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구축된 개발금융체계(開發金融體系)는 특정 산업·특정 기업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통해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재벌이 생겨나고 성장했지만, 설비투자(設備投資) 자금의 대부분을 외부 차입(借入)에 의존하고 투자의 목적 역시 외형 확장에 치중함으로써 금융산업과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낳았다.
☞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
1. 개발금융체제(開發金融體制)의 특징
18년간의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당대는 물론 그 이후 한국 경제의 행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1960년대 경공업의 수출산업화, 그리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로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개발전략은 놀라운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러한 성공의 신화는 오늘날까지도 ‘박정희 신드롬’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압축·비약의 경제성장은 동시에 그 구조적 모순의 누적과정이기도 했다. 즉 박정희 군사독재체제의 경제적 성공은 그 이후의 실패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이는 다음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박정희(朴正熙) 군사독재체제(軍事獨裁體制)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결여하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정부(政府)→금융(金融)→재벌(財閥)→노동(勞動)’으로 이어진 수직적 자원 배분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질서는 초기의 경제성장 국면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공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 성공의 조건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경제성장이 자본의 축적인 동시에 노동의 축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박정희 군사독재체제의 경제적 성공은 독점자본으로서의 재벌의 성장과 함께 조직화된 노동세력(및 시민사회)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그 성공의 결과물인 자본과 노동의 도전을 받아 붕괴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직면했다. 이것이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한 정치민주화 체제를 가져온 것이다.
둘째,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안정적 체제전환(Orderly transformation)의 가능성마저 결여하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가 그 자체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더라도 보다 정상적인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그 후유증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압축·비약의 경제성장은 그에 비례하여 구조적 문제점도 누적시키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국민경제(國民經濟)의 위치를 초래했다. 그 결과 1980년대 금융자율화 등의 ‘대내적(對內的) 자유화(自由化)’ 정책이 실패했고, 이것이 오히려 1990년대 자본시장 개방 등의 성급한 ‘대외적(對外的) 자유화’ 정책을 유발함으로써 위기의 강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1997년 정축외환사변(丁丑外換事變)은 그 최종적 결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개발금융체계(開發金融體系)의 특징과 그 결과로서의 재벌의 성장 과정을 분석하고, 이것이 이후 한국 경제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는지, 특히 그 모순이 어떻게 1997년의 정축외환사변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개발금융체제의 특징을 살펴보는데, ‘금융(金融)의 재정화(財政化)’ 과정을 통해 관치금융(官治金融)이 구조화되었음을 확인한다. 다음은 기업의 설비투자(設備投資) 자금의 조달 경로 및 그 동기를 분석함으로써,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개발금융체제가 재벌중심체제(財閥中心體制) 태동의 물적 배경이 되었음을 보인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재벌이 본격적인 의미의 독점자본(獨占資本)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또한 그 결과로서 재벌의 성장이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으로 확산되는 메커니즘이 현저히 약화되었음을 확인한다. 또한 박정희 군사독재체제가 가져온 후유증의 또 다른 측면, 즉 정부 정책의 왜곡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1980년대의 대내적 자유화와 1990년대의 대외적 자유화 정책이 실패하고 위기를 초래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마지막은 결론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압축·비약적 개발전략이 초래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 과제, 특히 재벌개혁(財閥改革)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2. 민간기업 자금 조달과 운영에 직접 개입
19세기 말의 후발자본주의국가(後發資本主義國家),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경우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한 정부는 주로 은행을 통해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와 일본 정부의 경제개입을 뒷받침하는 요소 중 하나는 정부가 자체 여유자금을 은행에 예탁·운용함으로써 산업자금의 상당 부분을 직접 조성했다는 데 있다. 반면, 박정희 정권은 초기부터 자체 재정자금을 통해 경제활동을 확대하는 데는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에, 민간기업의 축적자금은 대부분 외자(外資) 도입 및 민간자금의 동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가 민간기업의 자금 조달 및 운용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통제함으로써 이른바 관치금융(官治金融) 현상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⑴ 재정투융자(財政投融資)를 통한 정부의 경제활동
재정투융자는 정부예산을 통한 자본적 지출과 각종 융자기금 등을 통한 금융적 활동을 합한 것을 말한다. 재정투융자는 경제개발을 위한 정부의 활동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재정투융자의 추이를 살펴보면, 1960년대 이후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는 국내 투자 전체에서 재정투융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하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투융자 중 자금의 조기 회수가 가능한 재정융자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대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1960년대 이후 정부가 경제개발을 강력하게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축적의 주체는 민간기업이었으며, 자본축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대규모 초기 자본 소요로 인해 민간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분야에서만 직접 투자 주체로 참여했다. 그러나 해당 공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면 곧바로 민간기업에 불하하는 조치를 취했다. 196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그리고 1980년대 말에 이루어진 대규모의 공기업 민영화 조치가 이를 반영한다.
