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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치유20) 의지를 져버린 의존적 인간

소검 |2014.06.03 23:02
조회 78 |추천 0

의지를 져버린 의존적 인간

 

즐거운 정신에서 즐거운 현실이 이루어지고, 괴로운 정신에서 괴로운 현실이 이루어지며, 행복의 길에서 행복을 이룰 수 있고, 불행의 길에서 불행이 이루어진다. 주체적 정신의 길에서 간혹 삶의 고락에 의하여 실의에 빠질지라도, 다시 근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언제나 삶의 근본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의지(依支)가 아닌 의존적 정신에서 실의에 빠지게 되면, 삶에 적개심을 갖게 된다. 그러한 적개심을 이기려고 하는 삶에서 존재론적 허무감에 떨어지고, 허무감을 이기려고 하는 삶에서 악의심이 올라오며, 허무감에서 악의심이 올라오는 사이에서 영혼을 완전히 잃게 된다.

 

영혼을 잃은 인간에게는 선악의 구별도 없고, 진실과 거짓의 구별도 없게 되니, 인간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온갖 죄악은 이러한 인간으로부터 발생한다. 의존적 정신의 인간이 쉽게 빠지는 것이 종교다. 종교를 통하여 인생에서 뭔가의 부족함을 찾으려 하는 것인즉, 그러한 인간이 느끼는 부족함은 영혼의 부족함이니, 그리하여 종교를 통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현실의 삶에 부정적인 인식이 형성되면서 그러한 불만에 따라 종교를 믿게 되고, 또한 현실의 삶에 불만이 없는 인간이 종교에 빠지면 없던 불만이 일어난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종교적 교리에 따라 삶의 불안과 걱정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하여 쇄뇌가 되어 가면 주변의 가까운 인간들부터 비난하기 시작하고; 쇄뇌가 되어갈수록 더욱 비난하고 미워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의 부모나 자식, 형제들까지도 비난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가정과 사회를 이간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불만 덩어리로 만들어 투쟁의 장으로 만드니, 인간세상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종교에 쇄뇌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악행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며, 변질된 자신의 정신상태가 자신의 삶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종교적 이념에 쇄뇌된 관념에 따라 행위를 하는 것이니, 그 정신이 정상적인 정신인지 비정상적인 정신인지를 구분하는 정신자체가 없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의 행위를 보면서 인간에 대한 실망을 하겠지만, 실망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변질된 정신 즉, 쇄뇌된 정신임을 알고, 그러한 추악하고 유치한 삶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종교적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니,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나아가 사회를, 그러한 쇄뇌된 인간들로부터 지키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의존적 자기완성의 삶

인간의 성품에서 사랑이 위대한 것은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형성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질에 고귀한 사랑의 성품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사랑의 실천에서 사랑을 이루는 것이 존재론적 영혼을 이루게 된다. 그런즉 인간에게 사랑은 표면적으로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 남이 행복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사랑을 베풀어 자신의 성품에 사랑의 성품이 형성되게 하기위한 것이니, 그 베풀겠다고 하는 생각이나 마음 그 자체가 성품적 사랑이며,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의 성품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의존적 사랑은 어떠한 사랑일까? 의존적 사랑이란, 어떠한 외부적 명령이나 지시에 따라 행하는 강제성을 띤 압박에 의하여 행하는 사랑을 말한다. 그러한 사랑으로 사랑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랑으로 인하여 남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자기자신에게 사랑의 성품이 이루어지는가? 만약 그러한 사랑의 실천에서 사랑의 성품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성품을 이루고 싶다는 바램일 뿐이며, 그 바램은 사랑의 성품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더욱 부족한 사랑의 갈증일 뿐이다. 그러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에서 가식적인 사랑이 이루어지니. 그러할 때 인간은 위선(僞善)의 성품이 이루어져 사랑의 성품을 이룰 수 있는 그 본질적 능력을 상실하여 망각하게 된다.

