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Yoshimata Ryo- Depression of the Director (장미 없는 꽃집 OST)
(곳곳에 많은 엑소 곡 가사가 숨어있으니 잘 찾으며 보시길♡)
태양계 외 행성 Exoplanet.
'Exoplanet'은 태양계 행성들을 관리하고 우주의 흐름을 이어가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그들은 아마 첫번째로 ‘붉은 눈’을 입에 담을 것이다.
평화로 둘러싸인 세계를 상징하는 ‘생명의 나무’를 해치우려 든 ‘붉은 눈의 기운’을 막아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것이다.
고요한 우주의 평화를 기어이 깨버린 붉은 눈은 exoplanet과 그들에게서 보호받고 있는 생명의 나무를 공격하려 들었다.
생명의 나무는 스멀스멀 감지되는 붉은 눈의 기운에 자신의 위험을 인지했다.
생명의 나무는 평화를 상징하고 또 그에 마땅한 성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붉은 눈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될 성스러운 힘.
생명의 나무는 자신 스스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에 생명의 나무는 곧 자신을 덮칠 붉은 눈의 기운에 대비해 자신의 힘을 12개로 나누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봉인했다.
봉인해 힘을 지킨다면 붉은 눈이 힘을 크게 키워 다시 공격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완전히 소멸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exoplanet은 여느 때처럼 태양계 행성들을 훑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그들은 하나의 별에서 멈춰섰다. 붉은 눈의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일까.
심상찮은 기운에 멈춰선 별의 이름은 ‘지구’, 유일하게 생명이 존재하는 행성이었다.
만약 정말 지구가 붉은 눈의 기운에 깃들어버린 것이라면, 붉은 눈의 속셈은 뻔했다.
지구, 그러니까 생명의 막강한 힘을 빼앗아 생명의 나무에 대적하려는 것이겠지.
exoplanet은 이를 막을 의무가 있었다.
이에 그들은 ‘EXO'(엑소)를 지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엑소’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시간을 제어한다던가, 자연재해를 자유자재로 일으킨다던가..?
엑소는 지구로 보내졌다.
붉은 눈의 기운이 깃든 인류를 살피고, 후에 구해내고 붉은 눈을 사그라트릴 책임을 짊어진 엑소는,
마치 거칠어진 수면의 요동을 재우는 블랙펄과도 같았다.
엑소는 지구로 이동했다.
지구는 생각보다 훨씬 추악하게 변해버린 후였다.
엑소가 익히 알고 있던 지구는 지금의 지구와는 사뭇 대조되었다.
서로 감정을 나누고 사랑하던 아름다운 세상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온통 사랑하는 법을 잊고 배려하는 맘을 잃은, 살의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쁜,
생명도 감정도 따듯함도 없는 삭막한 세상만 존재할 뿐이었다.
붉은 눈의 기운이 가득 깃들어 차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만큼 검게 물들어버린 인간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죽고, 죽이고 싸우며 자신만의 이익만을 외쳐대는,
끝을 보고도 아직 부족하단 듯이 더더욱 추악하게 변해가는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정은 있는지, 심장이 뛰는 사람이란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검게 물들어버렸다. 그래, 그들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게 아니었다.
등을 돌린 채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기 바쁜 인간들은 마치 기계같았다. 눈의 생기를 잃고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듯 완벽히 차갑게 얼어버린 기계.
붉은 눈의 기운이 깃들어 온통 추악하게 물들어버린 인간들 속에서 오직 그녀, 한 소녀만이…….
어둠이 진한 세상에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같은 영혼을 가진,
눈이 멀어 처음부터 어떤 빛도 무색하게 할 만큼 빛나는 소녀는 붉은 눈의 기운이 깃들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녀는 빛났다. 소녀의 영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깨끗했고, 소녀의 미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엑소는 소녀를 닮고 싶었다.
소녀의 순수한 마음이, 소녀의 깨끗한 눈이 너무나도 닮고 싶었다.
