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봉에 뜨는 달
3.
수없이 많은 고수들이 반조의 검 아래 사라졌다. 검의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무당파에서도 서너 명의 고수가 죽었다. 반조와 자혈검의 악명은 강호를 주름잡았다. 반조가 펼치는 검법은 전광석화의 기세로 돌진하여 일격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고수들이 세 번의 공격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누가 먼저 공격을 하든 자혈검이 번쩍하는 섬광을 뿌리면 여지없이 비명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반조의 악명을 꺾으려 일부러 도전하는 고수도 있었지만 얼마 후면 뼈를 땅에 묻고야 마는 운명을 맞았다. 점점 검으로 명성을 날리던 고수들도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전전긍긍했다. 실로 강호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과연 반조가 자혈검의 주인이란 말인가?
철소마는 자혈검을 반조에게 보내기 전에 번뜩이는 칼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검이 뽑혀져 나가는 순간부터 검의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다섯 번의 공격기회만 주어진다. 오초의 공격으로서 자혈검에 상대방의 피나 살점이 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검기가 역류하여 오장이 터지고야 말 것이다. 오직 주인에게만 자혈검은 혼신을 다하여 충성할 뿐이다. 검의 양면에 새겨놓은 비급은 누구나 흉내는 낼 수가 있다. 그러나 검의 주인만이 그 뜻을 깨우칠 수 있을 뿐이다. 자혈검은 자기를 복종시킬 주인만 기다린다. 마음 놓고 강호의 피를 마시게 할 수 있는 주인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나와 내 아내의 원혼이 이 검에 깃들어 있다. 휘날리는 칼바람으로 우리 부부는 모든 무림의 인간들을 베어버릴 것이다. 흐흐흐...... 자혈검의 주인이여 빨리 그 모습을 드러내소서.”
실로 강호를 향한 무서운 저주였다.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반조는 검의 주인이 아니었다. 자혈비급을 연구하여 흉내만 내었지, 그 뜻을 통달하여 자혈검을 복종시키지 못했다. 반조에게 최후를 안겨준 사람은 소림사의 십팔 나한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였던 무해대사(無海大師)였다. 그는 여섯 살 때에 출가하여 사십여 년을 소림사의 문밖으로 한발도 내딛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오직 나한전에서 무공만 연마하며 불도의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수도승이었다.
어느 날, 승승장구하며 악명을 떨치던 반조가 무림의 대문파인 숭산의 소림사에 나타났다. 달마역근경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를 달린다는 무해대사의 명성을 듣고 소림사 문전을 두드린 것이다. 무해대사는 첫눈에 피비린내를 진동시키는 반조의 살기를 보고 도전을 피했다. 불가의 도장에서 무공을 겨루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살생은 할 수 없다는 무해대사의 말이었다.
그러나 야심에 찬 반조가 물러갈 리는 없었다. 거듭 도전을 거절하는 무해대사의 목을 내놓지 않으면 소림사를 피바다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분노했다. 병장기를 들고 반조를 둘러싸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무해대사는 생전 처음으로 소림사 문밖으로 발을 내딛으며 낮은 신음을 토했다.
“나무아미타불, 평생을 쌓은 무공이 살생으로 끝을 맺는구나.”
양생(養生)과 살생(殺生)의 대결,
모든 무공은 사람을 살리는 양생을 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반조의 몸에서는 살생의 기가 뻗히고 있었다. 향긋한 불도의 옷자락에 피바람이 부는 원혼의 검이 스치려는 순간이었다.
지그시 눈을 내려뜬 무해대사와 싸늘한 반조의 눈길이 마주쳤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아압, 하는 기합소리가 들리며 반조의 등에서 뽑혀져 날아든 자혈검이 푸른빛을 뿌렸다. 첫 번째의 공격이 무해대사의 목을 노렸으나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허공만 있었다. 몸을 휙 틀면서 내지르는 검의 일격을 피한 무해대사의 가슴을 향하여 반조의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무해대사의 몸은 그림자처럼 가벼웠다. 흡사 깃털이 검을 타 넘듯이 자혈검의 섬광을 아래로 스치게 하며 몸을 반대편으로 날렸다. 반조는 이를 악물었다. 실로 무해대사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비스듬히 어깨를 뒤로한 채로 반조와 검이 일체가 되어 뒤집어 지며 세 번째의 공격이 가해졌다. 흔들 하던 무해대사의 손이 앞으로 활짝 펴지면서 무서운 장력을 쏟아냈다. 무겁고 쇳덩이 같은 기운이 자혈검에 부딪치자 쨍그렁하며 검의 끝이 흔들렸다. 반조의 얼굴이 창백한 빛을 띠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강한 장력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장력을 검으로 후려치며 옆으로 비켜선 반조는 네 번째의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무해대사는 신음소리를 냈다. 반조의 공격이 날아들 적마다 사지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꼈다. 내공 중에서도 가장 수련하기 힘들다는 대승범천신공(大乘凡天神功)을 터득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 무해대사의 내공이었지만 자혈검의 무서운 검기는 태산을 베는 듯한 기세로 몰려왔다.