둘째, 정부의 경제활동을 강화하는 데 수반되는 재정자금 조달상의 문제점이다. 초창기 재정투융자는 주로 대충자금특별회계(對充資金特別會計)에 의해 재원을 조달했으나, 미국 원조의 감소에 따라 재원조달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재정적자를 시현한 정부로서는 자체 재원을 통한 재정투융자의 확충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정부는 특히 광공업 분야에 대한 지원의 경우, 투입자금의 고정화를 초래하는 재정투자 대신 자금의 회수가 가능한 재정융자의 비중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이후 강화된 각종 융자기금에 의한 재정융자는 이러한 경향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한편, 재정융자가 시행되는 경로로는 각종 융자기금에 의한 융자, 특별회계에 의한 융자, 그리고 정부 차관자금의 전대(轉貸) 등이 있다. 정부관리기금에 대한 융자는 1973년 이후 본격화되었는데, 특별회계 융자나 재정차관의 전대와는 다른 성격을 보인다. 즉 특별회계 융자나 재정차관의 전대는 기본적으로 사회간접자본(社會間接資本)의 확충을 통해 민간기업의 축적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재원 역시 주로 원조 또는 차관을 통해 조달했다. 반면, 정부관리기금을 통한 재정융자는 금융시장에서 조성된 민간자금을 정부가 직접 장악함으로써 특정 지원 대상, 특히 민간기업을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1988년 말을 기준으로 할 때 융자 기능을 수행하는 정부관리기금의 총 재원조성액 중 정부출연금은 16.2%에 불과했다. 반면에 장기차입 및 채권 발행은 각각 30.0%와 39.3%에 이르며, 운용수익으로 10.0%를 충당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정부관리 융자기금 중 1970년대~1980년대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국민투자기금과 국민주택기금의 재원 조성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투자기금의 경우 1974년~1988년간의 총 재원조성액 2조 6천 275억원 중 정부출연금은 전무한 대신 국민투자채권 1조 605억원, 금융기관 예탁금 1조 5천 123억원, 그리고 당기순이익 548억원으로 구성되었다. 국민주택기금은 1981년~1988년간의 총 재원조성액 3조 2천 462억원 중 정부출연금 3천 130억원을 포함한 자본금으로 5천 562억원을 조달했을 뿐, 나머지 2조 6천 899억원은 장기차입금(그중 국민주택채권이 2조 925억원)으로 조달했다.
이와 같이 정부관리 융자기금을 통한 재정융자는 1970년대에는 광공업 분야, 1980년대에는 주택건설 분야 지원에 집중하면서, 이에 필요한 재원은 민간지금을 정부의 통제 아래 둠으로써 사실상 재정자금화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사회보장 지출과 관련해 막대한 재정적자를 시현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조세 이외에도 민간자금을 정부의 통제 아래 두는 기금이라는 새로운 재원을 확보함으로써 재정위기를 은폐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⑵ 관치금융의 구조화
경제개발계획 시행 이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활동에 적극 개입했으며, 재정투융자는 그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재정투융자는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치중했기 때문에 민간기업의 축적자금을 양적으로 지원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 의미가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또한, 민간기업의 축적과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국민투자기금 등의 정부관리기금에 의한 재정융자는 자체 재원의 한계로 인해 민간자금을 재정자금화하는 편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민간기업의 축적자금은 대부분 외자 도입 및 민간자금의 동원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 정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이른바 관치금융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상의 결론은 예금은행 대출금의 자금별 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행에서 작성된『경제통계연보(經濟統計年報)』의「예금은행의 자금별 대출 추이(잔액 기준)」이라는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금은행의 총 대출 잔액 중 재정자금의 비중은 1960년대 초반 30% 수준에 달했으나, 이후 급속하게 하락했다.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예금은행의 총 대출 잔액 중 국민투자기금을 포함한 재정자금의 비중은 6%~7% 수준에 머무른다. 이러한 사정은 정부가 경제개발 과정에서 재정자금 이외에 예금은행의 금융자금마저도 통제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것이 결국 금융자금을 통해 예금은행에 정책금융을 강제하는 구조, 즉 관치금융을 낳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은행의 경영 전반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특수은행뿐만 아니라(1980년대 초 은행민영화 이전까지) 시중은행의 대주주로서 사실상 은행의 경영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를 제외하고는, 시중은행 대주주의 의결권을 10%로 제한했다는 사실(‘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 시행령’ 제4조)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또한 정부는 감독 권한만으로도 은행의 경영을 통제할 수 있었다. 당시 은행감독원장은 일반은행의 주주총회에서 결의한 임원의 선임을 승인하고, 또 업무감사 결과 공익위배의 정도가 현저한 경우에는 금융기관의 임원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주식 소유를 통한 통제나 은행감독권 이외에도 금융단협정(金融團協定)을 통해 은행 간 경쟁을 제한하고 통일적인 은행 경영을 행함으로써 사실상의 단일 은행제도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12월에 체계화된 금융단협정은 은행 경영의 모든 측면에서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었다. 우선, 금융단협정은 은행 간 경쟁요인이 될 만한 부분, 즉 실행이자율·이자계산방법·각종 수수료·PR 규제·공공예금 쟁탈 금지 등을 규정했다. 또한 업무개선을 위한 부분으로 각종 예금의 거래절차·내국환 집중교환 결제·은행 점포를 통한 세금 및 요금의 자동 불입·연체대출금 정리 등을 규정했다. 금융단협정 및 결의사항을 위반한 때에는 제재금을 부과할 수 있는데, 협정 위반 여부와 제재 금액은 은행감독원장이 결정하도록 했다. 따라서 금융단협정이 은행감독원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나아가 정부가 사실상 은행의 카르텔을 조장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특수은행과 일반은행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은행 부문 전체가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정부은행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이 연체대출금 정리에 관한 금융단협정의 내용이다. 금융단협정에 의해 한국은행 은행감독원 부원장보를 의장으로 하고 각 은행의 담당 임원을 위원으로 하는 ‘연체대출금정리대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연체대출금에 대해 모든 은행들이 공동보조를 취하도록 했고, 그 공동보조는 은행감독원의 규제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체대출금정리대책위원회는 대출금이 연체된 원인의 규명과 재발방지책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화된 연체대출금에 대해 개별 은행에 책임을 지우지 않고, 이를 연체대출금정리대책위원회라는 제3의 기관을 만들어 은행과 은행감독원이 함께 책임을 회피했던 것이다. 저축자금의 동원과 특정 부문의 지원이라는 한정된 목적에 봉사하는 정부 주도적 개발금융체계, 즉 관치금융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관치금융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을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급속한 경제성장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용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재정자금은 물론 금융자금 전반으로 확대된 은행의 대출심사 기능에 대한 제약, 정부가 주도한 카르텔에 의한 은행 간 경쟁의 제한, 부실채권의 투명한 처리에 대한 제약 등은 은행산업의 발전 자체를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즉 관치금융은 차입기업에 대한 금융기관의 정보 생산 및 감시 유인을 약화시키고, 정부-금융기관-저축자 사이의 인센티브 구조를 왜곡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부작용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음으로써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고 안정성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3. 개발금융체계와 기업의 설비투자
투자는 경제성장의 동력이라는 점에서 개발금융체계의 효과는 기업의 설비투자 동향을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에서는 산업은행의『설비투자계획조사』자료를 이용해 설비투자의 동향 및 자금조달 형태, 그리고 설비투자 동기의 변화를 살펴본다.
