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계가 적으나 속기가 없어 좋은 분
홍명희(洪命熹)는 북경 시대에 단재의 개성을 회상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북경서 달포 동안 단재와 교류하는 중에 비로소 그의 인물을 잘 알았습니다. 단재가 의논(議論)에 억양(抑揚)하고 행동에 교계(較計)가 적으나, 억양이 과한데 정열이 있어 좋고, 교계가 적은데 속기(俗氣)가 없어 좋았습니다. 단재가 고집 세고 괴벽스럽다고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단재의 인물을 잘 알면 고집이 맘에 거슬리지 않고 괴벽(乖僻)이 눈에 거칠지 않을 것입니다."- 홍명희,「상해 시대의 단재」,『개정전집』下, 474쪽~475쪽.
북경 시대에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단재를 만나보고 적지 않은 회상기를 남겼다. 원세훈(元世勳)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단재는 고집불통이지만 일에 대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은 확유(確有)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단재는 참으로 선견의 명(明)이 유(有)한 까닭에 그 주장을 고집하였을지언정 사리에는 능통(能通)이었다. 불통(不通)이라면 단재의 고집을 이해치 못하고 임시적 변통에 능한 체하면서 원대한 우려가 무(無)하였던 분들이 도리어 불통일 것이다"- 원세훈,「단재 신채호」,『개정전집』별집, 392쪽.
원세훈은 이 글에서 북경 시대 단재의『중화보(中華報)』에 얽힌 사연 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생에서 돈의 학대와 박정을 당하였지만 그는 돈에 대하여 추호도 크게 굴하지 아니하였다. 글 읽는 사람의 매문(賣文) 생활은 농부의 곡물 방매와 여(如)하다고도 할 것이다. 단재도 일찍 북경에서 중국 모 신문사에 논문을 써서 보내고 그 논문으로 인하여 그 신문의 발행 부수가 4000부~5000부나 증가되어짐을 따라서 윤필료 다시 말하면 원고료가 예외로 특별히 후하였다.
다른 신문사에서도 그의 논문을 후한 원고료로 하였지만 그가 불허할 뿐 아니라 그 쓰던 신문에도 글 몇자를 고쳤다는 것을 잘못이라 하여 다시 투고치 아니하고 생활의 고초를 감수하였다."- 원세훈,「단재 신채호」,『개정전집』별집, 395쪽.
단재의 어려운 생활상은 새삼 필설로 재론함이 무용한 일이지만 생활이 매우 곤궁하여 굶는 날이 많았으면서도 금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한 제자가 그 참상을 걱정하여 단재의 방석 밑에다 10원 또는 30원씩 묻어두고 갔다. 단재는 자기가 앉은 자리 밑에 돈이 있는 줄도 모르고 굶기도 한 것을 변영만이 방문하여 “방을 돼지우리처럼 두는가?” 하고 나무라면서 방 소재를 시작하다가 자리 맡에서 돈을 발견하고는 “나는 돈이 다 떨어진 줄 알았더니 아직 남았군!” 하면서 그것을 자기가 남겨놓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변영만(卞榮晩)의 회상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북경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때에 그의 양미(糧米) 있는 날은 손가락을 꼽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황해도 학생 우응규(禹應奎)란 청년을 이따금 그의 석저(席底)에다 십원 혹 삼십원을 복병(伏兵)시키어 두더라. 그러하나 방 소제 안하기로 유명한 그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어, 돈을 깔고 앉아서 굶으려고 하는 그 참상을 목격한 나는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어 “도야지 우리가 아닌 이상 방을 이 꼴로 두는 수가 있나?”라고 노호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그러할 적마다 그는 공율(恭慄)한 태도로 손에다 비를 들고 방 쓸기를 시작하였고 결국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나는 일부러 딴 방면을 바라보며 못 보는 척하고 있는 중 그는 ‘무엇’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나는 돈이 다 떨어진 줄 알았더니 그저 남었군!” 한다."- 변영만,「실루에트 2, 3」,『개정전집』별집, 374쪽.