 

인간의 삶에서 행복한 삶을 이루려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따른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욕구에 의한 행복은 행복한 삶에서 존재론적 영혼을 밝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니, 표면적으로는 인간 현재론적 행복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존재론적 영혼의 행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존적 행복은 어떠한 행복일까? 의존적 행복이란, 어떠한 외부적 대상에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행복을 말하는 것으로, 외부적 대상의 조건에 따라 이룰 수 있는 행복을 말한다. 이러한 의존적 행복은 불행하기 때문에 의존하는 것이며,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부족한 자각심에 의하여 외부적 대상에 의존하고, 그 외부적 대상으로부터 행복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바램에서 의존적 행복한 삶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스스로 이룬 행복이 아니라 의존적 행복에서 행복이 이루어지는가? 만약 의존적 행복에서 행복한 삶을 이루겠다고 한다면 먼저 불행해야 한다. 불행한 삶이 되어야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행복한 삶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니, 스스로 행복한 삶을 이루는 인간에게는 의존적 행복이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스스로 행복한 삶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고 하여 의존적 행복을 이루려 한다면, 그러한 인간은 계속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불행한 삶에서 계속적인 행복의 바램에 의한, “행복의 바램” 그 자체가 행복이 되는 의존적 삶을 이루어야 할 것이니, 의존적 행복이란 계속적인 “불행한 삶”이 의존적 행복이 된다.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은 자기완성이며, 자기완성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영혼을 깨어나게 하여 존재론적 목적인 영혼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영혼이 깨어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세상에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는 20세를 전후로 하여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철학적 물음에서 깨어나며, 영혼이 탄생하는 것은 성인이 되어 스스로 존재론적 자아를 자각하는 삶에서 그 정신을 다스려 영혼을 탄생시킬 수 있다.

 

의존적 자기완성은 어떠한 자기완성일까? 의존적 자기완성이란, 어떠한 외부적 대상을 믿음으로써 그 대상의 명령에 따른 사명을 갖고 그 사명을 실천하는 것에서 이룰 수 있다는 자기완성을 말한다. 이러한 의존적 자기완성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철학적 물음이 부족하여 영혼이 눈을 뜨지 못하고, 그러한 답답함을 외부적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해소하여 존재론적 자아인 영혼을 찾으려고 하는 것인즉, 그러한 의존적 자기완성은 영혼의 본질적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니, 그것은 영혼은 깨어나야 탄생할 수 있는 것이며, 영혼은 찾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존재론적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이치에서 벗어나 의존적 자기완성을 이루려 하는 것은, 그 전에 먼저 자기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자기자신을 잃었다는 것은 존재론적 영혼을 잃었다는 것을 말한다. 잃어버린 영혼을 스스로 찾지 않고 외부적 대상에 의존하여 영혼을 찾아 자기완성을 이루려 하는 것은, 결국 영원히 영혼을 망각하게 되며, 그러한 망각적인 의존적 자기완성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자기완성을 이루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어, 절망적 자기완성으로 끝나게 된다.

 

의존적 구원의 결실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밝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혼에 죄를 뒤집어 씌워 하느님의 밝음의 빛을 잃게 하여 귀신의 영혼으로 만들어 버리니, 귀신의 영혼이란 영혼의 빛이 죽은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여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하고, 스스로 구원해달라고 조르는 듯한 인간세상은, 하느님의 밝음에 따른 밝은 영혼을 이룰 수 없게 한다.

   구원이라는 말은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본능적인 것을 약점으로 잡고 구원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니,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면에서 볼 때 참으로 간악한 짓이 아닐 수 없는 것은, 구원이라는 말에는 죽음의 공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고,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약점 아닌 약점을 잡아, 구원이라는 말에 인간의 영혼을 구속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삶은 어떠한 삶이며, 그런 삶에서 인간의 가치는 무엇이며,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은 다 무슨 짓이 된다는 말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신이요, 악을 행하는 것도 자신이다. 선을 행하는 것에서 선한 운명을 개척하고, 악을 행하는 것에서 악한 운명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개척적 운명에서 존재를 이루면 신의 세계로 들어가고, 존재를 이루지 못하면 귀신으로 타락하여 끝나는 것이다.

   여기 어디에서도 구원이 낄 자리가 없으며, 기회도 없으며, 그러한 존재도 장소도 없다. 만약 그래도 구원이 있다면, 악을 행하여 악한 운명에 떨어진 인간만이 구원이 필요하니, 악한 인간은 구원받고 그 외의 인간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이 인간세상에 돌아다닌 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을 실망스럽게 하는 부분이다. 인간에게는 구원도 필요 없으며, 구원해줄 존재도 없으며, 구원이라는 말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인간을 죄악적인 존재로 취급하여 그 영혼이 살아나지 못하게 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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