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치의 지형을 바꾼,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
민주당의 차기 대권후보로 발돋움하려는 노무현에게 4·13총선에서의 낙선은 충격이 컸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다”며 패배의 충격을 훌훌 털고자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부산시민들을 탓하기에 앞서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총선 다음날 노무현은 월간《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경과 정치관 그리고 향후 전망을 자세히 밝혔다. 1995년부터 줄곧 그를 취재해온 기자가 “그처럼 기운 없고 침울한 표정은 처음”이라고 했을 만큼 그는 크게 낙담해 있었다. “처음에는 거의 단답형으로 응대하던 그는 대화가 계속되면서 겨우 말을 ‘회복’했으며, 3시간가량의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고 했다.
노무현은 선거사무소 해단식에서 “나는 여러 차례 시험도 실패해보았고 낙선도 많이 해봤다. 매 순간이 앞이 캄캄하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에 여러분도 마음이 많이 상했겠지만 잊어버리자. 길게 보면 민심이라는 것이 천심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역사의 흐름이지만 한 시기 한 순간을 거꾸로 가는 경우도 있다. 이 순간일 뿐이다. 결국 다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믿자. 그냥 한 번의 선거로 받아들였으면 한다”고 했다. 또 그는 “나는 부산을 택했는데 부산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는 왜곡은 “부산 사람들이 새로운 선택을 할 준비가 돼 있는데도 선택할 만한 정치인이 없으면 되겠느냐? 그래서 부산에 내려왔는데 아직 부산 사람들이 준비가 안 돼 있던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바로잡아 주었다.
그는 유권자들의 선택에 불만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유권자들의 선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옛날의 충신은 임금한테 듣기 싫은 소리를 한참 하다가 귀양을 가고, 귀양지에서는 아침마다 북쪽을 보고 절을 했다. 그래야 충신이었다. 지금은 임금의 자리에 국민이 올라가 있다. 그런데 감히 내가 어떻게 섭섭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부산에 내려온 것은 한국 역사에서의 대립과 반목, 그것을 한번 극복해보자는 것이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정치지도자가 국민의 대립과 반목, 심지어 심한 증오심을 부추겨 외국과 대결하거나 내부에서 대결하게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국민들에게 가혹한 재양을 초래한 경우가 많았다.(……)아쉽게도 이번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언제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해보거나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몸을 낮췄다.
그는 “1999년 1월 한나라당의 마산집회에서 이회창 총재가(지역감정을 자극하는)이상한 소리를 하기에 맞서 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부산에서 출마한 것인데, 상대인 한나라당의 허태열 후보는 한 술 더 떠 ‘DJ가 부산경제를 죽이려고 삼성자동차와 금융기관을 문 닫게 했다’는 둥 근거 없는 모함으로 지역감정을 극도로 부추겼다”고 개탄했다. 노무현은 끝으로 “내 정치철학은 살아 있지만 언제 나를 필요로 할지 알 수가 없다. 원외가 무엇을 하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힘이 든다.(……)선거는 인간을 너무 퇴폐하게 한다. 인간적 모멸감마저 느꼈다. 당분간 정말 쉬고 싶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낙선사례를 마친 그날 밤 노무현이 그간 쌓인 피로를 푸느라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사이에 ‘사건’이 일어났다. ‘바보’ 노무현을 구하기 위해 마침내 민초들이 ‘봉기’한 것이다. ‘노사모’의 초대 회장을 맡은 영화배우 명계남의 증언에 따르면 “동서화합을 위해 부산에서 출마한 노무현이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하자 이를 안타까워 한 많은 네티즌들이 노무현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격려의 글들을 쏟아내는 열기 속에서 이정기(늙은 여우) 님이 팬클럽을 만들자는 제안을 