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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반일시위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세계사적 의의

참의부 |2014.02.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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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곤 안동대학교 교수   1. 머리말   1919년은 세계사에서나 한국사에서 모두 중요한 시기였다. 세계사로 보면, 이때는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한 차례 영토쟁탈전이 끝난 시기이자, 그 마무리 작업으로 파리강화회의가 진행되고 승전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가던 출발점이기도 하다. 식민지로서는 자신을 통치하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의 승패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승리한 국가들로부터 통치받던 식민지는 사실상 해방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세에 눌려 살던 식민지들은 전쟁의 결과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통치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비록 승전국에 속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행여나 국제회의가 진행되다 보면 자기 민족과 국가의 문제를 다룰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고 또 거기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침략을 받거나 식민지를 겪던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하나는 외세의 침략에서 해방되어 자주국가를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제나 중세사회로 돌아가기보다는 근대사회와 근대국가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전자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벌인 식민지해방투쟁으로 나타났고, 후자는 전근대사회를 극복하여 근대사회를 구현하는 근대화운동으로 펼쳐졌다. 정리하자면 식민지해방운동은 대개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1919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시기였다. 8년 넘는 기간동안 식민지라는 종속상태를 겪었는데 이를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로 판단한 시기가 이때였다. 또 독립할 경우 세울 나라가 구시대로 돌아가는 군주국가가 아니라 근대민주국가로 나아간다는 진보성을 확연하게 드러낸 때도 이 무렵이었다. 앞의 것이 식민지해방운동이고 뒤의 것이 근대화운동이다. 이러한 변화현상이 바로 이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도 1919년은 매우 중요하다.   1919년의 중요성을 전제로 삼고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살펴보자. 3·1반일시위운동만이 아니라 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묶어 살피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3·1반일시위운동의 산물이자 1919년에 이루어진 성과이며 또 그 특수성이 세계사적으로 평가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2. 3·1반일시위운동의 세계사적 의미   ⑴ 제국주의 침략을 되받아치는 투쟁의 선두에 서다   세계에서 침략과 수탈로 살아간 제국주의 국가는 10개 정도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 팽창으로 시작된 절대주의는 전세계에 식민지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들에게는 그 행위가 ‘발견’이자 ‘진출’이지만 그 앞에 무릎 꿇린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의 나라에게는 그것이 좌절과 고통의 순간이었다. ‘진출’이란 이름으로 ‘침략’이 줄을 잇고 네덜란드 시대를 거쳐 프랑스와 영국이 패권을 다투는 시기가 뒤를 따랐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이들 서유럽 국가들이 세계 대부분의 지역을 식민지로 장악했고 뒤늦게 출발한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 등이 식민지 분할을 요구하면서 곳곳에서 부딪쳤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제국주의 국가의 아류였다.   서유럽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와 민족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짓밟히는 수난을 당했다. 동남아시아를 보면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이 네덜란드·스페인·프랑스·영국 등에게 짧게는 100년에서 길게는 400년이 넘는 동안 침략을 받거나 반식민지 혹은 식민지 역사를 보내야 했다. 또 남아메리카는 아시아보다 훨씬 일찍부터 식민지로 살다가 1800년대 전반기에 독립하는 나라가 많았지만, 20세기 후반에 종속이론이 이 지역에서 튀어나온 사실을 보면, 유럽 열강에 얽혀있던 ‘제국주의 국가-식민지’의 종속성이 쉽게 벗어나기 힘든 그물임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역사는 유럽에서도 많았다. 영국의 그늘 아래에서 8백년이나 되는 기나긴 세월을 국토 상실과 반식민지, 또는 완전한 식민지라는 굴레를 거듭하며 살아온 아일랜드는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재국주의 침략과 수탈의 물결은 매우 강했다. 때문에 거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식민지는 존재하기도, 존립하기도 힘들었다. 식민지의 저항이 미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400년이나 전개된 스페인의 통치 아래, 필리핀은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못했다. 3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프랑스에 핍박받은 베트남도, 응웬 왕조와 남부지역 유림들의 의병항쟁 등이 잠시 존재했을 뿐, 저항은 크지도 오래가지도 못했다. 240개 종족과 500개 넘는 언어로 구성된 인도네시아가 벌일 수 잇는 저항도 그 한계가 뚜렷했다. 