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인생의 새로운 막이 시작되는 무대.. 직장이라는 곳. 대학시절에 써빙이나 캐셔 등 몇 번의 아르바이트의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이건 벌이에서부터 판이 다른 게임이다. 내 삶을 내 힘으로 꾸려나가는 원동력을 마련해줄 수 있는 곳. 내 자존심과 사회적 위치를 대변할 수 있는 곳. 직장은 인생이다. 하지만 직장에서 진정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직장의 문화를 내 인생의 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수많은 장벽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곳.. 나는 불행히도 늘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속한 팀은 특히나 보수적인 집단으로서 모든 여자들은 당연히 남자들을 위해 커피와 차를 대령해야 하고 갖가지 잡다한 행사 및 하다못해 빼빼로데이에 깜짝 이벤트까지 도맡아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남자들은 물론 여자 상사들이 그것을 무척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회식 때 여사원들은 부장의 양 옆에 앉아 온갖 아양을 떨며 술을 따라야 하며 노래방에서는 대리나 차장들의 이끌림에 부루스를 춰대야 하는 곳… 노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였지만 나는 그런 생활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본색을 감추며 늘 몸을 사렸다. 하지만 신입사원들은 늘 회식의 안주거리이자 꼭두각시가 되어 재롱을 떨어야 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즐기며 마시는 술이 아닌 의무가 된 술자리는 차라리 지옥이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커피를 나를 때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인터넷을 하고 있는 동료 남자사원을 보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그 눈빛…
노종학.. 34이 되도록 만년 대리이며 데이트할 여자친구도 없는 서글픈 노총각. 이름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역할을 하는지 이 노총각 대리를 보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담배와 술에 찌들란 옷을 몇 일이고 연달아 입었으며 매일을 사무실에 밤늦도록 앉아있었다. 게다가 주말도 없이 사무실에 죽어라 앉아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늘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일은 업무시간에 헤치우고 퇴근시간과 주말을 칼같이 지켰다. 회사외의 시간은 내게 오아시스와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행동은 어느새 그 집단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한 작용을 하고 있었던가 보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소외되어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던 어느 금요일..
“재경씨 오늘 뭐하나?”
노총각대리가 뜬금없이 내게 술 한잔 할 것을 권유했다. 아니 거의 반 명령이었다. 군기잡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노대리.. 분명 내게 직장생활에 대한 충고를 할 작정인 것이었다. 도저히 거부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노총각 대리와 나.. 우리는 그렇게 허름한 고깃집에서 마주앉아 삼겹살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역시나 직장생활에 대한 장문의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고래.. 그는 웬만해선 취하지 않는 나의 주량에 흥미를 느낀 듯,
"요것봐라"
며 끊임없이 나의 술잔에 술을 가득가득 따라대며 원샷을 명령했다. 죽어봐라.. 나는 어느새 나의 본색을 서서히 드러내며 같이 죽자며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난 직장이란 사회에서 진정한 술고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퀴퀴한 냄새가 감도는 좁은 여관방. 모텔이라지만 그런 방은 여관이란 이름이 제격인 곳이었다. 순간 순간 떠오르는 추잡스러운 기억이 잔인하게 남아있었다. 노총각의 손에 힘없이 이끌려오던 기억.. 술과 담배로 찌든 노총각의 찝찝한 타액.. 침대 밑으로 던져진 나의 속옷들.. 노총각의 거친 숨소리와 나의 신음소리..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꿈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노총각이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란 게 이런 것일 거였다. 나는 순식간에 옷을 걸치고 그 방을 빠져 나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원나잇으로 내 순결을 잃었던 날.. 피 묻은 시트를 보며 절망했던 그 때보다 더욱 끔찍한 순간이었다. 그나마 그때는 쌔끈한 영계였단 말이다. 눈물이 솟았다.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다.
