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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군사력과 맞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항일독립군…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참의부 |2013.08.15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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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명치유신(明治維新)은 1868년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40년 후 일본은 서양 여러 나라와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모두 철폐하고, 제국주의 물결을 주도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일본은 과거 종주국이었던 청(淸)과 서양의 군사강국인 러시아를 모두 꺾고 1910년 한국을 병탄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국제적인 지위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의 기세는 욱일승천(旭日昇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한국의 독립운동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발표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을 기점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3·1반일시위운동은 일제(日帝)의 잔악한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독립운동 세력은 힘을 키워 후일을 기약하자고 주장했던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과 무력(武力)을 양성해 직접적인 군사행동으로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무장투쟁론(武裝鬪爭論), 그리고 사실상 일제의 통치를 인정한 자치론(自治論)으로 나뉘게 되었다.

 

국내의 독립운동이 이러한 한계에 부딪히게 되자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象龍)·이회영(李會榮) 등을 비롯한 뜻있는 인사들은 그들의 본거지를 해외로 옮겨갔다. 1920년대에는 일제가 아직 만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투쟁을 펼치기에 적합하였고, 재중동포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다.

 

만주에는 이미 1918년 서일(徐一)·계화(桂和)·현천묵(玄天默) 등 대종교인들을 주축으로 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만들어져 있었고, 1919년 3월 13일에 3·1반일시위운동에 자극을 받아 길림성 용정에서 “독립만세” 구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같은 해 4월에는 길림성 연길에서 구춘선(具春先)·김약연(金躍淵)·안무(安武) 등이 주축이 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출범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도 설립되었다. 

 

한편 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북로군정서와 대한국민회는 그 산하 기관으로 자처했다. 이들 단체는 간도 내 한국인들의 자치를 담당함과 동시에 동포 청년들을 무장시켜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의 길로 나섰다. 이들이 일본군에 맞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양대 전투가 바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었다.

 

 

● 독립군은 정규군이었다.

 

지금까지 독립군(獨立軍)이란 군대의 성격은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다.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 강국을 상대하는 약소국민들의 투쟁 방식은 주로 게릴라 작전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던 필리핀이나 독일의 나치 군대를 괴롭혔던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인민해방군, 프랑스와 미국에 저항했던 베트남, 소련의 침공을 막아낸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등이 모두 그러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일본의 점령 당시 이에 맞섰던 한국인 독립군 부대들 역시 유격전을 전개한 게릴라 집단처럼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맞선 한국인 무장단체가 오로지 게릴라 작전으로만 일관했다는 것은 잘못된 추측이다. 일본군에 대한 무장저항은 여러 단계를 두고 전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1920년 초기의 투쟁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었다.

 

게릴라는 원래 일정지역을 자신들의 ‘해방구’로 만들고 그를 토대로 현존하는 체제와 대립하는 반체제를 만든 다음 이를 국가와 같은 거대 정치체로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만주에 형성된 독립군 세력의 목적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것이지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군이 게릴라 집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전투방식에서도 알 수 있다. 게릴라는 주로 적군의 후위부대나 보급부대를 골라 공격하는 비정규전을 치렀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의 독립군은 비록 전략상 유인책과 기만전술을 적절히 구사하기는 하였으나 적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화력과 병력에서 월등히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당당히 정규전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조직임을 자임하며 병영을 운영하고, 엄격한 편제를 유지하는 정규적 군인들이었다. 반면 게릴라 집단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했다.

 

낮 동안 생업에 종사하던 마을 주민들이 밤에 유격대원으로 변해 활동할 수 있는 것이 게릴라였다면, 독립군은 비록 민주에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으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정규군으로서 당당히 일제의 군대와 맞섰다.

