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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팔 소재로 한 웹툰, 드라마 긴급 제안 (2)

강가딘 |2015.10.12 17:12
조회 146 |추천 1

스토리 본문

 

브레드 박.

2009년 뉴욕 소호.

 

내 이름은 브레드 박이다.

한국에서 온지 10년째인 뉴욕의 고학생이다.

사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어렵게 들어간 의대를 휴학 중이니 지금은 고학생이라고 부르기도 뭣하다. 현재는 이곳저곳에서 달러벌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청년일 뿐이다.

 

오늘, 지하철역 앞에 한국식 노점을 벌여놓고 I Love New York이란 글자와 뉴욕의 별명인 빅애플이 새겨져 있는 티셔츠와 우산을 팔고 있었다.

뉴욕답게 오락가락하는 날씨의 늦은 오후, 일행으로 보이는 한국 여자 예닐곱이 지하철역에서 올라오자마자 나를 보고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알아듣지 못하는 척 했다.

들리는 대화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여자들이 줄리아니 전 시장이 취임하기 이전의 더럽고 위험했던 뉴욕 지하철을 떠올리며 지하철을 탔던 서울 토박이 한국 관광객이라는 정도였다.

내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동양계 미국인인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자, 노란 모자를 쓴 한 젊은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이 사람, 꼭 한국사람 같지 않아?”라고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묻는다.

그 말에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내 외모에 대하여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일 뿐이었다.

다만 그녀들이 내가 팔고 있는 물건에 관심을 보였을 때 나도 그에 상응하는 관심을 그녀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들이 티셔츠 열한 장을 사 주었을 때, 나는 영어로 아이 러브 코리아! 라고 외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가며 웃음을 흘렸고, 그 덕분이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핑크 우산 다섯 개가 더 팔려나갔다.

 

이 정도면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다.

그때 갑자기 ‘현진건’ 이라는 옛날 작가의 소설이 떠올랐다.

불현듯 제목은 떠올랐지만 사실 어떤 얘기였는지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혹시 그 소설 내용을 알고 있는지 저 여자들에게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니! 그것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지금 와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밝힌다는 건 나는 사기꾼! 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녀들이 묻지도 않은 자기들 연락처를 갈겨 쓴 메모지와 지폐 몇 장을 내 주머니에 찔러주고 떠난 다음, 나는 서둘러 남은 물건을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총 매상 127불. 여기에 안주머니에서 꺼낸 비상금 200불을 합하면, 목표로 했던 300불이 넘기 때문이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걷다 보니 저절로 휘파람이 나온다.

화려한 소호 거리, 이곳은 예전에는 가난한 예술가의 거리였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파리의 샹젤리제가 부럽지 않은 거리가 되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나를 유혹하듯 반짝이지만 내가 들어갈 상점은 이미 정해져 있다.

여기다! 바로 이 곳이다!

2주 전, 간만에 기분이 밝아진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했던 휴일, 어머니의 눈을 사로잡아버린 그 목걸이가 걸려 있는 그 가게.

가게의 문에 달린 종소리가 힘차게 울림과 동시에 내 뱃속에서는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유대인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중,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어머니가 주신 우유 한 잔과 스크램블드 에그 한 접시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진열되어 있는 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배고픔은 순식간에 잊혀졌다.

 

히스패닉 여점원이 머리카락처럼 가늘디가는 금체인,14K 목걸이를 작은 박스에 넣은 다음, 리본을 매준다.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입가의 미소를 미처 지우지 못한 채, 지폐를 꺼내 대금을 지불하고 상점 문을 나선다.

티파니 매장에서도 가장 비싼 보석을 손에 넣은 듯한, 그런 뿌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쉰 번째 생일이자, 엄마와 내가 한국을 떠나 이곳 뉴욕으로 온 지 만 10년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는 오래된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누군가 신호라도 한 듯 비가 쏟아진다.

