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웃대-갱군님
포근해 보이는 아이보리색의 가디건을 두른 여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다.
여자는 커피빈의 상표가 그려진 길다란 컵을 두 손으로 움켜 쥐고 입김을 불었다.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여자는 생기있는 모습으로 입장했다.
10층 버튼을 누른 여자는 문에서 조금 떨어져 핸드백을 열어 무언가를 찾았다.
문이 닫히려하자 검정색 코트에 붉은 머플러를 두른 한 남성이 다가왔다.
시선을 핸드백으로 향하던 여자는 다가오는 남성을 위해 다급히 열림버튼을 눌렀다.
그 덕분에 팔꿈치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핸드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자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앉아 흩어진 물건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온 남성은 잠깐 망설이나 싶더니 말없이 여성을 도와주었다.
어느정도로 물건을 주워담은 여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선물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샌가 남성이 여자에게 무표정한 모습으로 먼저 주운 선물상자를 건냈다.
선물상자를 향하던 여자의 손은 잠깐 멈추었고 천천히 남성의 손에 있는 상자를 향했다.
상자를을 건내 받은 여자는 남성의 손이 얼음장 같이 차가워 섬짓 놀랐다.
여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는 것을 눈치챈듯 남성은 고개를 돌렸다.
잠깐이었지만 여자는 남성의 눈매는 날카로웠고 또한 차가웠다는 걸 느꼈다.
"감사합니다."
"……."
아무런 말이 없는 남성의 시선은 특별한 것 없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향해있다.
여자는 남성이 층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에 대해 조금은 의아한 마음이었다.
엘리베이터는 6층을 지나가고 있었고 남성에 뒤에 자리잡은 여자는 바닥만을 보았다.
그때였다.
묵직한 기계의 찢어질 듯한 마찰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멈추었다.
여자는 그 반동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몇 번의 깜빡임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은 어두움으로 가득찼다.
유일한 빛은 버튼 계기판 위에 달려있는 작은 비상용조명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아무런 행동이 없는 남성의 뒷모습,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기요……."
"말씀하십시오."
남성은 중저음의 차분한 말투로 서두르지도 뜸들이지도 않게 대답했다.
고요함을 채운 엘리베이터 안에서 침을 삼키는 여자의 소리는 크게 들렸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여자는 카페빈에서 주문한 코코아를 손에 꽉 쥐고 말을 이었다.
"이 엘리베이터, 고장난거 같은데……."
"비상용 인터폰이 있으니 건물관계자와 연락해보겠습니다."
"아, 네……."
남성은 우측에 있는 비상용 인터폰을 이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남성은 아무런 말 없이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여자는 아직까지 벽에 몸을 기댄채로 남성에게 물었다.
"안 받아요?"
"예."
"그러면 어떡하죠…?"
"이곳에 승강기 보수업체 비상연락처가 적혀있을 겁니다. 허나…"
"…왜 그러세요?"
"여성분께서 연락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남성의 말을 들은 여자는 남성에게 이유를 물으려고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남성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는 추락하지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벽에서 등을 때고 한발 두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상용 조명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이 있다하더라도 무척이나 어두웠다.
여자는 가디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의 밝기를 올렸다.
비상용 인터폰 아래 남성의 말처럼 승강기 보수업체 비상 연락처가 있었다.
휴대전화에 비상 연락처를 입력하면서 여자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이때문에 몇번이나 숫자를 입력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귓가에 전화기를 가져가며 통화버튼을 누르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통화권이 이탈되어 통화의 수신과 발신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긴급통화기능을 이용해보았지만 소망과는 반대로 무의미했다.
여자는 주저앉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안으로 파묻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여성의 행동을 보고는 말없이 있었다.
적막함과 고요함만이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작은 공간에 두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차가웠다.
말없이 고개를 파묻은 여자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숨소리 조차 내지 않던 남성은 코트를 벗어 앉아있는 여자에게 덮어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큰 아파트니까 곧 엘리베이터를 탑승하려는 사람이 올겁니다."
"…그렇겠죠? 저기, 아까 보니까 몸이 되게 차가우시던데 괜찮겠어요?"
"일 없습니다."
"그래도… 저기, 제가 마시던거지만 따듯한 코코아인데 마셔보실래요?"
"…전화기는 기종과 통신사마다 통화의 차이가 있으니 자리를 옮기며 연락하십시오."
"네? 그럴게요…"
여자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손을 흔들면서 통신이 가능한 위치를 추척했다.
남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별다른 행동을 하지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코트를 벗은 남자는 붉은갈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정전의 어두움은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있는 남자의 존재를 부정하는듯했다.
여자는 팔의 감각이 둔해졌는지 손을 아래로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자는 남성의 얼굴쪽으로 밝은 전화기의 화면을 갖다대며 말했다.
빛줄기가 남성의 얼굴에 비치자 여자는 다시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남성의 얼굴은 핏기없는 창백한 색채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정색 눈동자는 깊은 심해처럼 어두컴컴하고 차가웠고 막연했다.
허나 남성은 처음부터 그랬듯이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여자는 어색해진 분위기가 싫었는지 뜸들이기를 포기하고 말을 꺼냈다.
"천장 위로 올라가면 통화가 가능할까요?"
"내부에서는 열 수 없습니다."
