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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4.「황성신문」의 논객으로 등장 ⑴

참의부 |2013.08.27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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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씨년스러운 을사년의 풍경

 

한민족에게 1905년(을사년)은 11월 17일에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으면서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실질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치욕의 해이다. 오죽했으면 늦가을 찬비가 뿌리고 바람까지 세찬 날씨를 일러 ‘을스산하다’ ‘을씨년스럽다’라는 속어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을사년의 치욕에서 생긴 말이다.

 

단재는 을사년에 성균관을 마치고 박사직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관직에 들어갈 마음이 없었기에 성균관을 떠나 기울어가는 나라의 사회 현장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미 나약한 유생이 아니었다.

 

단재는 성균관에 들어갈 때부터 독립협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독립협회 참여는 주자학의 세례를 받은 유교 지식인에서 개화·자강의 민족독립사상을 수용한 계몽적 지식인으로의 변모·전환을 뜻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당시 개명파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엄복(嚴復)·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 등의 변법자강론(變法自彊論)을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주자학의 세계관을 벗어나 서구의 사회진화론적 계몽주의자가 되어 사회 변화에 눈뜨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은 청나라 말기에 강유위·양계초 등이 청일전쟁에서의 패전과 잇따른 열강의 중국 분할로 젊은 지식인층은 위기감과 함께 유럽의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려 했던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적인 정치·사회체제의 개혁을 부르짖게 되면서 전개되었다.

 

이들은 의회 개설, 과거제의 개혁과 서양식 학교의 설립, 산업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여, 주요 도시에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발행하는 등 계몽·선전활동을 벌였다. 강유위가 황제에게 의견을 올린 결과 양계초·담사동(譚嗣同) 등 변법파 인사들이 등용되어 그들의 주장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변법운동은 1899년 서태후(西太后)의 쿠데타로 좌절되고 강유위와 양계초 등은 해외로 망명하면서 좌절되었다.

 

중국에서는 변법자강운동이 좌절되고 말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변법자강운동은 19세기 영국 진화론의 자연도태·생존경쟁에 기초한 우승열패(優勝劣敗)·약육강식설(弱肉强食說)을 사회사상적인 측면으로 전위(傳位)·적용시킨 사회다원주의(社會多元主義)와 스펜서(Herbert Spencer)·헉슬리(Thomas Henry Huxley)의 사회진화론, 루소(Jean-Jacques Rousseau)·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등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정치 사상가들이 주장한 자연권·사회계약론·국민주권사상 등에서 부분적인 영향을 받아 정립된 사회개혁의 철학사상이었다.

 

단재의 사상과 교양은 전통적인 유학의 토대에서 세례를 받고 출발한 것이었지만, 실학파의 개신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서구의 근대사상을 대담하게 수용함으로써 뒷날 민족주의사상의 이론, 계몽사상가, 민족사학자로서 크게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의 변법자강론과 서구의 근대적인 시민사상을 함께 수용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참여의 방법으로 언론(신문)과 교육·사회단체·영웅이론·민족사학연구의 길을 택하였다. 

 

단재는 특히 양계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양계초의『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탐독하면서, 이를 통해 다윈(Charles Darwin)의《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 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스미스(Adam Smith)의『국부론(國富論)』, 몽테스키외의《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밀(John Stuart Mill)의『자유론(自由論)』등의 사상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무희 전 단국대학교 교수는 양계초와 신채호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① 역사를 통하여 애국심을 강조, ② 여성교육을 주장, ③ 민족주의로써 제국주의에 저항, ④ 남녀평등을 주장, ⑤ 신문체를 사용, ⑥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진화론을 주장, ⑦ 신소설로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을 주장, ⑧ 민족사관을 확립함, ⑨ 전기정치소설을 창작함, ⑩ 외래어를 표기함, ⑪ 노예와 사대사상을 배격함, ⑫ 주체주의를 제창함 등이었다."- 김강녕,「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66쪽 재인용, 다운샘(2003년 출판).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과 함께 다른 점도 있다.

 

양계초는 미국 각지를 돌아보고 일본에 건너간 1903년부터 개량주의적 보황(保皇)노선을 밟은 데 반하여, 단재는 미국 유학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거절하고 국수주의적 필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단재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러시아·중국으로 망명하여 온 몸을 던져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단재는 일찍부터 사회의식에 눈을 뜨고, 15세 때에 삼남일대를 폭풍우처럼 휘몰아친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외세의 침탈로 급격히 국권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역사의 현장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면서 1895년에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에 저항하여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제에 저항하였다. 1896년 2월에는 황제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발생하고, 4월에는 최초의 민간 신문『독립신문』이 서재필(徐載弼)에 의해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이 형식은 민간 신문이나 대한제국 정부의 개화정책에 따라 창간되고 비용도 정부 예산에서 지출되었다. 그러나 이 신문의 역할은 지대하였고, 단재는 정신적·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1896년 7월에는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 외국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인 30여명이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며 설립하였다.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안경수 등 정부 대신들도 참가하였다.

 

독립협회는 정치운동으로 옮겨서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고,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는 한편『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민중의 자주의식을 높이고 개화사상을 고취하였다.

