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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6.서간도에서 고대사 연구와 고구려 유적 답사 ⑵

참의부 |2013.09.02 15:41
조회 92 |추천 0

● 능묘와 비, 육측으로 기록하고

 

단재는 고구려 중흥의 영주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을 찾았을 때 관측할 기구가 없어서 자신의 팔로써 능묘(陵墓)의 둘레와 비(碑)의 길이, 넓이를 재어서 몇 발 몇 뼘이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정확한 관찰력을 엿볼 수 있다. 단재의 기록을 직접 살펴보자.

 

"1차 4, 5의 우인(友人)과 동행하여 압록강상(鴨綠江上)의 집안현(集安縣), 곧 제2 환도성(丸都城)을 폐람(嬖覽)함이 나의 일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노자(路資) 단핍(短乏)으로 능묘가 모두 몇인가 세이어 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장 내외라는 억단을 하였을 뿐이다.

 

촌인(村人)이 줏은 죽엽(竹葉) 그린 금척(金尺)과 해지(該地) 주거하는 일인(日人)이 박아 파는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을 가격만을 물어보았으며, 잔파(殘破)한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유존(遺存)한 8층 석탑 4면 방형(方形)의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과 그 우변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모본하여 사진을 대(代)하며, 그 왕릉의 광(廣)과 고(高)를 발로 밟아 신체로 견주어 측척을 대하였을 뿐이다(높이 10장 가량이요, 하층의 주위는 80발이니, 그 하층의 주위는 대개 광개토왕의 능과 동일).

 

왕릉의 상층에 올라가, 석주(石柱)의 섰던 자취와 기와의 남은 파편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송백을 보고,『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금은 재화, 진어항문(盡於厚葬), 적석위봉(積石爲封), 역종송백(亦種松柏)”이라 한 간단에 과(過)한 문구를 비로소 충분한 해석을 얻고, “수백 원이 있으면 묘 한장을 파 볼 것이요, 수천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 사진을 보리라”하는 몽(夢)만 하였다."- 신채호,「조선상고사」총론,『개정전집』上 49쪽.

 

이 글에서 단재의 궁핍했던 생활 형편과 고구려 유적에 대한 애착심을 새삼 살피게 한다. 만주와 백두산을 답사하고 돌아온 단재는 더욱 뜨거운 열정과 눈물겨운 노력으로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다음의 글은 이 무렵 단재의 열정을 정리하고 있다.

 

"민족사에 대한 신채호의 투철한 사명감과 탐구열은 마침내 퇴영적인 역사의식과 중세적·존화적·사대주의적 유교사관을 극복하려 했고, 주체적인 역사인식과 편사체계 아래 근대적인 민족주의 사관의 수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신채호가 강조한 고구려 중심의 사관은, 봉건적인 왕조 시대의 고질화했다시피 된 중국 중심의 화이관, 곧 중세적 유교사관의 사대주의적 교설을 극복·지양함과 동시에 사실(史實)의 실증·발굴을 통한 자주적이고도 근대적인 민족주의 사관을 수립하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임을 보여준다."- 최홍규,『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 127쪽.

 

백두산을 다녀온 단재는 동행하였던 신백우와 김사에게「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이란 한시(漢詩)를 써 주었다. 아래 시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번역하였다.

 

〃인생 40년 지리도 하다

병과 가난 잠시도 안 떨어지네

한스럽다 산도 물도 다한 곳에서

내 뜻대로 노래 통곡 그도 어렵네.〃

 

단재는 이 무렵에 또 다른 시 한편을 남겼다. 번역 역시 노산이 했다.

 

〃남북으로 오가며 세월만 가네

와도 그러려니 가도 그렇네

세상만사 제 뜻대로 결단해야지

남 따라 다니는 것 가장 가엾네.〃

 

● 중국인들 손에 훼손되는 유물·유적에 통탄

 

만주에서 지낼 때에도 떠나지 않은 ‘병과 가난’은 망명객 단재에게 종신토록 따라붙는 질곡이었다. 이는 독립운동 전선에 나선 망명객 대부분이 겪은 공통점이었지만 단재의 경우에는 건강에 따른 고통까지 겹쳐 더욱 심하였다. 그는 이같은 질곡에도 굽히지 않고 한민족사의 영광인 대고구려사(大高句麗史)의 부활에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철준 서울대학교 석좌교수의 주장은 정곡을 찌른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나 고구려 왕릉의 거대한 모습을 볼 때, 그리고 만주 어느 지역의 유적에서도 그때까지 뿌리박고 내려오는 고구려 관련 전설을 들을 적에, 거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문화의 성격과 체질이 조선왕조 말기의 기질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잘 나타나고 있다. 단재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의 고대적인 체질을 추구하는 것이 곧 한국 고대사의 연구 과정이었고, 또 이조(李朝)적 체질을 극복하는 근대정신의 확립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때의 역사를 민족운동의 교설적인 성격의 것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좀 더 학문적인 체계를 가진 것으로 좀 더 근대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을 통감한 것 같다.〃

 

단재는 우리 민족사의 발원지를 답사하면서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특히 김부식이 우물안 개구리처럼 광대한 대륙의 공간을 망각하고 신라 중심사로『삼국사기』를 편술한 것을 개탄해마지 않았다. 그래서 “집안현을 한 번 돌아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설파하였다. 다음은 단재의 목소리다.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일일지간(一日之間), 그 외부에 대한 조천(組淺)한 관찰만이지만, 고구려의 조교·예술·경제력 등의 여하가 안전에 활현(活現)하여 “당지에 집안현의 일람(一覽)이 김부식의 고려사를 만독(萬讀)함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리었다. 후래에 항주(抗州) 도서관에서 아방(我邦)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支那人)이 간행한『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사조와 속상(俗尙)에 참고될 것이 많으며, 한성 일(日) 우인(友人)이 보낸 총독부 발행에 계(係)한『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여하나 주해(註解)의 견강한 기부분을 제하면, 또한 우리 고사(古史) 연구에 보조될 것이 많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서생배(寒書生輩)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한 사료임을 자각하겠다."- 신채호,「조선상고사」,『개정전집』上 49쪽.

