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나이 9살 잉글랜드 군대의 영웅이자 사랑하는 아버지가 죽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자랑스러웠던 큰아들의 죽음에 절규하던 할아버지마저 숨을 거두게 되자 아직은 버겁게 느껴질 왕관이 10살 먹은 아이의 머리위에 씌어졌다.그러나 아직 그의 나이는 어렸기에 숙부가 섭정의 자리에 올라 그를 도왔다.
리처드 2세: 영국 플렌테저넷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먼곳에서 시집 온 한 공주의 남편으로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운명은 끝내 그의 편이 되지 않았다.
새롭게 즉위한 리처드 2세에 대해 귀족들은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몇가지 이유를 들자면 먼저 왕 자신이 어렸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흑태자가 너무 영웅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즉 강력한 군사지도자가 즉위하기를 두려워 한 귀족들은 그가 죽고 이어 에드워드 3세마저 죽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고 어린 리처드 2세를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다.
두번째 이유로는 왕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리처드 2세의 어머니는 캔트의 조앤이라 불리는 여성으로 결혼을 두번이나 그것도 당시 금기시되던 중혼(그녀의 첫번째 결혼을 교황이 인정하지 않아 두번째 결혼을 했으나 뒤늦게 첫번째 결혼이 인정되자 그만 두번째 결혼이 자동무효되고 그녀는 중혼을 했다는 이유로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까지 한 몸이었다.이후 두번째 이혼을 한 그녀는 에드워드 흑태자와 연애결혼을 해서 리처드를 낳았다
리처드 2세의 어머니인 캔트의 조앤:당시 결혼을 두번이나 한 몸으로 에드워드 흑태자를 매혹시킨 그녀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이 결혼에 대해 에드워드 3세는 손주를 낳아준 그녀를 인정했으나 아무런 영토확장에 도움을 못준 그녀를 내심 못마땅해 했다.
이렇듯 겉으로는 인정을 받았으나 내심 못마땅해 했던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리처드 2세의 왕위를 그렇게 존중해주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린왕을 보필하던 랭카스터 공작 존(곤트의 존)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더욱 매달려 과도한 세금을 거두었다. 이렇듯 왕이 어리고 폭정이 지속되자 영국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이를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고 한다.
한때 런던에 입성하기까지 한 이 반란군은 당시 영국귀족사회를 붕괴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귀족들의 유인책에 의해 와트 타일러가 피살된 후 가차없이 진압된다 이 시기 존 볼이라는 수도사는 "아담이 밭을갈고 이브가 옷감을 짤때 귀족이란 것이 있었던가" 라는 말을 남겼다.
어렵게 반란을 진압한 곤트의 존은 왕을 결혼시켜 안정을 꾀하게 된다. 이러한 목적에서 다양한 신부감들이 골라졌는데 곤트의 존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카를 4세의 딸을 선택하고 리처드 2세에게 추천했다. 리처드 2세 또한 군말없이 이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결혼에 대해 서로의 목적은 달랐다. 먼저 곤트의 존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당시 세력이 컸던 카를 4세의 도움을 얻어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강력한 처가의 힘을 빌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싶어했다. 여하튼 각자의 목적을 숨긴체 보헤미아의 공주이던 안나가 멀리 영국으로 시집오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는 16세, 신랑이었던 리처드 2세는 15세의 나이였다.
보헤미아의 안나: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4세의 딸인 그녀는
조용하고 얌전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녀를 마중나왔던 리처드 2세는 이러한 그녀의 모습에
흠뻑 빠져버렸다고 전한다.
런던의 항구에 도착한 안나는 앤으로 이름을 바꾸고 리처드 2세의 왕후가 되었다.(그녀와 리처드 2세는 결혼식을 올렸는데 잉글랜드의 작가 초서는 이 두 사람의 결혼이 발렌타인 데이의 시작이었다고 기록했다.) 얌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비록 연약했지만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여성이었다고 한다.(이것은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되는 여동생과 비교되는 이야기로써 그녀의 여동생은 여장부적인 성격으로 합스부르크가의 기초를 쌓는데 큰 역할을 하게된다.)
그녀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화를 내더라도 금세 수긍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신경질적이고 화를 잘내던 리처드 2세에게도 영향을 끼쳐 나라의 일을 담당하고 여러 귀족 및 의회와 싸움을 하고 항상 화난상태로 돌아오던 왕이라도 그녀의 곁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졌다고 전한다.(여담으로 그녀를 따라왔던 체코의 수도사들은 당시 영국에서 활약하던 존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에 매료되어 이를 보헤미아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 사상은 후일 얀 후스의 1차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0대 사춘기의 반항에 접어든 리처드 2세는 의회와 항상 대립하며 그들과 말싸움을 하는일이 잦았다. 왕도 의회도 서로에게 불만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과거처럼 사단이 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의 숙부인 곤트의 존이 둘 사이를 잘 조정했기 때문이었다. 의회에 존경을 받고있던 이 숙부는 리처드 2세에게 있어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언제든지 권력에 위험이 될만한 요소이기도 했다.
곤트의 존에 아내이자 랭카스터 공작부인인 블랜치
(그녀는 존을 처음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존의 열렬한 구애로 마음을 열고
그와 결혼했다. 이후 남편을 랭카스터 공작으로 만들었다. 금발에 청순한 미모였다고 전한다.)
리처드 2세의 또 다른 숙부인 요크공작 에드먼드 후일 요크왕가의 시조가 된다.