소녀의 순수한 마음이, 소녀의 깨끗한 눈이 너무나도
좋았다.
소녀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감히 붉은 눈의 기운이 침범할 수 없었던 그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딱 한번만, 그녀의 세상에서 그녀와 발을 맞춰 걸어보고 싶었다.
소녀와 마주친 두 눈에서, 소녀의 입가에 번진 미소에 엑소는 심장이 뜀을 느꼈다.
그녀에게 반하고 만 것이다. 언어의 틀에는 채 담지 못할 찬란함을 가지고 있는 소녀에게, 엑소는 반해버렸다.
소녀는 엑소에게 미카엘보다 눈부신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엑소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랑이나 하자고 지구로 온게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스스로를 자문했다.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그래서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려 했다.
엑소는 그렇게 스스로 소녀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소녀의 맑게 빛나는 눈을 또다시 마주한 순간 모두 다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소녀의 조그만 행동에도 엑소는 홀린 듯 반응했다. 시선은 자연스레 언제나 그녀를 향했다.
소녀를 사랑하지만 엑소는 뒤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다가서기엔 소녀는 너무 높이 있는, 은하수같은 존재였으니까.
그저 하릴없이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부디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너마저 붉은 눈의 기운에 깃들어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소녀와 함께, 소녀와 같이 하고픈 마음은 커져만 갔다.
결국 엑소는 소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사랑해요.” 필요하다면 날 바꿔도 괜찮으니까, 그대가 살고 있는 곳에 나도 함께 데려가 줘. 그게 세상의 끝이라도 뒤따라갈게. 너 하나만 바라며 마음으로 믿으며 살 수 있어.
매일 365일 1분 1초의 틈도 없을 만큼 사랑할게.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천국일테니.
엑소는 붉은 눈의 기운으로부터 소녀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소녀를 지키는 빛의 기사처럼, 그녀의 수호자로 그녀를 지켰다.
붉은 눈의 기운은 소녀의 순수함과 깨끗함을 시시탐탐 노렸다.
소녀를 물들일 수만 있다면 자신의 힘은 한층 더 커질 테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엑소는 소녀를 지켜내었다.
웬디를 괴롭히던 짖궂은 후크 선장을 해치운 피터팬처럼, 오직 소녀만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소녀도 차즘 엑소에게 마음을 열어갔다.
그저 엑소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냥 엑소가 좋았다. 항상 옆에에에에 있어주는 엑소가 듬직했다.
소녀는, 엑소에게 마음을 전했다.
소녀에게서 대답을 들은 엑소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행복했다.
내가 눈감아 기도한 이 순간이, 얼마나 손꼽아왔던 그 날인지.
우리 함께 내딛는 이 첫 걸음은 심장이 왜이리 미친듯 뛰게 하는지, 널 보면 내 눈이 왜이리 눈부셔하게 돼는지..
약속할게. 잘할거야. 기대만큼 나 역시 행복하게 해 줄게.
소녀와 엑소는 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더럽혀지지 않은 아름다운 공간에서 엑소와 소녀는 수많은 감정들을 나눠주고 배워갔다.
소녀는 눈을 좋아했다.
그것도 끊임없이 내려서 소복히 쌓이는 새하얀 눈을.
엑소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눈을 내리게 했다.
눈을 본 소녀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서로 함께라면 눈이 녹을 때의 한기도 말끔히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엑소에게 소녀의 존재는 점점 커져갔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 감정은 절대적이었다.
서로의 곁에 있으면 소녀와 엑소는 더욱 빛났다.
언젠가 자신은 지구를, 소녀의 곁을 떠나야만 할 터였다.
엑소는 곧 마주할 현실을 피하고만 싶었다.
영원히 소녀의 곁을 지켜주게 해달라고, 간절이 바라고 바란다면 이뤄질까? 동화 얘기처럼.
복잡한 엑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엑소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아오는 소녀는 한없이 맑기만 하다.
