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 당 현종은 그날도 하루종일 우울한 체로 무심히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과거 그는 가장 사랑하던 무혜비를 잃어 상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라는 태평성대로 불릴만큼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당시 당나라의 인구는 오늘날 7000~9000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서역이나 북방민족들도 당과 우호적이거나 눌려있었다.쌀값이 항상 일정해 백성들도 크게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점이 당 현종을 무료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안록산의 난이 없었다면 당태종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평가받았을 당 현종 하지만 사실 그의 통치기 이전부터 부병제,균전제의 붕괴조짐이 있었지만 이때 결국 터져버린것이다.
시큰둥하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현종은 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 질정도로 뛰어난 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양옥환 그녀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가 되었다.그녀의 양아버지인 양립은 사천성의 관리였기 때문에 그녀 또한 그곳에서 자랐다. 그녀는 자라면서 점차 풍만한 몸매를 가진 미녀가 되어걌다(당나라 시대는 가슴이 크되 허리가 약간 들어간 글레머형을 미녀로 보았다. 이것은 유목민의 미녀인식이었으며 송대에 이르러선 한대 이후로 다시 갸늘한 청순가련형 여성이 미녀로 선호되었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수왕은 당현종이 가장 사랑했던 무혜비의 아들로 황위계승자로도 이름을 올렸으나 능력이 떨어져 결국 배제되었다.) 그와는 비교적 금슬이 좋아 6년간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23살의 그녀는 당 현종에게 눈에 띄어버렸다.
당현종은 측근인 환관 고력사에게 저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고력사는 수왕의 비라고 했다. 자신의 며느리 라는 점을 안 당 현종은 잠시 고민하는듯 했지만 사랑의 열병은 더욱 강했다. 조용히 데려오라고 한 현종은 그녀를 범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후 수왕에게는 위씨성을 가진 한 여성을 소개해 새로운 며느리로 삼게했다. 그러나 며느리를 빼앗았다는 소문이 돌까 우려한 현종은 그녀가 도교의 여승이 되고 싶다는 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혼시키고 도교의 사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 기도를 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자주 방문에 양귀비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양옥환은 그곳에서 태진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잠시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얼마 후 당 현종은 그녀를 궁궐로 데리고 돌아와 수년 후 귀비라는 작위를 내렸다. 양옥환은 그날부터 양귀비로 불리게 되었다. .
너무 이쁜게 죄였던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진 양옥환은 당나라 쇠퇴의 역사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된다.
새로운 활력소를 얻게 된 현종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문제는 이때 회복한 열정을 정치에 쏟지않고 양귀비와 항상 함께 지내고 어떤 재미난 놀이를 할 것인가에 쏟아부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양옥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려 했다. 그래서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짓고 그곳에 양옥환을 살게 하였다. 이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 또한 화청지라는 큰 연못을 파서 양귀비와 뱃놀이를 즐겼다. 그녀 또한 해당탕이라는 전용 목욕탕을 짓고 그곳에서 온갖 약초를 넣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 고운피부를 유지했다. 양귀비는 당 현종과 서로 사랑에 빠졌으며 그곳에서 언제나 함께하였다.
오늘날 장안 교외에 있는 화청지의 양귀비상과 그녀가 목욕했다는 해당탕
당 현종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양귀비는 어느날 여지라는 과일이 무척 먹고 싶다며 황제 에게졸랐다. 당 현종은 여지가 남방의 과일이라는 사실을 안 뒤 칙명을 내려 여지를 공수해오게 했다. 당시 양귀비가 실세임을 안 관리들은 아부하기 위해 백성들을 무리하게 동원해 여지를 올려보내게 했다. 비록 당시 운하가 뚫려있었다고 일반 도로사정이 열악했고 운송기구 또한 부족해 백성들은 큰 고생을 했다.
