헨리 베이컨이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설계한 이 기념관은 콜로라도산(産) 대리석으로 만든 36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36개 각 기둥의 높이는 무려 13.4m로 장중함이 절로 우러난다. 이 기둥은 링컨 시대에 미국 연방을 이루었던 36개 주를 상징한다.

조지아에서 가져온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테네시에서 옮겨온 대리석 대좌에 앉혀놓은 거대한 링컨 좌상(높이 5.8m)은 조각가인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디자인하고 뉴욕의 피치릴리 형제가 조각한 작품이다. 링컨 좌상은 기념관 내부를 위압하면서 연못 너머 워싱턴 기념관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기념관 남쪽 벽에는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때 결정적인 전투(1863년 7월1일~3일)가 벌어졌던 펜실베이니아 주의 게티즈버그에서 1863년 11월19일 국립묘지 개관식 때 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 새겨져 있다. 링컨 대통령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은 별로 오래 기억에 남지 않겠지만 그분들의 희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우리는 그분들이 고귀하게 이루려다 못다 한 일을 완수하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즉 명예롭게 죽어간 용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했던 대의를 위해 우리도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하리라는 것, 그리고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라고 연설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기념관의 북쪽 벽에는 그의 재임 취임사가 새겨져 있다. 취임사 위에는 ‘재통일과 전진' 및 ’인종 해방'을 표현한 쥘 게랭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1915년에 짓기 시작해 1922년 5월 30일 전몰장병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워싱턴 기념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여 워싱턴 D. C.에 세운 오벨리스크(obelisk, 방첨탑(方尖塔)). 오벨리스크는 원래 고대 이집트의 사원 입구에 세워진 한쌍의 커다란 뾰족 기둥을 지칭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로는 워싱턴 기념비를 들 수 있는데, 기념비 위로 올라갈수록 그 모양이 뾰족하기 때문이다.

워싱턴 국립추모협회(1838년 창립)가 건립을 추진한 이 기념비는 1848년~1884년에 국민들의 기부금과 연방 예산으로 건축비를 충당했다. 1848년 착공했으나, 남북 전쟁과 잇따른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885년에서야 완공됐다.
로버트 밀스(Robert Mills, 1781~1855년)의 설계를 토대로 하여 메릴랜드산(産) 대리석으로 표면을 입힌 이 구조물은 16.8㎡의 바닥 넓이와 높이 169.3m, 무게 약 9만 1,000t에 이르는 화강암 오벨리스크이다.

이 기념비는 몰(Mall)의 서쪽, 링컨 기념관의 리플렉팅 풀 정동쪽에 위치한 43㏊에 이르는 대지 위에 세워져 있다. 남쪽으로는 타이들베이슨이 있고 북쪽으로는 엘립스콘스티튜션가(街)를 사이에 두고 백악관과 떨어져 있다. 국립수도공원의 일부분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기념비의 내부 벽에는 개인,도시,주(州), 그리고 외국에서 증정한 190개의 조각한 돌이 박혀 있다. 50개의 층계과 898개의 발판으로 된 실내 철계단이 내부 꼭대기까지 설치되어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면 약 70초 내에 올라갈 수 있으며, 전망대도 있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워싱턴 D.C.의 윤곽을 파악하기 쉽다.

건축가인 로버트 밀스는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호번, 벤저민 러트로브와 함께 일했다. 신고전주의 건축가로서 고대 고전건축 형태야말로 고대 공화국의 부활인 미국에 가장 어울린다고 선언한 제퍼슨의 원리를 대체로 따랐다.
고전적 형태를 독창적으로 사용해 대학교,감옥,병원,주택,운하,다리,방파제 등 50개가 넘는 주요작품을 남겼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워싱턴 D. C. 도시건설(1836 설계, 1884 완공)이 있다.

 

 ▲  미국 국회의사당

 