이런 것을 보아도 역시 오늘은 나의 럭키 day, 운수 좋은 날이다.

 

좁디좁은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서울에서 EBS로 보았던 “운수좋은 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나고 말았다.

평소에는 내 귀에 머무르지도 않았던 어머니의 슬리퍼 끄는 소리의 부재가 왜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는지......

오늘 따라 잘 들어가지 않는 열쇠를 탓하며, 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방 안, 뭔지 모를 불길한 장면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가며,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려댔다.

리본을 단 작은 상자가 바닥에 뒹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드디어 일곱 시간 전에 어머니가 나를 배웅하며 기대서 있던 그 문이 열린 순간, 내 청춘의 시계는 멈춰버렸고 하나의 세계가 그렇게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회색빛 문은 두들겨 대는 내 주먹에 항복을 선언하듯 힘없이 열렸고, 열린 문 사이로 너울거리는 것은 분명 어머니가 아침에 입고 있던 하얀 색 레이스 투피스였다.

사실 그 다음 순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오래된 필름처럼 노이즈가 많이 있는 영상이 한 커트 한 커트 정지 화면으로 이어지며, 동시에 ‘내 등 뒤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목에서는 소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매달려 있는 어머니의 몸에 가해지고 있는 중력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 어머니의 하반신을 들어 올리고 이미 싸늘하게 멈춰버린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불러오려 애를 쓸 뿐.

하지만 대학에서 지겹게도 반복했던 C.P.R.조차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무너져가는 세계 안에서 울부짖고 있는 나를 그 세상의 반대편에 있는 또 하나의 내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슬픔이었다.

 

어머니의 하얀 색 투피스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휴대폰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보라.

2011년 서울.

 

나는 보험조사원 S.I.U. 직원이다.

사무실에서 다들 나를 “람보~라”고 불린다.

여자 람보!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지칭하는 내 진짜 별명은 낙하산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낙하산이라는 소문은 내가 우리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만큼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내가 이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누가 보더라도 금융감독원 고위직인 아버지 남용한의 영향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했던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원했던 결과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얌전히 신부 수업을 받다가 아버지가 정해주는, 물론 윤비서가 찾아냈을 적당한 혼처로 시집가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것도 아주 어린 시절.

그것이 실제의 내 기억인지 아니면 사춘기 시절 갑자기 만들어져 스스로 세뇌시킨 셀프 메모리인지 모를 애매한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도.

내 기억이 닿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는 내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을 소망하며 자랐다.

그러나 정말 작고 소박한 그 소망은 나에게 금지된 것이었고, 남용한, 그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에서 쉴 수 있는 권리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의 소원은 집을 나가 독립하는 것이었고, 그의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은 학비와 식비를 지불하며 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신문배달, 우유 배달, 전단지 돌리기 등 갖가지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아버지가 윤비서를 통해 준 용돈 봉투들은 차곡차곡 내 방 책상 서랍 안에 쌓여갔고, 그 돈은 어느 날 화요일, 목요일에 파트타임으로 집안 청소 일을 도와주던 주근깨 언니가 사라지던 날 함께 사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언니가 갖고 날랐던 것은 내 용돈만은 아니었고, 그 언니는 사흘 만에 아버지의 금괴 뭉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내 돈,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아버지가 주었던 그 돈 봉투들은 그 언니가 좋아하는 오빠 사업 자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그 돈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화요일과 목요일의 주근깨 언니를 추궁하였고 나중에는 목포댁 아주머니, 그리고, 윤비서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그리고 마침내 남용한은 소리 없이 시작되었던 내 반항과 내가 학원 하나 다니지 않는 주제에 집안에만 처박혀 있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그 전처럼 내게 소리치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눈을 맞추며 자애로운 눈빛으로 딸에게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그 후부터 내 생활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나는 어느 곳에서도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내 힘으로 돈을 벌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폭압으로 유도된 굴종이었다.

