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장투쟁론 전개하며 임시정부와 결별
외교론(外交論)과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을 내세우는 개조파(改組派)는 군사행동이나 테러 행위는 열강의 동정을 얻어내는 데 장애가 되며 독립외교에 백해무익(百害無益)이라 주장하면서 군사행동에 힘을 소모하는 것보다 실력을 양성하여 후일에 대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폈다.
단재와 박용만 등은 일시에 수십만 대군을 출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노령·간도의 독립군을 지원하고 통합하는 일과 작탄대(灼彈隊)를 조직하여 일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국민개병론(國民皆兵論)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북간도 독립군을 대표하는 인물 윤기섭(尹琦燮)이 임시정부 의정원에 군사건의안을 제출하여 임시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군사정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여 무장투쟁론(武裝鬪爭論)의 창조파(創造派)에 힘을 실어주었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李承晩)의 추대 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면서 단재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였다. 임시정부 수뇌부가 현실에 안주하면서 국민들의 3·1봉기로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축출(逐出)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무장투쟁론에 배치되는 상황이어서 분노의 감정은 더했을지 모른다.
이를 계기로 단재는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임정 비판의 맹장으로 나섰다.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獨立新聞)』에 대응하는『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면서 꾸준히 무장투쟁론을 제기한다. 그의 상대는 철천지 원수 일제와 다른 한편 동지인 외교론 추종자들이었다.
이 무렵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상해의 같은 여관에서 기거, 미국의 친구가 보내온 이승만의「위임통치청원서(委任統治請願書)」를 보면서 이승만을 임정에서 제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음에도 상해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앉아 위임통치론(委任統治論)이나 제출하면서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는 이승만을 임시정부에서 축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내어 그의 본심을 듣고자 하였지만, 이승만은 끝내 서한을 보내지 않았다. 심산은 저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때에 마침 나와 상해에서 한 여관에 기거하던 단재 신채호 선생과 백암 박은식 선생의 친구가 미국에 있었는데, 그 친구로부터 이승만(李承晩)씨가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위임통치청원서의 원문과 번역문을 서신으로 단재 선생에게 보내왔다.
하루는 백암 선생과 내가 여관에 있자니까 단재 선생이 편지 한장을 들고 들어와 아무 말 없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말도 없이 우시오?”라고 물었더니, 그는 미국의 친구가 보내 온 서신을 내보였다. 물론 왜인의 한국 침략이 분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미국에 위임통치하에 넣겠다고 하므로… 이것에 웬 말이냐고 우리 3인이 통곡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3인은 이승만씨를 임정(臨政)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의 제거 공작에 착수했다.
제1차로 우리는 워싱톤에 있는 이승만씨에게 “위임통치청원서(委任統治請願書)를 낸 것이 사실이냐? 만일 냈다면 즉시 취하하라”는 요지의 서신을 발송했다. 그때 상해에서 미국 워싱톤까지 편지가 가려면 14일이나 걸렸다.
1차 서신에 대한 회신은 28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단재 선생은 제2차 서신을 내자 했고 백암 선생은 즉각 파면 공작을 하자고 우겼다. 그래서 우리가 백암 선생을 이해시켜 40일만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씨는 끝내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분개한 우리 3인은 임시정부로 달려가 국무총리(서리) 이동휘(李東輝), 노동총장 안창호(安昌浩),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씨에게 이승만씨가 미국에다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이런 청원서를 냈으니 이를 제거해야겠소”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동휘 총리는 깜짝 놀라며 우리도 몰랐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지금 당장 대통령을 제거하면 임정이 붕괴되니 덮어 둡시다”고 반대했다.
이 총리의 이와 같은 반대론에 안창호, 이시영, 이동녕 세 총장도 동조했다.
이리해서 이승만씨를 제거하자는 우리 세 사람의 주장은 임정 요인 전체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에 얼마 동안 고립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만 경무국장인 백범(白凡) 김구(金九)군만이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백범이 백암 선생과 내가 있는 여관으로 놀러온 일이 있는데, 그 때에 백암 선생이 백범에게 대노하여 “백범, 이승만을 그대로 둘 것인가…내 말을 듣겠소?”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백범은 “아닙니다. 지금 우남(雩南)을 없애면 정부가 망합니다” 하고 신중론을 주장했다.