부서지는 햇살은 소녀만을 비추는 것인지, 애석하게도 엑소는 점점 더 행복해졌다. 이렇게 행복해도 돼나 싶을 만큼.
소녀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엑소는 불안해졌다.
그녀가 행여나 자신때문에 다치지는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했다.
자신의 힘을 차즘차즘 무너뜨려가고 있는 엑소의 존재를 붉은 눈이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언제 붉은 눈이 엑소를 공격할지 몰랐다.
언제 붉은 눈이 소녀를 해치려 들지 몰랐다.
언제 소녀의 영혼이 검게 물들여질지 몰랐다. 자신때문에.
엑소는 그게 너무 불안했다.
그래서 소녀를 지키기 위해서 붉은 눈의 기운을 거두는데 온갖 힘을 쏟았다.
하지만 붉은 눈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에 엑소가 붉은 눈의 기운을 사그러트리려할수록 엑소의 상처는 늘어만 갔다.
소녀는 사랑하기에 엑소가 바뀌길 원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엑소에게 자꾸만 생기는 상처가 너무 싫었다.
언젠가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붉은 눈에 대해서.
엑소는 사람들이 바뀌어버린 이유가 붉은 눈이라고 했다.
행여나 대답하기 곤란할까 해맑은 말투로 붉은 눈이 너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물었지만, 엑소는 그저 비밀이라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엑소가 이렇게 다치고 지쳐가는 이유는 붉은 눈이 틀림없었다.
소녀의 확신에 찬 직감이었다.
붉은 눈의 기운을 거둬가는 일, 그거 그만하면 안돼?
소녀는 물었다. 엑소에게 부탁했고, 조르기도 해봤다.
하지만 엑소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엑소는 자신의 임무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소녀가 알게 된다면 크게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멋대로 정의를 내려버린 엑소는 이유모를 자괴감에 소녀의 앞에 당당히 서지 못했다. 동시에 소녀에게 자기도 모르게 입을다물어 버렸다.
그러고는 붉은 눈의 기운을 잠재우는 일에 더욱 전념했다.
그것이 소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것은 소녀를 향한 사랑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자꾸만 지속되는 엑소의 차가운 반응에
자꾸만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늘어감에
자꾸만 보여지는 엑소의 시린 등에
소녀는 이젠 더이상 엑소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멋대로 정의를 내려버렸다.
나만은 널 지켜주고 믿어주고 지켜주고 달래줄게. 니편이 될게. 네 곁에서 절대 안 떠나.
소녀는 미소지으며 약속하던 엑소가 그리웠다.
오늘도 어김없이 엑소는 붉은 눈에 대적하러 자리를 비웠다.
소녀와 엑소가 함께 만든 더럽혀지지않고 아름다운 공간에는 소녀만이 혼자 서있었다.
소녀는 분명히 엑소를 사랑했다.
하지만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드니 북받치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땅으로 떨어진 눈물은 소복히 쌓인 눈을 녹였다.
이렇게 엑소가 자신을 위해 내려준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는데, 정작 엑소는 어디있는건지.. 소녀는 엑소가 미워졌다.
하지만, 엑소때문에 차오르는 서러움의 눈물이 땅으로 곤두박실치는 그 찰나에마저도
소녀는 엑소가 다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무슨일이 있어도 엑소는 다치면 안된다.
차라리 내가 사라질 지언정, 엑소는 온전히 무사해야 한다.
엑소는 붉은 눈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단걸 일찍이 알아차렸다.
이렇게 된 마당에, 붉은 눈이 언제 공격해올지 몰랐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소녀도 위험해지게 될것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그녀는 다치면 안된다.
내가 사라질 지언정, 그녀는 온전히 무사해야 한다.
붉은 눈은 날로 강해지는 엑소, 날로 약해지는 자신을 보며 위험을 직감했다.
엑소의 힘이 갈수록 강해지는 이유가 뭘까?
붉은 눈은 엑소를 주의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붉은 눈은 자연스레 소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엑소에게 전부는 소녀였으니까.
그렇다면 일은 쉬웠다.
