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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6.서간도에서 고대사 연구와 고구려 유적 답사 ⑴

참의부 |2013.09.01 13:30
조회 63 |추천 0

● 윤세복 형제 초청으로 서간도에

 

“집안현(集安縣)의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金富軾)의 고려사(高麗史)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 (신채호)

 

만주(滿州),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국의 변방사(邊方史)로 왜곡하면서 만주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꽤 높아져 가고 있다. 만주는 고구려와 발해가 동북아시아의 최강호로 천하를 호령하던 본거지다. 그 이전에는 단군조선과 부여 등 한민족의 원형과 뿌리가 형성된 지역이었다. 그야말로 한민족의 고토(古土)이고 정신적 본향(本鄕)이기도 하다.

 

근대 역사학자 중에서 만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온 이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맨 첫 자리를 차지한다. 단재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크게 자극을 받고 한국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어『동사강목(東史綱目)』과『동국통감(東國通鑑)』등을 읽기 시작하였다.『동국통감』은 1484년 서거정(徐居正)·양성지(梁誠之)·정효항(鄭孝恒) 등이 편찬한 사서(史書)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고려 공양왕(恭讓王)에 이르기까지 1400년 동안의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동사강목』보다 3백여년 전에 발간되었다.

 

단재는 언론계와 애국계몽운동 단체에 종사하면서 국제열강이 만주 문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을 보고『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에 몇 차례 논설을 썼다.「한국과 만주」·「만주 문제에 취(就)하여 재론함」·「만주와 일본」등이다.

 

단재는 이들 논설에서 첫째, 한국과 만주는 역사적으로 공동운명체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둘째,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러일전쟁(露日戰爭) 이후 만주를 둘러싸고 대립한 미국을 주축으로 한 구미열강의 대일정책을 논하고 셋째, 만주의 고대사·중세사·근대사를 약술하였다.

 

단재는 역사적으로 한만관계(韓萬關係)를 재정리하여 세계사 속에서 만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늘날(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위급한 처지에 놓인 만주를 구출할 인물이 한국에서 배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은 사상이 고상하고, 국수(國粹)의 보전, 정치 능력의 양성이 요구된다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단재는 한국과 만주와의 밀접한 관계를 공동운명으로 보았다. 즉 한만관계사(韓萬關係史)를 살펴볼 때에, 만주를 한민족이 얻게 되었을 때 한민족이 강성하게 되었으며, 그 반면에 만주를 타민족이 지배하게 되었을 때에는 한민족은 약화되어 물러나게 되었으며, 만주를 타민족 중에서도 북방민족이 지배하였을 때에는 한민족은 북방민족의 지배권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게 되면 한국은 일본의 지배권내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또한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게 된다면 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권내에 들어갈 것이고 장차 미국이 일본과의 대립에서 승리하여 만주를 지배하게 된다면 한국은 미국의 지배권내에 들어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한국과 만주」,『개정전집』별집 234쪽, 박영석,『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 291~292쪽.

 

단재는 병탄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만주 문제를 훤히 궤뚫고 있었다. “만주에는 3, 4천년을 전후하여 원래 부여족(扶餘族), 숙신족(肅愼族), 선비족(鮮卑族) 등이 살고 있었는데 부여족이 흥기하면서 만주의 패권을 잡아 타족들을 그 지배하여 넣고 광개한 영토를 개척하여 고구려(高句麗)라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단군(檀君), 태조왕(太祖王) 광개토왕(廣開土王),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등이 배출되었다”는 글에서는, 오늘날 중국 당국이 주장하는 ‘고구려의 중국 변방사론’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한국 역사학계가 단재의 고대사관만 제대로 연구하고 고증에 충실해왔다면 감히 중국이 요즘과 같이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의 망설을 들고 나오지는 못하였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단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과 1백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진정한 사가(史家)의 진면목을 보인다.