성격이 불꽃같은 백범도 그보다 20세나 연상인 백암 선생에게는 감히 대들지 못했던 것이다.
임정 전테가 이토록 한사코 반대하므로 우리는 방향을 달리하여 일을 추진했다. 그것은 정부 측이 호응하지 않으니 부득이 의정원에서 ‘대통령 파면 결의안’을 내놓고 이를 밀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정원내에서도 찬반양론이 있어 수를 헤아려 보니 찬성자가 겨우 과반수 정도밖에 안 되었다."- 김창숙,「독립운동비화」,《경향신문》1962.3.2.『개정전집』별집, 402쪽.
●『신대한』주필로서 일제·임정과 언론투쟁
임시정부의 노선에 크게 실망하고 뛰쳐나온 단재는 다시 언론투쟁(言論鬪爭)의 길을 찾았다. 1919년 10월 28일자로『신대한』을 창간한 것이다. 신문의 발간에는 신규식(申圭植)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는 당시 별도로 신대한동맹회(新大韓同盟會)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여 부회주(副會主)로 있었다. 회주는 남형우(南亨祐)가 맡았다. 신대한동맹회의 회원은 40여명으로 북경에서 반임정운동(反臨政運動)을 전개하던 박용만(朴容萬)과 연계된 단체로 파악되고 있다.
『신대한』은 신대한동맹회의 기관지 성격을 띠고, 상해 보강리에서 1주 2회 발행을 원칙으로 하여 창간되었다. 일제와 싸우는 한편 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하는 데도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단재가 이 신문의 주필을 맡았고 편집장으로 김두봉(金枓奉)과 한위건(韓偉健) 등이 참여하였으며 나중에 주필에 피임된 방효상(方孝相)은 일제에 매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신대한』창간 당시를 연구한 내용이다.
"단재는『신대한』창간사에서 “2천만의 해골을 태백산 같이 쌓을지라도 일본과 싸우자는 정신”과 “이상의 독립군을 제조할 주의(主義)”로 설명하고 있었다. 민족전쟁과 계급전쟁을 논의하면서도 미래에는 ‘빈부 평균’을 주장하겠지만, 당장에는 눈앞의 적을 무찌르고 민족보관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일본의 반성을 요구하거나 외교에의 집착을 비판하면서, “제1독립을 못하거든 차라리 사(死)하리라는 결심을 견고케 하며 제2적에 대한 파괴의 반면이 곧 독립건설의 터”라는 각오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외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최기영,「일제강점기 신채호의 언론활동」,『한국사학사학사보』제3장, 215쪽.
『신대한』의 창간에 대해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은 “오래 갈망하던 한자신문(韓字新聞)『신대한』보(報)는 10월 28일에 창간호를 모지에서 출간하다. 지면의 광대와 언론의 장쾌함이 동지(同紙)의 특색인 듯하다”고 보도하였다. 일제(日帝)는 상해영사관 경무국의 보고서를 통해 “『신대한』이란 신문은 신채호가 주간한 것이기에 그 언론이 심히 정직 통쾌하여 (임시)정부의 행동 풍규(諷規)하고, 또 주의가 빈약한 논조나 설명 행위를 용서 없이 게재하며, 저들은 이를 눈 안의 못으로 여기며 백방 저해하여 폐간시키고 자기의 기관지 소위『독립신문』만 존재시키려 한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에서 작성한 또 다른 일제 자료는 “『신대한』이란 신문은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는『독립신문』측에서 첩보자 사용의 방효상이 그 감독에 임명되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상해 거주 독립운동 종사자가 간도의 동지에게 보내는 1919년 12월 15일자 편지를 일제의 정보기관이 압수하였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더 한층 통탄할 일은『신대한』신문은 신채호씨가 주관하는 것인 고로 언론이 극히 정직 통쾌하고 정부의 일을 규탄하고 또한 주의가 박약한 논조와 요령부득인 설명 행위에 대해 용서 없이 게재하였으므로 피등(彼等)은 이를 눈 속의 가시처럼 생각하고 백방으로 저해하여 폐간시키고 자기들의 기관지 소위『독립신문』만을 존립시켰으며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다…."