천천히 다가서던 반조의 몸이 앞으로 쭉 뻗으며 검이 번쩍 무해대사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너무도 빠른 공격에 피할 겨를도 없었다. 구경하던 승려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 무해대사가 들어올린 손끝에서 손가락이 탁 튀었다. 손가락에서 뿜는 지풍(指風)은 검과 같은 날카로움으로 자혈검의 날을 튕겼다. 지풍에 흔들리며 정수리 옆으로 미끄러지던 자혈검이 허공으로 휙 솟아오더니 삼십육방을 덮는 검진을 무해대사에게 펼치며 무수한 칼날을 드러냈다. 네 번째에 이어서 다섯 번째의 공격이었다. 비로소 반조가 진정한 자혈검의 주인일까, 오초의 초식을 넘어서면 드디어 무림에는 철소마와 그 아내의 원혼이 피의 날개를 달을 것이다.
다섯 번째의 칼날이 사방에서 꽃을 날리듯 푸른빛으로 쏟아졌다. 무해대사는 온몸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두 팔을 양쪽으로 뻗었다. 대승범천신공을 실은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가 삼십 육 개의 방향을 봉쇄하며 강기를 일제히 내뿜었다.
쨍~
자혈검이 부르르 떨며 날카로운 금속성소리를 내었다. 공중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 검을 내려치는 반조와 팔을 벌리며 빙그르 돌던 무해대사의 몸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 하더니 서로 비껴가면서 튕겼다.
반조는 자혈검을 땅에 꽂으며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그의 코와 입에서는 파열된 오장의 피가 솟구쳐 올라 울컥 쏟아졌다. 두어 번 비틀거리며 피를 토하던 반조가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앞으로 퍽 꼬꾸라졌다.
무해대사는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승려들이 우르르 무해대사에게 몰려들었다. 무해대사의 가슴에는 깊게 베고 지나간 자혈검의 자국이 있었다. 피가 방울방울 솟아 흘렀다. 무해대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서 있었던 것이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피를 부르는 자혈검을 장경각(藏經閣)에 보관하고 모두의 접근을 금지했다.
차를 끓이는 용기를 화로위에 올리며 노인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은 사사로운 원한에 집착하기보다는 자혈검이 몰고 올 강호의 피바람을 막으려는데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반조는 자혈검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백 년을 기다려온 자혈검이 드디어 주인을 만났다는 소문입니다. 누가 주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주인님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일선교의 인물일 것입니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앞으로 도련님은 사사로운 원한에 집착하지 마시고 우선 주인마님을 찾아서 모자의 정을 나누셔야 합니다. 천봉자님이 심혈을 기울인 도련님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신 후에, 흑선비곡님과 상의하여 자혈검의 화를 근절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봉자님이 도련님을 강호에 내 보내는 뜻입니다.”
소년은 생각했다. 무림강호에는 무공의 귀재들이 득실거릴 텐데, 어찌 나처럼 보잘 것 없는 힘으로 그 뜻을 이룰 것인가,
노인은 소년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말했다.
“도련님의 몸에는 천기도가 암시하는 천무가 베여 있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도련님은 천기도를 밟았으며 천무의 보법과 신법을 터득하였습니다. 비록 완성된 무공은 아니라 하여도 천봉자님의 심오한 내외공을 모두 전수받았으니 누구도 도련님을 쉽게 상대할 수 없습니다. 강호의 경험을 쌓으며 터질 듯한 천무의 극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봉우리 아래로 뻗은 바위틈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휙 날아올랐다. 노인 앞에 선 그림자는 17세 가량의 여자였다. 소리 없이 날아든 그녀의 솜씨로 보아 대단한 무공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긴 머리를 펄럭이는 여자는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지금 방에 다과를 준비했어요.”
“자야가 기분이 들뜬 모양이구나. 이제부터 도련님하고 차분하게 행동하여서 실수가 없어야 하느니라. 허허허.”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자야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오빠, 할아버지는 너무 말이 많아서 다 들으려면 한없어.”
자야의 경쾌한 목소리에 침울했던 분위기가 싹 가셨다. 자야의 어리광 섞인 목소리가 또 들렸다.
“할아버지, 제가 어린아이인 줄 아세요? 이제 다 컸는데...... 오빠, 내 말이 맞지? 호호호”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싱긋 웃었다. 소년과 자야는 노인을 뒤쫓아 봉우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달은 먼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