또 인도에서 ‘세포이반란’이라고 불리는 인도인 영국 용병들의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말해 처우에 대한 불만에서 싹튼 저항이지, 식민지해방운동·독립운동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 문화를 간직한 아시아 지역이 이 모양이니,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에서 제국주의에 저항한 대규모 독립운동은 거의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식민지가 제국주의 열강의 국력 차이는 너무나 컸다. 식민지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되받아치기 위해 반침략 투쟁을 벌였다면,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디에서나 침략에 맞서 싸운 투쟁은 존재했다. 다만 그것이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저항으로 나타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개 침략의 힘이 저항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기 때문에 복속은 쉽게 이루어졌고 식민지는 문명 차이를 내세운 제국주의 통치 아래 길들여져 갔다.   절대주의와 제국주의의 침략과 압제를 막아내려는 저항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는 처절한 생존 투쟁이자 정체성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 세밀하지는 않지만 아시아 지역의 반제투쟁시민이라도 둘러보면, 한국의 독립운동사가 가지는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을 그려낼 수는 있을 것 같다.   3·1운동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이 한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와 민주공화제를 달성해냈다는 사실에서 그렇다. 전 민족이 참가한 것과 비폭력투쟁으로 침략세력에게 저항하고 세계에 알려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게 평가된다. 그런데 거기에 한계가 있다. 세계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가지는 위상이나 의미가 몇몇 나라의 식민지해방운동이나 반침략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명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넘어서려면, 제국주의가 식민지쟁탈전을 벌이면서 성난 파도처럼 세계를 집어삼키던 그 시기에 그를 비판하고 막아서는 흐름의 선두에 선 것이 3·1운동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주의 노선, 그 물결을 되돌려 놓으려는 투쟁의 대표적인 거사가 바로 3·1운동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식민지의 해방투쟁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3·1운동은 반침략·반제국주의 투쟁의 물결과 함께 진행되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Irish War of Independence)이 1919년 1월부터 다시 터져 나온 것도 여기에 속한다.   이에 비하면 3·1운동은 몇 가지 면에서 독특한 성격을 보였다. 발표된 독립선언들은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잘못을 지적하고 인도주의를 내세워 인류가 평화 공존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엿다. 독립해야할 당위성만이 아니라 인류가 지향해야 할 범세계적인 이상과 지향점을 제시한 사실에서 그렇다.   3·1운동을 한국사 차원에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발행된 세계사 교과서조차 3·1운동을 내세우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식민지해방을 꿈꾸던 많은 약소국들의 움직임과 투쟁은 중요한 서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서술과 평가에는 극히 인색하다. 자국사적인 시각을 극복하자면서 오히려 자국사를 역차별하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세계식민지해방투쟁사 차원에서 보면, 3·1운동은 제국주의 침략 물결을 되돌려 놓으려는 투쟁의 선두주자였다. 비록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승전국이 판을 쳤던 파리강화회의였지만, 여기에 식민지 해방 문제를 다루도록 요구하고 나선 것이 3·1운동이다. 한국 문제를 다루어 달라고 온 겨레가 하나 되어 요청하고 나선 거사는 한 민족과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물론 그 힘이 모자라고 전달력이 약했지만, 패권주의 때문에 몰락한 식민지가 독립을 얼마나 갈구하고 있는지 그 사실만은 확실하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식민지 국가, 혹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 앞에 서 있던 나라에게는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3·1운동 소식을 크게 보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펼쳐진 세계식민지해방운동 속에서 평가해야 마땅하다. 3·1운동은 시간적으로 선두에 있었고 중국의 5·4운동 과정에서 3·1운동을 높이 평가한 것은 그 반향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 인구 대비 참가자들의 비율도 높았으며 무저항 비폭력 투쟁이라는 방법 면에서, 또 인류사회가 지향해갈 인도주의를 제시한 사상적인 면에서도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⑵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고 정통성을 확립하다.   한국 역사에서 ‘민중’의 존재는 독립운동과 근대화운동 과정에서 등장하고 정착하였다. 전근대사회에서 이와 비슷한 용어는 백성이라거나 민(民)이란 말로 쓰였지만, 그것은 결코 역사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피통치자의 의미만 가졌을 뿐이다. 그들 집단이 내는 목소리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민란(民亂)’이라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 일이 훨씬 흔했다.   이에 반해, 역사의 주인이자 역사를 움직여나가는 주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민중이 등장한 시기는 근대이고, 따라서 이는 근대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통치·피지배 계급이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러한 민중이 한국사에 등장하고 정립되어가던 계기와 시기가 바로 3·1반일시위운동이기 때문에 이것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더구나 3·1반일시위운동은 국내만이 아니라 나라 밖에 망명하거나 이주하여 살던 동포사회까지 하나로 묶어 정체성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민중은 쓰러지는 나라를 되살리려는 투쟁 속에서 형성되었다.