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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한민국참사<77.11.11-이리역 폭발 사건>

흐운남 |2013.08.01 16:28
조회 41,652 |추천 261

 

 11월 11일. 상술이라고 하지만 이날 괜히 두근거리는건 나뿐만이 아닐거야.

 

별거아닌 초코막대과자이지만 사람을 들었다놨다 요물이야.

 

이 풋풋한 기념일이 전북 익산에서는 다른 의미의 기념일로 기억되고 있어.

 

 

 1977년 11월 11일 이전의 이리역의 모습이야.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주거지였나봐.

 

1977년 11월 11일 이리시의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지내고 있었어.

 

그 날에는 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가 있던 날이라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티비를 보고 있었을 거야.

 

 

밤 9시 15분 이리역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어. 당시 한 주민은 방에서 공부하다가

 

아버지께서 축구 보고 공부하라는 말을 하셔서, 안방으로 갔는 데, 얼마 뒤 자신의 방에

 

기차 화통이 떨어졌대. 몇몇의 이리시 주민들은 북한이 공습한거라 생각하여 간단히 짐을 싸고,

 

대피를 하기도 했나봐.

 

 

 

폭발의 피해를 받은 곳 중에는 삼남 극장이란 곳도 있었는 데, 어떤 신인 여가수가 공연을 하던 중

극장 천정이 무너져내려 깔렸대. 이 여가수는 어깨에 중상을 입은 상태였는 데,

어떤 무명 코미디언이 건물 잔해를 해치고, 여가수를 들쳐 메고 병원으로 갔나봐.

이 용감한 행동으로 코미디언은 유명세를 탔는 데, 그의 이름은 이주일이고 여가수는 하춘화래.

 

폭발 소식이 빠르게 전해지고, 전국에서  기자 및 방송인들이 취재를 왔대.

 

 

- 다음은 당시 취재를 갔던 신문 기자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내용이야.

취재차가 이리 남쪽 목천포를 지날 때 드디어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속터미널 부근부터는 눈이 쌓인 것처럼 길이 훤했다. 도시 전체에서 유리가 깨지고 쏟아져 길을 온통 덮었고 그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거리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불 꺼진 건물의 음영만 으스스하게 차를 내려다 봤다. 차 밑에선 빠작빠작 유리 밟히는 소리가 났다. 유령도시를 가는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모두 이리 역 주변에 모여 있었다. 지붕은 완전히 날아가고 외벽만 남은 역사 근처에 임시 전등이 가설돼 있었다. 무너지고 찌그러진 집을 빠져나와 깜깜한 시내를 헤매던 사람들이 불나비처럼 역 주변에 모여든 거였다.

그들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이불을 덮고 있거나 입술이 새파래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조건 취재를 시작했다. 아이들 셋을 뉘고 이불을 연신 덮어주는 아주머니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사고 순간이 어땠나요?” 머리는 물론 얼굴에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아주머니는 그러나 별 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암시랑토 안해유. 우리 아그들쫌 보소, 이쁘게 자잔유.(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이들이 예쁘게 자고 있잖아요.)”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이불을 끌어올려도, 아주머니의 손길이 거칠게 움직여도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며시 아이들 손을 잡아봤다. … 아이들은, 셋 다 죽어 있었다.

취재기자들도 넋이 나갔다. 거리에 나온 이들 대부분이 머리가 깨졌거나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세 아이처럼 거리에 그냥 눕혀놓은 시체도 적잖았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그냥 꽝-하는 폭음이 들리더니 건물이건 사람이건 풀썩 뛰어 올랐다 내려앉았고 후폭풍이 몰아쳤다. 튼튼한 역 건물이 거의 날아갈 정도로 센 폭발이었으니 주변 집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역 반경 500m 이내 건물은 거의 다 부서졌다.

 

 기사를 보니, 그 당시 악몽같은 상황이 상상이 되는 것 같지?

 

사건 뒤 기자, 재난본부 등 은 사건의 원인을 알려고 밤새 노력했는 데, 자세한 경위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대. 어떤 사람이 벤치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고, 피해자인가 생각해서

 

기자가 가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는 데 그 사람이 폭발의 주범이었어.

 

그 사람의 말은 이래.

 

11월 9일 한국화학공업주식회사의 화물열차가 인천을 출발하여 광주를 향했대. 10일 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하였고, 입환대기선에서 대기하였대. 대기하는 시간이 계속 되자 당시

 

열차 호송원 신씨는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원칙

 

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음

 

주를 했대. 그 뒤 화차로 돌아온 신씨는 논산역에서 구입한 양초를 켜고 침낭에서 잠을 청했대.

 

그런데 양초의 촛불이 화학상자에 옮겨 붙고 만거지. (당시 화차에는 한국화학 인천공장에서

 

출고한 다이너마이트 30톤, 뇌관 1톤을 싣고 있었대.)  신씨는 잠을 자다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떠보았는 데, 폭발 일보 직전이란 것을 깨닫고 "불이야" 를 외치며 뛰쳐나갔대. 그러자 선로보수원이

 

'어느 화차냐' 고 물어보았고, 화약열차임을 깨닫고 "폭약 열차에 불이 났다" 라고 소리쳤대.

 

이 소리를 듣고, 역내 철도 요원들은 너도나도 도망치기 시작했대. 그런데 검수원 7명은

 

불을 꺼보겠다고, 물과 모래를 화학열차에 뿌리기 시작했대. 하지만 결국, 폭발하고 말았지.

 

 

이 사고로 이리 역에는 직경 30m, 깊이 15m의 웅덩이가 파였어.

 

역구내에서만 기관사 철로요원 등 16명이 숨졌고 전체 사망자는 59명, 실종 8명.

 

중경상자는 1350명이래.

 

이리 시내 13,362채 가옥 중 9,530동이 파손됐고 이재민은 1만 명이 넘었대.

 

역 구내에 있던 객차·화물열차·기관차 등 30여 량 남짓이 파손되었고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렸어.

 이 사고 책임을 물어 당시 한국화약 신현기사장을 비롯해 화약회사, 철도청,  대한통운 관계자 등 7명 등이 무더기로 구속됐고 호송원 신씨는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게됐어.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원에 달했다고해.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구성되어 재해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어.

 

박정희 정부는 천막촌을 건설하여 이재민을 수용했고,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1977년 11월 19일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했어. 

 

 

 

사건의 당사자인 화학공사는 사건 후 미온적인 태도로 이리시 주민들을 대하고 있는 데, 현재는 한화라 불리는 곳이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이 최근에  화제가 됐지? 한화 역시 이를 명심했으면 해.   아, 이 사고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 졌더라고.

 

그럼, 빠이!   출처)지식백과, 네이버, 구글, 네이버 캐스트 등
추천수261
반대수2
베플정말|2013.08.01 17:02
진짜 가슴아픈 사건이다.. 저렇게 순식간에 아이셋을 잃은 어머님의 절망적인 심정이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댓글쓰면서도 할 말을 잃었네요.. 제 생일이 11월 11일이라 그저 즐겁기만 했었던 날이 누군가에겐 세상이 무너져내린 날이 됐다고 생각하니 숙연해집니다.. 글쓴님 덕에 묻혀져가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베플머함|2013.08.01 16:34
저 열차 호송원 신씨라는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있는지 궁금하네
베플ㅠㅠ|2013.08.01 17:59
모르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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