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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5.애국계몽운동과 반일언론의 선봉장 ⑵

참의부 |2013.08.29 21:03
조회 117 |추천 0

●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 사회운동 참여

 

단재는『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논설을 쓰는 한편 여러 분야의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점이어서 각종 우국단체가 생기고 계몽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재는 1906년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조성환(曺成煥)·노백린(盧伯麟)·이회영(李會榮) 등이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할 때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신민회 산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창립 취지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1907년 2월에는 경북 대구에서 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 등 16명이 국채보상운동을 선언하고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었다. 국채보상운동은『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만세보』등 민족진영 신문에서 보도하고 적극 참여하면서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이후 4월말까지 보상금을 낸 사람은 4만명, 보상금 총액은 5월까지 2백 30만원에 달했다. 이 운동에는 특히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여 금은패물을 모아 보상금으로 냈으며, 당시 사회의 최하류 계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를 조직하여 의연금을 모금했다.

 

일제는 1904년 고문정치를 실시한 아래 한국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 경제에 예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 본토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왔다. 도입된 차관으로는 경찰기구의 확장과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복지시설의 확충에 투입하는 등 통감부가 제멋대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외채가 엄청나게 불어나는 바람에 정부 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더욱 심하게 대한제국 정부를 농락하여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외채를 갚지 않고는 나라의 주권을 지킬 수 없다는 자각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적 지지를 받아 성공적으로 추진되어가자 통감부는 탄압으로 나오고 어용단체 일진회를 동원하여 방해 공작을 벌였다. 단제는 한때 스스로 단연(斷煙)을 결행하고『대한매일신보』에 여러 차례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한 논설을 쓰고, 스스로도 성금을 냈다. 단재는 이 운동이 실패한 후에는 골초가 되어 더 많은 담배를 피웠다.

 

서울에서는 양기탁과 윤웅렬이 이 운동을 주도하면서『대한매일신보』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통감부는『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의 횡령이라는 근거 없는 혐의를 둘러씌우고 1908년 8월에 그를 구속하였다. 양기탁은 그 해 9월에 최종 재판 끝에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중도에 된서리를 맞고 점차 퇴조하게 되었다.

 

단재는『대한매일신보』를 무대로 많은 논설을 쓰는 한편 1908년 1월부터 휴간중이던 순국문 잡지『가정잡지(家庭雜誌)』를 속간하여 여성들의 계몽운동에 힘썼다. 한문 폐지론을 주장했던 단재가 순국문 잡지의 편집과 발행을 책임 맡은 것은, 그의 진보적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시점에 여성지를 발행하고 여성계몽에 앞장 선 것은 단재만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당시 개신유학자나 자강유학자 중에서도 단재와 같이 직접 여성잡지를 발행하면서 여성권익 옹호에 나선 이는 거의 없었다. 단지 장지연이『여성독본』을 집필하였을 뿐이다. 단재는 밤을 새워 글을 쓰고 낮을 지새워 애국계몽운동을 했지만 가정이나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단재는『가정잡지』1월호에「못 먹을 음식」이라는 제목으로 술에 관한 글을 썼는데, 변영로(卞榮魯)는 자신의『수주수상록(樹州隨想錄)』에서 다음과 같이 단재와 관련한 삽화 한 토막을 적고 있다.

 

"오활(汚闊)하고 불규칙하기 짝이 없는 단재인지라 목욕 또한 부지런히 할 리 없는데, 하루는 친구에게 끌려가서 목욕탕에 갔다. 옷을 벗을 때 보니 그가 진홍색 내의를 입고 있어 같이 간 친구가 기가 막혀 “신 선생! 이게 가다가 무슨 변괴시오? 그것은 남자의 내의가 아닐 뿐더러 더군다나…”하고 말을 잇지 못하니 “내가 이런저런 알 길이 있겠소? 일전에 어느 점포를 지나가다 보니 하도 빛깔이 고와서…” 하고 무심히 대답하였다."- 변영로,「광휘의 인 단재」,『수주수상록』.