게시판에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김민정(절세미녀) 님이 임시 게시판을 개설하고, 여기에 다시 보조 게시판을 만들고, 황의한 님이 서버와 도메인을 제공하고 강영세(런킴) 님이 게시판 통합용 페이지를 제작하는 등 모든 것이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이후 각 지역별 모임을 결성하기로 하고 5월 7일 대전에서 각지역 노사모 회원들이 모여 명칭과 도메인명, 회비, 회칙 등 팬클럽 창립에 관한 협의를 하였고, 마침내 2000년 5월 17일, 최초의 노사모 공식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그리고 6일 노사모 창립총회가 대전에서 개최됨으로써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 관군이 일패도지하고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구한말 군대가 해산되고 국권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즈음에 의병들이 봉기하여 왜적과 맞서 싸운 역사가 있는데, 노무현에게 ‘노사모’는 그런 의병대였다. 실제로 조직도 돈도 홍보수단도 없던 노무현이 재기하여 대권주자가 되고 마침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이들 ‘의병’들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다.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총선에서 진날 밤 ‘노하우’ 홈페이지에 글 잔치가 벌어졌을 때 누가 제안을 했다. “우리 따로 모이자!” 2000년 6월 6일 대전대학교 앞 조그마한 PC방에 60명이 모였다. 여기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노사모 창립총회를 했다. 학생ㆍ가정주부, 아이들을 데리고 온 40대 직장인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광날모’라는 모임도 있었다. 여름에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날을 새는 모임이라고 했다. 초대를 받아 가 보니 선거 자원봉사를 해 준 분들도 더러 있었다. 여고생이 하나 있어서 그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무난히 들어갔다고 해서 안심을 했는데, 대학에서 또 나를 지지하는 모임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배우 명계남 씨와 문성근 씨, 시인 노혜경 씨도 노사모에서 알게 되었다. 노사모는 나를 불러 놓고 질문도 하고 짖궂은 요구도 하면서 행사를 진행하곤 했는데, 서투르고 어색했지만 모두들 웃고 떠들면서 즐거워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63쪽.
당장의 이해득실보다 오로지 신념의 길을 투박하게 걸어온 ‘변방의 정치인’ 노무현에게 천군만마의 응원군이 생겼다. 자발적인 모임이니 돈이 들어갈 일도 조직을 관리할 필요도 없었다. 회원들은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만들어 모임의 비용을 썼다. 이로써 “한국인이 가진 아웃사이더 기질을 온몸에 농축한 상징적 인물”(강준만)노무현이 ‘노사모’의 등장과 함께 ‘세력’을 갖게 되었다. ‘노사모’는 지역별, 연령별, 각종 동우회 등으로 역할 분담되면서 세를 결집해나갔다. 동서화합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것이 이들의 의지였고 목표였다.
이와 관련하여 시사평론가 진중권은 ‘안티조선’ 사이트에서 그런 “노무현의 폭발력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고 했다. “노사모 회원이 거의 만 명이다. 이 정도의 자발적 지지자를 가진 정치인은 노무현이 유일하다. 원래 정치는 이래야 한다. 이게 표준이어야 한다. 노사모 회원 만 명은 진짜 민주당원, 즉 당비를 제대로 납부하는 민주당원의 수 6천명을 능가하는 수다. 이게 뭘 말하겠는가? 민주당 자체의 구태의연함과 노무현의 참신한 개혁성의 콘트라시트이다. 게다가 이인제는 필패지만, 노무현이 경선에서 후보만 되면 그 잠재적 폭발력을 그 누구도 예상할 수가 없다.” 전에 없던 ‘정치현상’을 접한 진중권 중앙대학교 겸임교수의 예리한 분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전국의 지지자들이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인터넷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각 지역별 다양한 모임까지, 자발적이지만 조직적으로 활발하게 펼쳐진 ‘노사모’의 활동은 단순히 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활동’의 무대는 언론이었다. 신문·잡지·방송을 통해 ‘정치’가 이루어졌다. 간혹 거리정치 혹은 광장정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특별한 일이고 일상적으로는 언론이 주 무대가 되었다.
