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사세 – 그 아파트에서 사는 세입자
조경이 참 예쁜 곳이라 그런가
푹푹 찌는 듯한 무더위가 한 풀 꺾이니 산책하기 좋았다.
그래서 개부장 약간 기분 좋다 싶으면 미친듯이 빨리 퇴근하여
한 한 시간쯤 동네 한 바퀴 매일같이 돌았더니
살도 빠지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한결 개운……………………하기는 개뿔!!
안그래도 좋은 식욕 한 3배로 뛰었음 ㅋㅋㅋㅋㅋ
금요일은 더 그럼ㅋㅋ
낼 출근도 안해도 되겠다 그날은 길 건너 슈퍼까지 가서
맥주 한 캔이랑 마른 오징어 사가지고
휘영청 달 밝은 밤 10시.
마치 누군가에게 진정한 건어물녀는 어떤가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미드 한 편 다운받아 놓고 열심히 오징어를 굽기를 하고 있었는데..
또로록.
MMS
장문 문자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싶어 열었는데..
어..?? 엇???
그 놈이었다.
또 메시지란 터질 정도로 꽉 꽉 채워 쓴.
그 좋은 사이 그 놈!!!!
이번 건의 요점은
- 연락하지 말아야지 잊어야지 했는데 안되더라
- 자주가 아니라도 좋다. 가끔이라도 연락하면 안되겠냐?
이 두 가지었다.
맥주 마시기도 전에 이미 내 몸은
열 받아서 취했고
읽는 내내 화가 났다.
여기서 많은 남자분들은
고백 받으면
특히 미인이 아닌데도 좋다고 고백하는 남자가 있다면
오히려 고맙다고 엎어져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여자분들은 아실 테다.
부탁을 했음에도 들어먹지 않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름이라는 것을.
정말 몇 개월 만에 다시 받은 그 야밤의 메시지는
날 시름앓이라는 통에 살포시 넣어 주었다.
또 싫다, 제발 연락하지 말라 해도
왠지 이 놈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싶었기에
고민으로 10층 석가탑 쌓은 후
결정했다.
9. 비장한 결투 신청
다음날 오전 문자 한 통을 보냈다.
- 나는 그쪽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또 문자 받으니 불쾌하다.
그래서 차라리 뵈었으면 좋겠다.
이미 내 얼굴, 전화번호까지 아는 걸로 봐선 짐작컨대 집도 어딘지 아실 것 같다.
정문 10시 방향에 공원 하나 있으니
오늘 오후 3시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서 보자.
어떠냐?
청소하고 힐끗,
설거지 하면서도 힐끗.
휴대폰을 몇 번이나 봤지만
깜깜 무소식.
어디서 글을 퍼와서 휴대폰에 한땀한땀 박음질 하시나?
보낸지 6시간이 지나도록
이거 진짜 돌+아이구나 싶도록
답장은 NO.
용기가 다시 불안으로 바뀌고
화는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너무 애정 했나 보다.
10. D-DAY
한 7시쯤 되었을까?
드디어 삐리릭이 옴.
심호흡하고 열었더니
본인은 주 5일 회사가 아니라
일한다고 이제 문자를 봤다며
괜찮으시면 일요일에 뵈면 안되냐고 와있었다.
뭐시라? 그럼 오늘 또 혼자 오만 상상 다 하면서
잠 못자라고?
안되지.
절대 안되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이제껏 지진하게 패닉상태로만 있다가 겨우 잡은 고삐 놓지지 않겠어요!
이에 서로 몇 번의 문자 주고 받은 후
장소는 동일/ 시간만 저녁 7시 반으로 옮김.
2시간을 앞두고 나는
머리를 최대한 올려 묶고
혹시 다리를 걷어 올려야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최대한 잘 늘어나는 트레이닝 복 꺼내 입고
운동화 끈 질끈 동여 묶곤
미리 나갔다.
가을이다 보니 해도 여름보다 짧고
혹시 해코지 하면 도망가야하니까 동선도 파악해 두고 ㅋㅋㅋㅋ
쓰고 보니.. 정말 혼자 생쑈했네 싶을 정도로
몸도 풀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후 벤치에 앉았다.
다가오는 시간, 다가오는 사람이 많아 지면 질수록
긴장감 백배였다.