⑴ 제조기업의 설비투자 동향 및 자금조달 형태 변화
먼저,「제조기업의 설비투자 자금조달 형태(1985년 불변가격 기준)」이라는 도표에서 1985년 불변가격으로 전환한 설비투자액 추이를 보면, 경기변동 상황에 따라 제조기업의 설비투자가 큰 폭으로 변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곧바로 계획 자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계획 자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초반에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5년 금리현실화 조치 및 IMF와의 대기성차관협정 체결 등의 국내외 환경 정비를 거쳐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설비투자는 급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기 이른바 차관기업의 위기 국면에서 설비투자는 다시 침체되었다. 이후 1973년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했으나, 실제 투자는 제1차 석유파동의 충격이 가신 1975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1979년 제2차 석유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라는 국내외의 충격으로 인해 설비투자 규모는 다시 침체되어 1980년대 초반까지 극심한 부진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이른바 3저호황 국면에서 설비투자는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결국 한국 경제는 1960년 중반, 1970년대 후반,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등 3차례의 설비투자 활황기를 거치면서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960년대 경공업의 수출산업화 시기에 그룹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재벌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기에 핵심 사업영역을 구축하면서 급격한 양적 팽창을 이루었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본격적인 독점자본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한편, 기업이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은 크게 내부자금과 외부자금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도표에서 설비자금의 조달 형태 추이를 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는 외부자금 의존도가 50%대의 비중을 보이다가 이후 크게 상승하여 1970년대 말까지 70%~80%의 높은 수준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수출 주도 산업화와 중화학공업 건설이라는 경제성장 전략에 따라 외자를 적극 유치하고 또 모든 금융기관을 개발금융기관화했던 정부 개입의 결과이다.
반면, 1980년대에 들어서는 외부자금의 비중이 60%대로 약간 하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1980년대 후반기에 비해 전반기에 외부자금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1980년대 초반 심각한 경기침체로 인해 제조업의 설비투자가 크게 위축된 것을 반영한다.
한국 제조기업의 외부자금 의존도가 1980년대 들어 하락했다고는 하나, 일본의 경우 1970년대의 40% 수준에서 1980년대 말에는 30% 수준까지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대대적 설비투자 확대가 주로 외부 차입자금에 의존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며, 이로 인한 재무적 취약성은 해당 기업은 물론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외부자금 중에서는 금융기관 차입금(원화 및 외화 차입금)과 해외로부터의 외자 조달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원화차입(原貨借入)’은, 모든 금융기관을 개발금융기관화했던 정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80년대에 걸쳐 평균 2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 뿐이었다. 원화 장기자금 조달의 한계 및 상대적으로 손쉬운 외자 도입의 확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원화차입 비중만으로 설비자금 공급에서 국내 은행이 차지하는 역할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1980년대 들어 종금사와 리스사 등을 통한 외자 도입 창구가 다변화되었지만, 국내 은행의 외화 대출은 1980년대 들어 차관을 능가하는 가장 중요한 외자 조달 경로로 부상했다. 이처럼 은행 부문을 통해 원화 설비자금과 외화 설비자금의 공급을 결합함으로써, 1980년대 이른바 금융자율화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은행 부문을 통해 산업정책적 목적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한편, 외부자금 중 ‘외화 자금(外貨資金)’의 비중을 보면, 1970년대 40%이상에서 1980년대에는 20%수준(특히 1980년대 말에는 20% 이하)으로 하락했다. 외화 자금의 절대적 비중이 하락한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조달 경로의 변화이다. ‘합작투자(合作投資)’는 1970년대 중반의 일부 업종을 제외한다면, 외화 자금 조달 전체 가운데 극히 미미한 비중을 차지할 뿐이었다. 반면,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 말까지는 ‘차관(借款)’이, 1980년대 이후에는 외화 대출을 비롯한 ‘간접차입(間接借入)’이 외화 자금 조달의 주요 형태로 부상했다.
외화 자금의 간접차입 중에서는 국내은행의 외화 대출 비중이 1970년 말기 이후 계속 80% 이상을 유지할 정도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는 과정에서 외자 조달 경로를 다양화하기 위해 국내 은행이 뱅크론(Bank Loan)을 통한 외화 대출을 확대하도록 정부가 독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국제수지가 흑자로 전환하면서 한국은행의 여유 외환보유고를 국내 은행에 예탁해 이를 외화 대출 재원으로 적극 활용했다. 결국 정부는 은행 부문의 외화 대출 규모 및 그 용도를 사실상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산업합리화 조치, 중소기업 육성, 소재부품산업 육성, 기술개발 지원 등의 산업정책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외부자금 중 ‘직접금융(주식 및 채권 발행)’과 ‘기타(제2금융권의 설비자금 공급, 특히 그 중에서 전업리스사 및 종금사의 리스계약이 중요한 역할)’의 비중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설비자금 조달 경로는 은행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대신에 관련 금융기관 대다수가 재벌의 계열사라는 점에서 1990년대 이후의 금융구조 변화 및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의 위상 변화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제조기업의 설비투자 동기
「제조기업의 설비투자 동기」라는 제목의 도표는 산업은행에서 작성된『설비투자계획조사』에 의거해 1974년~91년간의 제조기업의 설비투자 동기를 정리한 것이다. 설비투자 동기는 생산량 확대를 위한 ‘생산능력의 증가‘, 생산원가 절감을 위한 ‘합리화투자’, 그외 독립적인 투자항목으로서 ‘연구개발투자’·‘공해방지투자’ 및 ‘기타’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도표에서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설비투자의 대부분이 생산 능력의 증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1970년대에는 전체 설비투자의 약 90%가 생산 능력의 증가를 위해 이루어졌다. 외자 도입을 통해 표준화된 생산기술을 체화한 자본재를 수입하고 또한 모든 금융기관을 개발금융기관화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만을 추구했던 것이다.
