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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30살(4)

리드미온 |2004.01.09 14:32
조회 32,909 |추천 0

그 날 송별회를 내가 별다르게 기억못하는 것은 분명히 나이탓일 것이다.

이 나이쯤 되면 송별회나 환영회나 같은 느낌이다.

같이 일하다가 그만두는 사람을 위한 자리라면 앞으로 함께할 수 없다는 이별의 자리이겠지만 1-2년이 지나면 다시 같이 일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송별회는 무슨...세상은 좁지...또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몰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또 환영회에서는  

 

'저 자식은 얼마나 다니려나...'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가는 사람이나 오는 사람이나...아주 초연하게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송별회 중에서도 그 날의 송별회는 조금 달랐다고 기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송별회에서 여직원들은 민준과의 이별이 아쉽다고 1차 2차 3차 나이트 클럽까지 가서 신나게 놀다가 나이트 클럽이 끝나서 거리로 나와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처지가 된 것은 새벽 2-3시였을 것이다. 초여름이었으나 약간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고 나이트 클럽 앞에서 사람들은 택시를 잡으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여직원들 택시를 태워서 보내준다고 한참 집이 어디냐, 누구누구랑 같이 가고....이런 식의 교통정리를 해주고 있었다.

바로 그 때 27살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나는 쭉 왕언니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이가 무기냐? 나도 집에 가는 거 무섭단 말이지...누구 하나 나더러 어떻게 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나이에 연약한 모습은 더 꾸질꾸질하지...'

 

라고 강한 마음을 먹곤 했다.

 

그렇게 여직원들을 정리해서 보내고 있는데 민준은 여직원들이 준 선물을 한쪽 손에 들고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저 녀석은 사내 자식이 왜 또 저래? 술 먹었으면 알아서 집에 가야 할 거 아냐...하여튼 어리고 잘생긴 것만으로 다 용서가 되는 줄 알면 착각이지'

 

라고 생각하며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라면 한대 패줘야겠다는 생각에 다가갔다.

 

'어이, 민준씨....'

 

난 그래도 최소한 아랫사람이라도 꼬박꼬박 '씨'는 붙여주는 매너 있는 상사란 말이지...

 

'집에 어디세요? 제가 모셔다 드리고 가지요.'

 

이 녀석 독심술이라도 배운 걸까? 어찌 내 마음을 알고...

아니지...상사로서 끝까지 장렬하게...혼.자. 집에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술드셔서 운전도 못할테고, 마지막인데 제가 모시던 상사 집에는 모셔다 드리고 가야죠.'

 

그때부터였다. 민준의 나에 대한 말투가 약간은 달라져 있었다. 아주 친근하고 따뜻한 말투로 말이다.

거기다 그가 구사한 단어에는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두 단어가 있었다.

 

'마.지.막'과 '상.사'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람을 꼭 오버하게 만든다. 하염없이 나약해지던지 아님 강해지던지...

거기다 상사라는 말은 어떤 행동도 받아주어야할 것 같은 책임감을 아무 부담없이 던져준다.

좋다, 이 녀석 같은 애가 치한으로 돌변해도 한대 패주면 정신차리겠지.....

 

함께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민준은 송별회 자리에서의 유쾌함은 없어지고 예전의 말 수가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르바이트 끝나면 뭐할거지?'

가끔은 내가 어색한 자리나 할말 없는 순간에 얘기를 먼저 꺼내는 것에 대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정도로 아주 적절한 질문을 했다고 뿌듯해 하면서 한마디 던졌다.

 

'글세요. 아직은.....'

 

'그래...그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대책 없어 보이더니 요샌 정신차렸나 했더니 미래에 대한 아무 생각도 없이...이 녀석이 내 동생 같았으면....'

 

나는 무슨 조언이라고 해주려고 하다가 어차피 마지막이니 그냥 좋은 상사의 이미지나 심어주자 싶어서 잠자코 있었다.

 

'한대리님, 나이가 스물일곱 아닌가요? '

 

뜬금없이 나이 질문이라니...저 질문은 꼭 자기가 누군가를 소개시켜 준다고 할 때 상대와 나이를 맞춰볼 때 물어보는 뉘앙스가 강한 질문이다...

 

'어.'

그래, 어쩔라고? 하는 심산으로 짧게 대답했다.

 

'나도 75에요.'

 

아니 이 녀석이 나랑 동갑이었다고?

 

'그랬구나....'

 

라고 대답하면서 그래서 겉으로 나를 대리님으로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우습게 봤다는 얘기인가? 라며 표정관리를 하려고 하는 순간,

 

'아~ 시원하다....말해버리고 나니'

 

그래도 회사에서 나름대로 적응하느라고 날 우습게 보지 않고 직장 상사로서 대하느라고 노력했다는 뜻으로 생각되어 심성은 고운 아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약간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불편할까봐 일부러 말 안했어요.'

 

에이, 괜히 미안해 할 필요 없잖아. 그냥 상사였을 뿐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미안해지지?

하긴 내가 마음이 고와서 그럴거야....

 

'근데 저 불러다 놓고 야단 칠 때 진짜 멋있었어요.'

이런....그때 내가 '인생선배'라고 했던가.....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동갑치고는 나보다 훨씬 어리고 생동감 있어 보이는 남자 앞에서 주눅드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리라. 난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다행히도 택시는 집 근처의 사거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 먼저 내릴 테니 이 택시 타고 가. 여기 택시 잘 안 잡히니까...'

 

라고 말하며 내리려는 순간, 민준도 어느 새 내리면서 택시비를 계산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마무리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려고 했다.

 

'민준씨...'

 

라고 말을 꺼냈을 때 나를 바라보는 민준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뭐지? 이 분위기는.....

주위를 둘러보니 차도 없고 사람들도 없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구역이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소문이 났거나 폭동 사태가 터져 사람과 차를 통제하고 있던가....

 

민준의 손이 내 어깨에 오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안아버렸다.

 

'지우야...우리 앞으로 말놓고 지내자...'

 

약간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는데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다.

밀어내야 하나, 가만 있어야 하나.....갈등의 30초가 지나기도 전에 민준의 입술은 내 입술을 덮치고 있었다.

그래 ... 키스쯤이야.....그리고 생각보다 달콤하네....뭐지? 이 느낌은.....

 

'띠리리리리리.......'

 

나를 구제해준 것인지 방해한 것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 덕분에 자연스럽게 민준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나는 민준의 시선을 피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핸드폰을 받지는 않았다.

 

'남자친군 전환가 보네.'

 

민준은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제서야 내가 민준의 포옹이나 키스를 거부하려고 했던 게 남자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었을까...생각했다.

그래...27살엔 분명히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잘생긴 동갑나기 남자의 키스 정도는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마음의 오만도 있었던 것 같고....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민준이 따로 연락을 한 적도 없었고 나도 그 일을 계기로 민준에게 연락한 적도 없었다.

아주 로맨틱한 키스의 경험이긴 했으나 그거에 연연해 서로에게 얽힐 만한 아무런 기반도 없는 그런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무리 늦은 시간이며 또 사람이 없다고 해도 대로변에서의 키스는 인생의 몇 안되는 경험이리라....

그런 추억을 준 남자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그 후에도 그 전에도 그렇게 대로변에서 키스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난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야 민준의 전화통화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랫만이다. 근데 웬 리츠칼튼 호텔이야?"

 

이제 리츠 칼튼 호텔이란 하나만 풀리면 민준의 연락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리리라 확신하며 물었다.

 

"일단 만나자. 여기로 와라."

 

지금 만나자고? 호텔에서? 1월 1일에? 그것도 3년 만에 연락된 남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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