 

●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1920년대 전투 양상을 보면 독립군은 게릴라 전술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국가라는 기지가 없는 무장독립집단으로서 지속적인 인력과 자금, 무기의 공급을 받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소규모 교전을 통한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독립군은 국경지대라는 특수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반도 내에 주둔한 일본군을 소규모로 습격하여 도발한 뒤 이들을 만주 내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여 한꺼번에 섬멸하는 작전을 주로 구사했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내에 비밀행정조직을 만들어 비밀리에 세금을 걷어 행정력과 무장력을 뒷받침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곧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때문에 독립군 장병들은 무기와 자금을 스스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전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1920년 6월 4일 화룡현 길림성에서 벌어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는 사실 전투라기보다는 소규모 교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싸움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삼둔자전투는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함경북도 종성에 침투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고 귀환하자, 이에 분노한 일본군이 1개 중대 병력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약 4백여명의 병사로 편성된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삼둔자 전투 이전부터 두만강을 넘어와 국경에 배치된 일본군을 수차례에 걸쳐 괴롭히고 잇었다. 그는 갑산·혜산·자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찔렀으며, 만포진에서는 7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본군으로서는 비록 소규모 전투이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일본군을 연이어 격파하는 홍범도의 부대를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홍범도 부대의 잇단 월경과 기습을 막기 위하여 아리요시 중대를 파견해 독립군의 본거지를 공격하도록 했다. 두만강을 건너온 아리요시 중대는 독립군의 행방이 묘연하자 삼둔자 마을에 있던 무고한 한국인 동포들을 대량 학살하고, 재차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진격로를 미리 예측하고 있던 홍범도 장군은 박승길(朴昇吉) 휘하의 신민단(新民團) 소속 병사 1백여명을 삼둔자 서남방에 매복시켜 불시에 기습하게 해서 일본군을 모두 궤멸했다.

 

삼둔자전투에 출전했던 아리요시 중대가 패배하고 돌아오자 일본군 제19사단장 다카시마 중장은 야스카와 소좌 휘하 1개 대대 병력을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로 편성해서 증원군으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에 홍범도 부대의 뿌리를 뽑기로 작정하고 그들의 본거지를 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에 야스카와 대대는 약 3백명의 병력을 동원해 봉오동으로 출동했다.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일본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홍범도는 그들이 국경지대의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갈 지(之)’ 형태의 복잡한 계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봉오동(鳳梧洞)의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작전을 준비했다. 봉오동에 있는 계곡의 끝에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개활지가 있었다. 비록 이 장소는 폭이 100미터 남짓한 좁은 지역이었으나 적군을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전멸시킬 수도 있는 완벽한 매복지였다.

 

홍범도 장군은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부대를 동쪽 산지의 시루봉에 배치하고, 신민단(新民團) 부대는 남쪽을 맡게 했으며 자신의 본대는 서쪽을 담당하여 완벽하게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6월 7일 오전 일본군이 개활지 입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유인전술을 맡은 이화일(李化日) 분대는 맹사격을 가했다. 일본군 척후대는 황급히 후퇴하여 뒤에 따라오고 있던 본대에 독립군의 위치를 보고했다.

 

일본군 본대는 그날 점심 때쯤 전투대열을 정비하고 봉오동으로 진격해왔다. 그들은 매복공격을 경계하기 위해여 이번에도 척후병을 앞세운 다음 독립군 부대를 찾기 위하여 서산 아래를 배회했다.

 

홍범도 장군은 본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척후병들이 그대로 통과할 때까지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 본대가 개활지에 진입하고 나서도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수풀 속에서 일어나 일제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즉각 산개하여 이에 응사했으나, 개활지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피해가 속출하였다.

 

야스카와 대대는 병력을 밀집대형으로  바꾸어 서산에 위치한 독립군 진영으로 돌격을 시도했고, 기관총 2문으로 서산 방향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지만 동북쪽에 매복하고 있던 강상모(姜尙模) 중대가 일본군의 후방으로 내려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에 야스카와 대대는 홍범도 본대에 대한 돌격을 중단하고, 다시 카미야 중대와 나카니시 중대를 동북쪽으로 투입시켰다.

 

그러나 이미 눈앞의 적군은 물론 서산과 동북쪽의 시루봉 3면에서 공격을 받은 야스카와 대대는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야스카와 대대는 유일하게 길이 뚫려 있던 남쪽으로 황급히 후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남쪽의 야산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민단 소속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고, 일본군에게 남은 선택은 포위망 한쪽을 돌파하여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일본군은 남은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경사가 심하지 않은 동산 방향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뇌우성 속에 홍범도 장군은 신속하게 독립군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이미 전투의 승리는 확실한 결과였고, 일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그친 후 독립군이 전장을 빠져나간 것을 안 일본군은 패배감과 함께 극도의 허탈감까지 겹쳐 감히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야스카와 대대는 야간에 야산지대의 소로를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야스카와 대대는 도중에 때마친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진군하고 있던 다른 일본군 부대인 아리미 대대를 만나게 되었다.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혼이 난 이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지원부대를 독립군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때문에 일본군 두 부대는 맹렬히 아군에게 총격을 가했고, 다음날 아침 그것이 오인(誤認)전투였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봉오동에서 2백여명의 부상자와 함께 15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왔다.