1970년대 생산 능력 증가를 위한 투자 중에서는 기존설비의 확장을 위한 투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비중 자체는 감소 추세엿다. 반면 신제품의 생산을 위한 투자(기본업체의 사업다각화를 위한 투자와 신규사업체의 투자를 포함)의 비중은 계속 증가했다. 이것은 1970년대가 특히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영역을 구축하는 시기였으며, 새로운 투자는 곧 그 기업에게 해당 분야에서의 독과점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규모 확대를 주목적으로 하는 설비투자, 그리고 이것이 가져온 독과점적 산업구조는 재벌 위주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로서, 결국 중화학공업 분야의 중복·과잉투자를 통해 1980년대 초의 축적위기를 초래했다.
축적위기는 정부의 산업정책과 자본축적 구조에 어느 정도 변화를 강제했으며, 이는 기업의 설비투자 동기에도 반영되었다. 1980년대 초반의 경기침체를 거치면서 생산능력의 증가를 위한 투자의 비중은 급속하게 하락했다. 이후 3저호황기에 그 비중이 약간 증가하기는 했지만, 1970년대 수준에는 훨씬 미달하는 것이엇다. 반면, 원가절감을 위한 합리화 투자의 비중은 1970년대의 8% 수준에서 1980년대 초반에는 20% 이상으로 상승했고, 1980년대 중후반 이후에도 15%~18%의 비중을 보이고 있다.
또한 1980년대 말에 이르러 합리화 투자 중에서 자동화 투자의 비중이 증가한 것은, 근로자 후생복리시설에 대한 투자 증가를 반영해 기타 항목의 비중이 증가한 것과 함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임금 상승 및 노사분규 증가에 대한 자본의 대응전략을 보여준다. 즉 자본의 대응은 한편으로는 복리후생시설에 대한 투자 증가를 통해 노동자의 불만을 완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동화를 통해 기계로 노동을 대체하려는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상 1970년대~80년대 제조기업의 설비투자 동기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합리화 투자의 비중이 1970년대에 비해 1980년대에는 상당히 높아졌다고는 하나, 일본 등의 선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이다. 또한 기술기밸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의 절대 규모는 늘어났으나, 전체 설비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답보상태이며, 그 수준 역시 선진국에 비해서는 크게 낮았다. 이러한 요인은 제품의 고급화는 물론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 되었고, 1980년대 말기 이후 대내외 경제환경이 악화되었을 때 또 다시 위기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합리화 투자·연구개발 투자·공해방지 투자 등과 같이 경기변동에 상대적으로 비탄력적인 성격의 설비투자 비중이 낮고 생산 능력의 증가를 위한 설비투자의 비중은 여전히 높아, 설비투자가 경기변동의 진폭을 더욱 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 구축된 개발금융체계는 특정 산업·특정 기업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통해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재벌이 생겨나고 성장했지만, 설비투자 자금의 대부분을 외부 차입에 의존하고 투자의 목적 역시 외형 확장에 치중함으로써 금융산업과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4.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 확대의 폐해
⑴ 재벌체제의 태동
오늘날 존재하는 재벌세력의 모태기업 중 상당수는 1950년대 중반에 설립되었다. 6·25전란 후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제당·제분·방직·화학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 건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주요 기업들이 사업기반을 확장했던 것이다. LG그룹의 락희화학공업사(1955년 당시 자본금 기준 4위), 쌍용그룹의 금성방직(5위), 현대그룹의 현대건설(9위), 삼성그룹의 제일제당(17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당시 단일 업종이 아니라 다양한 사업 분야에 진출해 재벌의 구색을 갖춘 기업집단은 삼양사그룹(김상홍)과 대한전선그룹(설경동)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1975년 은행민영화를 계기로 ‘익숙한’ 이름의 재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수출산업화 과정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초기의 재벌은 정부의 특혜에 의존하는 상인자본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그 부침이 심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1993년에 작성한「10대 재벌의 변천(1960년~1992년)」이란 도표에 따르면 1960년대~70년대에는 상위 10대 재벌조차도 부도가 나거나 쇠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19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상위 재벌의 위상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1960년의 10대 재벌 중에서 1972년에도 10위권을 유지한 그룹은 4개뿐(삼성·LG·대한전선·극동해운)이었다. 반면 1979년~1987년간, 그리고 1987년~1992년간에는 기존의 10대 재벌 중에서 각각 9개 그룹이 계속 10위권에 남아 있었다. 결국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새로운 사업영역을 구축한 재벌들이 오늘날까지도 한국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이 한국의 재벌체제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임을 보여주는 다른 증거들도 있다. 우선, 재벌의 국민경제적 위상의 변화를 보면, 10대 재벌의 부가가치 생산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3년 5.1%에서 1978년 10.9%, 그리고 1983년에는 13.0%로 두 배 이상 급증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경기변동 상황에 따라 약간씩 등락할 뿐이다. 그리고 30대 재벌의 계열사 숫자도 1970년 126개사에서 1979년 429개사로 급증한 이후 한동안 정체상태였다가 1990년대 후반에 다시 크게 증가했다.