 

단재가 고조선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실지답사한 것은 역사 연구의 고증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역사 연구에서 실지답사의 중요성을 지적하여 “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적(史蹟)을 일일이 실지답사하여 문헌의 부족을 깁고, 착오를 바로잡아야”한다고 하였다.

 

단재의 역사 연구가 유적답사와 문헌의 비교 고찰에 의한 확고한 실증 위에 기초한 것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게다가 그 유리·방랑의 반생을 대개 고조선 발상의 유허(遺墟)와 전벌(戰伐)의 고지(故地)와 천종왕래(遷從往來)의 황성(荒城)에서 보내니 만큼, 이르는 곳마다 도적(圖籍)을 가지고 혹 산천을 묻기도 하고, 혹 습속을 살피어 고사(古史)와 비교도 하고 혹 금석의 단훼(斷毁)한 잔편(殘片)과 초지의 준몰한 여흔(餘痕)을 찾아다니면서 궁수(窮搜) 또 광채(廣菜)하여 이에 조고비금(早古悲今)의 감격을 증회(增恢)함을 고사하고 전인미발(前人未發)의 사료를 얻은 것이 점점 쌓일 뿐더러, 이왕 홀로서 고견(孤見)을 품고도 그 연부(然否)를 처정치 못하던 것이 목도신경(目覩身經)하는 가운데 드디어 확립함을 보고는 스스로 환희를 느끼기도 하였을 것이다."

 

단재의 고대사 연구를 두고 일부에서는 ‘실증(實證)’이 없다는 비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신용하 교수는 “그(단재)의 고구려·발해 유적지 답사에서 얻은 ‘실증’만으로도 섣부른 문헌 고증보다 더 견고한 실증 위에 그의 역사 연구가 서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그의 저서가 형식상 각주를 달고 있지 않을 뿐이지 그의 역사 연구는 문헌과 유적답사에 의한 실증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단재가 환인현(桓仁縣)에 체류한 기간은 1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은 안재홍(安在鴻)의 지적대로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안재홍은 이 무렵 단재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혹은 남·북만주 혹은 시베리아 하며, 사시랑이 생애가 정주(定住)를 모를 명도(命途)였다. 혹 해삼위의 한교(韓僑)와 함께 석판으로 보관(報館)도 경영도 하고, 혹 유랑의 투사와 신끈을 들메어 동구의 폐허 대고구려의 황성(皇城)에서 고왕(古王)들의 능묘비갈을 더듬기도 하였으나 빈곤은 그림자처럼 따르고 세사(世事)는 가시덤불처럼 거칠어만 가는 아프고 한 많은 지속이었다."

 

후일 단재는 간도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민족의 손에 인멸되어 가는 유적, 유물을 다음과 같이 아쉬워하였다.

 

“내가 아령(俄領) 방면과 만주 방면에 있었을 때에는 우리의 사적을 찾기에 거의 전력을 다하다시피 하였는데, 여간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자랑이 되는 훌륭한 것도 많았는데, 저 무지한 중국인들의 손에서 자꾸자꾸 없어져 가고 맙니다. 이를 생각하면 과연 통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재는 간도 생활을 접으면서『조선사』저술에 착수하였다.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저술에 필요한 자료 수집과 참고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극로(李克魯)는「서간도 시대의 단재 선생」이란 글에서 이 무렵 단재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강직한 사필(史筆) - 역사가로서 신채호는 재사로서 신채호보다 이름이 더 높이 난 것이 사실이다. 그의 필봉이 향하는 자리에는 정사(正邪)가 절로 밝혀진다. 조선 역사의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생은 늘 애를 썼다. 역사담(歷史談)만 하게 되면『삼국사기』저자 김부식의 죄악을 통론한다. 천추에 용서하지 못할 것은 고려(高麗) 인종(仁宗)으로 하여금 원(元)·금(金)을 멸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면 36국이 내조(來朝)한다고 부르짖던 국수주의자 승(僧) 묘청(妙淸)의 반란을 김부식이 대원수가 되어서 토평(討平)하고 사대주의를 주장한 일이다."

 

단재의 고구려 고토 만주에 대한 인식은 남달랐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과거 우리 민족의 영토였고 활동무대였던 만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박영석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단재는…만주를 포함한 한국 고대사를 종래의 사가들처럼 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 또는 단군·기자·삼한·신라로 체계화하지 않고 단군-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단재의 만주에 대한 주권의식과 영토 회복 의식이 작용한 것 같으며,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나 을지문덕(乙支文德) 등이 만주에서 배출되었다고 열거한 것을 보면 그의 자강의식과 영웅사관도 함께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만관계사(韓滿關係史)를 역사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단재는 만주가 한반도와 공동운명체였음을 인식하여, 장차 만주가 국제정치상 어떻게 처리되며, 만주가 어느 나라의 세력권 내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 즉 만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미국 등 열강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장차 한국의 운명을 전망하려고 하였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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