그 다음 월요일 출근은 지옥이었다.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는 더욱 괴로웠다. 문을 열자 저 쪽에 앉아있는 노총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웬일인지 못 보던 새 셔츠를 걸치고 앉아있었다. 언뜻 보니 이발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그가 나를 의식하고 있음을 느꼈다는 것... 그 순간부터 찝찝한 심정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직 그를 피하는 대만 주력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나와 다른 파트에 있었기에 나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순간순간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하루하루의 끝에 다가온 금요일, 나는 드디어 지옥에서 탈출하는 기분으로 퇴근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모니터에 뜬 그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다시 기분이 엉망으로 구겨져버렸다. ‘술 한잔?’ 나는 ‘바쁩니다’ 라는 답과 함께 사무실을 달아나듯 나섰다. 하지만 밤이 늦도록 그에게서 몇 번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전화번호가 뜰 때마다 몸서리 치던 나는 결국 정신차리라는 차가운 문자를 보내고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어찌되었든 더 이상 그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지만 다음 출근 일부터 그의 저주가 시작되었다. 그는 과장은 물론 차장도 조심해야 할 만큼 자존심이 무척이나 센 타입이었는데 내가 그의 자존심에 일격을 날린 것이었다. 노총각은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에 글자 포인트부터 컬러까지 걸고 넘어지는가 하면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신입이 너무 뻣뻣하다느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 아니냐는 등 사람들이 만류하기 직전까지 잔인하게 나를 씹어댔다. 하지만 만류하는 그 주변의 일파들 또한 은근히 나에 대한 비난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성차별과 비난, 세력다툼과 아부가 난무하는 곳.. 비효율적인 규칙으로 자유를 앗아가는 곳..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나는 웃음을 잃어갔다. 그 즈음 우울증세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늘 우울했다. 나는 가끔씩 나리를 만나 함께 신세한탄을 하곤 했다. 나리는 공무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를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이번이 마지막 시험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리는 늘 돈을 버는 나를 부러워하며 합격만하면 한턱 크게 쏠 거라며 큰소리를 쳤고 나는 알겠다며 늘 계산대에서 카드를 그었다. 역시 돈을 번다는 것 하나는 좋은 것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거나하게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남자이야기와 어디를 성형하면 좋을지에 대한 토론으로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늘 결론은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는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얼굴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순간 나는 눈물이 흘렀다. 나리는 무슨 일이냐며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나는 노총각의 이야기를 꺼냈다.
“똥밟았구만..”
나리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떠나고 싶다고 흐느꼈다. 새로운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며 술을 털어넣었다. 나리는 재털이에 담뱃재를 털어내며
"가고 싶으면 가면 되잖아.."
라고 짧게 내뱉었다.
그래. 죽어라 앉아서 신세한탄으로 세월을 낭비하느니 할 수 있을 때 진정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살아있는 삶일 것이다. 내가 늘 꿈꿔왔던 새로운 세계로의 떠남. 무엇이 그렇게 나를 막고 있었던가?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 것을…
마치 운명처럼 골머리를 앓아온 어려운 문제가 뻥하고 풀리는 느낌이 있었다. 가고 깊으면 가면 되잖아. 나는 뭘 망설이고 있었던가?
27의 어느 날.. 오나리와 건배를 외치며 그렇게 나는 탈출을 다짐했다.
시작.
나는 떠날 것이었다. 이왕 떠나는 거 아주 폼나는 곳으로 떠날 것이었다. 언제나 퀸이던 우재경이 아니던가! 내가 떠날 곳.. Top of the World라고 일컬어지는 곳.. 패션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곳..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섹스 앤 더 시티와 수많은 영화의 촬영지.. 아름다운 센트럴 파크와 하늘을 찌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그 곳… 나는 기필코 뉴욕으로 갈 것 이었다.
나는 영어공부에 돌입했다. 영어회화를 수강하며 팝송을 듣고 영어소설을 읽었으며 미국 드라마들을 MP3에 다운받아 틈이 날 때마다 반복청취를 하며 뉴욕의 생활영어를 익히고자 했다. 회사생활과 공부를 병행하기란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모두 탈출을 위한 준비과정이었기에 나는 기꺼이 그 상황을 감당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섹스 앤 더 시티와 프렌즈를 하나도 빠짐없이 섭렵할 무렵 내 통장에는 어느 정도의 돈이 쌓여있었다. 2년간의 우울함에서 벗어날 시간.. 나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해마다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하기 가요대전이 열린다. 1년에 한번 있는 행사인 만큼 하기가요대전은 각 본부와 팀의 명예가 달린 큰 행사인 듯 했다. 가요대전은 각 본부의 예선 당선자들이 모여서 본부 별 대결을 갖는데 나는 이 하기행사를 기점으로 사표를 던질 계획을 세웠다. 퀸은 마지막 퇴장마저도 멋지게 하는 법이다.
나는 남몰래 참가지원서를 냈고 그 날 오후 2대8 가르마가 반듯한 부장이 배를 쑥 내밀며내 앞에 나타났다.
“오호.. 재경씨 예선전 참가한다며? 의왼데 이거?”
부장님의 말에 주변이 수근수근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나, 정말? 우리팀에서는 몇 년간 참가자가 없었는데..”