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존에 대한 인식을 높여갔고, 나라를 빼앗긴 뒤 식민통치를 겪으면서 저항 주체로서 민중의 모습이 갖추어져 갔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나라를 지키고 지배하던 주체가 국왕과 양반계급으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이었다면, 그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주체가 민중으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계급사회를 뛰어 넘는 진보성을 보이게 되었다.   역사적 정통성은 급변하는 시기에 등장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을 빼앗고 통치하던 시기에 과연 정통성을 누가 가지는가? ‘대일본제국’이 가지는가, 아니면 ‘조선총독부’가 가지는가? 둘 다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역사적 정통성은 이를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아 겨레의 손, 민중의 손에 쥐어주려던 반일독립운동 지사들이 가진다. 민중이 바라고 지향한 것이 ‘왜놈의 나라’가 아닌 ‘한국’ 혹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이를 일구어내려는 노력은 곧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실제로 민중은 독립을 염원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알려주는 현상이 3·1반일시위운동이다. 일찍이 한국사에서 이만큼 절대적인 구성원이 집단으로 항쟁을 일으키고 참가한 일이 없었다. 구성원 거의 모두가 참가한 저항은 곧 민중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것이자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3·1운동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말은 ‘만세’시위운동으로 나타난 민중의 뜻이 곧 민족의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주장은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나라를 민중의 힘으로 되찾으려 나선 사실은 역사적 주인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민중의 힘으로 국가를 다시 되찾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뜻에 맞는 정부를 세우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였다. 이는 3·1운동 이전, 즉 독립운동 전반기에 분출된 역사적 과제를 제시하고 해결하는 것이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침략이 한민족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고 강제병합이 무효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일제가 온 세계에 대놓고 ‘한민족과 합의하여 한국을 일본에 병합시켰고 한국인들이 일제의 통치와 지배를 수긍하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떠들어대도 그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일제의 선전과 홍보라는 것이 조작된 것임을 온 천하에 알린 ‘대사건’이 바로 3·1운동이었다.   3·1운동에 나타난 한국인들의 주장은 일제의 침략과 점령이 무효라는 사실이다. 억지로 맺어진 조약과 협약들이 모두 무효이며 이러한 행위로 이루어진 모든 결과가 무효라는 점이 거기에 담겨 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당성과 도덕성, 나아가 정통성을 가진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는 겨레가 나라를 잃은 시기에 오직 항일투쟁에 나선 인물이나 세력만이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3·1운동에서 선언된 내용에는 한국이 이미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국내에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첫머리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대한제국을 일제가 멸망시켰지만, 3·1운동에서 한국이 이미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이는 일제가 강제로 짓밟아 무너뜨린 나라를 다시 되살려 독립국을 세운다는 뜻을 천명한 부분이다. 그렇게 선언된 ‘독립국’을 세우고 국가를 운영할 정부조직체를 만드는 것은 역사적 과제였고, 이를 추진해 나간 열매가 바로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워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임시정부라는 정부조직체였다.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중의 뜻은 더 이상 군주사회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 대한제국은 종결된 것이다. 3·1운동이 벌어지던 그 어디에도 보황주의(保皇主義)를 주장하거나 복벽주의(復辟主義) 목소리를 드높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간혹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던 무렵에 군주제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정황이 있다거나 복벽주의 세력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사실상 3·1반일시위운동은 역사 회귀적 논리에 종지부를 찍은 거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민중의 뜻과 명령을 현실로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적 정당성과 정통성을 담아내는 일이었다.   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세계사적 의미   ⑴ 민중이 선언한 독립국, ‘대한민국’을 세우다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첫머리에 조선이 독립국이요,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밝혔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보았다. 