미국은 국회 의사당은 ‘캐피톨(The Capitol)’이라고도 불린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의 캐피톨 언덕에 있는 국회 의사당은 높이 94m, 길이 약 250m의 큰 건물이다. 상원과 하원이 함께 쓰고, 중앙에 큰 홀이 있다. 해마다 수백만 명이 찾는 워싱턴D.C.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로 현대 건축의 백미로도 꼽힌다. 국회 의사당을 짓기 시작한 이후 완성될 때까지 여러 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여 수차례의 개축과 증축을 거쳐 1861년에서야 현재의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1792년 국회의사당 설계도 공모전에서 서인도제도 출신 의사인 윌리엄 손턴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1793년 9월 18일 조지 워싱턴이 초석(礎石)을 놓았다. 손턴이 건축공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공모전에서 차점자였던 스티븐 헬럿이 공사를 감독했다. 그러나 헬럿이 손턴의 설계를 지나치게 많이 수정하려 했기 때문에 백악관을 설계했던 건축가인 제임스 호번이 새로운 감독관이 되었다. 북쪽 날개 부분이 가장 먼저 완공되었고, 1800년 11월 국회가 이곳에서 소집되었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벤저민 러트로브를 공공건물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국회의사당을 완공하는 것도 러트로브의 임무가 되었다. 그는 손턴의 생각에 따라 외부공사를 진행했지만, 내부공사는 그 자신의 설계대로 했다. 그러나 1814년에 영국인들에 의해 이 국회의사당은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뒤 러트로브는 의사당 건물을 재건하려 했으나 1817년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후임자는 보스턴 출신의 뛰어난 건축가인 찰스 불핀치였다. 찰스 불핀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작가인 토머스 불핀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다시 손턴의 처음 설계에 따라 1827년 두 날개 부분들을 연결하고 첫번째 둥근 지붕을 완성했다.

1850년 국회가 공모한 날개 부분 확장설계의 당선자는 필라델피아 출신 건축가인 토머스 우스틱 월터로 결정되었다. 하원 건물 증축공사는 1857년 완결되었고, 상원 건물 증축공사는 2년 뒤인 1859년 완성되었다. 월터는 주철로 된 87m의 둥근 지붕도 설계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둥근 지붕을 기초로 해서 설계했다.

링컨 대통령은 국가적 일체성의 상징으로서 남북전쟁중에도 지붕 공사를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1863년 12월 2일 토머스 크로퍼드가 만든 6m 높이의 동상인 ‘자유’(Freedom)를 둥근 지붕 꼭대기에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중앙난방 시설, 전기, 엘리베이터 등 현대적인 장치들 외에는 특별히 건축학적인 개조나 증축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9~60년에 국회의사당의 건축자인 J. 조지 스튜어트의 감독에 따라 동쪽 건물의 앞부분이 10m 확장되었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약 4,800평 규모로 540개의 방이 있으며, 658개의 창과 850개의 현관 입구를 갖고 있다.


 

 ▲ 마운틴 러시모어 메모리얼

 

미대륙의 한 가운데에는 사우스 다코타주와 와이오밍 주에 걸쳐있는 자연의 위풍과 인간의 집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미국역사의 한 페이지가 상징적으로 새겨져 있는 러시모어는 왼쪽부터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위대한 민주국가의 탄생을 위하여 헌신한 조지 워싱턴,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안했고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해 국토를 넓힌 토머스 제퍼슨, 서부의 자연보호에 공헌이 컸고 파나마운하 구축 등 미국의 위치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승리로 미연방을 살렸고 모든 인간의 자유를 지킨 에이브러햄 링컨까지 네 위인의 초상이 조각되어있는데, 각각 미국의 건국, 성장, 보존, 발전을 의미한다. 거대한 바위에 머리에서 턱까지의 길이가 18m, 코길이 6m, 눈의 크기가 3m 씩이나 되어 90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그 위풍을 과시하고 있다.
1927년 보글럼이 러시모어 산의 대리석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커다랗게 기본 틀을 잡았는데, 작업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크게 폭파하는 방법보다, 세밀한 부분일수록 조금씩 신중하게 폭파하는 작업을 통해 자칫 바위가 더 떨어져나가는 부분이 없도록 진행했다.
이렇게 조금씩 폭파되어 떨어진 암석조각은 총 50만 톤이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의 크기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대좌를 만들고 파워 드릴로 얼굴을 조각해 나가던 보글럼은 완성 7개월을 앞두고 작업을 마치지 못한채 1941년에 죽고 말았고 후에 그의 충실한 제자이기도한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현재의 조각을 완성하였다. 횟수로 치면 14년이란 장기간에 걸친 작업이었으나 실제로 작업에 소모된 시간만 따지만 6년 반 정도 소요되었다. 작업이 중단되었던 8년여의 기간은 고갈된 자금을 얻기 위하여 관계자들이 동분서주했으며 한 때는 초등학교 아동들로부터 모금하기도 했다.
이러한 러시모어 산의 조각은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으며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이 되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1931년 뉴욕 시에 건설된 102층의 철골 구조 건물이다. 높이 약 381m인 이 빌딩은 1971년 세계무역센터가 생길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지난 2001년 9.11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역사속으로 사라지자, 시카고에 있는 시어즈 타워(442m)와 말레이지아의 페트로나스 타워(452m), 중국 상하이의 진마오 빌딩(421m) 등과 함께 ‘세계 4대 초고층 건물’로 꼽히고 있다. 이 건물은 창문이 106,400개이며, 화장실도 무려 2,500개인 그야말로 매머드급 빌딩이다.