엑소가 날로 강해지는 이유는 단연 '소녀'였다.
소녀만 없에면 되는것이다. 굳이 많은 힘을 들여가며 엑소를 대적할 필요는 없었다.
소녀만, 소녀만 물들이면 되는거다.
엑소는 날로 험해지는 붉은 눈의 기운의 횡포에 소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소녀를 지키기 위해 으르렁댔다.
그녀가 없다면 엑소도 없는거다. 엑소는 필사적이었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울 날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붉은 눈은 불시에 엑소를 공격했다.
소녀를 목적으로 두고 정말 순식간에, 공격해왔다.
소녀는 놀란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주저앉았고, 붉은 눈은 이를 놓치지 않고 소녀를 공격하려 들었다.
엑소는 그런 붉은 눈을 막아섰다.
날이 선 눈빛과 베일 듯한 긴장감에
붉은 눈은 소녀를 노리고 있다. 엑소는 직감했다.
엑소는 그길로 소녀에게 몸을 돌려 다가갔다.
너는 내가 지킬거야. 언제나처럼.
엑소는 벌벌 떨고있는 소녀를 감싸안았다.
그녀 곁에서 모두 다 물러나.
그녀를 넘본다면 나를 먼저 넘어봐. 엑소는 경고했다.
붉은 눈을 향한 엑소의 분노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붉은 눈은 엑소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소녀를 향한 붉은 눈의 기운은 오히려 갈수록 억세졌고, 엑소는 이 기운들을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날이 선 눈빛과 베일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흐린 공간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소녀를 노리는 붉은 눈의 시선에 엑소의 분노는 한층 더 높아졌다.
붉은 눈은 교활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엑소보다는 뒤에서 떨고 있는 소녀를 호시탐탐 노렸다.
붉은 눈과 엑소, 두 거대한 존재의 싸움에 허점이 보이려는 그 찰나,
붉은 눈의 손길은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엑소는 그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땐 붉은 눈의 기운은 이미 소녀를 감싸기 시작한 뒤였다.
소녀는 고통스러워했다.
엑소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지라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붉은 눈의 기운에 검게 물든 인간들은 전혀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가니까
소히 말해 죽는거와 다름없는 삶을 말이다.
그녀가, 나의 소녀가 아파한다.
엑소의 누르고 눌러왔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말았다.
검은 그림자가 엑소의 내면에서 깨어났다.
붉은 눈을 마주한 엑소의 깊은 눈에선 불꽃이 튀었고,
엑소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만큼 사나워졌다.
처음으로 일어난 엑소의 폭주였다.
엑소의 폭주에 붉은 눈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붉은 눈은 조용히, 또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엑소의 공격에 타격을 입었다기 보단 소녀를 검게 물들이는것에 성공했으니 스스로 돌아갔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엑소의 분노로 일그러진 눈이 안정을 되찾았다.
다시 이성을 되찾은 엑소의 눈은 급히 소녀를 좇았다.
텅 비어있는듯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
그 공허하고 새까만 눈이 엑소를 맞았다.
생기있고 아름답던 소녀의 눈은 붉은 눈의 기운에 깃들어 점점 짙은 회색을 띄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텅 빈 눈이었다. 살아 숨쉬는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소녀가 변해가고 있다.
확실한건 소녀가 붉은 눈의 기운에 깃든 상태로 살아가는건 죽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엑소는 여지껏 그런 사람들을 수도없이 봐왔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인간이란 본래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존재와 교감하고 사랑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검은 힘에 물들어 자신을 틀에 가두고 다른 사람을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은 진정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의미했다.
엑소는 도저히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빛나야 하는 소녀였다.
누구보다도 깨끗해야 하는 그의 소녀였다.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하는 엑소의 그녀였다.
엑소는 소녀의 손에 칼을 그러쥐어주었다.
그러자 소녀가 잠시 움찔함이 엑소의 손을 타고 느껴졌다.
