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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6. 대선으로 가는 길, 감동과 반전의 드라마 ⑷

참의부 |2014.02.17 18:29
조회 87 |추천 0

 

 

운명의 여신은 여전히 노무현을 시험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실시된 8·8재보선에서도 참패한 것이다. 특정 당의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야 그렇다 치고, 수도권 7곳 모두에서 압승한 한나라당은 국회 과반의석을 넘김으로써 정국 주도권을 확보한 반면 민주당은 연이은 참패로 지리멸렬했다.

 

당내에서는 다시 후보교체론이 제기되었다. 전국을 누비며 선거 유세를 해야 할 주자가 당내의 발목잡기에 묶여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민주당 내 이른바 비노(非盧)·반노(反盧) 계파 국회의원 34명은 10월 4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대통령선거 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이하 후단협)’을 발족시켰다. 노무현 후보를 주저앉히고 선수를 교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월드컵 4강 신화’로 한껏 성가를 높인 무소속 국회의원인 정몽준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통합21’을 결성하여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민주당의 적잖은 인사들이 그쪽을 기웃거렸는데 후단협에서는 노무현 대신 정몽준을 추대하려는 의원이 상당수에 이르렀고, 당내에는 ‘국민통합21’과 함께 신당을 추진하려는 세력도 있었다.

 

이에 다시 위기에 몰린 노무현은 신당 논의는 물론 국민경선을 통해서라면 재경선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수도권과 영호남, 제주 등 전국 13곳에서 치러진 8ㆍ8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다시 참패했다.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신당 논의는 물론이요, 국민 경선이라면 재경선도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몽준 후보는 국민경선 방식이 아니라 여론조사 단일화를 원했다. 악몽과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당헌 당규에 따르면 선대위를 구성해 후보가 중앙당을 운영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는 선대위 구성을 자꾸 미루었다. 국고보조금이 나왔지만 후보는 그 돈을 쓸 수 없었다.” 

 

노무현이 당내에서 위기에 몰리면서 지지율도 끝없이 추락했다. 지지율 추락은 그 자신이 자초한 바도 있었다. 대선 후보로 선출될 무렵 66퍼센트를 넘나들던 지지율이 지방선거를 전후로 급락하여 간신히 20퍼센트에 턱걸이하는 지경이었다. 한때는 정몽준에게도 밀렸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YS를 방문하면서부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성급하게 YS를 찾아간 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던 것이다. 물론 “부산, 울산, 경남 중 어느 한 곳에서라도 승리하지 못하면 재신임을 받겠다”라고 선언했던 노무현 후보이기에 YS의 지원이 절실했을 것이고, 그래서 “부산시장 후보를 추천해 달라”는 말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YS를 방문한 이후 지지도는 추풍낙옆처럼 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미숙한 것이었는가를 쉽게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것은 노무현 홍보팀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증명한다.˝ - 최용식, “민주당 노무현호, 좌초하고 마는가”,〈인물과 사상〉, 2002년 8월호, 98쪽~99쪽.

 

노무현이 김영삼을 찾아가 협력을 구한 것은 실책이었다. 본인으로서는 이제 큰 정치를 위해 DJ와 YS의 화해를 통해 민주세력의 통합을 이루고, 당장 영남지역 선거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겠지만, 국민이나 지지자들에게는 ‘원칙’의 일탈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노무현은 1997년 11월〈사회평론 길〉과의 인터뷰에서 “14대 총선에서도 내가 언제든지 민자당에 입당할 수 있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실제로 제의도 많이 받았고, 15대도 마찬가지다. 변절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중 오라고 하지 않아서 못 간 사람도 있고, 오라고 해도 안 간 사람이 있다. 나는 오라고 해도 안 간 사람 아닌가. 그것도 90년 3당야합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 15대에 이르기까지 두 번의 국회의원 총선 과정에서 나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해 가면서 원칙과 옳은 길을 지켜왔다. 내가 이익을 쫓아서 옳은 길을 훼손한 일이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이처럼 험난한 당 내외 여건 속에서도 노무현은 대선 행보를 이어갔다.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끈기와 집념으로 전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유세를 했다. 가는 곳마다 민초들의 지지는 여전했다. 다시 활력을 찾게 되고 용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노무현은 대선 연설을 통해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을 당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던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다.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며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의 600년 역사”를 얘기하면서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활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권력에 맞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호소했다.