이 건물은 지금도 뉴욕시의 명소로 손색이 없다. 마천루(摩天樓)의 대표적인 예로서 수용인원 약 1만 8000명이며 65대의 엘리베이터가 각 층을 연결한다. 주로 임대 사무실용으로 되어 있는데, 86층과 102층에는 전망대가 있어 시내와 근교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951년에는 꼭대기에 약 67m 높이의 텔레비전 안테나 기둥이 설치되었다. 120㎞까지 보인다는 102층 전망대는 한 번 올라갈 볼 만한 관광 명소로 꼽힌다. 방문객만 하루 평균 7000명 정도이고, 연간 300만명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건축적으로는 1910~1920년대에 걸쳐 유행한 울워스 고딕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은 뉴욕 중부 맨해튼 34번가 51번 도로변에 약 0.8㏊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건축가인 슈립과 람하먼이 설계해서 건축했으며,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뉴욕시의 별명으로도 불린다. 총 40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졌으며 현재는 그 주위로 한인타운이 형성되어있다. 1986년엔 국가 기념물로 지정됐다.
1945년 2차대전 중 폭격기 B-25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79층을 들이받았을 때, 비행기는 완파됐어도 건물은 끄떡없었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특히 이 건물은 영화의 공간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맥라이언이 주연한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킹콩’, ‘러브 어패어’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인의 자존심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소유주는 일본의 부동산 재벌이라는 점이다.


 

 ▲ 백악관

 

워싱턴 D. C.의 펜실베이니아가(街) 1600번지에 위치한 미국 대통령의 관저이다. 백악관 건물을 포함해 모두 7만 2,000㎡에 달한다. 존 애덤스 대통령 이후의 모든 역대 미국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됐으며, 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연방 건물이다. 1791년 대통령 관저를 설계하기 위한 공개 경쟁이 있었고, 아일랜드 출신의 미국인 건축가 제임스 호번이 500달러의 상금을 받고 설계권을 얻어냈다.

호번은 엷은 회색 사암(砂岩)으로 100개 이상의 방을 갖춘 3층의 구조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1792년 10월13일 건물의 초석이 세워지고, 존 애덤스 대통령과 그의 부인 애비게일이 1800년 새로 건축된 건물의 최초 입주자가 됐다.
백악관은 1814년 영국군의 침입으로 불태워졌다가 호번의 지휘 아래 확장, 보수되어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재입주했다. 1809년 이전부터 대통령 관저를 ‘백악관’이라 불렀는데, 이는 회백색 사암 건물이 주위의 빨간 벽돌 건물과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190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White House’(백악관)를 건물의 공식명으로 정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기에는 건물 2층에 있던 대통령 집무실이 그의 가족들의 숙소로 전환됐고, 대통령과 늘어나는 수행원들에게 더 넓은 사무실을 제공하기 위해 서측 건물이 증축됐다. 또한 1942년 동측 건물이 완성되어 더 많은 사무실이 제공됐다. 동측 건물과 서측 건물은 동?서로 난 테라스에 의해 중심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1948년 해리 트루먼의 집권기에 중심 건물의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시작되어 4년간 건물 외벽을 제외한 내부장식 전체가 다시 이루어졌다. 백악관의 마지막 개조는 1960년대에 재클린 케네디가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고가품들로 여러 방들을 장식하면서 이루어졌다.

백악관에는 모두 130개 이상의 방이 있다. 중심 건물에는 대통령 가족의 숙소와 18~19세기 양식으로 장식된 여러개의 접대실이 있는데, 중심 건물의 일부는 여행객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서쪽 테라스에는 수영장과 체육관이 있으며, 동쪽 테라스에는 극장이 들어서 있다. 서측 건물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실, 그리고 기자실이 있으며 동측 건물에는 그외의 여러 사무실들이 있다.

오랫동안 백악관은 미국의 주요한 명승지가 되어왔으며, 대중에게 공개된 지역에는 매년 15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 백악관 건물은 내셔널 캐피털 공원의 일부이며 1988년 박물관으로 승인됐다.