나는 내가 다녔던 모든 일터에서 배제되었고 심지어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조차 쫓겨났다.

마지막으로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두 시간 만에 해고당한 나는 패스트푸드점 앞에 차를 세워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윤비서를 보고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윤비서는 내게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너처럼 어린 나이부터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아이, 그나마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꼴도 몇 번 본 적이 없다고!

내가 그랬던가?

또래 친구들이 아빠에게 생일 선물과 어린이날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심지어 부처님 오신 날까지 마치 전생에 맡겨놓은 물건을 찾아오듯 자연스럽게 갖가지 선물들을 요구하던 나이였음에도, 나는 이미 죽어버린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묵언 수행하는 스님처럼, 엄마가 죽기 전에 내게 사준 양배추 인형의 얼굴처럼 굳은 미소를 띤 채.

 

윤비서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아버지의 뜻‘을 관철시켰다.

내가 일하고 싶어 했던 모든 장소에서 내가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싹을 가차 없이 뽑아버렸고 모든 일에 그의 뜻이 미치도록 했다.

굴복해버린 나는 그가 원하는 대학, 그가 원하는 학과에 지원했으며, 그의 돈으로 학비를 지불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반 취업 시즌에 캐리어를 쌓으라는 ‘그의 뜻’에 의해 뉴욕 여행을 다녀왔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유치원생 때처럼 노란 모자를 쓰고 쉬지 않고 지껄이며 뉴욕 곳곳을 싸돌아다녔지만 지구 반대편에서조차 나는 그의 영향력 아래였던 것이다.

 

다시 서울에 다녀오자마자 나는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원서를 냈다.

그 때 심정으로는 나에게 일을 주고, 월급을 주고, 나를 그의 속박에서 구해주기만 있다면 악마와도 계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연이은 불합격 통지와 그 불합격의 배후에 있을 ‘그’와 윤비서의 모습을 떠올리는 데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보험조사원 자리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 나는 잠깐 이 회사에 세 번이나 지원서를 보냈었다는 사실도 잊고 입사를 미끼로 한 보이스 피싱이 아닌지 먼저 의심했다.

심사관이었던 장일도씨가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밝힌 후에도 내 의심증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버지’ 남용한의 뜻으로 합격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윤비서를 사주하여 나의 취직을 막았던 힘의 십 분의 일만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이름도 영광된 대기업에 떡하니 취업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침내 내가 마음을 놓은 이유는 합격소식을 들은 윤비서가 철저히 무표정으로 대응했기 때문이었고, 그녀가 아버지와 통화하는 목소리 톤을 봐서는 나의 합격은 결코 그 둘의 계획안에 있지도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내가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기쁨에 취할 잠시의 여유도 없이 걱정이 똬리를 틀었다. 그들의 의지로 인해 쥐꼬리 같은 내 희망의 싹이 잘려져 나갈 가능성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추후 내 직속상관이 된 장일도 과장님에게 전해들은 전언에 의하면 내가 보낸 세 번째 원서를 우편으로 받은 다음 날 내 아버지에게서 직접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장일도 과장님에게 “내 딸이 이번에 귀사에 원서를 낸 건 같은데 신경 쓰지 말게!”라고 잘라 말했고, 과거 막역한 사이였던 장일도 과장님은 ‘그’의 이 말을 ‘반어법’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나의 파란만장한 입사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내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식 출근을 사흘 앞두고, 한국보험사에는 또다시 ‘그’로부터 유감의 뜻이 전해졌고, 합격을 취소해 줄 수는 없느냐며 정중하지만 은근히 강압적인 톤의 전화도 걸려왔었다고 한다. 인사권자인 장일도 과장님이 아버지에게 이미 결정된 일,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되돌릴 수는 없다! 고 답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반어법 변명은 아마도 변명을 위한 변명이었으리라.

 

브레드 박.

2012년 강원도.

 

나는 한국에 돌아왔고 해병대에 자원했다.