 

노무현 후보가 당의 전폭적인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대선정국은 노무현·이회창·정몽준 3자 대결로 압축되었다. 3자 가운데 노 후보가 가장 외롭고 고달픈 처지에서 선거전을 힘겹게 꾸려가고 있었다. 집권당 후보가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대선을 치른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 색깔공세를 잠재운 일갈, “그러면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

 

설상가상으로 수구족벌신문들의 근거 없는 음해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특히《조선일보》가 심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대담하게 ‘맞짱을 떴다.’《월간 중앙》은 노무현의 대《조선일보》‘전쟁’ 발언을 묶어 특집까지 냈다.

 

˝“<조선일보>는 스스로 거대한 입을 가지고 있으니까 엄청나게 불리한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처럼 부도덕한 언론과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면 누구도 정치를 바로 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누군가 상처를 입을 각오를 하고 이런 악의적인 언론의 횡포에 맞서 싸워야 한다.” (1991년 12월 <말>지 인터뷰, <주간조선> 기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취지를 설명하며)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이 일제와 독재 정권에 아부한 추악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개혁적인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2001년 5월 국민정치연구회 초청강연)

“수구세력 대공세 선봉에 <조선일보>가 서 있다. <조선일보>는 독재권력과의 야합으로 부정과 특혜를 통해 쌓아올린 기득권 세력이며 언론시장에서 부당한 과실을 누리고 있다. <조선일보>가 이제 와서 자율경쟁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게 얻은 독점적 지위를 자율이라는 명분을 통해 유지하겠다는 발상이다.” (2001년 6월 7일 <미디어오늘> 인터뷰, <조선일보>를 공개비판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조선일보>는 이회창 총재의 기관지다. <조선일보>는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하기 때문에 이미 신문도 아니고 언론도 아니다. 우리는 언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총재의 기관지와 싸운다고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조선일보>는 수구세력의 선봉이다.” (2001년 6월 28일 <민주당보> 인터뷰)

“나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조선일보>와 싸우지 말라고 권유해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생각을 고쳐먹고 매일 <조선일보>사 앞에 꽃을 바친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나를 잘봐주겠느냐. 차라리 내가 분명한 입장을 밝혀 놓아야 나중에 <조선일보>가 나를 공격해도 그 공정성을 의심받게 할 수 있다.” (2001년 7월 2일 <한겨레신문> 인터뷰)

“<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은 민주화운동이다. <조선일보>는 현재 민주화 과정에서 마지막 특권세력이자 성역으로 남아 있다. 이제 특권세력과 성역은 우리 사회에서 법의 지배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마지막 남은 특권세력을 실질적 법치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2001년 11월 19일, <조선일보>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하며)

 

“<조선일보>는 아무리 봐도 희망이 없어요. 그곳은 사주의 자유와 기자의 자유가 전혀 충돌하지 않은 신문입니다. 아주 특이한 신문이에요. 그곳에서는 어떤 제도적 개선을 통해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지 않습니다.” (2001년 12월호 <말>지 인터뷰, <동아>ㆍ<중앙일보>와 <조선일보>를 다르게 보는 이유를 설명하며)

“밤낮 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저격범까지도 끌어안아야 하나? <조선일보>는 언론이 아니라 저격수다. 내가 <조선일보>에 가서 불을 지르거나 테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적법하게 ‘응징’하겠다는 것인데, 무엇이 편협인가.” (2001년 12월 3일, <시사저널> 인터뷰)

“내 아내에게 딱 하나 불만이 있다. <조선일보> 보지 말라고 하는데 자꾸 본다.” (2002년 4월 7일 경북지역 경선에서 정견을 발표하면서)

“<조선일보>는 과거에 독재세력과 결탁하고 친일하던 신문으로 수구 기득권을 갖고 있으면서 지금도 특권적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언론 세무조사를 한 것과 관련해 <조선일보>는 정부를 진실에 근거하지 않은 사실로 악의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느냐. 이는 사회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누리려는 특권의식이다. 나는 언론과 먼저 싸울 생각은 없지만 부당한 박해를 할 때는 싸울 것이다.” (2002년 4월 10일, KBS 라디오 인터뷰)˝ -〈월간 중앙〉, 2002년 5월호, 112쪽.