독립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은 이미 반일시위운동 이전부터 나타났다. 1919년 1월부터 상해지역 독립운동가들은 대단히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나라 안팎으로 대표를 보내 민족의 독립의지를 드러내도록 독려하는 한편, 프랑스로 보낼 대표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을 뽑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느라 분주했다. 2월 1일 우사가 상해를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국내와 국외 곳곳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상해로 모여 들었다.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독립운동 방법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2·8독립선언과 3·1반일시위운동을 준비하던 세력들이 대표를 상해로 보냈고, 만주지역의 지도자들도 속속 그곳으로 모였다. 그렇게 모여든 애국지사들은 마침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흥분했다. 그들은 독립임시사무소를 열었고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정보를 나누고 정책방향을 논의했다. 마침내 국가를 세우고 정부를 조직하는 역사적인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4월 10일 여러 독에서 모여든 독립운동 단체 대표 29명이 회의를 열었다. 밤을 지새우며 진행된 이 회의는 이튿날 국호와 연호를 결정하고 체제를 규정하는 등 큰 성과를 낳았다.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이요, 운영체는 민주공화정체를 갖춘 임시정부였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민국(民國)’이자,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였다. 그렇다면 이날 회의는 바로 제헌의회였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 낸 내용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결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라를 잃은 뒤 독립운동가들이 줄곧 논의하고 발표해 온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짧은 순간에 의견을 종합해서 정리할 수 있엇던 것이다.   다음날 4월 11일 제헌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이 제정되었다. 모두 10개조로 구성되었는데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나라가 세워졌음을 알려준다. 나라 이름 국호(國號)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나라를 잃을 때는 황제가 주인인 제국(帝國)이었지만 이제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국(民國)이다. 대한(大韓)이라는 이름에 국가의 주권 소유자를 나타내는 민국을 붙여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한 것이다. 또 여기에 그 국가의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제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말보다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였다. 그러다보니 대한민국 건국 사실은 잊혀지고, 오직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것만 머리에 각인되었다. 국가를 세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정부조직만 만든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줄여서 그냥 ‘임시정부’라고 불러온 것에 원인이 큰 것 같다. ‘대한민국’과 ‘임시정부’로 나누지 않고 그냥 이름 붙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쓰거나, 아니면 ‘임시정부’라고만 줄여서 사용하다보니 대한민국보다는 임시정부에 치우쳐 생각하고 평가하는 일이 일반화된 것이다. 더구나 해방 이후 ‘임시정부’를 세우자는 논의가 나왔을 때, 그것과 앞서 중국에 있엇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혼동할까 우려하여 후자를 그냥 ‘상해임시정부’라고 사용한 탓도 있다. 상해를 떠난 이후 시기를 말할 때도 모두 ‘상해임시정부’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이런 까닭으로 ‘대한민국’은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그저 ‘상해임시정부’, 혹은 ‘상해임정’만 남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마치 없었던 사실처럼 잘못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 증거가 급히 만든 제헌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제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이란 국호로 나타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민주공화제’라는 말이다. 민중이 바라던 나라가 황제국이 아니라 민국이요, 이를 실현하여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사실과 공화주의 체제를 갖춘다는 지향점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러한 지향성이 3·1운동 과정에 우연히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나라를 잃은 직후에 미국에 살던 동포사회에서 그러한 주장이 나왔고, 특히 1917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여 민주공화정체(民主共和政制)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천명한 일이 있었다. 민중과 민족의 뜻을 정리하고 담아낸 이 선언이 3·1운동 당시 여러 독립선언문을 통해 다시 등장하였고 이를 수용하여 대한민국을 선언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대표성을 가지려면, 1919년 건국 당시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했다. 3·1운동을 앞뒤로 곳곳에서 선언된 정부조직체가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실질적인 형체와 움직임을 보인 국내의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모두 합류시킴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나라라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건설에 반대한 일이 없고, 나아가 모두 임시정부라는 정부 조직체에 가담했던 것이다.   ⑵ 대한민국을 운영할 정부조직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이제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관계를 보자.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라는 조직체가 통치·운영한다는 뜻이다. 임시의정원이라는 의회의 결의를 거쳐 임시정부가 통치행위를 집행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의회관리정부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이를 운영할 정부조직체로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점이다.   사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만들던 첫 회의 자체가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였고, 제헌의회 첫 회의였다. 다시 말해 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의 산실인 셈이다. 나라를 잃은 지 9년이 흐른 뒤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정체를 갖춘 국가와 정부, 그리고 의회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협회운동에서 추구하다가 실패했던 의회설립운동이 20년이나 지나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 임시의정원이었다.   그러한 사실이 갖는 의미는 개원 당시 흥분에 가득 찬 이동녕(李東寧) 초대 의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서 잘 느낄 수 있다.   “이때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을 안겨주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제 군주제를 부활하려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이 나라에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발인 침략세력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것만을 지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민주공화정체를 갖춘 국가를 세운다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민족문제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진보성까지 담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나 임시의정원이 언제 ‘임시’라는 수식을 뗄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식민지를 청산하고 독립할 때일 것이다. 해방이 되면 ‘임시’라는 말을 떼고 정식 ‘정부’가 된다. 이는 한국의 완성된 국가 건설이 독립운동과 더불어 진행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뜻은 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 국회’의 관계 설정에서도 드러난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마지막 제10조는 ‘임시정부는 국토회복후 만 1개년 내에 국회(國會)를 소집함’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국토를 회복하면 국회를 소집한다는 내용이다. 곧 임시의정원을 국회로 바꾼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1919년 9월 11일에 선포된 제1차 개정 헌법에도 담겨 있다. 즉 제34조에는 ‘임시의정원은 완전한 국회가 성립되는 일(日)에 해산하고 기(基) 직권은 국회가 차(此)를 행함’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내용은 일제를 구축(驅逐)하고 국토를 회복하면 국회를 조직하고 이것이 완성되면 임시의정원을 해산한다는 뜻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임시의정원의 최후 기능이 국회 결성인 셈이다. 이는 국토 회복 이전에는 임시정부-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운영·통치하고, 그 이후에는 정부-국회가 그 권한을 갖는다는 뜻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를 완성시켜 가는 과정을 이처럼 체계적으로 마련했고, 그 뒤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줄곧 그것을 완성시켜 나가는 데 힘을 쏟았다.   ⑶ 정부조직체를 중심으로 식민지 해방투쟁을 벌인 세계사적 사례   세계에서 제국주의를 추구한 나라는 10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부분은 식민지를 겪고 해방투쟁을 펼쳤다는 말이다. 절대 다수가 식민지 해방투쟁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 정부조직체를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한 나라는 흔하지 않다. 가장 흔한 조직체가 베트남 독립연맹[Việt Minh]을 비롯한 단체나, 의용군 조직, 그리고 아일랜드의 신페인(Sinn Fein)당이나 인도네시아 국민당과 공산당,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과 같은 정당조직이었다. 정부조직이 있엇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머물렀던 프랑스와 폴란드의 망명정부 정도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무려 26년 4개월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국내 행정을 원격제어하면서 통치력을 장악하고자 시도하기도 했고, 군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펼치는 한편으로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다. 또 의열투쟁을 벌여 침략세력에 저항하는 ‘반침략전(反侵略戰)’을 전개하면서 외교활동에 힘을 쏟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독립운동이 세계식민지해방투쟁사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드러낼 만하다. 간혹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부’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시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늘 그러했던 것도 아니다. 