 

 ▲자유의 여신상

 

미국 뉴욕 항 어퍼 만 리버티 섬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이다.
공식 이름은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세계를 밝히는 자유’).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 간의 친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받침대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92m이고 높이 치켜든 오른손에 횃불을 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는 자유의 선언을 상징하는 서판을 들고 있다. 발코니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거기에서부터 전망대인 머리부분까지는 나선형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받침대 입구에 있는 현판에는 받침대를 지을 기금을 모으기 위해 에머 래저러스가 지은 '새로운 거상'(1883)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에는 “…/횃불을 든 강대한 여인이 서 있으니/그 불꽃은 투옥된 번갯불, 그 이름은 추방자의 어머니/횃불 든 그 손은 전 세계로 환영의 빛을 보내며/부드러운 두 눈은 쌍둥이 도시에 의해 태어난, 공중에 다리를 걸친 항구를 향해 명령한다/오랜 대지여, 너의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하라!/…”라 적혀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에두아르 드 라불레가 남북전쟁 후에 자유의 여신상 건립을 제의했다. 프랑스 국민들이 기금을 모았으며 1875년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의 지휘 아래 프랑스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본체는 동판을 두들겨서 모양을 내고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 르 뒤크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고안한 4개의 대형 철제 구조 위에 조립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46.1m, 무게가 225t이나 되는 완성작은 1885년 분해해서 배에 실어 뉴욕으로 가져왔다. 미국의 건축가 리처드 모리스 헌트가 고안해, 받침대를 완성했다.

받침대에 올려진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10월28일 클리블런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제막되었다. 1986년 7월에 개최된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미국과 프랑스 양국이 자유의 여신상을 수리 복구했다. 처음에는 조명장치가 되어 있는 횃불이 항해에서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등대국에서 관리했지만, 1901년부터는 여신상의 관리를 육군부에서 맡았다. 1924년 국립기념물로 지정됐으며, 사적지 전체면적이 약 0.24㎢에 이르게 되었다.

받침대 부분에는 미국 이민박물관(1972)이 있다.

 

 ▲ 타임스퀘어

 

미국 뉴욕시 맨해튼 중심부에 있는 번화가로 브로드웨이, 7번가, 42번가가 교차하는 곳에 형성되었으며 초기에는 롱 에이커 스퀘어로 알려졌으나, 1903년에 뉴욕타임스가 이곳으로 이전해오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19세기에는 말 거래업자, 마굿간, 마차 등으로 붐비던 곳이었는데, 1899년 오스카 헤머슈타인이 이곳에 최초로 극장을 세우면서 브로드웨이 공연문화가 시작되었다. 타임스스퀘어와 인근 지역은 공연장, 극장, 상점, 뉴스 가판대, 술집, 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는 미국에서 가장 번화하고 분주한 유흥지역으로서 미국 공연문화의 중심지를 형성했다.

타임스퀘어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인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범죄 소굴이었으며, 성인영화관과 성인용품 상점, 스트립쇼 공연장 등이 즐비한 곳이었다.
하지만 뉴욕주와 시 당국에서 강력하게 재개발을 추진, 오늘날과 같이 많은 새로운 공연장, 호텔, 음식점, 대규모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재정비됐다.

뉴욕주 정부의 타임스퀘어 재개발 계획은 1982년도에 처음 수립됐다. 극장밀집지역을 제외하고 평지처럼 깨끗이 정리한 다음에 4개의 초고층건물, 대형시장, 호텔 등을 신축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일부 정치인과 건설회사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일반시민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비판자들은 그 계획을 두고 전통적인 위락단지로서 풍부한 역사를 지닌 이 지역을 단순히 개발논리만을 내세워 일시에 완전히 철거하고 다시 신축하는 식의 개발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재개발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팽팽히 맞부딪쳤고, 법정 공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90년 마침내 뉴욕주 정부가 재개발과 관련된 44건의 법원 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본격적인 재개발에 돌입할 수 있었다. 1993년 재개발계획이 확정됐고, 1995년 12월에 1,140만 달러를 투입해서 청소년용 전용극장인 ‘뉴 빅토리 극장’이 문을 열었다. 이 청소년 극장이 개관됨으로써 그 동안 성업 중이었던 150개 이상의 성인전용 가게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타임스퀘어 재개발에는 건축가 로버트 스턴(Robert A.M. stern)과 청소년 극장의 소유주인 월트 디즈니(Walt Disney)사의 공이 컸다. 이로 인해 디즈니를 필두로 건전한 업체들의 입주가 쇄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제야에 불이 밝혀진 공이 내려오면 새해를 향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전통이 뉴욕타임스가 이전해오던 때부터 시작되어 해마다 12월 31일 밤이면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아시아존