● 임시정부,『신대한』폐간 기도
『신대한』과『독립신문』의 관계가 꼭 그렇게 ‘앙숙’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 정보기관의 자료를 모두 믿을 수도,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가지 자료를 분석하면『독립신문』측에서는『신대한』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고 이의 폐간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독립신문』측에서 인쇄소에 압력을 가하여『신대한』이 휴간될 수밖에 없었다는 일제의 조사보고서 요지이다.
"상해재류 불령선인의 기관지『독립』·『신대한』두 신문의 알력으로 국민대회를 개최한 결과『신대한』발행이 금지되지 않기 때문에『독립』측은 가만히 간책(姦策)을 돌리고『신대한』의 인쇄소에 비밀리에 교섭하여 조선인은 일본이라는 배일을 결향하는 당(當) 공장에서 이것을 인쇄하기 어렵다는 구실하에 인쇄를 거절시킴에 따라『신대한』은 그 후 휴간을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신문은 원래 신규식의 힘으로 설립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신의 기관지라는 것과 같이 주목되고 있었는데, 금회(今回) 그의 반대 신문에 의하여 휴간되게 되었으므로 필경 이를 교사한 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의론을 야기하였고, 그의 교사자로서 안창호를 주목하여 신파(申派)의 저들은 현 정부를 비난하는 자가 차츰 많아졌다.
2월 초부터 소위 임시정부 파괴운동을 개시한 자가 있으면 점차 그의 세력을 가중하여 목하 36명의 다수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안창호 암살계획을 하고 있는 자를 발생하였기 때문에 안(安)은 그의 암조(暗潮)가 더욱 더 격렬함을 탐지하고 칭병하여 외출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신대한』은 순한글로 발행하여 상해와 중국 지역 한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일제의 폭압을 규탄하였다. 또한 외교정책과 실력양성론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임시정부를 거세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무력투쟁론을 제시하였다. 현재 창간호(1919.10.28.), 제17호(1920.1.20.), 제18호(1920.1.23.)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승만과 안창호의 지도 노선을 추종하며『독립신문』의 주필과 사장을 역임하고 있던 이광수(李光洙)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때에 내가 단재를 만난 주요한 이유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함이 대의에 합(合)하다는 것을 설복하여 단재로 하여금 내가 주간하던 ○○신문의 주필로 모시려 함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재를 설복하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단재는 ○○○이라는 이 박사를 수반으로 하는 ○○를 부인하는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중 일이어니와… 그 후에 단재가 ○○○이라는 신문에 ○○운동의 현재에 대하여 부인하는 논을 쓴 데 대하여 나는 정면으로 그를 박론하지 아니치 못할 처지에 있어서는 이렇게 수차 논전이 있은 후에는 그만 단재와 나와의 사적 교분조차 끊어지고 말았다.〃
이광수가 이 글을 쓴 것은 1936년 4월이었다. 때문에 임시정부와『독립신문』·『신대한』과 독립운동 등을 ○○○으로 표시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광수가 단재를『독립신문』의 주필로 모시려고 시도하였지만, 거부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재는『신대한』이 임시정부의 압력으로 폐간되고, 이미 미련없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한 상태이기 때문에 1920년 초 미련 없이 상해를 떠나 활동 장소를 북경으로 옮겼다.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편찬한 ‘연보(年譜)’에 따르면 상해 시절에 몇가지 활동 상황이 더 있음을 알게 된다.
1919년 2월 만주 길림성에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가 주동이 되어 발표한『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민족대표 39명의 한 사람으로 서명에 참여하고, 이 무렵 봉천(奉天)에 갔을 때 의군부에서『주일보(週日報)』의 발행을 부탁받은 바 있고, 또 한진산(韓震山)과 함께『진광신보(震光新報)』를 발행한 듯하다.
3월에는 북경에서 문철(文哲)·서일보(徐日甫) 등과 더불어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으며, 그 회원은 70여명 정도의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4월 11일에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고, 서울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었다. 11월을 전후하여 국내에서 남형우·안희제(安熙濟)·신백우 등이 조직했던 항일비밀결사단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의 재건에 착수하여 단장에 추대되었고, 상해 의영학교(義英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