지금은 훈련을 마치고 ‘국군 장병아저씨께’로 시작되지 않는 이상한 위문편지를 읽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은송이라는 초등학생 소녀가 발신인인 이 편지는 소녀가 내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에 어머니의 유골을 뿌려드리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다음에라도 한국에 돌아오시는 걸 더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다.

의대에 진학했던 것도 어머니의 의견이었고, 나 또한 의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뿐,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정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마지막까지 지니고 계셨던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어머니의 휴대폰 안에 10여 년 동안 갇혔던 텍스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내게 한국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 유혹에 따라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나서 나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괴롭힌 그 누군가에게 처절한 응징으로 갚아주는 것! 나는 그것이 어머니가 내 인생에 남긴 새로운 목표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따로 유서를 남기시지 않았기에 마지막까지 지니셨던 휴대폰에 남겨진 문자들과 전화번호들이 내겐 어머니가 내게 남긴 숫자 부호처럼 느껴졌다. 충전을 거듭해가며 디지털로 남아있는 연락처들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해 어머니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어머니의 죽음을 알려드렸다. 물론 그 10년 전 지인들은 연락처 변경 등의 이유로 대부분 실제로 통화가 된 분은 많지 않았다. 어머니 지인으로 확인이 되어 대화를 나눈 분은 세 분에 불과했고 그 중 한 분은 아들인 내 존재조차 모르고 계셨던 것을 보면 가까웠던 분은 아니셨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나누었던 그 분들과의 대화를 종합해보면, 고아였던 어머니가 갑자기 나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면에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기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내가 이해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셨는지,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 사건, 그리고 조팔돈이라는 원망스러운 이름은 입에 올리신 적이 없었고, 그저 한국이 싫어졌다는 혼잣말만 되뇔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어머니는 그 조팔돈이라는 놈이 짜놓은 피라미드 사기에 걸려 그 많던 재산을 잃고 절망감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행을 택하신 것 같다는 것이 어머니 지인 분들의 공통된 말씀이셨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점은 그동안 대부분의 지인들과는 연락이 끊겨있었지만 한 핸드폰 번호의 주인과는 최근까지 통화 목록이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상당한 마음의 준비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결이 되지 않는 번호라는 녹음된 음성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스물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격하게 증오해본 적 없던 나에게 조팔돈이란 사기꾼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다 합친 것과 같은 무게를 가진 악인이 되었다.

그 악인에 대항할 힘을 키우기 위해 나는 가장 먼저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했다. 어제까지 나는 어엿한 대한민국의 해병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힘을 기르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오늘 나는 지옥 훈련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한 사람이 되어 시상대에 올랐다.

지옥 훈련 최후의 1인으로 연대장 앞에서 선 나.

연대 병력 모두의 눈과 귀가 시상대로 몰렸고 연대장이 내게 물었다.

소원이 뭐냐?

나는 무섭기로 소문난 연대장의 눈을 똑바로 보며 준비했던 대답을 목청껏 소리 질렀다.

의무 경찰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다시 한 번 목이 터지도록 소리 질렀다.

그렇다!

나는 경찰이 되고 싶었다.

아니 나는 경찰이 되어야만 했다.

조동팔! 그 놈을 잡기 위해 나는 경찰이 되어야 했다.

은송이라는 내 펜팔 친구가 알려주었다.

통화가 되지 않는 휴대폰 번호의 소유자를 알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경찰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무 경찰이 되는 편이 도움이 될 거라는 게 똑똑한 그 아이가 내게 준 정보였던 것이다.

 

이제 나는 대한민국의 경찰이 될 것이다.

 

남용한.

2013년 서울.