모두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꼬여있는 비웃음이 너무나도 확연히 느껴졌다. 언제나 나서는 적 없던 나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나에겐 곧 그들의 혼을 빼놓을 허리케인이 장전되어 있었다. 두고 봐라… 수많은 클럽의 이벤트와 학교 행사에서 언제나 모두의 기를 꺾으며 무대를 장악해 오던 그 우재경이 바로 나거든.
사실 우리팀에서는 이렇다 하고 나설만한 인재가 없었다. 그래서 몇 년간 하기가요대전은 우리 팀의 관심 외의 행사인 듯 했다. 하지만 나의 참가선언으로 사람들은 가요대전에 꽤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니, 관심이라기 보단 너무나도 의외의 상황에 대한 당황함이란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예선전의 곡명을 정하고 얼마간의 연습에 돌입했다. 진정한 엔터테이너가 무엇인지 곧 보여주겠다.
그리고 예선전 당일..
의외로 예선전에 부장님과 상무님까지 참석해 전 팀이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라던 바였지만 시금털털한 표정으로 앉아 코의 피지를 짜대고 있는 노대리의 모습은 역시나 볼 것이 못되었다.
“자.. 오늘 경영지원본부를 대표할 인재가 누가 될 지 기대되는 가운데 첫 번째 참가자를 모십니다.”
인사팀, 회계팀, 총무팀등 에서 시시한 경쟁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몇 곡의 트로트와 발라드..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경쟁자는 보이지 않았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8번째 참가자.. 우재경.. 나는 사뿐히 무대에 올랐다. 떨림이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무대에 선 나는 내 심장의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간만에 느끼는 짜릿함이란.. 내가 무대에 오르자 우리팀의 환호성이 퍼져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어디 한번 해보시지.’
곧 나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크한 섹시풍의 멜로디.. 홀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나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와 목선의 움직임을 마음껏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은 작은 움직임에서도 큰 회오리를 일으킬 수 있다. 여유로움과 숨이 막힐 정도로 격렬한 열정이 공존하는 끈적한 몸의 표현.. 나의 몸은 작지만 내 몸이 만들어내는 실루엣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나는 관중석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브라운 톤의 달콤 쌉싸름한 목소리.. 나는 노래할 때 나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무대에 설 때 나의 눈빛과 목소리는 꽤나 에로틱하게 변한다. 나는 관중과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다.
모든 예선자들의 룰은 1절만이지만 나는 2절까지 마친 후에야 무대를 나설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난 후 관중석은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정적의 법칙’ 그 정적 후 터져 나오는 열광적인 반응은 내 무대에서 자주 발생하는 ‘정적의 법칙’이다. 노대리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은 물론 모두가 사뭇 다른 눈길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경영지원본부의 촉망 받는 대표 출전자가 되었다.
예선전 후 나도 모르는 소소한 팬클럽이 생겨났고 수십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우리 팀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결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결선은 사장님도 참석할 만큼 큰 행사였기에 나는 상무님과 부장님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다. 상무님은 매일 나의 건강을 챙기며 결선에 만전을 기했으며 결선 전날에는 조퇴명령까지 내렸더랬다.
그렇게 다가온 결선 날 우리팀과 나의 팬클럽은 풍선을 휘날리며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7번째 참가자 경영지원본부 우재경..”
나의 무대는 에로틱한 음악과 함께 겉옷을 벗어 던지는 소소한 스트립쇼로 시작되었다. 관중은 벌써부터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지만 나의 무대는 절정에 절정을 넘어 최고조의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노래와 댄스와 음악의 완벽한 삼위일체.. 어느새 나의 노래가 후반부로 접어들 무렵 나는 무대를 내려섰다. 사람들은 정신 없이 손을 내밀어댔지만 나는 사장님 앞에 멈춰섰고 나의 마지막은 사장의 무릎 위에서 막이 내렸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사장은 잔뜩 굳어있었다. 내가 좀 심했던가? 하지만 더 이상 쫄 이유는 없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무대였다. 나는 우리팀 사상 처음으로 대상을 따냈고 그와 함께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사장님이 인재가 들어왔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상무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한번의 무대가 나를 인재로 만든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미국의 비자수속을 모두 마치고 오직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근심과 한숨에 찬 표정이 나의 마음을 괴롭혔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가는 것이니 누구도 나를 막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나에게 떠남의 구체적 목표는 없었다. 떠남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늘 내게 스트레스였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현실도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란 그 막연한 결정이 분명 나의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었다. 심장이 이끄는 길의 따름. 그 길의 끝에는 분명 심장이 뛰는 삶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운명에 몸을 던졌다.
착륙을 알리는 승무원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안전벨트를 두르고 눈을 감았다. 기다려라 뉴욕.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서부터 새로운 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