"…아."
냉정한 남성의 말에 여자는 포기했는지 엘리베이터 구석자리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빛은 주노란 천장의 비상용 조명과 여자의 얼굴을 비추는 작은 빛, 둘 뿐이었다.
여자는 전화기를 눈 앞까지 끌고와 바라보며 화면을 손가락으로 튕겨댔다.
다닥다닥하는 무척 신경쓰이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작은 공간안에 울려퍼졌다.
이 따닥거림은 전화기 화면을 때리는 손톱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떨리는 턱이 이를 부딪히게 만들었다.
이 불협화음에도 남성은 신경쓰지 않는지 가만히 서있기만 할 뿐이다.
"…저기요, 제가…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그런데요……."
"말씀하십시오."
"휴대전화가 있다면 좀 켜주실래요? …밝아지면 나을 것 같아요."
"없습니다."
"네?"
"없습니다."
"아… 두고 오셨나봐요?"
"……."
여자는 긴 한숨을 내뱉었고 화면조명에 비친 입김은 길게 뻗어나갔다.
따닥거림은 멈추었지만 그보다 더한 불협화음의 분위기가 공간에 가득찼다.
그때 모든 것에 무관심해보이던 남성의 시선이 드디어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또 쭈그려 앉아 무릎 위에 팔짱을 껴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주시네요."
"……."
"저기……."
"말씀하십시오."
"저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나 보이는데 되게 예의바르시네요. …좋으신 분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게 뭐에요? 하하…"
"계속 말하십시오."
"음, 그럼. 혹시 저랑 같은 10층에 살아요? 엘리베이터 타고나서 한번도 버튼 안 누르던데."
"같은 층에 볼일이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럼 이 아파트에 사는 분이 아니시네요?"
"예."
"…무슨 볼일이 있어 가시나요?"
남성은 뜸을 들이고서 시선을 여자로 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두 손을 넣어 아래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얼핏 자세의 윤곽만이 보였지만 남자의 분위기를 어느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성의 분위기는 어둠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였다.
그때 갑자기 남성은 주머니에서 빠르게 손을 빼내어 입으로 갖다댔다.
두번의 큰 기침 후, 남자는 까만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보다 그 선물상자, 리본으로 묶은 걸 보니 꽤나 정성을 들인 것 같습니다."
"아! 그거, 우리 아빠가 오늘 생신이라서 준비한 선물이에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여자는 선물상자 얘기를 꺼낸 후 밝아진 말투와는 다르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이 사색에 잠겨 턱을 팔에 괴었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멍한 눈동자를 아래로 내린 후 말을 이어갔다.
"그간 곁에 있을 시간이 없어 딸 역할을 못해서 오늘 몰래 찾아가서 놀래켜드리려고 했는데…"
"이리 될줄 몰랐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늘 혼자였어요, 아빠는 사업가라서 출장을 가느라 늘 바빴거든요."
"……."
"그 때문에 관심을 끌려고 일탈도 많이 했어요. …늘 속만 썩였죠."
"…그렇습니까."
"얼마전에 아빠가 크게 다쳐서 정말 위험했었는데 그때서야 깨달았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아빠의 소중함을…. 하하… 뭐, 지금은 사업도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지만요."
"그렇습니까."
"음, 네. 그런데 있잖아요. 처음보는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게…."
"…잘 들었습니다."
"… 역시, 좋으신 분 같아요. 혹시, 전화…번호… 물어봐도 될까요?"
"죄송합니다만 전화기는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 그러면… 저희집은 205호니까 언제 한번 오세요…!"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팔짱 안으로 고개를 다시 묻었다.
남성은 여자의 마지막 말을 듣고 발꿈치가 조금 뒤로 밀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원래 위치로 발을 옮겼다.
남성은 고개를 여성의 반대방향으로 돌렸다.
늘상 무표정을 유지하던 남성의 얼굴에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선물상자… 안에 무얼 넣었습니까?"
그때 엘리베이터 문 밖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고 이윽고 여자는 구조를 요청했다.
이곳에 주거하는 아파트 주민과 경비원이 달려옴과 동시에 정전도 끝났다.
여자는 자신을 폐쇄공포증으로 부터 구해준 남성에게 코트를 돌려주려고 했다.
남성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린체 바라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침에 구입한 새옷입니다. 아버지 선물로 드리십시오."
"이 옷 비싸보이는데 받을 염치가 없어요……."
"제게 고맙다고 세번 말한거 기억하십니까?"
"아… 그야 당연히…"
"제 평생 들은 고맙다는 말보다 오늘들은 고맙다는 말이 더 많습니다."
"…그럼 이거 드세요, 아직 따듯한 코코아에요."
"…감사합니다."
남성의 말이 끝나고 나서 곧장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민과 경비원이 이들을 도왔다.
주민이 여자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이에 남성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와 함께 거실에서 사과를 깎아 먹는 여자는 티브이에서 방영중인 뉴스를 보았다.
"아빠! 내가 준 생일 선물 어디에 뒀어?"
"응? 우리 딸이 준거니까…"
다음 소식 입니다. 한 사업가를 살인해 달라는 의뢰인의 요청을 받은 청부업자가
의뢰인을 죽이고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와 그간에 저지른 범죄를 자백하는 사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