 

나는 금융감독원 수석 부원장 남용한이다.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희생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역시 가족이다. 사실 아내를 잃은 홀아비인 내게 가족이라고 해봐야 딸자식 남보라 하나다. 그런데 그 녀석이 사춘기 때부터 아버지인 나에게 반항을 시작하더니, 대학을 졸업한 지금까지도 좀체 기나긴 반항을 그만둘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억지로 윽박지르다시피 보낸 금융공학과를 졸업하기도 전부터 이 집에서 나가는 것만 생각하는 눈치더니 기어이 집을 나갔다. 윤비서 말로는 엄마가 없어서 그렇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 녀석이 상처를 입을까봐 물밀 듯이 밀려드는 재혼 자리도 모두 거절하고 오직 녀석 하나만을 바라보며 일에만 파묻혀서 사는 사람이다.

암으로 죽은 아내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이 궁리 저 궁리 하다 보니 학교에서 나오게 되었고 갑자기 아내가 죽은 후에는 이렇게 공직에 남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후회는 없다.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죽기 전에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병에 지쳐 마음까지 병든 아내는 내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주변에 내가 돈 때문에 아내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말까지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이제야 나는 이해한다. 죽음을 앞둔 아내는 너무나 외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때는 나도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내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희생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내 마음이, 내 행동이 달라졌음을 불평하다가 죽었다.

사실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건 이미 그 명제 자체가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형체가 없고 매초마다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언젠가 한국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며 징징거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변하는 마음이 사랑이고 그걸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사랑할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보라.

2013년 서울 병원.

 

나는 지금 병원에서 몰래 도망가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어제 오후, 나는 자동차 보험 사기로 의심되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불시에 자동차 공업사를 방문했다. 사실 방문이라고 하기보다는 ‘보라의 공업사 습격 사건’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장일도 과장님은 약간 위험할지도 모르니 동료와 함께 방문하라고 내게 지시했지만 나는 혼자 갔다. 나와 파트너를 이뤄 움직이고 싶은 지원자가 아무도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평소처럼 케이블 타이를 한 움큼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당당하게 공업사의 문턱을 넘었다.

 

다짜고짜 셔터를 올리자 CCTV가 없는 사거리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된 외제 스포츠카로 추정되는 차량이 있었고, 나는 그 차량을 보자마자 보험 사기임을 직감했다. 차량의 좌, 우, 앞, 뒤가 온통 회색 크레파스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크레파스’라는 동요를 흥얼대며 수입 스포츠카의 사진을 찍어대는 내 주위를 조직 폭력배로 보이는 직원 서너 명이 에워쌌다. 회색 크레파스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니 마치 국수 가락 같은 크레파스의 자국이 말려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들고 간 투명한 비닐 봉투 안에 그 증거물을 가능한 한 많이 넣었고, 그들은 카메라와 증거물을 뺏기 위해 달려들었다.

물론 나는 그런 위험한 상황을 일찌감치 예상했다. 카메라와 증거물을 두 팔로 보호하며 신속하게 도주로를 확보하여 내뺐지만 놈들의 추격은 끈질겼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놈을 가볍게 제압해 양 손목을 뒤로 돌려 케이블 타이로 묶어주었다.-예쁘게.

그러는 사이 한 놈이 내 뒤에서 헤드락을 걸었고 나는 녀석의 급소를 가볍게 차준 다음 도망쳤다. 결국 카메라와 증거물을 지켜냈고, 놈들이 차를 빼돌리기 전에 차까지 확보하여 조직 폭력배가 개입된 크레파스 공업사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나도 온 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윤비서가 내 차에 위치 추적 장치라도 달았는지 입원한 사실을 대번에 알아채고는 아버지에게 알리는 바람에 금감원 수석 부원장께서 몸소 이 누추한 곳까지 납시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6개월 만에 아버지와의 급만남이 병원에서, 그것도 나의 부상을 핑계로 이루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서둘러 탈출하는 중이다.

그러나 아뿔싸!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병원 정원에 설치된 시멘트로 만든 모형 외나무다리만 지나치면 주차장의 내 차를 탈 수 있는 바로 그 타이밍에 그만 딱 만나고 만 것이다. 아버지와 윤비서 커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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