 ▲ 자금성

 

자금성’은 중국 명,청 양시대 24명의 황제가 거처하던 중국 봉건왕조의 마지막 왕궁이다. 590년의 역사를 지닌 이 고궁은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며, 중국 최대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 고궁은 궁실만 모두 9,000여 칸이며, 면적은 72만㎡에 이른다. 애초 설계한 것의 반밖에 못 지었다고 하니 당초 구상이 얼마나 장대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왕궁 주위에는 높이가 3m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궁 장벽 밖에는 넓이 52m의 성을 보호하는 하천(호성하)이 둘러서 흐르고 있어 하나의 성채가 완벽한 경계를 이룬 요새를 이루고 있다.

자금성의 건축 배경에는 당시 영락제를 보좌했던 한 스님의 꿈에서 비롯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날 밤 스님은 천제가 살고 있는 ‘천상의 도시’를 꿈꾸고 나서 이와 똑같은 수도를 만들것을 황제에게 진언했다.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한다는 명분에 의해 영락제는 지상에 세계의 중심으로서 ‘천제의 도시’를 재현할 것을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자금성의 첫 글자 자(紫)란 ‘자미(紫微)'에서 나온 말로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의 하나이고, ’금성(禁城)‘이란 왕성을 뜻하므로, 자금성은 곧 ’천자의 궁성‘이란 뜻이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자금성은 1407년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가 남경(南京?지금의 난징)에서 북경(北京?지금의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부친인 태조 홍무제(주원장)와 조카 건문제에 이어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북방으로 패주한 원의 잔존세력이 계속 위협을 가해오자 군사적으로 정권강화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1406년 원의 수도인 북경으로의 천도 결정을 내리게 된다. 천도 계획과 함께 1년후인 1407년 5월에 새 궁전인 자금성 건설을 시작한 것이다.

자금성의 궁내 구조는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의 양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고궁의 전반부를 외조라 칭하는데,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등 3대전을 중심으로 삼고 문화전(文華殿), 무영전(武英殿)을 양 날개로 삼아 웅장하고 장엄하면서도 화려하다. 이곳은 황제가 대전 의식을 거행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외국의 귀빈을 접대하던 장소이다.

후반부는 내정이라 칭하는데, 황제가 평상시에 업무를 보고 후비와 함께 거주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내정의 북쪽에는 어화원(御花園)이 있는데, 건축이 정교, 우아하고 구성이 변화 무쌍하며, 제왕과 후비가 놀던 장소이다.

 

 ▲ 구마모토 성

 

일본은 봉건영주에 의한 통치와, 무가(武家) 사회의 상징으로 축성술과 더불어 군사적 목적에 의해 성이 발달하였다. 망루처럼 높게 솟아있는 것을 ‘천수각’이라고 하며, 이것이 있는 본성의 건물을 ‘혼마루’(本丸)라 하여 성 전체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성주가 살고, 병기와 많은 군비가 갖추어져 있다. 주변의 아성들은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라고 하여 역시 수비를 담당했다. 성둘레에 해자를 둘러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 요새의 형태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들은 메이지 유신 직후 봉건시대의 잔재로 인식되어 대부분 파괴되었다. ‘히메지성’, ‘오사카성’과 더불어 일본 3대 명성 중의 하나로 꼽히는 ‘쿠마모토성’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았다.

이 성은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침공했던 장군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1607년 축성된 것이다. 쿠마모토성은 우아한 곡선의 돌담과 함께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한 아름다운 성이면서도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진 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887년 세이난 전쟁 때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은 1960년에 복원된 것이다.

7년간에 걸쳐 완성된 성곽의 넓이는 약 76㎡, 그 주위가 약 5.3㎞에 달하도록 웅대하게 지어졌는데, 이 성 안에는 성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높은 건물 천수각이 둘, 성루가 49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우토성루’(宇土櫓)에 대해 전해내려오는 일화가 눈길을 끈다.