이러한 권력구조 속에 리처드 2세는 점차 성년이 되고 정치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권력균형은 깨어지기 시작한다. 1386년 카스티아의 왕위계승 문제로 곤트의 존은 잠시 영국을 떠나게 된다. 의회와 리처드 2세는 서로 이것을 기회로 보고 권력쟁탈을 벌이기 시작했다. 먼저 리처드 2세는 젊은 귀족들을 포섭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회는 이를 위험요소로 보고 리처드 2세의 막내숙부와 곤트의 존의 아들인 랭카스터 공자 핸리를 포섭해 균형을 맞추었다. 잉글랜드는 점차 내분의 길에 접어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리처드 2세는 앤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는 시간이 날때마다 그녀와 함께 있기를 원했고 이를 실천했다. 심지어 그는 공무를 보는 것 보다 그녀와 함께 있는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왕은 권력싸움에 지쳐 있었지만 앤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1386년 의회는 왕의 측근들을 체포해 처벌하기 시작했다. 먼저 칼을 빼든것이다. 리처드 2세는 이를 왕권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 반격했다. 그러나 곧 의회의 반격으로 잠시 화해를 했지만 3년 후인 1389년 성년으로 인정받자 마자 다시금 반격을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돌아온 곤트의 존이 화해를 주선해 사태는 진정되었다. 곤트의 존은 왕의 숙부로서 귀족과 의회가 왕에게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하게 한 다음 리처드 2세가 이를 관대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조정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서로에게 불만을 가진 왕과 의회는 억지로 웃는모습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리처드 2세의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졌고 이것은 짜증으로 이어졌다. 이후 그마한 이유로 주변 내관이나 궁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마다 앤이 조용히 다가와 리처드를 말리곤 했다. 짜증을 내던 리처드 2세도 앤을 만나면 순한 양으로 돌변해 그녀와 정원을 거닐기도 했다.
이처럼 부부사이는 무척 화목하였다. 리처드 2세는 아무리 국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앤과 함께하며 마음을 다스려나갔다. 앤 또한 조용한 성품으로 고집불통이던 왕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두 부부는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정의 평화가 지속되고 표면적이지만 국정이 안정되는 시기가 7~8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그 내면에서는 조금씩 파열음이 나타나고 있었다. 리처드 2세는 이러한 긴장되는 시기에 점차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이 다가왔다.
1394년 런던에서 흑사병이 발생했다. 당시 죽음의 공포라 불리던 흑사병은 왕실 이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앤은 이 흑사병에 감염되었는데 리처드 2세는 크게 놀라 그녀를 직접 간병하려 했다. 그러나 곤트의 존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왕과 앤을 떨어뜨려 놓았다. 앤은 사실상 쉬엔궁전에 감금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성 주변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리처드 2세는 신에게 앤을 데려가지 말라고 기도했다. 그는 그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완전한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밥도 제대로 먹지않고 기도를 계속했다고 전하는 리처드의 간절함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앤은 결국 어두컴컴한 쉬엔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앤은 왕후의 예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잠들었다. 그러나 흑사병의 공포로 인해 왕후의 시체는 최대한 빨리 처리되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크게 분노하고 이전의 반감과 겹쳐 점차 곤트의 존과 의회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리처드 2세는 먼저 쉬엔궁전을 모두 파괴함으로써 분노를 표출하였다.
뒷이야기
이후 리처드 2세는 본격적으로 의회에 반격을 가해 자신의 막내숙부를 비롯한 의회인사들을 처형대에 올리게 된다. 분노한 그에게는 오로지 왕권강화만을 추구하는 독선적인 면모만이 남게되었다. 이런 그에게 있어서 가장 미워했던 것이 바로 곤트의 존과 그의 아들인 랭카스터 공작 핸리였다. 곤트의 존은 마지막까지 왕과 의회의 대립을 조정하기 노력했으며 왕을 달래기 위해
새로운 결혼을 주선했다. 1396년 프랑스와 20년의 휴전을 맺는 조건으로 리처드 2세는 마침내 재혼을 하게된다. 앤이 죽은 후 3년이나 재혼을 하지 않았던 리처드 2세의 배우자는 바로 샤를 6세의 딸인 7살의 공주 발루아의 이자벨이었다.
31세의 신랑인 리처드 2세와 7세의 공주 이자벨의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혼인이었다.
리처드는 이 결혼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첫날밤을 치른 후부터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이러한 화해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결국 1399년 곤트의 존이 실의속에 죽은 후 그의 영지를 몰수했고 핸리를 추방시키며 승기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모든것이 끝났다고 방심하게 되고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꺼진 반란의 불꽃을 살리는 패착이 되었다. 힘을 모은 핸리는 귀족들과 의회를 등에 업고 마지막 반격을 가한다. 이것이 결국 성공하여 핸리는 런던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아일랜드 군에 고전하던 리처드 2세는 긴급하게 퇴각을 하였다. 그러나 양 사이의 적들로 인해 제대로 반격을 가하지 못했고 결국 크게 패하여 핸리의 포로가 되고만다. 결국 그는 의회에 의해 폐위되고 핸리 4세에게 강제로 양위하게 된다. 이후 폰티프렉트 성에 감금된지 4개월 후 폐왕 리처드 2세는 음식을 거부한체 굶어 죽었다.(그러나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핸리 4세가 대의를 위해 리처드 2세를 암살한 것으로 그렸으며 이 전승이 많이 알려지기 되었다.) 이후 그의 시신은 사랑하던 아내인 앤의 옆에 잠들게 된다.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난 아자벨은 프랑스로 돌아와 도팽공작과 결혼하였으나
그의 아이를 낳다가 20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국의 국영방송인 BBC는 2012년 런던올림픽을 기념해 세익스피어가 만든 리처드 2세~핸리 5세
의 일대기를 드라마화 했다. 이때 리처드 2세의 역을 톰 히들스턴(영화 토르에서 로키역)이 핸리 4세의 역을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았다.(알아본 결과 톰 히들스턴이 리처드 2세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