재벌의 국민경제에 대한 지배력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는 흔히 재벌의 자산·매출액·부가가치 등의 GDP 대비 비중을 측정한 경제력 집중도가 사용된다. 그러나 규모가 크다는 것만으로는 독점자본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재벌 자체의 규모 확대만이 아니라, 재벌이 국민경제의 순환과 재생산 과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독점자본으로서의 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재벌은 정부의 재정·금융상의 특혜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본래 의미의 독점자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재벌은 1980년대 초반의 축적위기 국면에서 구조조정을 강제당하면서 어느 정도 합리화 과정을 거쳤고, 또한 1980년대 후반 3저호황 국면을 이용해 그 독점적 지배력을 크게 강화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기술개발 능력을 크게 제고했고, 은행 부문에 비견될 정도로 급성장한 제2금융권의 계열사를 통해 자금 흐름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했다. 나아가 노사관계 및 하도급 구조 개편을 통해 노동 및 중소기업의 재생산 과정을 직접 장악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1980년대는 한국의 재벌의 정부의 보호·육성 체계를 벗어나 스스로 독점자본으로서의 지배력을 확립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⑵ 국민경제 균형 발전 가로막아
그러나 재벌이 독점자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국민경제의 재생산 메커니즘이 보다 ‘정상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은(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천민자본적 성격과 상호작용하면서)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저해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는 재벌 육성정책이 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과 고용의 확대를 수반하는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으나, 재벌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점적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경제의 재생산 과정을 통제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순선환 효과 또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가 크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재벌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이익이 괴리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의 하나로서, 통계청이 작성한《광업·제조업 조사》라는 자료를 이용해 광공업체의 규모별 분포 및 그 생산성 격차 추이를 살펴보자. 노동자 수를 기준으로 한 기업 규모별 분류는 노동자 5인~19인의 ‘영세기업’, 20인~49인의 ‘소기업’, 50인~199인의 ‘중기업’, 200인~299인의 ‘중견기업’, 그리고 500인 이상의 ‘대기업’으로 구분했다.
먼저,「광공업체의 규모별 비중 및 생산성 추이(1960년~1998년간)」라는 제목의 도표를 살펴보자.〈그래프 ①〉에서 규모별 사업체 수 비중의 변화 추이를 보면, 1960년대~70년대에 걸쳐, 특히 1970년대에 영세기업 비중이 대폭 하락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같은 기간 소기업 및 중기업 비중은 각각 꾸준히 상승했다. 임금을 비롯한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기업 규모임을 감안할 때, 1960년대~70년대에는 기업 규모의 상향 이동과 함게 고용의 양적·질적 개선이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당시 한국 경제가 전통 부문에서 근대 부문으로, 그리고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 차원의 구조조정이 활발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1980년대에 상대적으로 정체 양상을 보이더니 1990년대에 들어 반전되었다. 즉, 영세기업의 비중이 다시 급격하게 증가하고, 소기업·중기업의 비중은 하락햇다. 성장산업으로의 산업간 구조조정보다는 산업 내의 기업 규모 간 구조조정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주훈 박사는 이러한 특징이 외환사변 이후에 본격화되었다고 판단했지만, 그러한 징후는 이미 외환사변 이전부터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기업 규모별 고용 및 생산액 점유 비중의 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래프 ②〉와〈그래프 ③〉참조). 1960년대~70년대에는 영세기업 및 소기업이 고용과 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하락한 반면, 중견기업과 대기업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대기업의 점유 비중 상승은 놀랄 만한 것으로, 1970년대 말에는 광공업 분야 전체 고용의 45%, 생산액의 55% 정도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대기업의 비중은 다시 증가해,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고용 및 생산액 점유 비중이 1960년대 수준으로 높아졌다.
이처럼 1960년대~70년대와는 달리 1980년대 이후에는 사업체 수 비중, 그리고 고용 및 생산액 점유 비중 측면에서 기업 규모의 영세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기업 규모별 양극화를 동반했다.「광공업체의 규모별 비중 및 생산성 추이(1960년~1998년간)」의〈그래프 ④〉에서 1인당 부가가치로 측정한 생산성의 기업 규모별 격차 추이를 보면, 500인 이상의 대기업을 100.0으로 했을 때, 1960년대에 확대되던 생산성 격차가 1970년대에는 상당한 정도로 축소되었고, 1980년대의 정체기를 지나, 1990년대에서 지속적으로 격차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1988년에 대기업 대비 각각 38.0% 및 44.6%였던 영세기업과 소기업의 생산성이 1998년에는 25.1% 및 31.7%로 급락했다. 중기업의 생산성도 같은 기간 중 58.8%에서 48.9%로 하락했다.
이상의 기업 규모별 변화 추이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정부의 규제와 노동계의 저항에 직면한 재벌계 대기업들이 고용과 생산을 직접 확대하기보다는, 중소기업들을 하도급거래 구조에 배치하고 이를 통해 소재·부품 조달 및 노무관리의 ‘간접’지배 체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신 대기업들은 핵심공정 및 연구개발 분야에 자신의 자원을 집중 투입함으로써 생산성 우위의 격차를 계속 확대할 수 있었다. 이는 천민자본과 독점자본의 특성을 동시에 내재한 재벌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소기업과 그에 소속된 노동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민경제 전체의 균형적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론적으로, 재벌의 선도적 성장을 통해 중소기업을 포함한 국민경제 전체의 순선환적 동반성장을 이끌어낸다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 논리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실적 유효성을 상실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로 전락하게 되었다.