가토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 때 반대파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본거지인 우토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이 승전의 기념을 위해 가토는 우토성의 천수각을 그대로 옮겨 자신의 성에 건축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토성루라는 것이다. 또한 이 천수각 끝에는 조선 기와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잡혀온 조선의 와공이 만든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고 했던가. 가토가는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정책에 의해 2대에 걸친 44년 밖에 계속되지 못했고, 그 모습을 뽐내던 천수각마저 1877년 내란으로 끝내 불타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천수각은 1960년에 구마모토현에 의해 재건되어 현재 영주와 성에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의 용도로 사용이 되고 있다.


 

 ▲ 만리장성

 

오늘날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만리장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關)에 이르는 지도상의 총 연장 거리만도 약 2,700km에 이르며, 실제는 약 6,400km에 걸쳐 동서로 뻗어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으로 손꼽힌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전국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의 연(燕),조(趙),위(魏),초(楚) 등 여러 나라가 각각 장성을 구축하였다. 기원전 221년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7년후인 기원전 214년에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대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실질적인 만리장성의 첫 토대를 건축했다. 이전까지 연,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개축하여 이룩한 대 사업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만리장성의 건설 위업은 진시황제가 이룬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 진시황제가 통일후 첫사업으로 만리장성의 구축을 서두른 것은 여전히 북쪽의 흉노족이 부담스러운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의 방어책으로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시킨 것이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그리하여 10여년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랴오둥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 장성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 대 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가 멸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진시황제에 의해 최초 구축된 만리장성은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에 의해 숱한 변화를 겪게 된다. 애초 만리장성의 위치는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당~송~명조를 거치면서 거란 돌궐 몽골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明)나라 대에 들어와서였다. 청(淸)대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한 채, 단지 중국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거의 보수를 하지 않아 원형이 파괴된 곳도 많고, 특히 문화혁명 때에는 농부들이 집 수리를 위해 장성의 돌을 훔쳐가곤 한 적도 있었다.


 

 ▲ 타지마할

 

인도의 자랑인 ‘타지마할’은 우타르프라데시주(州) 아그라 교외 아그라성(城) 동쪽 약 2 km, 자무나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만들어진 궁전형식의 묘묘(墓廟)이다.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으로,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5대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4번째 왕비 무 무타즈 마할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이 여인의 무덤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궁전이라는 의미의 '마할'을 붙였다.

타지마할의 건립 배경에는 샤 자한과 그의 왕비 무 무타즈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14번째 아기를 낳다가 죽자,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무려 22년에 걸쳐서 그녀를 애도하는 아름다운 죽음의 궁전인 타지마할을 아무나강가에 만들게 한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집권 30년 중 22년을 이 건축에 바친 황제 샤 자한은 타지마할을 짓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타지마할이 건너다 보이는 아무나강 맞은 편에 검은색 대리석으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또한 황제는 이 궁전을 완성한 후 다시는 그런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건설에 참여했던 장인들의 손목을 모두 잘라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동안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재력을 낭비하고 인력을 동원하자 백성의 원성이 높아만 갔고, 이 틈을 노린 아들 아우랑제브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나라를 빼앗는 패륜적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타지마할의 대문을 들어서면, 길 중앙에 있는 일직선의 풀이 양 옆의 나무의 녹색을 비추고, 우유 빛깔의 대리석으로 된 돔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태양 광선은 대리석을 그물모양으로 투조(透彫)한 2중장치를 통하여 돔 내부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곳에 황제부처의 묘관을 안치하였다. 특히 달밤의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으며, 인도 ?페르시아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서 세계적으로 이름높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그와 함께 타지마할에는 많은 외국인이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건축의 설계와 세부의 장식은 이란인이 했고, 돔은 터키인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했다는 설도 있다. 타지마할이 인도의 힌두적인 생동감 보다는 이란의 이슬람적인 장식성이 더 두드러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롱먼석굴

 

‘윈강석굴’ ‘둔황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룽먼석굴’은 뤄양(洛陽) 남쪽 교외 약 14km 지점에 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갈라지며, 석회암의 암벽에 다수의 크고 작은 동굴을 뚫어놓았는데,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수만 해도 동굴 1,352개,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개, 석탑 39개, 불상 9만 7,306체, 글자가 새겨진 제기(題記)나 비각이 3,600점이나 된다. 가위 세계적인 불교예술의 보고인 것이다.

뤄양은 역사의 고도로서, 중국의 역사에서 시안(西安, 옛 장안) 다음으로 많은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뤄양이 이렇게 번성했던 것은 중원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힘입은 바 크다. 중국 대륙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중앙인데다 육운과 수운의 연결점이기도 했다. 뤄양의 숱한 문화 유산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룽먼석굴인 것이다.

