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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학생 |2013.10.09 18:12
조회 176 |추천 0

출애굽기

 

역사적 배경

출애굽기에는 모세와 대적한 바로의 이름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출애굽기가 쓰여졌음이 분명한 시대의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역사 중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부분과 확실하게 연결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사건들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증거들이 모두 간접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들이나 신학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역사적인 문제를 먼저 다루어 주어야만 한다.

 

출애굽의 증거

첫째, 출애굽이 있었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비록 이집트의 압박과 탈출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지만 간접적인 증거들이 압도적이다. 요셉 이야기는 이집트(특히 삼각주 서북부 지역)의 생활, 관습, 문학 그리고 심지어는 이집트 기록들을 통해 알려진 관료들의 명칭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이집트 체류의 역사적 사실성을 상당히 잘 증명해 준다. 제18 왕조 시대의 테베 근처와 제19 왕조 시대의 삼각주 서북부의 건축 사역에 다수의 셈계의 국가 노예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잘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몇몇 이스라엘인들의 이름, 그리고 특히 모세 가족들의 이름은 정식으로 이집트 이름들이다. 또한 고대 세계의 한 중요한 국가에서 지배 민족들이 탈출한 예가 없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구약 시대 전체를 걸쳐서 이스라엘은 출애굽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탄생시킨 사건이라고 회고한다.

 

출애굽의 연대

비록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관련된 복잡한 연대상의 문제나 지리상의 문제에 대한 확고한 해결책은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정확히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이 출애굽이 발생했느냐 하는 것은 확실하게 말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과 성경 외적인 증거들에 가장 잘 들어맞는 시대로는 13세기의 전반을 들 수 있다. 중요한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메르넵타 석비는 메르넵타가 재위 5년째 되는 해, 즉 1220년경에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을 만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출애굽은 이보다 먼저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2) 출애굽기 1:11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비돔(Pithom)과 라암셋(Raamses)이라는 국고성을 짓기 위해서 노예로 사용되었다. 이 도성들이 삼각주 서북부의 정확히 어떤 장소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약간의 의문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하여튼 가능성 있는 장소들은 모두 제19 왕조의 바로들의 원래 근거지들과 라암세스 2세의 건설 활동의 결과들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그가 왕좌에 등극(1300년경)하고 난 이후에 일어난 것이 틀림 없다.

(3)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과 정복 시기에 대한 증거들도 이 시기를 지지해 준다. 이스라엘인들은 에돔과 모압 주변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민 20:14-21). 고고학적 개요들로 볼 때 이 왕국들은 1300경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발굴 작업을 통해서 볼 때 여호수아가 취한 수많은 도시들은 13세기 후반에 멸망당했으며, 그 이후에 곧장 물질 문명이 훨씬 더 단순하고 빈약한 사람들이 이 도시들에게 거주했다. 여기에 포함된 주요 장소들은 라키쉬, 벧엘, 하솔,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텔 엘-헤시(Tell el-Hesi) 등이다. 비록 이 도시들은 파괴한 적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문헌은 없지만 전반적인 유형은 성경의 정복 활동과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4) 당대의 이집트 문헌들은 역사적으로 유사한 점들을 제공해 준다. 메르넵타와 라암세스 2세 시대의 문헌들은 건설 공사에 셈족들을 노예로 사용했음을 고증해 준다(아피루<Apiru>란 말에 대한 이집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 또 하나의 문헌은 에돔에서 온 샤수 베두인족(Shasu Bedouin)의 집단들이 국경선에 있는 숲들을 가로질러 비돔(이집트어, Pr-Itm)에 있는 물웅덩이들로 오는 것을 허락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5) 이러한 기록은 요셉과 이집트로 이주의 배경이 학소스 시대라는 견해와 잘 일치한다. 창세기 15:13는 이집트에서 체류할 기간이 400년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또한 출애굽기 12:40은 그 기간이 430년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출애굽이 13세기 전반에 일어났다고 한다면 이집트로 내려간 기간은 17세기 전반 즉, 힉소스 시대가 될 것이다.

성경적인 근거에 기초한 중요한 반대는 이 연대가 왕상 6:1의 480년이란 기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출애굽과 솔로몬이 성전의 기초를 놓은 때까지의 기간이 480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치에 따르면 출애굽은 15세기 중반에 일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구약도 숫자를 현대의 역대기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480년이라는 숫자는 열두 세대에 각각 40년씩을 부여해서 계산해 낸 “어림수”, “총수”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1300-1250년의 연대가 다른 어떤 견해보다도 대다수의 증거에 잘 들어맞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근거에서 볼 때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바로 세티 1세(1305-1290년)이며, 출애굽 당시의 바로는 라암세스 2세(1290-1224)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정보는 출애굽이 이 동안에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출애굽 경로