 

이 무렵 단재는 활동 영역이 광범위하고 다양하였다. 대한협회(大韓協會)에도 참여하고 여기서 발행하는『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에 글을 썼다. 대한협회는 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계몽운동단체로서 일제의 통감부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해산하자 권동진(權東鎭)·남궁억(南宮檍)·장지연(張志淵)·오세창(吳世昌)·윤효정(尹孝定) 등이 국력배양을 위한 교육·산업의 발달을 내세우고 창립하였다. 한때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아 전국에 70여 개소의 지회를 두고 수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기관지『대한협회월보』는 남궁억·이윤영(李允榮)과 단재 등이 필진으로 참여하여 애국사상과 국권회복을 주창하는 논설을 실었다. 단재는『대한협회월보』에「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성력(誠力)과 공업(功業)」등의 논설을 발표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대한협회는 통감부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심해가면서 합법적 운동으로서의 한계가 드러나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일진회와 연합하는 등 지도층의 일부가 변절하였다. 단재는 마침내 이 단체와의 관계를 끊고 기고도 중단하였다.

 

단재는 애국계몽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던 학회(學會)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학회 중에서 대표적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의 참여가 그것이다.

 

기호흥학회는 1908년 1월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기호 지방에 설립된 애국계몽단체이다. 이용직(李容稙)·지석영(池錫永)·이상재(李商在)·유근(柳瑾)·안종화(安鍾和) 등 105명이 모여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을 진흥시키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주창하였다. 단재의 기본 정신은 기호적이 아니고 국가적이어야 하여 지방적 분열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이 아니라 교육적인 운동임도 아울러 밝혔다.

 

회보로『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를 통권 12호까지 발간하였으나 통감부에 의해 그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몇 차례 압수되는 수난을 겪었다. 단재는 여기에「기호흥학회는 하유(何由)로 기(起)하였는가?」,「문법을 의(宜) 통일」등의 논설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안재홍(安在鴻)은 1936년 단재의 옥사 소식을 전해 듣고, “단재는 우리나라 봉건 말기에 시민적 민족주의와 국민주의의 가장 총명하고 예민한 양심이요 개척자”였다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구한말의 지도자로서 또는 그의 지속적 노력자로서 종시(終始)한 관(觀)이 있고, 그 사상·학식에 관하여서도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주의 시대의 말기적인 도정(道程)에서 자본적인 민족사상 또는 국민주의의 발흥하는 시대에 걸치어 가장 총명하고 예민한 양심으로서 그 개척자적 임무를 다했던 분이다. (중략)

 

단재가 신흥 국민주의적 또는 민족사상적 선구로서 그 계몽적 내지 혁신적인 사조를 다분으로 고취 선양한 공적은 비록 그 과정적 형태임에 불계(不計)하고 그는 역사적으로 확실히 위대한 한몫을 본 것이다. 그는 개국진취의, 즉 자본주의적 국가사상의 섭취 및 수립의 시기에 있어 응분의 당위적인 의식상 공작을 하였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던 데 돌아보아, 다음의 시기 즉 목하 당면인 제2의 역사적 단계에서 얼마만큼이나 정치문화적 저력으로 나타남을 봄에 의하여 그 가치를 신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안재홍,「조선사학의 연구자」,『동광(東光)』1936년 4월.

 

● 역사 전기물 저술, 애국심 고취

 

단재가『대한매일신보』시절에 벌인 활동은 실로 눈부실 정도로 다양하였다. 언론, 학술단체, 사회운동에 이어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자강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해외 역사 서적을 번역하고 한국 사상의 영웅전을 직접 저술하였다.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은 중국에서 양계초(梁啓超)가 지은 것을 1907년 10월 단재가 번역하여 장지연의 서문과 교열로 서울의 광학서포(廣學書舖)에서 발행하였다.

 

이 책은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쟁취한 세 영웅 마치니(Giuseppe Mazzini),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카보우르(Camillo Benso conte di Cavour)를 소개하여 자주적인 민족혼을 불러일으켜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배양하고자 한 내용이다.