이곳에 석굴을 처음 파기 시작한 것은 북아시아 유목민의 한 부류인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 왕조. 493년 북위가 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 수?당에 이르는 4세기에 걸쳐 룽먼석굴을 완성했다. 그들은 강북 전체를 통일하자 확대된 영토를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인 것인가를 궁리하다 자신의 문자와 성(姓), 복식 등을 버리고 모든 것을 다수세력인 한민족의 것으로 바꾸는 한화(漢化)정책을 폈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룽먼석굴의 건설도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석굴 공사는 그후로도 계속되어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이어졌는데,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대개 조영되었다. 그 덕분에 지금 이곳에는 빈양둥(賓陽洞), 구양둥(古陽洞), 완포둥(萬佛洞), 펑셴쓰둥 등의 석굴사원과 많은 조각상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서도 룽먼석굴의 하이라이트는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펑셴쓰(奉先寺)의 본존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이다. 이곳의 대부분의 불상들은 상처를 받아 흠이 많지만 이 노사나불만큼은 온전하다. 거기다가 얼굴에선 온화함이 흘러 넘치고 풍만한 상체에선 원만함이 풍긴다. 대불다운 풍모를 여지없이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작품이며 높이가 17m남짓하고 얼굴은 축천무후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 앙코르와트 사원

 

‘캄보디아의 영원한 등불’로 불리고 있는 ‘앙코르 와트’는 그 정교한 예술성과 웅장미에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을 능가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오늘날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비록 캄보디아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내전으로 점철돼 왔던 터에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최고의 유적 중의 하나인 앙코르 와트에는 연간 5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와 그 놀라운 예술성에 감탄해마지 않는다. 앙코르 와트가 이토록 유명세를 타게 된 데에는 세부적인 조각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웅장한 규모 면에서도 가히 참배객들을 압도하고 있다. 동서로 약 1,500m, 남북으로 약 1,300m의 직사각형 터에 높이 65m의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을 중심으로 지어진 웅장한 석조 건물인 앙코르 와트는 오랜 세월 자연과 사람들의 손을 타서 많이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m의 해자를 건너면 3개의 탑과 함께 길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參拜路)를 따라 475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중앙사당탑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앙코르왕조는 15세기에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 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으나,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하여 다시 알려졌다.

 

한국존

 

 ▲ 거북선

 

한산대첩은 임진왜란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일본 해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두차례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7년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 혼란기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륙 정벌의 야심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공했다. 유럽에서 받아들인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은 육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60일만에 수도 한양과 평양을 함락하는등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있어 사천의 선창,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조선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수군의 패퇴로 보급로가 끊기게 되자 일본군은 육전에 종사하던 수군장들이 총망라되는등 대대적으로 병력을 증강, 110여척의 대규모 전함을 이끌고 7월 8일 남해안에 집결하였다. 이제까지의 해전이 게릴라식 비정규 해전이었다면, 한산대첩은 양국의 주력함대끼리 정면으로 맞붙은 최초의 정규 해전이었다. 특히 이 해전은 조선에게는 국가의 존망이, 일본에게는 전쟁의 승패가 걸린 한 판 결전이었다.

한산도는 지금의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는 지형으로 이순신 장군은 이를 십분 활용,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하여 거짓 후퇴하는등 적함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한 뒤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잠복해 있던 주력선들이 마치 학의 날개를 펴듯 일제히 기습하는 이른바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결과적으로 이 해전의 승리로 왜군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까지 왜군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모든 전선에 걸쳐 소극적, 수세적 군사활동만을 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침공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은 180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영국 넬슨 제독의 저 유명한 트라팔가 해전과 더불어 오늘날 동서양을 각각 대표하는 해전과 해군 제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산대첩에서의 조선 수군의 승인은 우수한 함재포와 거북선 및 판옥선과 같은 전투력이 뛰어난 병선 그리고 이순신의 천재적인 전략과 전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왜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조하여 만든 우리 고유의 조선(造船)방식에 의해 건조된 국산 전함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외국인들도 격찬하는 전함으로 평가받고 있다

 

 ▲ 경복궁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성(지금의 서울)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궁궐의 조성에 착수했다. 1394년(태조 3년)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주야로 작업을 진행한 끝에 이듬해인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복궁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5개의 궁 가운데 으뜸이 되는 정궁이다. 경복궁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직사각형의 윤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남에 광화문, 정북에 신무문(神武門), 동에 건춘문(建春門), 서에 영추문(迎秋門)을 각각 세웠다. 근정전(勤政殿)은 수조지소(受朝之所)로서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남북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직사각형 터전에 조성하였으며, 보평청(報平廳)의 남쪽에 위치한다.