출애굽의 경로나 시내산의 위치도 역시 확실하지가 않다. 여기에서도 역시 직접적인 증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성에 근거하는 수밖에 없다. 삼각주 서북부 지역의 지리에 대한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는 출 12:37; 13:17-14:4과 민 33:5-8에 나오는 몇몇 장소의 이름을 어느 정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출발 지점인 라암셋은 거의 확실하게 타니스(Tanis)나 칸티르(Qantir)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다음 기착지인 숙곳은 나일강 유역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는 중요한 경로를 형성하고 있는 와디 투밀라트 (the Wadi Tumilat) 계곡에 위치한 테쿠(Theku, 이집트 명칭), 즉 현대의 텔 엘-마스쿠타흐(Tell el-Maskhutah)인 것으로 보통 간주되고 있다. 이 지역은 보통 요셉 시대에 이스라엘들이 정착했던 고센 지역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다음의 세 장소, 즉 에담, 비-하히롯, 믹돌은 상당히 불확실하며, 여러 장소가 제시되었다. “홍해”로 보통 번역되고 있는 명칭은 원래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Sea of Reeds)”이며, 멘잘레 호수 주변과 남쪽의 비터 호수(the Bitter lake) 사이에 있던 늪지대를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늪지대는 갈대가 많고, 단내가 나는 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현재의 수에즈 운하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이집트와 성경의 문헌들이 이 늪지대를 지칭하기는 하지만 에담, 비-하히롯, 믹돌의 위치에 대한 현재의 지식으로는 출애굽기 13:18; 15:4,22등에 언급되어 있는 장소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다. 갈대 바다 횡단과 관련된 넷째 장소인 바알-스본은 현재 칸타라(Qantara) 서쪽 약 오 마일 지점의 멘잘레 호수 서부 기슭의 텔 데프네(Tell Defneh)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따라서 갈대 바다는 바로 이 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갈대 바다를 건너 위치에 대해서 두 가지 장소가 물망에 떠오른다. 하나는 비터 호수의 남쪽 근처로서, 이 경우에는 이스라엘은 숙곳의 서쪽이나 서남쪽(와디 투밀라트)으로 바로 횡단해서 한 늪을 지나 시나이 광야로 들어갔을 것이다. 또 하나의 장소는 텔 데프네(바알-스본) 가까운 북쪽으로서, 이 경우에는 이스라엘은 숙곳으로부터 되돌아와서(14:1), 멘잘레 호수의 한 어귀를 건너 남쪽으로 해서 시나이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아직까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가나안을 잇는 정상적인 경로, 즉, 그 시대에 다소 어긋나게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길은 실레(Sile, 현대의 칸타라)에서 시작해서 해안선을 따라 가나안의 가자(Gaza, 한글판 개역 성경의 “가사”)까지 뻗어 있다.

이 길은 이집트 군대가 보통 사용하는 길로서 군데 군데 요새와 병참 기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 가면 이집트 군대와 만나게 될 것이 확실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광야 길”을 따라갔으며, 갈대 바다를 건넌 이후에는 “술 광야”로 들어갔는데, 다른 곳들에서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이 광야는 팀사흐 호수(Lake Timsah)와 멘잘레 호수(Lake Menzaleh) 사이에 있는 지역의 동편, 시나이 반도 서북부 지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부터 여러 곳을 거쳐서 시내산으로 진행했다.

시내산의 위치와 이스라엘이 거기에 있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결코 나타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거기에 단지 잠깐 동안만 머물렀을 뿐이며,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방문한 장소들에 붙인 이름들이 계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그곳에 정착민들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시나이 반도에는 역사가 시작되고 난 이후로 정착민이 산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영속적인 이름이 존재하는 장소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거주 지역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 경우는 그 이름이 오랫동안 보존된 반면 이 비 거주 지역의 이름들 중 모세 시대로부터 나온 이름이 이 지역의 아랍어명에 살아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예벨 무사(Jebel Musa, 아랍명, “모세의 산”라는 뜻)가 있는 자리와 성 캐더린 수도원(the Monastery of St. Catherine) 근처에 있는 거대한 화강석 산들은 여전히 시내 산(일부 구절들에서는 호렙이라고도 불림)이 있었던 장소로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며, 몇 가지 증거들이 이 점을 강력하게 지지해 준다.

이 곳을 시내산이 있던 자리로 보는 기독교 전통은 최소한 주후 4세기에 이집트에 있던 수도사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전통 자체는 그보다 오래 되었음에 틀림없다. 성경은 시내산이 가데스 바네아보다 한참 남쪽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신명기 1:2는 가데스 바네아로부터 시내산까지 열하루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엘리야는 브엘세바에서 시내 산까지 가는데 “사십주 사십야”(매우 긴 여행이라는 의미)가 걸렸다(왕상 19:8). 그러므로 이곳은 시나이 반도의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강렬하고 인상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장엄하고 엄숙한 경관을 볼 때, 이 지역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의 경험을 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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