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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0. 신채호와 김원봉의 의기투합 ⑴

참의부 |2013.09.11 13:56
조회 108 |추천 0

● 신채호와 김원봉의 의기투합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强盜) 일본을 구축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驅逐)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신채호)

 

일제 식민지 시대에 수많은 반일선언문 가운데 단재가 1923년에 쓴『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은 내용으로나 문장으로나 정신사적으로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선언문이다.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성취한 가장 귀중한 불멸의 문헌의 하나이며, 독립선언문들 중에서도 정상에 서 있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신용하,「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논고」,『혁명론』, 190쪽, 문학과 지성사, 1984년.

 

〃역사는 뒷날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을 최남선의「기미독립선언서」, 한용운의「조선독립 이유의 서(書)와 함께 대표적인 독립선언서의 하나로 간주했고, 오히려 이들 선언문을 훨씬 능가할 만큼 민족독립을 위한 폭력적인 투쟁이념을 가장 선명하면서도 극적으로 밝힌 선언적 압권임을 스스로 증명했던 것이다.〃- 최홍규,『신채호와 민족주의 사상』, 189쪽~190쪽, 형설출판사, 1993년.

 

최남선(崔南善)의「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조선독립(朝鮮獨立) 이유의 서(書)」가 우리 독립운동사의 불후의 명문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과 함께『조선혁명선언』이 이들과 정족을 이루면서,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내용과 함께 단재의 옹골찬 기질과 치열한 삶도 작용한 것일 터이다.

 

1922년 말, 단재가 머무는 북경의 우거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일제 기관원들이 눈이 뒤집혀서 쫓고 있는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이었다. 약관 25세의 약산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테러단체’를 이끌고 있던 의열단(義烈團)의 단장이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단재와 함께 이승만 탄핵운동에 참여한 관계로 익히 지면이 있었다.

 

약산은 1921년 4월 단재가 주도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성토문」에 반(反)임시정부 계열 인사 54명과 함께 공동 서명을 하는 등 단재와는 무장투쟁 노선을 같이 해 왔다.

 

약산은 국내에서부터 단재의 명성을 듣고, 무장투쟁론의 대선배로서 사숙하고 있었다. 약산은 이때 상해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키기 위한 폭탄 제조를 준비하고 있으면서 북경에 들러 단재를 찾은 것이다. 의열단은 1920년 9월 단원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1월에는 최수봉(崔壽鳳)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였다. 의열단은 1921년 9월 김익상(金益相)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1922년 3월에는 단원 김익상·오성륜(吳成崙)·이종암(李鍾巖)이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군벌의 거두 다나카 기이치[田中喜一]를 저격했는데 암살에는 실패하였다. 5월에는 황포탄의거(黃浦灘義擧)로 피체되었던 오성륜이 상해 일본영사 경찰서 유치장을 파옥·탈출하였다.

 

의열단은 국내외에서 일제에 가공할 그리고 신출귀몰한 테러를 감행하면서 좀더 성능이 좋은 폭탄을 만들고자 상해에서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암살과 파괴에 따르는 선전활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산이 단재를 찾게 된 데는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이번 북경 길에 있어 그의 가장 큰 기쁨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과의 회견이다. 단재는 세사이 다 아는 사학계의 태두(泰斗)로 왜적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을 떳떳치 않게 생각하여, 해외로 망명한 지사다.

 

서로 안 지 수일만에, 약산은 그의 학식과 지조를 높이 우러러 보고 인격적으로 가장 숭배할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하였거니와, 단재 역시 이 젊은 애국자에 대하여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유달리 두터웠다.