초기에 국내 행정 일부를 장악한 것이나, 독립군 각 부대를 하부조직으로 거느리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것, 의열투쟁으로 일제의 침략 책임자를 처단하려거나 처단한 것, 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펼친 것, 이념적인 분화를 이겨내며 좌우통합정부를 달성한 것 등은 성과로 꼽힌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약화된 요인에는 내부 문제도 있지만 일제의 탄압과 주변 정세의 어려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약화된 요인에는 국내와 이어지던 생명선을 일제가 철저하게 찾아내서 끊어버린 탓이 컸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여 형편없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가 더러 있다.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이다.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국가와 정부를 승인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승인할 나라라면 아예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도 않았고 식민지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침략국가들이 승인하지 않았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세계사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식민지 해방투쟁과 식민지 출신 국가가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논리는 침략국의 시선, 제국주의 국가의 시각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런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에서 식민지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이 보장된 사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과 위상이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4. 독립운동으로 일구어낸 ‘근대’, ‘근대국가’   세계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공통된 역사적 과제는 두 가지라고 앞서 말했다. 하나는 전근대적인 요소를 극복하여 근대사회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적 침략과 이에 맞서 싸운 식민지 해방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구체제 극복을 통한 대내적인 근대화 운동으로, 후자는 침략과 저항이라는 대외적 반외세 투쟁으로 나타났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두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특히 근대화를 추구한 부분에서 그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근대라는 말은 분야별로 다양한 성격으로 표현된다.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민주공화제를,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상적으로는 합리주의와 과학적 비판정신을 말하게 된다. 이 가운데 민주공화제를 말하자면, 자연히 근대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등을 주요 항목으로 말하게 된다. 이 가운데 정치사적인 측면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면 언제 민주공화제를 지향하고 또 그것을 일구어냈는지 살펴봐야 한다.     정치체제 면에서 군주정을 넘어 민주정을 향하려는 논의가 시작된 시기는 독립협회(獨立協會)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고 당장 그 때가 민주정의 출발은 아니다. 군주정을 극복하여 민주정을 지향하는 것이 숙원이지만 당장 벼랑 앞에 서 있는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 군주정이라도 보호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다음으로는 그 국가를 지켜내면서 민주정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근대로 향해 나아가던 과정에 얽힌 과제들을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조선총독부라는 통치조직 아래 민중은 기존 군주정보다 더 악화된 조건 아래 살게 되었고 이제 역사적 지향점은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민주공화정부 수립으로 바뀌었다. 3·1운동 직후에 발표된 여러 정부조직체가 한결같이 민주공화정체를 내세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다. 이는 3·1운동으로 나타난 뜻을 수렴하여 수립한 것이라기보다는 3·1운동을 통해 국민들이 명령한 것을 독립운동가들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하게 ‘정부 수립’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최초의 ‘민국’이 세워진 것이고 이를 운영하는 최초의 ‘국민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그 정부가 국토 밖에 존립한다는 현실 조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한계를 고려하여 정식 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요, 정식 국회가 아니라 임시의정원을 만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사상적인 변화를 보아도 그렇다. 전통적인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바탕으로 펼쳐진 의병항쟁은 점차 민중의 손으로 확산되면서 계급사회라는 한계를 극복해 갔고 이를 헤치고 올라선 혁신유림은 서유럽 근대 사조인 계몽주의나 시민사회를 향한 혁명 논리, 그리고 사회주의까지도 도입하여 독립운동의 현장에 접목시켰다. 3·운동 이후 신세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이념을 수용하면서 민족문제 해결에 나선 것도 사상적인 면에서 근대화를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한 부분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를 근대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제의 침략과 통치가 한국 자본주의 성립과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과 이와 달리 오히려 이지러진 성장을 가져와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식민지수탈론(植民地收奪論)’이 그것이다. 