 

● 독립군 연합부대 결성

 

조선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 중장은 일본군 제19사단 예하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日帝)는 일본군 소규모 경비 병력이나 일본의 간도영사관 소속 병력을 가지고는 나날이 불어나는 독립군 세력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1920년 7월 16일 조선 주둔 일본군 참모장 오노 소장과 관동군 참모장 대리 기쓰 대좌, 그리고 중국 주재 일본영사관의 고위 관리들이 모두 심양에 모였다. 여기에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남작의 밀명을 받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도 참석하였다. 이들은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독립군을 한꺼번에 없애기 위한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는 봉오동전투 이후 일본군이 독립군의 존재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일제는 ‘토벌’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중국 정부에게 국경지역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만주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접근하였고, 장작림과 일제 군부는 결탁하여 공동수사의 명목으로 독립군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만주 동부의 독립군은 우호적인 길림성장 서정림의 비호 아래 어느 정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으나, 남만주의 독립군은 탄압을 견디다 못해 본거지인 통화현을 포기하고 안도현으로 옮겨갔다. 얼마 후 장작림이 서정림을 해임하고 자신의 심복인 포귀경을 길림성장에 임명하자 동부의 독립군 역시 산간지방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재차 중국 정부를 설득하려고 시도했으나 또 다시 실패하고, 만주 출병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일제가 장강호가 이끄는 중국인 마적단을 매수하여 자국 영사관을 습격한 정치적 조작극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자국의 국민들을 살해하면서까지 만주 출병을 강행한 것은 후일 만주 진출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일 수도 있으나, 당시 그들이 당면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독립군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그만큼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준비 단계에서 홍범도 장군의 역할은 컸다. 그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이 재차 공격을 할 때에는 그 규모가 훨씬 클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간도 화룡현 와록구로 가서 수백명의 병사를 양성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익혔고, 대종교도들이 주축이 된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徐一)과 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을 설득하여 이곳으로 모이게 했다.

 

이로써 독립군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신민단(新民團)·의민단(義民團)·광복단(光復團) 등이 연합한 홍범도의 부대와 김좌진이 이끌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중심으로 병력을 한데 모야 2천여명 정도의 전투부대를 편성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아즈마 소장이 지휘하는 함경도 나남의 조선 주둔 육군 제19사단 제37여단 소속 병력으로 사령부와 보병 1개 연대, 1개 대대, 기병 1개 연대, 1개 포병 대대, 공병 1개 중대와 19사단 직속부대와 헌병을 합쳐 모두 5천 4백여명이었다.

 

독립군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결전을 치를 것을 각오했다. 독립군이 지향한 전투의 성격은 연합부대가 홍범도를 총지휘관으로 추대한 후 발표한 ‘5항결정’ 중 제5항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군대와 응전하여 그 허를 찌르거나, 또는 산간에 유인하여 필승을 기하도록 하고 그 외에는 싸우지 말 것….”

 

그러나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 모인 독립군이 이 작전을 채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홍범도 장군은 북로군정서 산하 부대를 화룡현까지 오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통일된 지휘부를 구성하고 전투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10월 초와 10월 16일 두차례 만난 양군 지휘부는 서로의 견해 차이만 보인 채 중론을 통일하지 못했다. 홍범도 장군은 지형을 이용해 속전속결로 나가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반면, 김좌진 장군은 대규모 일본군 부대와 정면충돌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여기고 피전책(避戰策)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10월 19일 일본군의 선발부대가 북로군정서의 후미에 배치되어 있던 부대를 따라잡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발생했다. 이에 김좌진은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홍범도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 정보 우위와 무기 확보

 