5. 재벌로 흥하고 재벌로 망하다
1970년대 말 박정희 군사정권의 경제개발 전략이 한계에 봉착하고 위기를 초래하자 정부와 재벌 등의 지배블록 내에서도 새로운 경제운용 메커니즘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실패했다. 그 요인으로는 무엇보다 세계 경제환경의 변화와 국내 노동·시민사회 진영의 저항 등이 고려되어야 하나 다른 한편 정부와 재벌 사이의 관계 변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의 무리한 중화학공업 투자에 따른 후유증으로 인해 정부의 지원을 계속 필요로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자본축적 때문에 제약이 되는 정부개입의 폐지를 동시에 요구하는 모순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3저호황을 통해 독점적 지배력을 크게 강화한 재벌은 정부의 개입에 반발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결국 경제운용 메커니즘의 전환을 둘러싼 지배블록 내부의 균열이 한층 심화되었다. 그 결과 관치금융(官治金融) 등 과거의 잔재는 해소되지 않은 채 시장질서의 정상화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악순환이 초래되었다. 이것이 1980년대 ‘대내적(對內的) 자유화(自由化)’의 실패를 낳았고, 이로 인한 축적위기를 개방 전략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1990년대 김영삼 정권의 ‘대외적(對外的) 자유화’는 결국 1997년 정축외환사변(丁丑外換事變)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서는 1980년대~90년대 재벌체제의 문제로 인해 정부의 정책기조가 왜곡됨으로써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⑴ 1980년대 대내적 자유화 정책의 성격과 한계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經濟開發五個年計劃) 시행 이래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1980년의 경험은 개별자본으로서의 재벌은 물론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에게도 기존의 경제개발 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함을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에서, 정치체제는 과거 박정희 정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폭력적 권위주의 체제가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 측면에서는 통화주의(monetarism)에 기초한 긴축정책(緊縮政策)이 강력히 시행되었을뿐만 아니라 산업정책 및 금융정책의 기조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상징되는 서구의 신자유주의 흐름에 부응해 국내적으로도 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의 자유화 정책은 1986년 ‘공업발전법’ 및 ‘대외무역법’의 제정, 그리고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 등과 같은 입법조치들이 보여주듯이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것이 사실이다. 국제수지의 흑자, 원화절상 압력을 비롯한 신보호무역주의의 강화, 그리고 임금상승 및 노사분규 등과 같은 국내외의 경제환경 변화에 따라 국내 산업구조를 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 경제환경의 급변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변화의 속도를 배가시킨 촉매제였을 뿐, 변화의 출발점은 아니었다. 과거 박정희식 개발독재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정책수단을 제시한 것으로 볼 때, 새로운 경제운용 메커니즘으로의 전환은 1980년대 초 이래 계속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의 부분적인 수입자유화와 1979년의 ‘경제안정화종합시책(4·17조치)’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첫걸음이었다면, 1980년 ‘산업지원법’ 제정 시도 및 ‘공정거래법’ 제정, 1981년 ‘산업지원시책 운용에 관한 대통령 특별지시’ 및 ‘조세감면규제법’ 개정, 1982년~83년의 시중은행 민영화 조치, 1984년 ‘수입자유화 5개년 프로그램’ 및 ‘관세인하 5개년 계획’ 등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될 조치들의 실질적 내용을 모두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1980년대를 관통하는 경제적 자유화 정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특히 자유화 정책의 시행에 따라 정부와 자본(재벌) 사이의 관계는 과연 변화했는가? 변화했다면, 그 내용과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1980년대에 정립되기 시작한 정부의 재벌정책을 해석하는 데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80년대 자유화 정책은 경제운용 메커니즘의 중심축을 ‘국가’에서 ‘시장’으로 대체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실제 그 결과도 그러하지 않았다. 1980년대 전반의 장기불황 국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 후반의 3저호황 국면에서도 정부의 경제적 역할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산업정책 기조는 시장 기능에만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 내내 계속된 부실기업·사양산업(斜陽産業)의 합리화, 그리고 산업정책의 새로운 목표로 등장한 중소기업 육성, 부품·소재산업 육성 및 기계류 국산화정책, 기술개발지원, 첨단산업 육성 등의 과제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부터 누적된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인 시장에만 일임할 수 없어, 정부의 조정·통제를 계속 필요로 하는 문제였다. 특히 자금의 동원 및 배분체계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필요했으며, 은행 부문은 여전히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중은행 민영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은행 부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강력하게 유지된 것, 그리고 그 결과로 특히 설비자금 공급기관으로서 은행 부문의 중요성이 더욱 강화된 것은 1980년대 산업정책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1980년대의 자유화 정책은 자본축적의 위기에 따른 정부개입의 새로운 형식일 수는 있으나, 경제운용에 관한 정부의 주도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나아가 재벌과 노동·시민사회의 견제력을 정부 스스로 수용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결과 정부 주도의 자유화 정책은 1980년대 말 이후 분명하게 드러난 재벌 및 노동·시민사회의 성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실패했다.
⑵ 1980년대 재벌정책의 내용 및 그 한계
1980년대 자유화 정책의 특성과 그 한계는 재벌정책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재벌정책의 주요 수단은 공정거래법(公正去來法)과 여신관리제도(與信管理制度)였다. 1980년에 제정된 공정거래법은 1986년 1차 개정을 통해 경제력 집중 억제 시책을 새로 도입했는데, 그 핵심 수단이 출자총액제한제도(出資總額制限制度)이다. 그러나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순자산 대비 40%로 느슨한 출자한도를 설정하고 3년간의 유예기간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3저호황에 따른 주식시장의 활황을 배경으로 대규모 유상증자(有償增資)가 가능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재벌의 경영활동에 큰 제약이 되지는 못했다.
1980년대 재벌정책의 성격은 여신관리제도의 변화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여신관리제도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개발금융체계에 따른 부작용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출현했다. 1974년 7월 ‘계열기업군에 대한 여신관리협정’이 금융단협정(金融團協定) 형식으로 제정·시행되었는데, 대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간접금융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실태를 시정한다는 명분이었다. 이것이 개별기업, 특히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제도의 시초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등 직접적 통제의 성격이 약했다.
그러나 1978년 6월 제정된 ‘주거래은행의 여신관리협정’에서는 기존의 규제 이외에 기업투자(기업신설·매입·출자), 차관 지급보증, 부동산 취득 등에 대한 주거래은행의 사전승인, 과다한 배당 억제를 위한 결산협의 등이 추가되었다. 이후 협정의 개정 과정에서 기업투자나 부동산 취득에 대해 보다 강도 높은 규제가 추가되었다. 이는 1980년의 ‘기업체질강화대책(9·27조치)’을 배경으로, 당시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나타난 재벌 세력의 방만한 계열기업 확장과 부동산 취득을 억제하고자 하는 전두환 정권의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협정의 12차 개정(1983년 10월)에서는 기업투자와 부동산 취득의 금지·제한 사유가 강화(차입금비율 기준 추가)되었으며, 자금조달 규제(예외인정 승인시 자구노력에 의한 자금조달 의무)도 부과되었다.
한편, 1980년대 초 개정된 ‘공정거래법’에 의해 금융업도 그 적용 대상에 포함됨에 따라 사실상 은행들의 카르텔 협정인 금융단협정이 폐기되었다. 이에 따라 1982년에는 ‘은행법’ 개정을 통해 그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1984년 7월 종래의 ‘주거래은행의 여신관리협정’을 폐기하고 이를 한국은행의 ‘금융기관 여신운용 규정’에 흡수하여 이 규정에 의한 ‘계열기업군에 대한 여신관리 시행세칙’으로 전환했다.