잘 들어. 네가 지금 내 심장을 찌른다면… …
"너 대신 내가, 물들게 될지도 몰라. 아직 늦지 않았어."
넌 순수한 존재로 남아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네게 깃든 붉은 눈의 기운이 내게 옮겨올 지도 몰라.
더는 망설이지 마 제발 내 심장을 거두어 가.
그래 날카로울수록 좋아 달빛 조차도 눈을 감은 밤에.
어둠이 걷히고 나면 다 없었던 일이 될 거야.
네가 나를 만나지 않았던 그때로 돌아가는 거야.
사라지는건 네가 아니야. 내가 될거라고.
어두컴컴한 고통의 그늘 위에서 내가 무참히 무너져도
그마저도 널 위해서라면 감당할 테니, 제발 망설이지는 말아줘.
더 늦기 전에, 네가 다시 깨끗해질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나버리기 전에
눈부신 사랑으로 남을 수 있게 차라리 그 칼로 날 태워줘
엑소의 부탁을 넘어선 애원에도 소녀는 끝내 엑소의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엑소에게 소녀가 중요한만큼 소녀에게도 엑소가 간절했을테니까.
비록 엑소 때문에 쏟아낸 눈물이 많을 지라도, 자신이 엑소를 사랑함은 변한 적이 없었으니까.
소녀는 자신때문에 엑소가 사라져버리는걸 원치 않았다.
엑소는 붉은 눈의 기운에 물들어 소녀가 사라져버리는걸 원치 않았다.
점점 눈에 생기를 잃어가는 소녀와 그 옆에서 눈물을 떨구는 엑소.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도 사랑하는 엑소의 눈물을 보며 눈물이 멈출 줄 모루는 소녀.
두 남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 눈물은 곧 절망이 되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위태로운 밤이었다.
엑소는 정처없이 걸었다.
끝끝내 소녀의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었고, 붉은 눈에 완전히 지배당해버린 소녀는 더이상 엑소의 곁에 머무르지 않았다.
목적지 없이 걷던 엑소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다름아닌 소녀와 함께 만들었던 물들지 않은 공간.
엑소는 그곳을 거닐며 아직 사라짐이 실감나지 않는 소녀를 회상했다.
소녀는 눈을 좋아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내 능력을 사용해 눈을 내리게 하고 시간을 멈췄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새하얀 눈을 보며 넌 참 좋아했었지..
우린 여기서 사랑을 키워갔어. 내 말 맞지?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더라..?
소복히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남겨가던 엑소의 발걸음이 멈췄다.
문득 뇌리는 스치는 하나의 생각 때문에.
내가 이곳을 비운 많은 시간동안, 너는 혼자 뭘 했을까
함께 하기 위해 만든 공간에서 혼자 남아서,
아마 넌, 울었겠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동안 소녀가 흘렸을 눈물이 눈에 선했다.
아마 능력 때문이리라.
엑소는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여지껏 자신이 뜻하지 안게 소녀에게 준 상처가 얼마일지가 가늠이 안되었다.
엑소는 눈 위에 앉아 다시한번 깊게 소녀를 떠올렸다.
날이 가고 시간이 가도 엑소의 기억에선 소녀가 한시도 지워질줄을 몰랐다.
그럴수록 소녀가 그리워질 뿐이라는걸 엑소도 알지만
잠깐이라도 소녀를 생각하고 회상하지 않으면 더 미쳐버릴것 같았다.
능력을 사용하려고도 해봤다.
제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결국엔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엑소는 시간을 돌리는 능력을 가졌지만 미래를 바꾸는 능력은 없었다.
특히나 붉은 눈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찌하나 이야기의 끝은 소녀의 사라짐이었다.
그녀를 되돌리지 못하는 초라한 초능력따위, 이젠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엑소는 자책했다.
모든게 붉은 눈의 시나리오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녀가 사라지면 엑소는 스스로 힘을 가두면서 소녀를 그리워한다.
그러면 당연히 붉은 눈 자신은 힘을 마음껏 키워갈 수 있게 되겠지.