 

이는 이미 오래된 일이거니와, 약산(若山)은 진작부터 의열단(義烈團)이 주장하는 바를 문서로 작성하여 이를 널리 천하에 공표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암살과 파괴만이 능사가 아니다. 행동만이 있고, 선전(宣傳)이 뒤를 따르지 않을 때, 일반민중은 행동에 나타난 폭력만을 보고, 그 폭력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절(不絶)하는 폭력과 함께, 또한 꾸준한 선전과 선동과 함께 계몽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제 단재와 만나 간담 상조하는 자리에서 그는 문득 이 생각을 하고, “그렇다, 이 분이다! 우리는 단재 선생에게 글을 청하기로 하자…!” 하고 무릎을 쳤다.

 

약산은 어느 날 단재를 보고 말했다.

 

“저희는 지금 상해에서 왜적(倭敵)을 죽일 폭탄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가셔서 구경 안하시겠습니까? 겸하여 우리 의열단의 혁명선언도 선생님이 초(抄)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단재는 흔쾌히 대답하였다.

 

“좋은 말씀일세. 그럼 같이 가 보세.”

 

이리하여 며칠 후 단재는 약산을 따라 상해로 향하였던 것이다.〃- 박태원,『약산과 의열단』, 103쪽~104쪽, 깊은 샘, 2000년.

 

이렇게 하여 단재와 약산이 만나게 되고, 한국독립운동사의 반일선언문 중 백미인『조선혁명선언』이 집필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의열단의 ‘암살과 파괴’ 활동에 철학과 사상이 ‘포장’되었다.

 

● 김원봉과 의열단의 폭력투쟁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은 1918년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하고, 1919년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가가 퇴교한 후 그 해 11월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을 창단, 단장에 추대되었다.

 

의열단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신흥무관학교 생도를 중심으로 하는 청년 10여명에 의해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潘氏) 집에서 조직적인 무장투쟁과 폭력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일제식민통치로부터 조국해방을 이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창단되었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공약 제1조 문구 속의 ‘의(義)’자와 ‘열(烈)’자를 합성하여 ‘의열단(義烈團)’이라 이름을 짓고, 일제와 친일 민족반역자 집단을 제거하는 결사적 폭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의열단은 창단과 함께 다음과 같은 10개조의 공약을 결의하였다.

 

1. 천하의 정의와 사(事)를 맹렬히 실행키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에 선(先)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ㅇ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지하시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返背)한 자를 처살함.

 

10개조의 공약을 결의한 의열단은 암살의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의 ‘칠가살(七可殺)’을 설정하고, 파괴의 대상으로 다음의 ‘오파괴(五破壞)’를 선정하였다.

 

칠가살(암살 대상)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2. 군 수뇌부

3. 대만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탐(일정)

7. 반민족적 토호열신(지방유지)

 

오파괴(파괴 대상)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회사

3.『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외적 중요 기관

 

의열단은 단의 강령도 제정하였다.

 

의열단 강령

 

1.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함.

2.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削除)하고 진정한 민주국(民主國)을 건립함.

3.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을 건립함.

4. 민중경찰을 조직하고 민중무장을 실시할 것.

5. 인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結社)·거주(居住)에 절대 자유권을 가짐.

6. 인민은 무제한의 선거 및 피선거권을 가짐.

7. 1군(郡)을 단위로 하여 지방자치를 실시함.

8. 여자의 권리를 정치·경제·교육·사회상 남자와 동등하게 함.

9.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은 국가의 경비로 실시함.

10. 조선내 일본인 각 단체(동척(東拓)·흥업(興業)·선은(鮮銀) 등) 및 개인(이주민 등)이 소유한 일체 재산을 몰수함.

11. 매국적(賣國賊)·탐정(探偵)·반도(叛徒)의 일체 재산을 몰수함.

12. 조선인민 생활상 침해가 되는 외국인의 일체 재산을 몰수함.

13.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함.

14.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빈고농민(貧苦農民)에게 토지·가옥·기구(器具) 등을 공급할 것.

15. 공인(工人, 노동(勞動): 인용자)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노동평민에게 가옥을 공급함.

16. 양로(養老)·육영(育)·구제(救濟) 등의 공공기관을 건설함.