새로운 체계에 의한 여신관리제도는 그 기본 골격에서 과거와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종래에는 개별 계열기업을 대상으로 금융기관 차입 규모나 자기자본비율 등을 규제하던 것에서, 이제는 계열기업군 그 자체를 여신관리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주는데, 여신바스켓비율관리 등 각종 규제의 목표치를 5대 재벌 또는 30대 재벌 전체를 단위로 해 설정·운용하는 데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1980년대 후반 경제민주화(經濟民主化)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팽배한 것을 배경으로, 경제력 집중 억제와 편중여신의 완화 등이 여신관리제도의 주요 목표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지자, 1985년 3월에는 계열기업군이 비주력업종을 신고하게 하고, 비주력업종에 기업 투자나 부동산 취득을 금지하는 등 주력업종으로 전문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로 추가되었다. 그리고 신규업종에 진출하는 경우에는 기업 투자액 또는 부동산 취득액에 상당하는 규모의 비주력업체를 처분하는 것만 자구노력으로 인정했다.
이처럼 1980년대의 여신관리제도는 기본적으로 부동산 투기 억제, 경제력 집중 억제 및 편중여신(偏重與信) 완화 등에 대한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크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여신관리제도는 정부가 성장 주도 산업을 중심으로 재벌의 합리화를 강제하는 주요 정책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이것은 여신관리제도가 단순히 은행여신의 총액한도관리라는 차원을 넘어서, 재벌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자금 사용 용도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의 여신관리제도는 시중은행 민영화라는 자유화 정책의 핵심 조치 중 하나가 실제로는 얼마나 왜곡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중은행 주식의 완전매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은행 경영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재벌의 은행차입금 규모 및 조건, 그리고 그 용도까지도 통제하는 관치금융(官治金融)의 구조를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
물론 여신관리제도가 실제로 재벌의 합리화를 유도하는 효과를 낳았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우선, 1986년~90년간 30대 재벌의 평균 자기자본비율은 17.4%에서 20.8%로 높아졌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주식시장 호황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여신관리제도가 직접금융에 의한 은행 대출금 상환을 강제한 효과는 있으나, 여신관리제도 자체가 재벌의 재무구조 개선에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89년 하반기 이후 증시침체로 유상증자가 어렵게 되자 자기자본비율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86년~91년간 30대 재벌 중 23개 재벌의 계열기업 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여신관리제도가 자구노력의무 부과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확장을 억제하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신관리제도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은행의 대출금만을 규제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재벌의 자금수요를 은행으로부터 재벌의 지배 아래 있는 제2금융권으로 구축하는 효과를 낳은 것에도 일부 원인이 있지만, 재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여신관리제도의 골격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한 것이 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89년을 기점으로 국내외 경제환경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여신관리제도는 재벌의 집중 비판 대상이 되었다. 결국 1991년 4월 여신관리제도는 대폭 개편되어, 대출금 규모 상위 30대 계열기업군별로 3개 이내의 주력업체를 선정토록 하고, 이에 대해서는 여신한도관리 규제에서 제외하고 자구노력의무를 일부 완화했다. ‘국제화 추세에 대응해 국내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재벌의 업종전문화를 유도하고 산업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주력업체제도 도입으로 인해 여신한도관리 대상에서 제외되는 대출금 규모는, 1990년 4/4분기 기준으로 5대 재벌의 경우 총대출금 10조 6천 246억원 중 40.0%인 4조 2천 528억원, 30대 재벌의 경우 총대출금 21조 2천 427억원 중 44.5%인 9조 4천 568억원에 이르렀다. 이로써 재벌의 은행차입금을 규제한다는 여신관리제도의 원래 취지는 크게 훼손되었다. 나아가 1994년에는 3개 이내의 주력업체가 아니라 3개 이내의 주력업종에 속하는 모든 계열사에 대해 여신한도관리를 면제하는 주력업종제도로 바뀌면서 여신관리제도는 사실상 완전히 형해화되었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에 진행된 정부 주도의 자유화 정책, 특히 재벌 합리화 정책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해관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행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법·제도적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공정거래법과 여신관리제도를 통해 정부가 직접 규제에 나서는 방식은 경제환경의 악화에 따라 재벌의 반발이 거세질 경우 좌초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⑶ 1990년대 성급한 대외적 자유화의 추진, 그리고 IMF 구제금융체제를 불러온 정축외환사변
이처럼 관치금융적 수단을 통해 재벌의 합리화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정책적 목적을 추구했던 1980년대의 정부정책기조는 1990년대 들어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재벌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대내적(對內的) 자유화(自由化) 정책이 실패한 상황에서 오히려 김영삼 정권은 축적위기돌파 전략으로 자본시장 개방, 경제개발협력기구(經濟協力開發機構;OECD) 가입 등의 대외적(對外的) 자유화(自由化) 정책을 성급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외개방 정책 추진을 위해 국내 산업정책을 완전히 폐기한 결과, 재벌의 투자결정에 대해서는 정부의 통제도 그리고 금융기관의 감시도 작동하지 않는 완전한 규율의 공백상태 속에서 한국 경제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國際通貨基金;IMF) 구제금융체제(救濟金融體制)로 들어가게 되는 정축외환사변(丁丑外換事變)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 또는 이른바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핵심 요소는, 자원배분의 방향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고 이에 대해 자본·노동 양 계급으로부터 헤게모니적 동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절대적 자율성에 가까웠던)’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에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전형적으로 발현되었던 영역 중의 하나가 바로 금융 부문에 대한 정부 개입이었다.