● 조카 딸 혼사 문제로 고국 잠입
1917년 단재는 조국을 떠난 지 7년만에 조카딸 향란의 혼사 문제로 잠시 고국에 찾아왔다. 망명길을 떠나면서『대한매일신보』의 동지 임치정에게 부탁하였던 향란이 임씨의 이설에 현혹되어 친일파와 혼사를 맺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요절한 형님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딸의 잘못되는 혼사를 막으려고 일제 헌병·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수만리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지만 향란은 숙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울분을 참지 못하여 조카와 의절하는 뜻으로 단지(斷指)하고 헤어졌다.
일제 관헌의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밀입국을 감행하고 단지를 하면서까지 조카딸과 의절을 결행하는 것은 단재의 치열한 삶의 단면이다. 그는 유일한 혈육이 친일파와 결혼을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를 성균관에 천거해준 신기선의 친일 행위에 단호히 의절하고 ‘일본의 충노’라고 질타한 일, 대종교의 지도자 한 사람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위원을 지낸 것에 대한 비판, 뤼순 감옥에서 건강의 악화로 생사 위기에 처하여 친일파 종친의 보호자 선정을 거부하여 끝내 옥사를 당하는 행위 등 단재의 원칙에 대한 치열성은 단호하였다. 특히 친일파를 배격하는 원칙에는 어떠한 틈새도 용납하지 않았다.
홍명희는 후일 단재가 조카와 의절한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고(故) 임치정(林蚩正)씨가 맡아 기른 단재의 질녀를 출가시키려고 할 때 단재는 북경서 기별을 듣고 임씨가 질녀를 매혼한다고 분노하여 노자를 변통하여 가지고 잘녀를 데리러 들어갔는데, 그 질녀가 임씨의 이설을 청종하고 삼촌의 엄명을 거역한 까닭에 단재는 질녀더러 “이제부터 너는 나의 질녀가 아니고 나는 너의 삼촌이 아니다. 골육이라도 이렇게 끊어버린다” 하고, 손가락 한마디를 끊고 혼자 돌아 나왔다고 말들 합니다. 내가 단재더러 이것을 물어보고 둘이 같이 탄식한 일도 있었습니다."- 홍명희,「상해 시대의 단재」,『개정전집』下, 475쪽.
이 때 단제가 고국에 잠입한 데는 또 한가지 목적이 있었다. 평소에 그를 따르던 제자 김기수(金箕壽)가 불의의 변을 당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남포를 거쳐 서울 김기수의 집을 찾아 젊은 제자의 넋을 위로하였다. 백천(白川) 태생의 이 제자는 촉망되는 제자로 알려져 스승의 학문을 계승할 재능이 있어 사제간의 의기가 상통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단재는 제자의 집을 찾아 조상(弔喪)하고, 다른 사람은 일체 만나지 않고 다시 망명지로 돌아왔다.
단재는 북경의 여관과 보타암(普陀庵) 또는 석등암(石燈庵)의 우거에서 한국사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으면서도 독립운동의 동지들과는 꾸준히 연락을 맺고 있었다. 그 사이에 국내외의 정세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1916년 10월 16일 조선을 병탄한 원흉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일본총리대신으로 전임되고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새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6월에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 기공식이 있었다. 한국에 일본군 2개 사단이 상주하게 되면서 서울 여의도, 용산, 대구 등의 수백만평이 강제 수용되었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1917년 1월 1일부터 이광수의 장편소설『무정』이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에 연재를 시작하고, 3월 3일에는 러시아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이상설(李相卨)이 사망하였다. 5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김립·문창범·윤해 등이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결성하여 식지 않은 항일투쟁의 열기를 보여주었다. 이 해 7월에 단재는 신규식·박은식 등과「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민주권에 입각한 공화정의 이념을 내세우고,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17년 8월 상해에서는 신규식 등이 동제사(同濟社)를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으로 개칭하고, 스톡홀름의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에 조선독립 요구서를 제출하여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7월 11일 대한광복회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蔡基中)이 군자금 조달에 협조하지 않은 대구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고, 11월 17일 안희제(安熙濟)가 해외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백산무역을 설립하였다.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이 발발하였다.
1918년 6월 26일 러시아령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김립 등이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1919년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고,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8월에는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김철(金哲)·선우혁(鮮于赫) 등이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 해 1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항일독립운동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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