 

단재는 1914년 윤세이(尹世伊)·윤세복(尹世復) 형제의 초청으로 서간도의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 홍도천(紅島天)으로 이주하였다. 단오날 윤세이 등 동지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어 시작(詩作)을 즐기기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해 봄에 만주로 이주한 것 같다. ‘이주’란 표현을 썼지만, 나라 잃은 망국민으로 국적도 호적도 없이 이역에서 떠도는 처지이니, ‘유랑’이란 표현도 무방할 것이다.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되면서 신민회(新民會) 회원 중심의 민족운동가들은 1910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자 우선 이곳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여섯 형제와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김창환(金昌煥)·주진수(朱鎭守) 등이 적극 추진하여 설립한 경학사는 학교를 세워 기간장교를 육성하여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기로 하였다.

 

경학사에 이어 1912년 봄에는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서 경학사의 정신을 이은 부민단(扶民團)이 결성되어 한국인사회의 계몽과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10년대 초에 블라디보스토크나 상해에 비해 만주는 여전히 항일독립운동의 열기가 뜨겁게 치솟고 있었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한 데 이어 1911년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조선과 남만주를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를 준공하였다.

 

이 해에 서일(徐一)이 만주에서 결성된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이끌고 일제와 싸우고 있었다. 중광단은 두만강을 건너온 구한말 의병들을 모아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초기에는 무기와 장비가 부족하여 군사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으나 단장인 서일을 비롯해 중요 간부가 대종교(大倧敎) 교도로서 한국인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높이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중광단은 1918년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주도하고 1919년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 고대사 인식과 민족사관 형성의 현장

 

“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적을 일일이 실지 답사하여, 문헌의 부족을 깁고, 착오를 바로잡아야 하리니, 조선사 연구자들은 오늘부터 이 광막한 역사의 처녀지를 개척함에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신채호)

 

단재가 서간도에서 머문 1년여 동안은 고대사의 인식과 현장 답사를 통해 대고구려 정신을 일깨우는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다. 국내에 있을 때 이미 고대사와 고구려 역사, 우리 고토에 대한 수준 높은 연구를 해온 그에게 고대사의 현장은 연구와 자료 수집에서 보물창고나 다름이 없었다.

 

환인현 홍도천에는 윤세복 등이 세운 동창학교(東昌學校)가 있었다. 단재는 이 학교에서 교포 청년들에게 국사를 가르치고, 교재로「조선사」를 집필하여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조선사」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단재를 이곳으로 초청한 윤세복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고 이듬해 가산 수천석을 절이하여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사재를 들여서 환인현(桓仁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선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 무송현(撫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당벽진(密山當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대종학원(大宗學園)을 설립하여 5년 동안 교육사업에 힘썼다.

 

또 1916년에는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천여명의 교인들을 새로이 모으고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에 윤세복이 대종교의 제3대 교주에 취임하면서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다시피 하였다.

 

단재는 윤세복 형제의 도움으로 환인현에 지내면서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신백우(申伯雨)와 김사(金思)·이길용(李吉龍) 등과 만나게 되어 이들과 시회도 열고, 윤세복 형제도 함께하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고토인 남·북만주 일대의 유적과 민족의 영지 백두산을 두루 답사하였다.

 

남·북만주 일대와 백두산 답사는 단재에게 일대 ‘사건’이었다. 오래전부터 꿈꾸던 민족의 발원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민족사의 회복을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한국 고대사의 생생한 자료를 얻기 위해 남·북만주에 흩어진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직접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되니, 이때 그는 역사연구자로서 큰 감격과 발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백두산에 올랐을 때 조국광복이란 민족적 염원을 기원했다면, 만주 지역의 고구려 유적, 예컨대 집안현의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와 왕릉의 거대한 규모를 보고는 한민족이 웅비하던 고대적 세계의 위대했던 영광을 피부로 생생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의 답사 체험과 탁월한 역사의식과 현실 감각을 역사상으로서 실증화하는 데 결정적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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