그런데 ‘노사모’의 등장과 함께 무대와 주역이 바뀌게 되었다. 족벌신문들과 방송이 여론을 좌지우지함에 따라 정치인들이 언론에 목을 매던 현상이 크게 바뀐 것이다. ‘노사모’의 등장은 정치와 미디어의 상관관계를 근저에서부터 바꿔버렸다. 인터넷의 보급과 네티즌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구조적으로 노무현은 대선 승리는커녕 대통령후보도 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사모’의 등장은 정치 판도를 뒤흔든 혁명적 사건이라 할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구세주’에 감동한 노무현은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노무현을 대통령 만드는 것이 노사모의 목표라고 했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그동안 정치권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민들이었다. 회원이 몇 천명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노사모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거대 보수언론사와 싸울 때 이 사람들이 종횡무진 인터넷을 누비면서 사이버 여론을 만들어 나갔다. 소액이지만 여러 사람이 후원금을 만들어 주었다. 모임을 하면 십시일반 돈을 걷어서 스스로 모든 비용을 치렀다. 늘 돈에 쪼달리던 나에게는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노사모는 기존 정치인 후원회나 지지 단체들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참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생활수준이나 학력이 비교적 높은 편인 30대 회사원들이 주축으로 원칙·정의·진실·인권·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노무현이 추구해온 가치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무현에 열광하고 그에게서 우리 나라 정치의 희망을 본 것이다.
노무현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0년 5월,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를 공개했다. 그 자리에 현직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다른 대선 후보들은 다들 자파의 현역 의원들과 함께 세를 과시했지만 그는 그야말로 단기필마였다. 갈 길은 끝도 안 보이게 멀고 첩첩산중의 험로였다. 그간의 정치 역정으로 보건대 그의 숙명이었다.
˝하나의 큰 산을 넘으면 더욱 높고 가파른 태산 준령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너머로 가면 나의 의지를 일순간에 꺾어버리는 또 하나의 큰 강이 버티고 있었다. 단순한 의지 하나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 정치인의 길이었다. 그것은 도전의 의지만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그 산의, 또 그 강의 높고 깊음을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변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넜다.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숙명이었다.˝ - 노무현,〈내가 선택한 길을 내 뜻대로 걸었다〉,《노무현:상식 혹은 희망》, 행복한책읽기, 2003년, 127쪽.
노무현이 출마를 염두에 둔 것은 제15대 대선 때부터였다. 그런데 문재인을 비롯한 지인들이 시기상조를 들어 말려서 출마를 보류했지만 그때부터 차기를 겨냥하여 착실히 준비하면서 더욱 뜻을 다졌다.
˝그가 대선출마 의사를 나에게 처음 밝힌 것은, 15대 대선 때 여당 경선에 불복하고 탈당해서 독자적으로 나온 이인제 후보의 출마를 보고나서였다. ‘그런 반칙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며 당신이 야당 후보로 나서겠다고 했다. 그 때는 모두 반대했다. 나도 반대했다. 이르다고 봤다. 목표를 차기에 두고 해보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청문회 스타’와 ‘원칙’의 좋은 이미지가 있었지만, ‘명패 던지기’와 ‘의원직 사퇴’로 인한 돌출 이미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갑작스런 출마가 자칫 돌출적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때부터 그 뜻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착실히 준비해 나갔다. 기획팀을 두기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 문재인,「문재인의 운명」, 가교출판, 2011년, 92쪽.
2000년 총선 당시 노무현은 부산으로 내려와서 출마할 때도 대권 의지를 보였다. 측근들이 그렇다면 더욱 서울 종로에서 출마해야 한다며 부산행을 말렸지만 그는 기어이 부산에서 출마하여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만약 그가 서울에서 출마했거나 부산에서 당선됐다면 대선 출마는 좀더 미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의 조화를 누가 알겠는가? 그는 또 험지로 내려가 떨어졌고, 그로 인해 오히려 엄청난 성원을 받으면서 ‘국가 지도자’로서의 기대감을 높였다. 그에게로 향한 여망은 ‘노사모’로 결집되어 그를 그 길로 끌어냈다. 2001년 9월 6일, 그는 마침내 부산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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