17.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질의 기업(철도·광산·기선(汽船)·전력·수리(水利)·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18. 소득세는 누진세율로 징수함.

19. 일체의 잡세(雜稅)를 폐제(廢除)함.

20. 해외 거류동포의 생명·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고 귀국동포에게 생활상 안전한 지위를 부여함.

 

의열단의 이와 같은 공약·행동지침·강령 등은 단재의 사상과 일치하는 대목이 너무 많았다. 이념적으로나 무장투쟁·폭력투쟁을 주장해온 주장과 대부분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의열단이 단재에게『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단재가 이를 혼쾌히 수락하게 되었다.

 

● 격렬한 어조의 선언문 완성

 

단재는 약산과 함께 상해로 와서 왜적을 무찌를 폭탄 제조와 시험과정을 지켜보면서 역사적인「의열단선언문」의 기초에 들어갔다. 단재가 1923년 1월 상해에서『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할 무렵은, “민족주의사상에 무정부주의의 방법을 포용한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시기”로 인식된다.

 

『조선혁명선언』에는 민족주의사상과 무정부주의사상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연구 분석일 것이다. 단재는 상해의 한 여관에서 선언문을 집필하면서 의열단의 이론가 유자명(柳子明)으로부터 무정부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명듣게 되었다. 유자명은 3·1운동에 참가한 후 북경으로 망명하여 북경대학의 오치휘(吳稚暉)·이석증(李石曾) 등 중국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가하고, 그 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에 공명하여 가입하고 의열단의 가장 탁월한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유자명은 단재가『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때에 같은 여관에서 합숙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조선혁명선언』에는 무정부주의의 사상이 많이 섞이게 되고, 단재는 무정부주의사상을 공부하여 그 후 아나키즘에 몰입하게 되었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투쟁선언인「조선혁명선언」을 쓸 때는 그 논조와 문맥이 심도 있는 아나키즘의 대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미 단재는 아나키즘을 자기 것으로 잘 소화하여 그의 ‘민중직접혁명’의 사상으로 아나키즘운동 방식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원고를 집필한 지 1개월만인 1923년 1월 전 5장 6400여자에 이르는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의 정당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역사적인 문서일 뿐 아니라,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단계와 독립항쟁정신을 가장 힘차고도 확고하게 천명한” 격렬한 어조의 선언문이 완성되었다.

 

단재의 이 노작은 약산과 의열단원들을 크게 감격시켰다. 단재가 의열단의 요청으로「의열단선언문」을 집필하면서「의열단선언」이라고 명칭을 붙이지 아니하고 굳이『조선혁명선언』이라 한 것은, 의열단의 활동을 넘어서서 민족주의혁명을 선언한 의지의 결합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단순히 의열단을 위해 그 단체의 강령·규약을 작성해 준 것이 아니라 의열단의 무력항쟁에 대한 급진적 민족주의 혁명 이념을 부여한” 것이었다.

 

단재의 이 선언문은 ‘이 무정부주의 방법을 포용한 혁명적 민족주의사상’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결국은 강자(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해 주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므로 이에 대한 대응논리를 찾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단재가 이 선언문을 집필할 때는 그리고 선언문의 내용을 분석하면, 그는 여전히 투철한 민족주의자였다. 선언문 집필 후 유자명을 통해 중국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지도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점차 무정부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 당시 단재의 독립운동방법론은 ‘민중의 직접혁명’이었다. 갈수록 세력이 강해지는 왜적과 정규전을 통한 독립전쟁은 비현실적이므로 개인 테러 중심의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의열단과 이념적으로 일치하게 된 것이다.

 

의열단은 단재가 쓴『조선혁명선언』의 끝에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부속 문서를 첨가하여 이를 대량으로 인쇄하여 세상에 공표하고, 의열단의 활동 때마다 폭탄과 함께 이를 현장에 살포하였다. 의열단 활동에는 반드시 이 선언문이 살포되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알리고, 사건과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도록 하였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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