 

노무현은 평소 연구해온 내용을 토대로 집권 비전을 제시했다.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중심으로 당 정책팀의 보좌를 통해 만든 대선 공약이다. 책임총리제를 비롯하여 국가정보원·검찰·감사원 개혁,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수평적 한미관계 지향 등 괄목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이명박 정권이 뒤엎으려다 국회의 결정으로 바로잡게 된 신행정수도 건설 추진을 비롯해 유아 보육비 50퍼센트 국고 지원 등도 이때 제시한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수구세력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온 색깔론이 다시 극성을 부렸다. 자신이나 자식들의 병역 기피를 위해 온갖 불법·편법을 저지르는가 하면 북한 지도층과 만나 선거 직전에 휴전선 근방에서 총격을 해달라는 천인공노할 흥정까지 마다않는 자들이 민주진보진영 인사들에게는 온갖 용공음해를 일삼았다.

 

노무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인의 ‘좌익 전력’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당내 경선 때에는 이인제 후보까지 이 문제를 들어 집중공격했던 터였다. 노무현은 이에 정공법으로 맞서 돌파했다.

 

˝제게는 잘나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좌익운동하다 옥사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난했습니다. 그때 한 남자를 알았습니다. 그 남자는 고등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시험에 붙었습니다.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그 뒤에 판사 임용 신청을 했습니다. 저는 떳떳이 나섰습니다. 판사 못해도 좋다, 인간답게 살겠다.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장모님은 판사 발령 받을 때 지서로, 경찰서로 쫓아다니며 사위의 신원조회를 잘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제가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장인 때문에 판사 안될까봐 그렇게 쫓아다녔습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문제를 안 삼는다는, 은혜인지 관용인지 그 무엇 때문에 판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게 죄입니까. 평생을 가슴에 한을 묻어온 아내가 또 아버지 일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2002년 7월 5일 대구 강연에서).

제 장인은 좌익활동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실명(失明)한 상태라 얼마나 나쁜 일을 했을지 모르나 아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내는 아들 딸, 성실한 시민으로 키우고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불만이 없습니다. 딱 하나 불만이 있다면 <조선일보> 보지 말라고 하는데 자꾸 <조선일보> 보는 것입니다.(청중들 웃음) 사상도 연령도 지역도 뛰어넘어야 하는 시대에 왜 이런 것을 끄집어내 국민들을 혼란시킵니까? 제가 아내를 버리면 용서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버리라면 버리겠습니다.(청중들이 ‘아니오’라고 외침).˝ -〈월간 중앙〉, 2002년 5월호, 99쪽.

 

6·25남북전쟁 시기에 일어난 장인의 좌익 경력을 물고 늘어지는 수구세력의 집요한 공격에 노무현은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아내가 네 살 때 옥중에서 돌아가신, 그것도 입증할 이렇다 할 근거나 자료도 남아 있지 않은, 실명 장인의 전력을 자신에게 연계시키는 매카시즘에 단호히 대처했다.

 

특히 남로당 군부 총책이었던 박정희를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세력이 그런 전력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근거자료도 없는 사안을 가지고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헐뜯는 데는 분노를 삼키기 어려웠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서고 군사독재정권에 빌붙어 축재하면서 거대 언론권력으로 성장해온 족벌신문들이 국가의 정체성 운운하면서 비난을 일삼을 때에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저들은 노무현 후보의 장인이 좌익운동을 했다는 전력만 잘 이용하면 그를 ‘빨갱이’로 색칠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노무현이 “그럼 나보고 아내를 버리라는 겁니까?” 하고 일갈하자 한순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렇다’고 답하자니 자신들은 졸지에 인륜을 파괴하는 잔인무도한 집단이 되어버릴 것이고,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면 수세에 몰리는 곤혹스런 처지가 된 것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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