양귀비가 가장 좋아했다는 남방산 열대과일 여지 이 신비의 과일은 18세기 이후 유럽,미국에도
진출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오늘날에는 영어식 이름 리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양귀비는 태진궁에만 머물러 있었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사치와 현종의 사랑만을 원했다. 현종 또한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다. 양귀비의 세 자매까지 한국,괵국,·진국부인에 봉해졌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건달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였지만 현종에게서 국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양국충은 당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이었으며 종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역사서에는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덕분에 그녀는 후궁의 모든 여인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현종의 여인들은 그녀를 매일 증오하며 살았다. 한 예로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이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불태울 당시 당나라는 점차 기울어 가는 제국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균전제와 부병제가 점차 붕괴되었고 그 결과 760만호에 9000만명의 인구를 자랑한 당나라의 세금은 도리어 절반도 못 거두는 실정에 이르렀다. 권력자와 그들에게 빌붙은 지방관리들의 농간으로 인해 탈세가 횡횡하게 된것이다. 결국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넘아가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원흉은 양국충이었지만 당 현종은 항상 양국충을 칭찬하였다.
병역을 지는 사람이 줄어들자 대신 이민족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과거 당나라는 북방민족을 철저하게 억눌러 평화를 지켜냈는데 그것이 점차 무너지게 된 것이다. 변방에 절도사라는 직책을 만들었고 그 수장에 이민족 출신들이 등용되기 시작했다.(사실 당 태종대에도 계필하력, 설인귀등이 활약했었지만 군권은 황제나 중앙이 쥐고 있었다.) 이때 유명한 무장들이 바로 안서절도사 고선지와 더불어 당나라를 몰락의 길로 유도한 안록산이 있었다.
강족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를 가진 안록산은 어린시절 먹고살기 위해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얼마 후 특유의 넉살과 친화력 그리고 확실한 일처리로 당시 절도사였던 장순규의 총애를 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부터 승승장구 한다. 이후 장순규가 죽자 그 자리를 차지했고 적극적으로 중앙에 충성심과 능력을 보여줘 이임보의 추천으로 당현종에게 다가간다. 반란이 평정된 후 그 시체가 찣겼으나 이후 신하였던 위박절도사 전승사 등에 의해 가묘와 사당이 세워졌다.
당시 중앙권력은 양국충이 쥐고 있었는데 그는 안록산을 지독히 싫어했다. 그 이유로는 안록산이 과거 재상이었던 이임보의 충복이었고 황제와 귀비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록산을 제거하려고 그를 장안으로 소환했지만 정작 안록산이 장안을 방문해 도리어 총애가 깊어졌다.
당 현종은 점차 나이가 들어 어찌될 줄 몰랐기 때문에 양귀비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은뒤에도 그녀를 지켜줄 충복을 원했고 그래서 안록산을 키웠다. 양귀비 또한 안록산을 좋아했는데 한 예로 양귀비가 안록산을 홀딱 벗겨 목욕시키고 아기 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으며.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좋아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특유한 넉살때문이었다. 하루는 현종이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안록산에게 그 뱃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농담을 건네자 안록산은 폐하에게 바칠 충성심이 있습니다. 라고 해 현종을 웃겼다고 한다. 당 현종도 양귀비도 안록산을 철저하게 믿었으며 심지어 양귀비가 안록산과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두사람은 안록산에게 철저하게 뒷통수를 맞는다. 변경으로 돌아간 안록산은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낙양을 점령한 그는 파죽지세로 진격했지만 고선지,기서한 등에 의해 동관에서 저지되었다. 반란은 제때 수도를 점령하지 못하면 결국은 실패하기에 안록산은 크게 당황했지만, 결과적으로 당현종과 양귀비가 환관들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을 제거해버버렸기에 동관은 결국 뚫리게 되었다. 그러자 황제와 양귀비는 사천으로 도주하던 중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과 세 부인을 비롯한 양씨일족을 모두 죽이고 그녀에게도 죽음을 강요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그녀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일본으로 도망갔다는 설이 있는데 일본 고지현에서는 이를 관광상품화 하였다.)
당 현종과 양귀비가 도피하던 당시를 그린 사천피난도
일찍이 양귀비를 두고 이태백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으로 하여 장한가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워낙 인기인이라 오늘날에도 중국에선 양귀비, 양귀비비사, 대당부용원 등 양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여러 편 만들어졌다
대당부용원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중국의 인기스타인 판빙빙이 양귀비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