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슬픈지 허전한지도 모른 채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생트집이야.' 라는
생각에 화가 더 많이 났다. 이러다 잠깐 지나면 "아까는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
갑자기 욱하는 바람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 지도 모르겠어." 라며 연락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씩이나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설령 잘못이 없다고 해도,
싸움이나 말다툼 뒤면 먼저 사과하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기 때문에 조만간 연락하면
해결이 될 거라고 느긋하게 생각했다. 매일같이 생소한 생활에 쫓기는 이유도 있었다.
며칠이 더 지나 연락을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적당하지 않아. 한 번쯤은 헤어져 있어 보자." 라며 고집스레
주장했다. "한 번 헤어지면 끝이지, 두 번이 있고 세 번도 있어?" 라며 따지고 싶었지만,
그의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와 헤어지자 뻥 뚫린 구멍만 남았다. 가슴과 머리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났다.
그 구멍을 외면한 채 보고서를 쓰고, 순찰로를 걷고, 보급로를 달렸다.
지금 내가 군인이라서 천만다행이라고 느끼면서도, 괜히 불편했던 선임이 조심스레 친근한
인사를 건넨다거나, 순찰로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간부에게 혼쭐이 나게 되면,
그런 이야기를 들려 줄 그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만 주저않고 싶은 때가 많았다.
울적한 기분을 견디다 못 해 막역한 사이의 친구에게 연락을 했지만,
우습게도 "입대한 애인한테 연락이 올 때마다 부담스러워.
마치 죄를 짓는 기분이라, 차라리 나를 좀 미워하게 됐으면 좋겠어." 라는 푸념을 쓴 웃음을 지으며 듣고 있게 될 뿐이었다. 마치 "설마 아무런 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라며
핀잔을 던지는 것 같아서 내려다 보이는 전투화가 어찌나 야속하던지,
얼른 전화를 끊고는 목젖에 힘을 있는대로 주고는 흡연장까지 뛰어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와 함께한 기억들이 벌컥벌컥 흘러나온다. 마치 현상된 사진처럼 흔들흔들 떨어지다 이따금씩
뒤집힌다.
거기에는 식당에서 "배고파." 라며 어깨를 흔들며 춤을 추던 그도 있고, 화가난 표정인데도 내 손을 꼭 잡고 길을 걷던 그도 있고, 가디건을 뒤집어 쓰고 소나기를 맞으면서 뛰어다니던
그도 있고, 처음 "우리 헤어지자." 라며 등을 돌려 누운 나를 보며 펑펑 울던 그도 있다.
애꿎게도 그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들 뿐이다.
그가 나와 헤어지고 싶은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생트집인 걸까? 그렇다면, 너무 간단해서 웃어버릴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