11. 어..? 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 7시 반이 되었지만
유모차 부대, 운동하는 아주머니들 외엔 내 쪽으로
다가 오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여자가 나한테 고백하는 건 아닌가 싶어
더 당황되기 시작했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한 10분 지났을 때인가?
저 쪽에서 모자 쓴..
발걸음 가볍지 못해 보이는 한 구부정한 어깨가 보였고
직감적으로 저 놈이 그 놈임을 알아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아냐?
팔짱 딱 끼고
일어서는데..
어? 가까이 오면서 보이는 얼굴은…
엘리베이터 카풀하던 옆집 그 남자였다.
“어?? 카풀 아저씨?? 저희 옆집 분 맞으시죠??”
“아저씨 아닙니다. 총각입니다”
어설픈 유머에 웃을 시간도 없이 너무 놀란 가슴 진정시키기 바빴다.
사실 내가 사는 평수가 신혼부부들이 좋아하는 평수였기에
당연히 카풀하는 그 남자도 결혼한 유부남인 줄 알았는데
본인이 총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놀랐고
평소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 듣는 내가
몇 달이나 같이 카풀하던 남자가 그 문자 놈인걸 몰랐다는 것도 놀랐다.
그래도 낯 익은 사람이 나와 안심이 되는 가운데
어떻게 내 번호를 알게 되었는지
왜 미리 이야기 하지 않고 무섭게 문자만 툭툭 보냈냐고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잠만요. 숨 좀 돌립시다”
소심하게 문자 보내던 남자가
배짱 튕기면서 농담까지 하니까
과연 이 사람이 나와 맨날 ‘안녕하세요’만 엘리베이터 카풀남이 맞는가
내가 욕하던 소심 스토커 문자남이 맞나
이리보고 저리보고.
저절로 둘리 놀이 하게 됐다.
그렇게 한 5분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나의 궁금증을 하나 둘 풀어 주었다.
“ 처음에 마주쳤을 때 내 스타일은 아닌데
왠지 말 한 번 걸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에 보면 말 걸어봐야지 했는데
맨날 인상 쓰고 짝다리 짚고 있는 분한테 말 걸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하하하. 차에 주차 스티커에 번호 보고
문자로 먼저 친해 지자 했는데 역시 하하하. 완전 철벽이시데요.”
중간중간 호탕한 하하하 섞어 가며 풀어내는 카풀남의 이어지는 이야기.
인사라도 하면 뺨 후려칠까봐 호시탐탐 기회 노리다가
철저한 계획하에 까꿍 기법으로 인사 텄고 ㅋㅋㅋㅋ
엘리베이터 카풀 아니면 얼굴도 못보니
새벽부터 집 안에 연결되어 있는 거실 엘리베이터 버튼의 빨간 불 들어오나 안들오나
그것만 지켜본다고 눈 사시 될 까봐 엄청 걱정했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나는 남들보다 좀 늦게 연애를 했는데 2년 차가 되어 갈 즈음..
상대방이 다른 여자와 만남을 지속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당연히 내가 헤어지자고 했지만 찢어지는 마음과 짓밟힌 자존심은 회복이 될 줄 몰랐고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 5년 정도 솔로로 지냈다.
간혹 가다 802호 아저씨처럼ㅋㅋ 눈 나쁜 누군가 내가 좋다고 하면
잠시 행복해 하다가도 곧 마음을 닫고
‘저 남자도 언젠가 다른 사람이 좋다며 떠나가겠지’ 라는 혼자만의 새장 속에 갇혀
사랑의 날개를 펴질 못하게 스스로 꺾곤 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 성화로 몇 번의 선으로 만난 남자들이 하나같이
나에 대한 피드백으로 ‘다음 주제로 이어갈 맛이 나지 않게 대화 단절시켜버리는 재주가 넘쳐 흐른다’ 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 마음 아프게 했던 사람은 저기 있는데
괜히 엄한데 되갚을 요량으로 상처 주고 아프게 했구나 싶은게…
너무 미안했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조금씩 하다 보니
어느덧 밤 12시가 되었고
집으로 같이 걸어 오는 길.
“그나저나 왜 10분이나 넘게 늦었어요?” 묻는 내게
“혹시 맞아 죽을까 봐 관 짜고 오느라 고요” 하며 또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그 남자.
난 그렇게 멈춰뒀던 연애세포에 조금씩 기름칠 하며
사랑 가득한 엘리베이터 카풀을 꿈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