하지만 경복궁의 역사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553년 대화재가 한번 발생한 이후, 다시 임진왜란(1592년)때 방화로 완전히 전소되어 그 폐허만 남은 채, 그후 250년 가량이나 사실상 내 버려졌다. 조선왕조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이 이처럼 버려진 채 있었던 것은 역대의 많은 왕들이 복구 의지는 내비쳤으나 번번히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865년 아들 고종이 왕에 등극하면서 권력을 잡게된 흥선 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세에 의해 무너져 가던 나라의 기강과 왕조의 복구를 기도하며 막대한 돈을 들여 다시 대 공사를 감행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69년에 재완성된 경복궁은 궁안에 지어진 전각만 무려 7,225칸에 달하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중건된 경복궁은 미처 그 위용을 뽐내기도 전에 쇠락해가던 국력으로 인해 곧 외세에 의해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일본은 1904년 조선을 완전히 자신의 속국으로 삼은 뒤에, 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의 전각들을 하나 둘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특히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고, 이듬해에는 정문인 광화문을 치워버림으로써 경복궁은 완전히 제모습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해방 이후까지 계속되었던 이 아픈 역사는 최근에 들어서야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면서 다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의 옛 모습을 되찾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황룡사9층 목탑

 

불교 문화의 융성을 정신적 근간으로 삼아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는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가운데서도 특히 자랑하는 3대 보물이 있었다. 진평왕의 옥대와 황룡사의 장육존불, 그리고 황룡사 9층목탑이 그것이다.
황룡사는 불심이 깊은 신라 제 24대 진흥왕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원래는 궁궐 남쪽인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으나,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신궁 공사를 중지하고 황룡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553년(진흥황 14년)에 처음 공사를 시작한 이래 9층목탑이 완성되는 645년(선덕여왕 14년)까지 무려 92년 간에 걸쳐 건립된 신라 최대의 국찰(國刹)이었다.

643년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 대사의 요청으로 건조된 9층목탑은 아홉 개의 층이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으며, 이 탑을 세움으로써 변방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9층목탑에 관해서는 두 개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 있을 때 자장은 한 신령스러운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신라는 북으로 말갈,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입하니 이런 이웃 나라의 횡포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하자, 그는 “지금 그대의 나라는 덕이 있는 여왕을 섬기고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넘보는 것이오. 지금 본국에 돌아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도록 하오. 그리하면 이웃 나라들이 모두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가 조공해 올 것이며 나라가 길이 평안하리라”라고 하였다.

자장의 요청에 의해 건축된 9층목탑은 백제의 공장(工匠) 아비지가 총책임을 맡았다. 아비지는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조국 백제가 멸망하는 것이 보였다 한다. 이에 의심이 난 아비지가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그리하여 아비지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만 42척, 그 이하 본탑의 높이가 183척이었다. 총 225척(80m)의 크기는 요즘으로 치면 20층 빌딩 위에 철탑이 하나 더 서 있는 높이였을 만큼 그 규모가 웅대했다.

이처럼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 배경은 삼국통일의 상징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년)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 전체가 불타버린 이후로는 안타깝게 중수되지 못하였다.


 

 ▲불국사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전한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서는 528년 신라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하고,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때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을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장 믿을만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전해진다. 이 기록에 따르면 불국사는 751년(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전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大雄殿) 25칸, 다보탑(多寶塔)?석가탑(釋迦塔)?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극락전(極樂殿)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이 약 2천여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불국사는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1604년(선조 37년)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년)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다.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국보 20호), 석가탑(국보 21호), 연화교?칠보교(국보 22호), 청운교?백운교(국보 23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 사리탑(보물 61호) 등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삼국이 통일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하던 시기에 불국사는 만들어졌다. 불국사는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전각들을 세운 대표적 가람이다. 현재의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이 각각 중심 건물이 된다. 극락전 뒤쪽에 복원되지 않았으나 법화전지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현재의 불국사에 비해 창건 당시의 불국사가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낱낱의 영역은 거기에 이르기 위한 계단과 입구인 문, 영역의 중심 건물, 그리고 영역을 둘러싼 회랑 등의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다. 불교적 해석을 빌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한 것인데,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뛰어난 문화적 가치로 1995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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