 

그리고 한민족이 유교문화에 젖어 문약에 빠진 것을 한탄하여 용감한 무웅(武雄)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을 한국 역사의 3걸(三傑)로 인정하고 그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역시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뜻이었다.

 

단재의『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은 1908년 5월에 도산 안창호의 추천 서문을 받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한민족의 대외항쟁에서 크게 전공을 세워 국가를 지켜 낸 영웅의 기상을 살려서 새로운 국난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무장투쟁을 고취하였다.

 

"…그런고로 나의 권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칼과 피로서 그 권리를 보호할 따름이요, 나의 권리가 이미 덜어지거든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찾아올 따름이며, 설혹 형극 속에 비참한 일을 당하여 회계에 부끄러움을 잠시도 참지 못할 경우를 당하면 마땅히 날마다 섶에서 자고 때때로 쓸개를 맛보아 칼과 피로 전국 인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하거늘…"-「을지문덕전」,『단재 신채호 전집』, 별집, 별항, 14~15쪽.

 

단재의 구국영웅상의 저작 활동은 이어졌다. 1908년 5월 2일부터 8월 18일까지『대한매일신보』에「수군 제1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을 연재하고, 이 무렵에「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을 간행하였다.「수군 제1위인 이순신전」은 연재 후 저술 신채호, 교열 변영만, 발행 김상만의 이름으로 휘문관에서『성웅 이순신』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고 정가는 30전이었다.

 

영웅전기류는 단재만의 집념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장지연의『애국부인전(愛國夫人傳)』(1908년), 우기선(禹基善)의『강감찬전(姜邯贊傳)』(1908년), 박은식(朴殷植)의『연개소문전(淵蓋蘇文傳)』(1909년) 등은 우리 역사속의 영웅담을 현실에 부각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노고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단재가 영웅의 역할을 중요시하고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였다고 해서 몇 사람 영웅의 힘만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과거의 영웅과 미래의 영웅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과거의 영웅은 무인일 뿐이었다. 근래의 영웅은 무인뿐만 아니라 종교가, 정치인, 실업가, 문학인, 철학자, 미술인 등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단재는「20세기 신동국지영웅」에서, “구국민은 국민이 아니며 구영웅은 영웅이 아니다”고 말하고 신영웅은 국민적 영웅으로서 국민적 종교, 국민적 학술, 국민적 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였다. 신영웅은 국민 전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을 말하며, 또 국민 전체가 영웅이 되어야 진정한 외경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단재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 잡고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웅이 나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오호라, 국민적 영웅이 있어야 국민적 종교가 될지며, 국민적 영웅이 있어야 학술이 국민적 학술이 될지며, 국민적 영웅이 있어야 실업이 국민적 실업이 될지며, 미술가가 국민적 미술가가 될지오, 종교, 학술, 실업가, 미술가 등이 국민적 종교, 국민적 학술, 국민적 실업가, 국민적 미술가가 된 연후에야, 동국이 동국인의 동국이 될지니, 국민의 부름이여 영웅을 부름이여."-「20세기 신동국지영웅」,『대한매일신보』, 1909.8.17.~ 20.

 

단재는 영웅사관의 본질을 일국의 흥망이 한두 사람의 영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실력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공(諸公)은 혹 하처 초근석굴에서 일개 영웅이 산출하여 차국(此國) 산하를 정돈할 줄로 신(信)하는가? 고대에는 일국의 원동력이 항상 1, 2 호걸에 재(在)하고 국민은 그 지휘를 수(隨)하여 좌우할 뿐이려니, 금일에 지(至)하여서는 일국의 흥망은 국민 전체 실력에 재하고 1, 2 호걸에 부재(不在)할 뿐더러……."-「소회 일폭(一幅)으로 보고(普告) 동포」,『개정전집』下, 93쪽.

 

단재의 영웅관은 민주주의적 영웅관, 즉 국민공화사상과 마찰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단재의 시대에 앞서가는 역사의식을 보게 된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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