 

1898년에는 종로에서 최초의 민중대회라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정의 자주노선을 요구하는「헌의 6조(獻議六條)」를 결의하고, 이의 실행을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헌의 6조」는 만민공동회에서 결의한 6개조의 개혁안으로서 △외국의존 탈피 △언론·집회 자유 보장 △외국의 의회를 모방한 민회(民會) 설치 등이었다. 처음에는 고종도 6조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의 방해로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협회에서는 맹렬히 정부를 비판하면서 충돌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정부 수뇌들은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거짓을 고하여 이상재 등 17명의 협회 간부를 체포하였다.

 

단재는 독립협회가 1898년 10월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통하여 자강개혁 내각의 의회개설운동을 추진하던 무렵에 참여하여 일반 회원의 부서 담당 중 내무부 문서부 서기 및 과장·부장급에서 활동한 것으로「독립협회연혁략(獨立協會沿革略)」은 전한다.

 

단재는 이때까지는 아직 독립협회의 간부진에는 끼지 못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일반 회원들의 참여로 민중투쟁을 전개할 때 소장파의 한 사람으로 일반 회원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만민공동회가「헌의 6조」를 가결하고 정부에 이의 실천을 요구하며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때 단재도 여기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인 열성을 보였다.

 

만민공동회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수구파 관료와 황제는 기습적으로 서울에서 4백여명의 회원을 구속하는 등 탄압으로 나왔다. 단재도 이때 체포되어 투옥되었지만, 얼마 동안 투옥생활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긴 기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정부는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국왕이 황제 칭호를 쓰면서 중국과의 전통적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이 된 것을 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칭제건원(稱帝建元)이나 자주독립선언은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보다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 단계 작업으로 우선 대청(對淸)종속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하는 배경에서 진행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늑대를 피하려다가 승냥이를 만난 격이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8년 독립협회를 비롯한 민간단체를 강제로 해산시킨 한편 독립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보부상들을 모아 황국협회를 조직하였다.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세울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벽서를 붙여서 정부가 독립협회를 탄압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다. 1898년 11월에는 정부의 사주를 받은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고 12월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이런 와중에서 1898년과 1899년 사이에는 동학의 남은 세력이 영학당(英學黨)을 조직하여 전라도 흥덕군에서 봉기하고, 1900년에는 활빈당(活貧黨)이 충청·전라·경상·강원·경기 지역에서 ‘척왜척양(斥倭斥洋)’,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궐기하였다.

 

1901년 제주에서는 이재수(李在守)의 반란이 일어났다. 모두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지만 국정이 크게 문란하고 소연해졌다.

 

이와 같은 틈새에서 한국 침략의 흉계를 꾸준히 진척시켜온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를 체결하면서 한국에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일한의정서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의 제1단계로서 한국 정부가 1904년 1월 23일 ‘대외중립’을 선언했는데도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6개항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는 제3국과 일체의 협정을 맺지 못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국내의 친일세력은 더욱 활개를 치고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유학주(兪鶴柱) 등이 이끄는 일진회(一進會)가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자체 방위력도 없고 국민의 신뢰도 잃은 대한제국 정부는 서서히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조정 대신들은 대부분이 친일파로 바뀌거나 친일화로 변신하였다.

 

열강의 이권 침탈은 하루가 다르게 우리 민족의 자원과 재산을 빼앗아갔다. 병든 암소 한마리를 놓고 승냥이와 늑대 무리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형국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제는 일한의정서를 체결하여 한국에서 우월적인 위치를 확보한 것을 계기로 1904년 6월에는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를 통해 전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였다. 노골적인 영토 강탈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대해 민심이 들끓고 유생들의 황무지 개간 요구에 대한 반대 상소가 이어졌다.

 

단재는 성균관에서 일본의 침략 야욕을 지켜보면서 조소앙을 비롯한 유생들과 함께「반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일제의 침략 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상소하고 황무지 개간에 동의한 이하영(李夏榮)·현영운(玄暎運) 등 조정 대신의 매국 행위를 통렬히 규탄하였다. 단재의 대사회 첫 작품인「반일성토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1905년이 밝으면서 서울과 경기 지역의 치안경찰권을 일본 헌병대가 장악하고 ‘화폐조례’를 공포하여 일본 제1은행권을 본위 화폐로 삼아 한국 유통을 무제한 허용하였다. 한국의 경제권마저 일제가 장악한 것이다. 일본과 통신 기관 위탁에 관한 협정서가 조인되어 전신·전화·우편 사업을 일본에 위임하여 통신권도 박탈되었다.

 

영국 주재 공사 이한응(李漢應)이 국가의 주권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함을 비관하여 자살하고 황제의 밀사로 이승만과 윤병구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하여 한국 독립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일제의 한국 병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립되어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한국에서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강대국끼리 약소국을 밀약으로 주고받은 야만의 흥정이 거래된 것이다.

 

망국으로 기울고 있는 격동기에 단재는 장지연의 초청으로『황성신문』에 입사하여 반일논객으로서 첫 발을 딛는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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