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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길 거부한 전범이야기 1편 -731부대장 이시이 지로-

콜로라도 |2015.02.27 13:09
조회 1,223 |추천 0
 

 

일본군의 731부대장으로 전쟁사를 통틀어 찾아봐도 유례없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까일 인물. 또한 윤리의식을 상실한 채 지식만 잔뜩 쌓아놓은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이시이 시로는 군의(軍醫)중장[으로 악명 높은 731 부대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이 부대는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생물학전을 담당했다.
일본의 치바 현에서 태어나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미군 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 행위가 행해진 곳은 교토제대 의학부가 아니라 큐슈대학 의학부다(이 실험의 대표적인 희생자가 바로  윤동주 시인이다. 피 대용으로 바닷물을 주입하는 대체실험으로 돌아가셨다)   이시이 시로가 처음 사령관으로 부임한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731부대, 즉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평범한 방역 및 급수 전문 부대였다. 당시 연구원들은 실험 대상을 마루타라고 명명했으며 들이 지르는 일체의 비명이나 신음은 깡그리 무시하라고 세뇌를 받았다 한다. 세뇌 과정 중 가장 엽기적인 것은 마루타로 잡혀온 이들 중 가장 반항이 심한 사람을 1명 골라서 무조건 때려죽이도록 강요했다는 것. 참고로 한자로 쓰인 마루타(丸太)라는 단어를 731부대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한 마루타란 말은 가타가나로 쓰인 마루타(マルタ), 즉 '재료' 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통나무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말은 하바로프스크 군사재판 공판서류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 중에 빚어진 오해이다.   그는 포로들에게만 이런 야만적인 짓을 자행한 것도 모자라,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페스트균 살포 등을 저질러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군도 꽤 죽었지만. 그리고 마루타는 포로들만 있지 않았다. 미성년 샘플이 필요해서 납치해오는 경우도 있었고 일거리를 구해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전후 이 인간 백정의 말로는 나름대로 비참했다. 귀국 후 전범 추적을 피해 자기 장례식까지 치르고 가명을 써가며 은신했고 기회가 닿자 미 점령군 당국에 부하를 보내 전범 면제와 맞바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균전 자료 일체를 미군에게 넘긴다.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이 자료들을 소련에 준다고 협박했다. 여기까지는 꽤나 현명하게 처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이게 현명한거다. 마루타 창시자이자 100부대 부대장이자 이시이 시로수준의 인간말종인 다카하시 다카아쓰는 소련군한테 잡혀서 죽도록 얻어터지고 혹사당하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든가... 부하들은 이를 기회로 이시이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점령군과의 거래를 독점하고서는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발돋움하여 일본 녹십자 (ミドリ十字) 사를 만들어 명예와 돈을 거머쥐고 고위층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러나 녹십자사도 시작부터 줄줄이 인체실험을 자행한 탓에 항상 잡음에 시달려왔고 결국 1980년대 후반 혈우병 치료제에 AIDS 환자의 혈액을 사용, 일본 내 혈우병 환자들 4,500여명 중 무려 2,000여명이 줄줄이 AIDS에 걸리는 사상 최악의 병크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1998년 일본 녹십자는 인수합병의 형태로 요시도미 제약이라는 회사에 합병되고 모든 기술은 요시도미 제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기업이 웰화이드라는 기업이며 또 이 웰화이드는 후에 미쓰비시 화학의 자회사인 미스비시 도쿄제약으로 합병되는데 이리하여 탄생된 기업이 미쓰비시 웰파마다. 이후에는 다나베 제약과 합병해 미쓰비시 다나베 제약(주)가 되었다. 참고로 이 기업은 한국 지사도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731부대는 명맥을 이어가고 또 돈을 벌어 지금은 엄청난 대기업으로 발전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녹십자와는 혈액관련제재의 기술협력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일본 녹십자가 망하자 협력했던 지분은 한국 녹십자가 다 챙겼다고.

그에 비해 이시이는 전쟁 전에 착복한 재산과 전후 고향에서 벌인 사업으로 번 돈으로 엽관과 매수에 공을 들여 어떻게든 옛날의 영화를 누리려 했다. 그가 했던 사업이란 매음굴을 겸하는 숙박업소와 실험용 흰쥐 농장이었다. 그런데 일본 쪽 위키피디아에서는 단순 매음굴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했다고 나와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즈음에는 이미 이시이의 존재 자체가 일본 의학계의 흑역사였기에 옛 부하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렇게 한 번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는 회개를 했는지 기독교로 개종하고 윤락업소 경영과 병행해서 동네 주민들에게 무상 의료 행위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위법으로 이시이의 의사 면허는 1945년에 박탈됐으므로 걸리면 감옥에 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후 윤락업소 경영은 모순적 행동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결국 실의에 빠진 채 미군을 상대하는 윤락업소를 겸하는 여관 주인 노릇을 하며 살다가 67세에 으로 죽었다   뒷이야기   2014년 1월 교토대 의학부 도서관에서 발견된 1960년 2월 콜레라균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에 지도교수로 이시이 자신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 종전 이후 사망하기 직전까지 자국에서 의학계의 원로로 대접받으면서 731부대의 반인륜적인 행위로 얻어진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학계에 적용시켰던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즉 위의 매음굴 운운은 이시이가 여전히 의학계에서 큰소리치는 것을 외부에 은폐시키기 위한 역정보였던 것이다.

이시이 시로는 일본에선 의학계에 혁명을 가져온 '영웅'이자 일본이 낳은 천재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심지어 일본엔 이시이 시로 기념관까지 있다! 기념관 위치는 교토대학 본관 바로 앞이다 특히 교토대학 의대 학장을 지낸 인물도 731부대 출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요시무라 히사토. 이시이의 대학 후배이자 동상 연구를 했으며 이후 교토대학 의학부 학장을 지냈다.

더구나 731부대는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안전하게 귀국한 사람이 많은 만주 주둔 일본군 중에서도 인원 손실율이 특히 낮은 부대라는 점에서 더욱 사람의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뒷이야기 2 전후 미군은 이시이 시로와 731부대가 넘겨준 자료를 처음에는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얻은 자료라고 매우 중요시했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동물실험으로 얻을 수 없는 자료' 를 기대했기 때문. 그러면서 자기들 거랑 비교해 봤는데 대부분 동물실험으로 해도 충분히 실험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실험이라 미군이 가진 자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는 앞에 언급되었다시피 백신이나 치료제의 연구 따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 여기에 대한 반응은 '뭐야 이 새키들! 속았다는 반응이었으나 이미 거래를 한 상황이었기에 쉬쉬하고 묵인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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