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즈에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그곳은 아침에 군대의 구호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마음이 음악으로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랬던 이태석 신부님은
오랬동안 꿈구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바러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악기를 자긴이 먼저 배워보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악보를 만들고
한국 살레시오에서 보내준 단복을 입혔다
총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총대신 악기를 든 톤즈의 아이들은 남부 수단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는 정부 행사 대통령이 개최한 리셉션에 연주를 선보여 정부 공무원으로부터 큰 호흥을 얻어냈다
지금도 아이들은 새벽에 모여 연습을 하고 이태석 신부님이 만들어준 악보를 보고 선배들이 후배를 가르치고 이끌며
브라스 밴드를 꾸려 가고 있다
아무런 꿈과 희망을 가질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브라스 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이태석 신부님의 형님인 이태영 신부님은 그가 의사의 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 다미안 신부 " 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 " 성 다미안 베스테르 " 1840년 벨기에 태생
어린시절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깊어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면서 성장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형을 대신해 하와이선교에 자원
1865년 하와이 군도에 나병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이 제정되어
몰로카이섬으로 격리 수용 1873년 몰로카이 섬에 수용된 나환자들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님은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건너가 700명이 넘는 나환자들의 집을 지어주고 고름을 짜주고 환부를 씻어 주며 붕대를 갈아주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 주었다
1885년 다미안 신부님은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알았으나 요양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를 돌보다가 1889년4월15일 세상을 떠났다
다이안 신부님이 평생을 몸바친 하와이 몰로카이섬에는 그를 기리는 다음과 같이 씌인 비문이 있다
"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
이태석 신부님은 초등학교 5학년때 성당에서 상영해준 다미안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태석 신부님은 어린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고 톤즈의 한센인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졌다
톤즈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초가집에 지하수조차 없던 곳을
벽돌집을 짓고 지하수를 끌어올릴 펌프 시설을 만들었다
톤즈에서 하나뿐인 앰블런스를 타고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차소리가 나면 나무막대기를 집고 성치 않은 손과 다리를 이끌고 어른들과 아이들이 나타난다
이태석 신부님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직접 고름을 짜내고 붕대를 갈아주며 환자들을 돌본다
톤즈의 한센인들은 처음으로 한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관심과 따뜻한 손길을 느낀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님은 사랑 그 자체였다
[출처]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작성자 혜사랑
글의 출처: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776454
http://blog.naver.com/tooziro84/220220180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