그러나 개발국가가 주도한 경제성장은 국가의 개발능력 자체를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본과 노동 모두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1990년대 초 이래 외환시장·금융시장·자본시장의 개방이 가속화됨으로써 박정희 정권은 결정적으로 붕괴되었다. 독점자본의 확립과 노동계급의 현실세력화라는 대내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금융 부문을 통해 미시적 효율성을 달성하던 국가의 능력이 제약되었고, 세계화라는 대외적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금융 부문의 거시적 안정성을 보장하던 국가의 능력이 마비된 반면, 국가·독점자본·노동간의 변화된 세력 관계를 관통하는 새로운 조정원리는 창출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어설픈 금융자율화가 시도된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그 문제점이 폭발적으로 누적되었다. 과거 개발독재시대에는 관료들의 기획 기능이 은행의 감시 기능을 대신할 수 있었지만, 1980년대 말 이후 재벌이 정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면서 그 누구도 재벌의 투자결정을 사전에 조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政經癒着)·관치금융(官治金融)의 구조는 지속되어 재벌의 투자 실패에 대한 사후 감독과 제재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는 재벌의 금융독점 및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이다. 여기에 1990년대 들어 금융개방이 성급하게 추진되어 외자(外資) 유출입에 대한 통제력까지 상실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진 것이다.
그러면, 대내적 자유화의 실패와 성급한 대외적 자유화 추진이 가져온 위기의 징후를 사전에 포착·예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재벌이 주도한 경제위기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1990년대 초 정부에 대한 재벌의 공격은 개별 정책 차원을 넘어 경제위기론으로 확대되었다. 그 이전의 경제위기론이 주로 재야세력이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다면, 1990년대의 경제위기론은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 경제의 축적구조 및 계급지형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벌이 주도한 경제위기론은 ‘고비용(高費用)-저효율(低效率)’ 구조라는 표현으로 집약되었다. 즉 한국 경제의 병은 ‘고비용 벽’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고임금·고지가·고금리·고물류비·고규제·고소비 등의 6중의 벽이 높게 쌓여 있어 경제 전체의 효율성이 향상될 수 없고, 저효율은 다시 고비용을 유발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비용-저효율 구조 주장은 과거의 경제위기론과 비교할 때 다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고비용의 한국병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바로 정부라는 비판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 높게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즉 어정쩡한 노동정책은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임금의 급상승을 유발했고, 공급규제 일변도의 토지정책은 부동산 버블을 야기했으며, 호송선단식 금융정책은 그대로 고금리로 이어졌고,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린 사회간접자본 정책은 물류비용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고비용 구조는 정부의 과잉 개입으로 생긴 정부 실패 비용(Government faliure costs)의 총합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고비용-저효율 구조 주장은 경쟁력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 가격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 경제적 위기의 주요 원인이 가격경쟁력 상실에 따른 수출부진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재계·언론 등의 위기론자들은 정책처방의 무게중심을 고비용 구조를 저비용 구조로 전환하여 가격경쟁력을 회복하는 쪽에 두었다.
그런데, 경쟁력 향상을 위한 방안으로서 생산성 향상보다는 비용 인해를 선택한 고비용-저효율 구조 주장은 이미 그 자체로 특정 계층·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효과를 발휘했다. 경제활동은 생산·분배·유통·소비의 측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위기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적하는 셈이 된다. 임금·지가(地價)·금리(金利)·물류비 등은 모두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비용이지만, 해당 생산요소를 기업에 공급하는 경제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소득이자 소비의 원천이다. 따라서 고비용·고지가·고금리·고물류비·고규제는 고비용의 문제인 동시에 분배의 문제이면서 유통·소비의 문제이다.
생산의 측면을 간과한 고비용-저효율 구조의 주장은 생산의 주체인 기업, 특히 재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으며 나아가 이들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고 지원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오죽했으면 조국을 떠나 해외 투자에 몰두할 수밖에 없겠느냐는 투다. 반면, 기업 이외의 경제 주체, 즉 노동자·토지소유자·금융기관·소비대중 그리고 심지어 정부에 대해서까지도 매우 가혹했다.
이러한 경제위기론의 효과에 따라 1990년대 재벌정책은 계속 왜곡되었으며, 특히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한 조치는 사실상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신 재벌 주도의 위기 극복 방안은, 1996년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勞使關係改革委員會)와 1997년 금융규제 완화를 위한 금융개혁위원회(金融改革委員會) 작업이 상징하듯, 기업의 저비용 구조를 창출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으로서의 재벌의 힘이 강화된 만큼 노동·시민사회의 저항도 거세진, 변화한 세력관계 속에서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시도 역시 실패함으로써 결국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로의 추락을 피할 수 없었다.
6.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정축외환사변(丁丑外換事變)의 뿌리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했는가? 설사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다 큰 실패를 낳은 성공이었을 뿐이다. 압축·비약의 경제성장은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 이상의 구조적 모순을 누적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박정희 군사독재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재벌의 성장이다.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은 정부의 개입을 거부했으며, 이것은 박정희 군사독재체제의 성공 조건을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근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체제였다.
또한 독점자본이자 천민자본인 재벌은 박정희 군사독재체제가 보다 정상적인 체제로 전환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1980년대 대내적 자유화 정책의 실패와 1990년 대외적 자유화 정책의 성급한 추진을 불러온 배경이 되었고, 그래서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박정희 정권 경제개발의 신화가 계속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사실 자체가 바로 재벌의 지배력, 특히 그 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이 얼마나 강고하게 한국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재벌은 박정희 정권 경제개발의 신화 속에서 그 스스로 신화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군사독재체제의 진정한 극복을 위해서는 재벌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개혁·진보진영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이다.
물론, 서구적 잣대에 비추어보면 재벌개혁 자체가 진보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재벌개혁은 자유주의적 과제일 뿐이다. 그러나 1980년대~90년대 정부 주도의 자유화 정책이 실패한 과정에서 보듯이, 그리고 1997년 정축외환사변 이후 국제통화기금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 역시 실패한 과정에서 보듯이, 재벌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보수진영은 자유화가 자신의 역사적 책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벌개혁이라는 자유주의적 과제를 노동·시민사회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진보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진보적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역량을 축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위로부터의 시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재벌개혁을 이루는 것, 이것이 진정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를 극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