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등 공안통치는 김지하 ‘오적(五賊)’의 현대판…“부정축재·부정선거”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라고 했던가. 권력을 잡기 이전에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국민을 속인 뒤, 집권 이후에는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는 행태는 반 백 년이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는다. ‘부전여전((父傳女傳)’이라고나 할까.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 파기가 아버지 박정희를 그대로 닮아있다. 국민에 대한 가장 엄숙한 약속을 거리낌 없이 함부로 저버린 부녀의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가 50여 년 전 아버지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조짐인 것 같기도 하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직후 이른바 ‘혁명공약’을 내세웠다.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자주경제를 건설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우리 또래의 초등학생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혁명공약을 달달 외워야 했다. 그러나 공약은 박정희 집권 17년 동안 제대로 이뤄진 것이 없다. 특히 박정희의 ‘민정이양’ 약속은 글자 그대로 공약(空約)이 되었다. 오히려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선포를 통해 장기독재를 이어갔을 뿐이다. 부정부패도 만연했다.
5·16쿠데타 10년 뒤인 1970년 시인 김지하는 당시 ‘오적(五賊)’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묘사했다. 오적은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들의 부정부패와 초호화판의 방탕한 생활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오적은 ‘십 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도(盜)자 한 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 모습을 해학과 풍자로 묘사했다.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양 휘휘감고/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 같이 높이 들고 대갈 일성/쪽 째진 배암 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잡농(雜農)으로!”
공약을 생명으로 하는 국회의원에 대한 김지하의 일갈이다. 박정희에 이토록 비판적이었던 김지하가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매우 우호적이라는 사실이 믿기지는 않지만.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써부터 대선공약 파기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형식적인 사과만 했을 뿐이다. 박 대통령이 파기한 공약은 이뿐만이 아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박 대통령의 대선 핵심공약 30개가 파기되거나 미이행 상태에 있으며, 20개가 대폭 후퇴 및 축소된 채 추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4대 중증질환 100% 국가 책임, 의료비 본인부담 상한 50만 원으로 인하, 무상보육 시행, 국민적 합의 없는 민영화 추진 없을 것, 쌍용자동차 국정조사 실시, 공공부문 비정규 폐지와 정규직 고용, 소득연계 맞춤형 반값 등록금, 기초생활법 개정으로 빈곤 사각지대 완화, 장애등급제 폐지 및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중증장애인 활동지원 24시간 보장,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 헤아리기 어려운 공약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신규순환출자 금지, 대규모 유통업 불공정행위 근절, 집단소송제 도입, 특정경제범죄 형량 강화 및 사면권 제한, 전 금융권 대주주 적격성 심사 확대 등 경제민주화 공약은 미이행 상태에 있다. 또한 군 복무 기간 18개월 단축, 2015년 전시작전권 전환 차질 없이 준비, 상설특검제와 특별감찰관제 신설 등 핵심 공약들도 온데간데없다. 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은 애초부터 매우 미흡했다. 그러나 앙상한 공약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엔 ‘원칙과 신뢰’는커녕 ‘편향과 거짓’이 가득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사죄하고 반성하기보다는 국정원 등 수구세력을 앞세워 여론조작과 공안통치를 기도하고 있다. 게다가 전교조와 공무원 노조를 시작으로 민주노조운동 탄압에 나서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공약파기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와 노동기본권까지 파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급기야 시민사회가 ‘공약 파기! 민주주의 파괴! 박근혜 정부’에게 일제히 투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16일 투쟁선포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시국농성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오는 26일엔 대규모 범국민촛불집회를 열 계획이다. 이어 11월부터는 ‘100인 100곳 1인 시위’와 ‘박근혜 공약집 다시 읽기’ 등 대중행동을 지속하고 만민공동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공약은 국민에 대한 가장 엄숙한 약속이자 사회의 비전을 압축한 미래이다. 어떤 약속보다도 엄중하다. 공약파기는 곧 정치적 신뢰의 파산이다. 혹시 박 대통령은 김지하의 지적대로 ‘공약즉공약(公約卽空約)’임을 맹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라는 구호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일까. 이제 국민은 사탕발림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
▶ 김주언 민주언론광장 간사《미디어오늘》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