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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⑤ → 케네디, 박정희에게 ‘민정이양’ 요구

참의부 |2014.02.27 21:28
조회 233 |추천 0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 (324쪽)

 

역사왜곡과 독재미화 논란을 빚었던 교학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럼 미국은 정말 박정희 정권을 인정했을까요? 민족문제연구소는 "5·16 군사 쿠데타를 미화하는 표현이다. 미국이 곧바로 승인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반공과 동맹국과의 유대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희생도 불가피하다는 것인데, 이런 서술은 학생들의 가치관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참고 2013.12.18 <프레시안> 교학사교과서, 5·18 유혈사태가 시민 탓?)

 

1970년대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총 책임자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도날드 그레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군사반란에 대한 미국 판단을 이렇게 말합니다.

 

"(쿠데타 당시) 미 정부 안에서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면 정부가 (1960년 정권교체 이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국방성을 중심으로 박정희가 반공 군부 지도자라는 점에서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고 본다." 2011.05.12 <한겨레신문> "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 

 

특히 '미국이 박정희를 좋아했다는 뜻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좋아했다기보단, 받아들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은 냉전의 관점에서 해당 국가의 국내정책을 바라봤다. 정부의 방향이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어떤 나라에서 누군가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할 때, (그 정부가 반공주의 정부라면) 오케이다. 한국의 경우, 당시 장면 정부는 강력하지 않았고, 매우 강력한 반공주의자에 의해 정권이 교체됐다. 미국이 새 지도자와 싸울 필요가 없다. 그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자는 게 당시 미국의 결정이라고 봐야 한다."

 

이 같은 판단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미국 상황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키기 한 달 전인 4월 17일 미국은 쿠바 피그만 침공 실패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쿠데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비록 박정희가 '좌익경력'은 있었지만, 반공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반대할 명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집니다. 케네디가 한국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박정희로서는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케네디는 군사반란은 상황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제대로 대접은 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합니다. 52년이 지난 2013년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자 우리 언론들은 박정희-케네디 인연을 집중 보도했습니다.

 

지난 1961년, 미 백악관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케네디 대통령과 박 의장이 처음 만나는 이 순간에 두 나라 지도자들의 우의와 신뢰에 찬 악수는 두 나라의 굳은 유대를 상징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흔들의자를 앞뒤로 움직이는가 하면, 한 손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악수를 합니다(중략) 52년이 지난 뒤,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같은 장소에서 '블랙 케네디'로 불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갖습니다.-2013.05.05 <mbn>아버지에 이어 52년 뒤 딸의 방미…확 달라진 미국의 대우

 

박정희-케네디 회담과 박근혜-오바마 회담은 반세기의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그 격이나 내용을 달리합니다. 1인당 국민총생산이 고작 80달러에 불과했던 가난했던 그 시절, 미국으로 건너간 박정희 대통령은 원조을 요청했지만 케네디로부터 매몰찬 거절을 당했습니다. 쓸쓸하게 귀국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1인당 국민총생산 3만불을 향해 달리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회담에서 한미 양국이 글로벌 파트너로 우뚝 서는 한미동맹 60주년 동맹선언을 채택합니다-2013.05.05 <연합뉴스> 박정희·케네디 52년 후 박근혜·'블랙 케네디' 회담

 

아버지 박정희는 약소국 최고지도자로서 설움을 당했지만, 딸 박근혜는 대접을 제대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언론은 케네디가 거만하고, 원조를 거부한 것만 보도했지만 당시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요구했습니다. 케네디가 민정이양을 요구하기 전 박정희는 군사반란 후 '혁명공약'에서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며 스스로 민정이양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하지 않은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민정이양을 요구한 사실은 고 리영희 선생 특종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습니다. 지금도 별 다르지 않지만, 당시 우리 언론들도 '박정희-케네디 회담' 결과를 두고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승인했다고 전했지만, 리영희는 케네디가 조속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 따위를 제시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케네디는 박정희에 대해서 ① 조속한 시일 내에 공정한 선거를 통한 민정으로 이양할 것 ② 민정이양에 앞서는 군의 정치관여 금지와 원대복귀 ③ 그때까지 모든 경제원조의 집행연기 ④ 군사원조의 잠정적 동결 ⑤ 박정희가 제1차 경제계획으로 요구한 공업화계획 자원 23억 달러 요구의 백지화 ⑥ 조속한 한일 회담 재개를 통하여 단시일내의 한일국교정상화 실현 ⑦ 베트남사태에 대한 남한의 협력 등을 요구한 거예요. 그중에서도 조속한 민정이양, 군의 원대복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한일회담 재개를 통한 조속한 한일국교 정상화 실현이었어요." 리영희 <대화>(한길사) 277쪽

 

민정이양 특종을 한 리영희 선생은 박정희 미국 방문을 "정권을 세운 박정희가, 마치 옛날 왕조시대에 세자책봉이나 왕위계승의 윤허를 얻고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상전의 나라 중국을 찾아가는 꼴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이 특종기사로 국내로 소환당합니다. 박정희와 리영희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방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군 실력자들이 경무대(청와대)에서 방미 외교 성공 축하파티를 대규모로 열었어, 그때 갔던 수행기자들을 다 초청하면서 나만 제외하더구먼.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박정희가 지도자다운 인물이면 나 같은 보잘것없는 기자도 일단 초대해서, 술잔 들고 왔다갔다 하다가,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 기자는 왜 그런 기사를 썼어? 그러면 곤란하잖아!'라고 말했다면 나는 아마도 박정희의 인간적 크기에 감복했을 거야. 그러나 아예 딱 제쳐버리더라구."<대화> 283쪽)

 

박정희는 큰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인터넷 매체〈데일리서프라이즈〉익명 칼럼니스트 탐독(耽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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