전쟁에 있어서 정보의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은 두 차례의 걸프 전쟁 당시 정찰기와 인공위성 등 자국의 정보자산을 총동원하여 입체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고, 이라크는 항공기나 공중 무기가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당해야 했다. 과거의 몽골군도 전담 기마정찰병을 지정하여 긴급상황을 지휘관에게 신속하게 알리도록 하는 체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이동 중인 적을 상대할 때에는 정보의 확보가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을 만큼 중요했다. 이동 중인 적군에 대한 정찰과 진격에 대한 예상은 공격과 수비를 준비하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립군은 청산리대첩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정보우위 상태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전력의 열세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간도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일본군을 발견할 때마다 인근의 독립군 부대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었고, 일본군을 피해다니는 협조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언제나 독립군에 대한 정보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독립군은 일본제 30식·40식 소총(小銃)과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 그리고 Steyr M95 장총(長銃) 등의 무기를 사용했는데, Steyr M95 장총은 Mannlicher1890 장총의 개량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원으로서 러시아군과 싸우기 위하여 연해주지방에 와 있던 체코군 병사들에게서 구입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패배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체코군 병사들은 쓸모없어진 무기들을 독립군 병사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이 무기는 우수리강~왕청현, 연해주~왕청현, 그리고 남연해주~훈춘~왕청현 등 세 개의 루트를 통해 들어왔다. 독립군 수뇌부는 이 무기를 구하기 위하여 20대~30대의 젊은 병사들로 하여금 등짐에 무기를 숨긴 채 좁은 산길을 통해 운송하게 하였다.

 

●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대첩의 서막을 연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가 일어났다. 훈련대장 이범석(李範奭) 휘하 3백여명의 북로군정서 병사들은 백운평 근처를 탐색하여 직소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소는 벼랑 사이에 있는 개활지로 알려졌으나 최근 현장조사에 의하면 하나의 좁은 산길을 험준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밝혀졌다. 이러한 산길 옆 수풀은 매복작전을 펼치는 데 적합한 장소였다.

 

일본군 보병 제37연대 소속 선발대 2백여명으로 구성된 야마다 대대는 주위를 제대로 정찰하지도 않고, 일열종대로 직소의 산길에 들어섰다. 이때 갑자기 독립군의 집중사격이 시작되었고, 야마다 대대는 거의 전멸당했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23명에 불과했다.

 

백운평의 총성이 잦아들 때쯤 일본군 주력부대는 어랑촌 부근의 와록구에 정지해 있었다. 그들은 그 주변에 독립군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어 주요 길목마다 기관총(機關銃)을 설치하고, 산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인근의 수풀을 거의 불태웠는데도 독립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와록구 중앙 산등성이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선발대를 구성하여 그 방향으로 출격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이미 일본군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예비대를 와록구 중앙 산등성이에 남겨둔 채 주력군을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때 홍범도 장군은 예비대 지휘관인 허근(許瑾)에게 일본군 선발대와 교전하다가 증원부대가 나타날 기미가 보일 경우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비대가 일본군과 완강히 맞서 싸우는 동안 독립군 주력부대는 적절한 위치를 탐색하여 병력을 재배치하고 있었다.

 

홍범도의 예상대로 와록구 산등성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일본군은 증원부대를 투입했다. 이에 독립군 예비대는 명령대로 즉각 정상 측면으로 후퇴하였다. 정신없이 독립군 예비대와 싸우고 있던 일본군 선발대인 이노 대대는 산등성이를 차지하고 있는 부대가 자신들을 도우러 온 증원부대라는 것을 모른 채 계속 공격하였고, 이에 일본군끼리의 오인(誤認)전투가 벌어졌다.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우군(友軍)에 대한 사격 사고는 종종 발생한다. 더군다나 당시 독립군과 일본군의 복장은 비슷하기까지 했다. 일본군이 한창 아군끼리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홍범도의 주력부대와 산 측면으로 후퇴했던 예비대가 동시에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 선발대인 이노 대대는 졸지에 3면에서 공격을 받는 꼴이 되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홍범도 장군은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즉각 부대를 철수시켰다. 독립군은 유격전보다 결전을 택하였지만, 병력의 소모를 막기 위해 한곳에서의 전투가 종료되면 재빨리 그 지역을 이탈했다. 결과적으로 독립군은 결전을 벌이면서도 유격전의 전술방법을 차용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 두 부대는 독립군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야 서로를 알아보고 사격을 멈추었지만, 이미 4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후였다.