백 걸음 물러서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말에 타당한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 하나만 가지고 식민지 지배 덕분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제적 기준만으로 역사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통해 일구어낸 가치가 그것을 덮고도 남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이 근대를 이루어내는 과정은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물론 근대화의 모델이나 과정을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 점도 있지만, 실제로는 침략국의 계획 자체가 식민지를 근대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영원히 지배하고 수탈하기에 적합한 체제를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벌인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해방운동은 처절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제국주의와 투쟁을 벌여 독립을 달성한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인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한국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자주독립이라는 민족문제 해결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를 달성해내는 성과를 올렸다. 더구나 민족문화 말살정책이라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가혹한 압제를 이겨내며, 자주독립과 근대사회 건설이라는 목표에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특히 정치적으로 근대사회, 근대국가를 일구어냈다. ‘독립운동 근대화론’, ‘독립운동 근대국가건설론’은 식민지가 해방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근대사회와 근대국가를 일구어낸 것을 말하며 한국 독립운동사, 특히 3·1반일시위운동과 대한민국, 그리고 임시정부가 대표적인 모델이 된다는 사실은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1919년은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모두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서로 격돌하였고, 식민지들은 해방될 기회를 눈여겨 살폈다. 그럴 때 3·1운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물결에 맨 먼저 맞서 싸운, 그것을 뒤집으려던 대표적인 투쟁이자 시도였다. 승자의 기준으로 재편되는 정세라서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지만, 절대적으로 강한 침략세력에 맞선 놀라운 저항인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이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   3·1운동은 한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전통적인 피지배계급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 민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민중이 새로운 국가와 정부조직체를 요구하였고 그 부름에 맞추어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정체가 등장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역사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했다. 또 독립운동으로 근대화를 달성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민족문제 해결 차원에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근대화를 지향하는 진보적인 기준에서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계식민지해방투쟁사에서 우뚝 솟을 만한 위상을 갖는다. 국가를 세우고 정부조직을 구심점으로 삼아 무려 27년 가까이 투쟁한 사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1919년은 바로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낸 시점이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세계 개조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나선 출발점이기도 하다.   영토와 국민을 직접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뿌리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하지만 식민지 해방투쟁을 벌이는 나라와 정부에 대해 어느 제국주의 국가가 그것을 인정하고 승인한다는 말인가? 그러한 주장은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의 시각으로 역사를 평가하는 논리요, 식민지 종속 근성에서 헤어나지 못한 몰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해방투쟁을 벌인 민족과 국가의 시각으로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세계 대다수가 겪은 역사를 무시하고 오직 몇 나라가 펼친 침략의 잣대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들이 민주사회, 시민사회를 만들 때 시민혁명을 거쳤다. 한국은 독립운동을 통해 시민혁명에 해당하는 성과를 올렸다. 식민지가 해방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민족문제만이 아니라 근대사회를 일구어가는 전형적인 모델을 한국 역사가 보여준 것이다. ‘독립운동 근대화론’, ‘독립운동 근대국가건설론’은 그래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1919년은 승전국만이 아니라 식민지에게도 좋은 기회로 파악되던 시기였다. 한국은 세계 식민지 가운데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 대열의 맨 앞에 섰고, 독립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일구어가는 모범적인 과정을 보였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평가해야 옳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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