엑소는 소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기억만 남고 사라져버릴것 같았던 소녀의 눈물은 오히려 더욱더 선명하게 남아갔다.
엑소에 의해 흘린 그녀의 눈물이 너무 많았던 탓일까,
언젠가 엑소는 기억 속의 소녀에게 속삭였다.
이젠 내가 울 차례야. 그러니까,
넌 울지 마.
하지만 엑소의 기억엔 눈물을 떨구는 소녀의 모습이 너무 많았다.
다시금 피어오른 오른 소녀의 마지막 모습에 엑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방울, 두방울.
엑소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가 바닥으로 떨어져 발밑에 쌓인 하얀 눈을 녹여 자국을 남겼다.
눈물에 녹아내려 다시 물이 되어가는 저 눈처럼 우리도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수만 있다면 매일이라도 널 위해 울 수 있을텐데.
생각할수록 커져가는 죄책감과 그리움이 엑소를 짓눌렀다. 그 무게를 얼마나 더 버틸수 있을지..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이기기 위해서
오늘도 엑소는 돌아가지 못할 기억에 잠겨 소녀와의 추억의 책을 편다.
아주 조그맣고 약한 사람이, 소녀의 사랑이 엑소의 삶을 모두, 엑소의 세상을 모두 바꿨다.
엑소는 소녀를 그리워하며 살다 저도 모르게 깨달았다.
나는 그녀 없이는 안되는구나.
추억뿐이라지만 나는 내가 지켜주지 못한 그녀와 함께해야겠구나.
나는 평생을 그녀와의 추억과.. 함께해야겠구나.
또다시 눈이 내렸다.
피부에 내려앉은 눈은 한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렸다.
너는 눈을 참 좋아했지.. 눈 오는 이런 날에 너에게 말을 걸 수만 있다면 정말 기쁠텐데.
네가 다시 내 옆에 나타나 웃어준다면..
바보 같은 소리지? 그래도 만약..
아직도 추억에 잠겨 너를 만나면 눈물이 차 올라.
바보 같은 난 아무 말 못해.
눈이 내리면 멍든 가슴이 모두 하얗게 다 덮여지게 될까? 네가 좋아하던 새하얀 눈이 나를 덮어준다면...
정말 신기한 일이야. 너의 생각만으로 이렇게 눈물이 넘쳐 흐르니말야.
다시 너에게로 가고 싶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삶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예나 지금이나 난 변하지 않았어. 너만 있다면,
그 어디든 천국일테니
엑소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멈춘다.
추억의 책은 오늘도 어김없이 소녀의 페이지를 펼친다.
보이지 않는 소녀를 찾으려고 애쓰다가,
들리지 않는 소녀를 들으려 애쓰다가,
엑소는 숨겨왔던 소녀의 눈물을 알아버렸다.
늘 자기밖에 몰랐었던 이기적인 엑소가
소녀의 계속 옆에 있어달라는 마음도 몰라줬던 무심한 엑소가
사랑이 고마운 줄 잊었었던 엑소가
항상 옆에서 웃는 소녀가 영원할거라 확신하던 엑소가
소녀가 원하던 그 모습 그대로 날마다 자신을 고쳐간다.
소녀를 위한 나날을 살아간다.
내가 언제나 옆에 있을께. 엑소는 소녀와의 기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녀와의 기억의 공간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비록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소녀이더라도,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엑소는 소녀와의 추억 안에 자신을 가둔다.
엑소의 시간은 멈췄지만 엑소와 소녀의 추억의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엑소와 소녀의 추억 속에는, 여전히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한결같이 하얗고 깨끗했다. 마치 소녀처럼.
눈을 감았다 떠보면, 너는 어느새 내곁에 조용히 와 쌓여있겠지.
나는 와 있어.
우리가 함께했던, 그 겨울에 와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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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부터 써보고싶던 글이었는데..ㅎ
제가 쓴거구요! 공유는 사랑해요.
엑소 흥해라 더 흥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