 

백운평 직소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의 장병들 역시 전투가 종료되자 일본의 증원군을 피해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들은 80리를 행군하여 10월 22일 새벽 2시경에 와룡구 갑산촌에 이르렀다. 이때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은 주민들로부터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병력이 30리 떨어진 천수평에서 야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김좌진 장군은 즉시 장병들을 독려하여 이범석 부대를 앞세워 날이 밝기 전에 천수평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독립군을 놓쳤다고 생각한 일본군이 보초도 세우지 않고 야영을 하고 있엇다. 독립군은 잠자고 있던 일본군 기병들에게 총격을 퍼부었고, 시마다 기병중대는 혼전 와중에 겨우 도주한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되었다.

 

그런데 독립군은 이 습격에서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되었다. 시마다 기병중대의 천막 안에서 일본군의 배치도와 작전 서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본군 총지휘부인 아즈마 지대가 천수평에서 불과 20리 거리에 있는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립군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장거리 행군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지만 다시 서둘러 어랑촌으로 향했다.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은 어랑촌에 도착하자마자 감제고지(瞰制高地)를 확보하기 위해 동북쪽의 고지를 점령했다.아즈마 지대가 북로군정서 병력의 이동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독립군 병사들이 고지 위를 선점했고, 일본군은 산 아래에서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백운평과 와록구에서 연패해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던 일본군 총지휘관 아즈마 소장(少將)은 지금까지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듯 기병 제27연대와 포병·공병 등 전력을 총동원하여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비록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이 감제고지를 확보했다고는 하나, 고지의 이점을 상쇄할 수 있는 포병부대의 공격 때문에 전투는 상당히 어려운 양상으로 흘러갔다. 전투에 임할 때마다 사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던 독립군의 피해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아즈마 소장이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포위공격을 하는 지휘관은 언제나 포위망 외부에서 가해질 수 있는 위협에 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북로군정서 장병들을 공격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위기 국면에 당면한 김좌진 장군은 병사 여러 명을 차출하여 홍범도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지시했다. 와록구에서 승리하고 서북쪽으로 향하던 홍범도 연합부대는 이 사실을 듣고 즉각 어랑촌으로 향해 일본군에 대한 공격에 가세하였다. 새벽에 시작된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는데, 양측에서 공격하는 독립군과 맞서야 했던 아즈마 지대는 결국 점점 늘어나는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후퇴하자 독립군은 이들을 추격하지 않고 바로 북쪽으로 철수했다. 홍범도 부대는 천보산에서 철수를 가로막는 일본군 수비대와 맞닥뜨렸지만 이들을 격파하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러나 어랑촌에서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연이어 이노 소좌의 지휘 아래 츠다 중대를 편성하여 추격을 시작했다.

 

얼마 후 츠다 중대는 고동하곡 근처에 천막을 치고 숙영 중이던 홍범도 부대를 발견하고 즉각 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그곳에 천막을 친 다음 불만 밝혀 놓고 주변에 은신하면서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넓은 지역에서 깜깜한 밤중에 환한 불가에 서 있는 일본군은 독립군의 좋은 사격 목표가 되었다. 홍범도의 부대가 집중사격을 시작하자 츠다 중대는 큰 피해를 입고 무질서하게 후퇴하였다. 이들은 다시 독립군 부대를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청산리대첩의 결과 남만주 일대의 독립군 세력을 소탕하려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일본군 제19사단은 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천 3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다시 한반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독립군의 명예와 운명

 

1920년대 간도에서 활약한 독립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이들은 적군의 움직임을 수월하게 읽고, 작전지역을 마음대로 선택했기 때문에 한 번의 전투를 통해서도 일본군에게 큰 손실을 입힐 수 있었다. 독립군이 일본군에 맞서 이렇게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형지물의 적절한 이용과 함께 지역 한국인 주민들의 정보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엄청난 전력의 차이가 나는 일본군을 상대로 당당한 전투를 벌인 정규군이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이후 독립군의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2만명의 중국인 마적단을 사주하여 밀산에서 독립군을 습격하게 하여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뿐만 아니라 1921년 소련 땅 자유시에서 소련군의 강제편입 시도에 맞서 저항했던 독립군들은 모두 몰살당했다. 만약 독립군이 이러한 타격을 받지 않고, 일본군에 맞서 계속 결전을 벌일 수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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