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김재규는 왜 쓰러진 박정희를 확인사살까지 했을까
⑴ 확인사살한 김재규, “인간적 환멸 때문이었다”
어느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더 잔인한 달은 10월인 것 같다. 우리 나라의 현대사를 보면 4월이나 10월은 대학가에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불붙는 시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여 동안 토론과 함께 준비의 시간을 갖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것이다. 어두웠던 독재정권 시절을 살면서 우리 민중이 숱하게 겪어온 계절적 악순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2년 그 반독재투쟁의 계절 한복판에서 노골적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그 전 해에 박정희는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학생운동 간부 177명을 체포해 중앙정보부, 군 보안사, 경찰에서 고문 조사한 뒤 전원을 군대에 강제입영을 시켰다. 대학에서는 모두 제적 처분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학생운동 세력을 ‘소탕’한 뒤 박정희는 거리낌 없이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0·26궁정동총격사건을 두고 김재규 자신은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계엄사 군사재판에서 ‘민주주의 회복의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법정은 그를 혁명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란 목적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김재규는 “다수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국민들이 갈구하는 민주주의 회복의 혁명을 했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포로가 된 장군의 심정”이라고 군사법정을 비판했다.
10·26궁정동총격사건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보아야 할 문제는 김재규를 민간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다. 또 과도하게 신속한 사형집행도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난 것으로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는 점이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살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마산만 계엄령 발동 상태였으며 전국적으로 평시상태였다. 계엄령이 전국에 발동된 것은 10·26궁정동총격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이다. 따라서 평시에 발생한 10·26사건의 연루자들은 헌법상 민간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적용으로 위헌이었다. 10·26사건 연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로 현역 육군 대령인 박홍주 한 사람뿐이었다.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며, 그로부터 불과 나흘만인 5월 24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하나회 세력이 중심인 신군부가 5·18광주시민항쟁을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혼란기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처형함으로써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⑵ 군사법정에 선 10·26궁정동총격사건, 속속 드러나는 권력의 작태
10·26궁정동총격사건과 관련해 중요한 의문 중의 하나는 김재규가 왜 그처럼 단호하고 냉혹하게 박정희를 확인사살까지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후에 군사법정에서 중정요원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져 있는 박정희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으면 제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박정희가 사라져야 할 권력자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탄환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 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박정희는 한양대학교에 재학 중인 패션모델 신재순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센티미터 이내의 거리였다. 모델 신재순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심수봉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야말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요직을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관계를 생각하면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주역(周易)』「혁괘(革卦)」에 “소인(小人)은 혁면(革面)하고 군자(君子)는 표변(豹變)한다”는 말이 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 번 마음먹으면 얼굴 표정을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헌법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적 발언으로 국가안보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일으켰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 문제와 한미관계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주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 내용을 분석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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